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前 대통령을 좋아했다. 노사모의 구성원만큼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난 그를 좋아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어제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주체하기가 힘들었음을 보면 말이다. 운 좋게 지난 참여정부에 그가 퇴임하는 그 전날까지 반 년 가까이 대통령 비서실 기록관리비서관실에서 잠시나마 근무한 것은, 그를 직접 볼 수 있던 것은 아니지만 아주 미약하나마 그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참으로 뿌듯하게 여겨졌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느즈막한 오전에 티비 속보로 급작스럽게 전해들은 그의 투신으로 인한 서거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현실에 대해 끝내 타협하지 않는 '노무현다운 선택'이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국민경선을 치루기 전까지는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민주당 국민경선을 거치는 중 광주에서 1위를 차지하며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이런저런 책과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그의 정치적 소신과 신념에 대해 신선함과 더불어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되었던 듯 싶다. 물론 그 과정에서의 도전으로 점철된 드라마틱한 정치 역정도 매력을 느끼는 주요한 요소가 되었을 듯도 싶다.

 

의경으로 복무하던 시절에 처음으로 행사한 투표권을 미련없이 그에게 던졌으며, 투표가 마감되고 개표가 시작되면서 자정 무렵 방범순찰을 위해 탄 순찰차에서 접전 끝에 당선이 확실시 된다는 방송을 듣고, 옆에 있는 젊은 순경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그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신념이라면 해방 이후 지금까지 모순이 누적되어 온 한국 정치와 사회 전반의 환부를 도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학 후 1년 정도 지난 즈음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친구가 먼저 수화기 너머로 흥분한 채 전해 주었던 탄핵 소식을 듣고, 분노했었다. 그리고 한 달여 뒤에 있는 총선과 지자체 선거에서 모두 열린우리당에 투표를 했다. 할 일이 많은 그가 여기서 기득권의 반발에 의해 무너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정치판에서 밀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 막강하다는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해서 일거에 다 쓸어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들 정도였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라고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노무현은 노무현이었다.

 

그렇게 정적은 물론이고 지지세력까지도 등을 돌리는 상황 속에서 비판은 물론 가당찮은 비난까지 받아가면서도, 자신의 소신대로 대통령 직위를 수행했다. 물론 그 소신을 항상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노무현에게 정치인으로써 부족한 것은 유연한 정치술수가 아니냐는 지적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역시 기존의 숱한 정치인들처럼 정치에 노회함을 발휘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다면 오늘날 이 비극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까지의 우리가 알고 있는 노무현이 있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노무현답기 때문에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노무현다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지 고작 1년 반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투신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 역시 그에게 언제나 지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재임 중에 있었던 한.FTA는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비판 일색으로 인해,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힘들어서 당시 봇물 터지듯이 출간되는 책들을 갖다 놓고 정부의 설명과 비교하기도 했다. 정말 진보 진영의 주장처럼 노무현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서 우측으로 가버린 것일까.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행하는 집무는 단지 어느 한 정파의 주장이나 견해만을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국가의 이익과 국민 다수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선택하고 추진해야 함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하나의 당파성에 매몰되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적과 아군으로 단순하게 구분짓던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던 시대는 90년대에 사실상 끝났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다극화, 다원화 된 사회에서 개별 사안별로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 관계를 따져가며 처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한 쪽에 100%의 만족을 줄 수가 없다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탈권위주의적인 행보는 재임 기간 동안 한국 사회가 지닌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 과정은 도외시한채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라는 말 한마디로 쉽게대통령 1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조롱하는 상황들을 초래했다. 국민이 역대 가장 훌륭한 대통령 중 한명으로 꼽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면, 그가 재임 중에 겪었던 그러한 상황을 용납할 수 있었을까.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약해진 대통령직의 권력과 권한이라지만, 결심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그 정도는 틀어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건 굳이 과거까지 가지 않고도 당장 지금의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는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주권자인 국민이 통치자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정치적 신념의 크기는 이미 일반적으로 권력에 경도되어 있는 흔해빠진 정치인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은 분명하다.

 

그의 임기 5년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극소수로 전락해버린 지지자들을 제외하면 진보니 보수니 가릴 것 없이 그는 공격당하기만 했다. 과거의 대통령직이 지니고 있던 초법적 권력을 내려놓고맞서 싸우자니 그 힘은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과거의 어두운 현대사를 상징하던 힘을 끌어다 쓰지 않고 임기를 마쳤다. 이제는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100% 완벽하게 수행하고 국민 개개인 모두에게 동일한 만족감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이 명백한 현실임에도 다수의 국민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지 구별할 줄을 몰랐다. 노무현이 우리에게 대통령으로써 무엇을 해주었는지는 비로소 정부가 교체되고 나서야 알았을만큼 각자의 욕망에 매몰되어 갔다.

 

그리고 그렇게 국민 개개인이 갈구하던 욕망의 집합체로 잉태되어 새롭게 등장한 권력은, 그가 도입했던 법과 제도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기 시작했으며, 종국에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그마저도 가만히 놔두지 않고 절벽 끝으로 내몰았다. 우리는 또 과거와 같이 너무나도 편하게 현 대통령과 정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지만, 과연 지금 정부가 지닌 그 권력은 누가 위임하였는가? 지난 대선에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 보며 차분히 생각해 보길 바란다.

 

퇴임 직후부터 시작되어 13개월간의 당사자와 가족, 친인척과 측근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수사기관 등이 동원되어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뇌물을 받았다는 어떠한 명백한 법적 사실이나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지저분한 추정과 3류 소설같은 의혹들을 언론에 흘렸으며, 참여정부 말기에 추진했던 취재 선진화 지원방안에 대해 기자실 통폐합이라며 진보.보수 언론 가릴 것 없이 그가 마치 독재자인마냥 성토하던 언론권력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날뛰며 하루가 멀다하고 기사로 포장된 배설물을 쏟아내어 그에게 인격적 살인을 가하고, 뇌물수수를 한 부패한 정치인으로써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리고 다수의 국민들은 그러한 언론 다수의 추측성 보도만으로 이를 기정사실화 해버렸다.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은 완벽하게 고립되었고 벼랑 끝으로 내밀리고 있었다. 퇴임한 대통령으로서 정계의 큰 어른은 고사하고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노무현의 삶마저도 유지될 수가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결국 그 마지막을 비극으로. 한편으로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오랜 기간 보아왔던 노무현다움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사는 법을 진정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어찌보면 두려울 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고 있는 정의감과 도덕성에 대한 강렬하리만큼의 신념은 그를 대통령직의 도전까지 성공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반대로 조그마한 흠집에도 쉽게 깨질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닌 것으로, 한국 정치의 평균적인 수준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만큼, 정치적 난도질에 의해 쉽게 손상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지난 대선 국민의 선택이었지만, 국민은 그를 버렸다. 냉혹하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서 추진한 개혁 또는 혁신과 국민 개개인 다수가 추구하는 극히 현실적인 욕망의 방향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비극적인 투신은 현 정부와 언론 등 기득권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며, 그 정부를 탄생시키고 그들의 가당찮은 주장과 졸렬한 행태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국민 다수에 의한 것이었음을. 그의 초상화를 보며 헌화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지금은 깨닫고 있을까?

있을 때는 소중한지를 모른다. 사라질 때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의 어리석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국민의 정치 수준은 그러한 그에게 5년 시한부인 대통령의 권력을 주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이를 반납하고 자연인으로 되돌아간 그를 끝까지 믿고 지켜주지는 못하는 수준에 그쳤다.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고 살아온 발자취가 어찌 되었든 상관없이 그저 당장의 자신의 금전적 이해관계와 맞는 정치인을 선호하는데 급급했다. 부패했든, 범법자든 그런 것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땅값, 집값으로 대변되는 욕망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려줄 수 있을 정도의 대통령.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그의 서거 소식은 더욱 가슴 아프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헌정 사상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품위가 공존하는 멋진 전직 대통령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끝끝내 지켜줄 수가 없었던 이 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국민의 정치 의식에 대한 수준낮음은 역겨울 정도다. 뒤늦은 국민들의 추모행렬도 이를 변명할 수는 없다.

 

그의 서거가 정말 슬프다면 그래서 이 후진적인 정치 수준과 환경이 싫다면,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교훈은 단 하나다.

 

정치가 아무리 혐오스러워도 관심을 갖고, 자신에게 부여된 정치 권력인 선거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것이다. 노무현은 지난 촛불 집회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에 대한 퇴진 요구는 지나치다고 언급했던 적이 있다. 쿠데타나 혁명을 제외한다면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현행 법과 제도 내에서는 11표제의 선거권을 행사하는 것이, 소시민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정치 개입이자 변화에 대한 시발점일 수 밖에 없다.

 

국민 개개인이 위임한 권력의 집합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는다면, 그래서 다시는 오늘날과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면, 자신의 조그마한 사익보다도 국민과 국가 전체에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정치적 신념과 그러한 정치 역경을 걸어온 정치인에게 자신의 조그마한 권력을 위임할 수 있다면.

 

평생을 독재정권의 퇴진과 민주주의의 부활, 지역감정에 기반한 낡은 정치구조의 타파, 수도권 대신 지역의 균형발전, 대통령 중심이 아닌 정부와 여당의 존중, 법과 제도에 기반한 행정의 합리적 선진화 등을 추구했던 그가 더 이상 여한이 남지 않고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삼가 노무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문'

한때. 10여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분명 한때나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에 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 알고 있던 팩트와 그 이후에 알게 된 팩트 사이의 간극은 내게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원 사이드만이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극단적인 진실은 그 당시의 현실이기도 했으니까.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문이 그의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에 올라왔다고 한다. 지난 여름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 집회를 듣고 보고 몇 차례 참여하면서 너무나도 답답한 나머지 그의 홈페이지를 들러 이런 저런 글들을 보며 이 땅의 민주주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위안을 삼았던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저 한 사람의 정치인이기도 하면서 그 자체로 변화된 한 갈래 진보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론 진보 학자와 진보 칼럼니스트와 진보 언론과도 날카로운 대립도 했으며 모든 사안에 대해 일반적으로 진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기준에 맞춰 정책을 집행하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끈 참여정부의 최대 화두는 '도덕적 청렴'과 그에 의한 '개혁'이었다. 사회 전방위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등 각계 각층의 기득권력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경제 부문은 수치상으로는 더디지만 여전히 성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양극화 해소'라는 경제에 있어 신자유주의 하의 최대 부작용을 효율적으로 치유해내지 못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국민들의 체감 경제 불만족도를 유발하였으며 그로 인해 결국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1년 후.

참여정부의 주된 모토로 내세웠던 '도덕적 청렴'은 박연차 리스트에 의해 측근으로 시작해 결국 권양숙 여사까지 연루되면서 사과문을 올리며 사실상 무너져내리기에 이르렀다. 재임시절 그렇게도 강조했던 부정부패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무색해질 정도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배신감을 느낀다면 충분히 이해한다. 또 평범한 국민들이 실망하거나 허탈하다고 해도 백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들이대고 있는 그 같은 잣대를 들이댈 경우 입이 100개라고 해도 할말이 없는 작자들이 모인 정당들이 꺼리낌없이 내뱉는 후안무치한 논평으로 듣자니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을 듯 하다.

한국에서 정치는 대체 얼마나 돈이 필요하고 돈을 요구하고 돈을 받아야 행할 수 있는 것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도 천상 정치인이다. 그라고 해서 정부 수립 이후 기형적인 한국 정치의 구조 속에서 돈 한푼 쓰지 않고 국회의원을 하고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미 재임 초기에 대선자금 수수설로 인해 한차례 곤혹을 치뤘던 그였다. 자금의 총 액수와 무관하게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실망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털고감으로써 앞으로 그러한 구태의연한 정치행태를 근절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이 뇌물과 관련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급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것도 그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수치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퇴임 후 친형의 뇌물 수수와 관련된 구속. 그리고 측근과 권양숙 여사까지 돈과 관련된 추문에 휩싸이면서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그렇게 척결하려고 했던 친인척과 측근에 의헤 권력형 부정부패로 비춰지는 사건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한때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구시대 정치인은 자신으로 끝나기를 바란다.'는 언급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발언은 새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는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번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사람이 대통령이든 그 친인척과 최측근이든 그에 합당한 법적 처벌을 받는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 다시한번 확인함과 더불어, 이번 사건들에 들이댔던 엄중한 법적 기준은 현 대통령의 퇴임 후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국민 사이에 널리 형성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이번 사건 역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보복' 수준으로 훗날 평가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정치판은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대통령은 수백억원, 국회의원은 수십억원을 써야 한다. 수백억원대의 자산가였던 문국현 창조한국당 의원도 지난 대선 후 비용 문제로 그렇잖아도 조그마한 당이 쪼개지다시피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선거와 관련된 비용의 투명성을 미국과 같은 해외 수준으로 높일 필요성이 있다. 엄청난 비용을 소진하고 정치 권력을 잡게 된다면 당연히 그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다. 그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빚을 지면 빚을 갚고 싶어하고, 재산이 줄었다면 그 재산을 채우는 정도가 아니라 최대한 수십배로 늘리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적 욕망에 자신에게 다수의 국민이 부여한 정치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게 된다. 부정 부패는 그 정치권력으로 돈을 요구하는 자와 돈으로 그 정치권력을 사려는 자의 암묵적 합의 하에 그 싹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온갖 후안무치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국민들에게 일반적으로 각인된 진보와 보수에 대한 도덕성의 이중 잣대도 이참에 폐기해야 한다. 한때 부패한 보수에 대해 도덕성으로 무장한 진보가 정치권력을 획득한 적이 있었다. 지난 10년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간의 역사는 정치권력이 지닌 본원적 속성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진보와 보수는 사회 변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인식과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에 결합되어 있는 한 진보든 보수든 어느쪽이든 정치권력을 획득한 세력에게는 끊임없이 돈과 결탁하는 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인간의 본능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법과 제도로 그것을 최소화 할 수는 있다. 자신들이 저지른 위법 행위는 훗날 언제든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그 분명한 전제가 확립되게 된다면, 완벽하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의 미래와 현실을 바꾸는 어리석은 욕망을 어느 정도는 자제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안은 그저 과거의 추문을 들춰내고 덮어버리는 1회용 수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노 전 대통령이 내세웠던 도덕적 기치가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정치적 상황과 구조와 배경에 대한 국민들의 냉정한 현실인식과 판단이 요구된다. 단지 한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제 하에서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던 이같은 전철이 왜 반복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국민들에게 있어 정치가 혐오스러워질수록 역설적이게도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09년의 대한민국의 모습에서도 일면 엿보이기도 한, 다수의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게 되면 정치인인척 하는 자와 그에 결탁한 소수의 작자들이 국가를 통제하고 쥐락펴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판은 경제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압축되어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기에 그 과정에 온갖 폐단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도는 민주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정치인과 국민 다수의 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한때 국가를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했던 독재자를 무너뜨렸고 독재를 하는 동안 천문학적 액수의 뇌물을 챙긴 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보내기도 했으며 그 사이에 부정부패의 액수는 역시 대폭 줄어들었다. 이제는 그 줄어든 액수마저 제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게 된 시점이다. 지난 대선에서 보여준 국민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그 통치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인식은 통치자와 관련된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소액이라고 하더라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정도로 높아진 듯 하다. 이는 또다시 정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실로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처벌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인 제도들이 마련되어 있고 그렇게 참여하는 자들의 의사로 만들어지는 공화국가임을 헌법 1조 1항에서 보장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의 국민들은 끊임없이 정치에 참여하고 선거를 통해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정치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권리도 행사하지 않으면서 비난만 일삼는 무책임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 여전히 기형적인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 정치판이지만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 다수의 사람에 의한 참여가 모인다면 그 참여만큼의 발전을 이뤄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일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나 한때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번 사안으로 국민들이 지난 대선 투표 당시와 다른 생각들을 갖게 될 수만 있다면, 차후 비슷한 처지에 놓이는 제 2 제 3의 노무현의 출현을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사잡지 중에 정기구독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애독하는 잡지가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경향 신문에서 발간하는 '위클리 경향'과 한겨레 신문에서 발간하는 '한겨레21', 그리고 마지막으로 옛 시사저널에서 삼성사태에 반발하여 이탈한 기자들이 만든 '시사IN'이다. 이 중에서 시사 IN을 가장 많이 사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Daum 메인 화면에 글 제목과도 같은 타이틀로 기사가 올라왔다. 제목을 보니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끌어들인 것 보니 보수보다는 진보(딱히 이렇게 구분짓는 것도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경향을 크게 놓고 이야기 할 때 갖는 입장 차이로 규정할 따름이다.)매체에서 올려놓았거니 생각했다.

나름 흥미로운 주제여서 클릭을 하고 기사를 확인해 보았더니 예상 밖으로 낯익은 시사 IN의 주진우 기자가 쓴 글이었다. 글을 내용은 양비론을 넘어서 삼비론에 가까웠다. '정권 편향적인 인사'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잘못' 임명했고, 그 인사들을 이명박 정부가 용이하게 활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전에 신방과 과목을 들었을 때 교수님께 들었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의 기자들은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한다. 그건 어떻게 보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할 수 있는데, 즉 자신이 기사를 쓰기 위해 이리저리 취재를 다니다보면 학식이나 명망이 높은 전문가 집단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또 현안에 대한 실무를 맡는 정부 당국의 담당자에게 취재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모은 정보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다 보면, 양 그룹군에 장단점을 파악하게 되고, 그것을 종합하여 아우르는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자의 마인드는 하루 아침에 형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취재 노하우를 쌓게 되다 보면, 그 경험이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편협함과 아집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직업군에 있고,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자만심은 스스로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적이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고, 자신의 위치와 위상이 상승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인간 본성의 약점이기도 하다. 

필자가 주진우 기자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기사에서 묻혀 나오는 느낌이 딱 이와 같았다. 길지 않은 기사에 마치 자신이 3자적 관점에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식으로 비판에 결론까지 내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시사 IN을 애독하는 독자로써 이 기사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듯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대략 몇 가지 잘못 재단한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용인술은 재임 기간 내내 '코드 인사'로 불리우며 언론에게 뭇매를 맞았던 부분이다. 물론 일부 보수 언론들이 노 전 대통령의 인사를 폄훼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겠지만, 시사 IN의 이번 기사를 보면 이는 결국 과대포장에 왜곡보도였다는 셈이 된다. 더불어 노 전 대통령이 자기와 같은 철학을 가진 인물만 중용했다는 것도 '거짓말'인 것이다. 즉 이는 보수-진보 따지지 않고 다양한 색깔을 지닌 인물들을 두루 기용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편향없는' 인사를 통해 등장한 인물들이 성격이 다른 현 정부까지 직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의 인사가 '객관적'이었고 '합리적'이었고 '중립적'이며 '배포'가 두둑했다는 증거가 되면 모를까, 그에게 그 인사들 개개인의 정권 친화적인 부분까지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아전인수'격 해석일 뿐이다.


두 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 철학과 국정 운영 스타일이 다르다는 부분이다. 기자는 이 부분을 매우 간과하고 기사를 작성한 것 같은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록 소신과 고집을 넘나들며 국정을 운영하였지만, 그 과정은 대체적으로 민주적이었다. 최근에 정부 산하 기관에 근무하시는 분께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참여정부 시절에는 정부에서 선임한 인사가 발령받아 오게 되면, 조직 내부의 게시판에 찬.반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졌다고 한다. 즉 일반 직원들도 선임되는 간부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이러한 다수의 의견은 어느정도 반영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그러한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즉 관계 부처 고위 인사가 들러서 상황을 설명하고, 잡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부탁하고 가면, 조직 내부의 그 누구도 정부의 인사 발령에 딴지를 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참여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통치 스타일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적인 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도 마찬가지다. 비록 코드가 다르고, 성향이 달라도 일단 임명장을 주어 일을 맡겼고, 그들도 굳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평소 소신대로 조직을 운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다르다. 자신들과 노선이 같고, 사고 방식이 같고, 뭔가 하나라도 연줄이 닿아야 기용하는 상황에서, 참여 정부 시절의 고위 공직자들 역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면 결국 박차고 나오게 되는 것이고,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기회주의적' 즉 정권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즉 이것은 노무현의 문제라기 보다는 각자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자는 통치 스타일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들까지도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개개인의 소신을 문제삼기 보다는 모두 노 전 대통령의 '잘못된 인사'로 규정지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편한 논리인가. 

마지막으로 한편으로는 한국 정치판에는 그만큼 보수적인 인물이 많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령 노무현 대통령이 진짜 일부 보수 언론의 보도처럼 자신과 코드가 부합한 인사들로만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반세기동안 한국의 통치 계층은 지속적으로 보수적인 인사들의 차지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진보적 성향을 지닌 인물로 기용한다는 것이 그 정도였고, 그것만으로도 임기 내내 '코드 인사'한다며 비난을 받던 그였던 것이다. 당연히 정권이 바뀐 뒤에 그들이 본래 지닌 속성을 드러내 현 정부와 코드를 맞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또한 '노무현 탓'이라고 하니 이 또한 지난 5년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멘트가 아니던가.


아랫사람은 윗사람 하기 나름이다. 가장 상위에 있는 사람이 압력을 넣지 않고 자율성을 부여하고 민주적으로 통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래로 그 영향력이 파급되기 마련이다. 특히 행정부와 같은 관료조직은 그 구조상 정도가 훨씬 클 것이다. 그래서 그 최고 통치자가 바뀌고 통치 스타일이 바뀌자 아랫사람들도 드러나지 않았던 기질이 드러난 것이다. 자신이 지닌 부와 명예와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슷한 통치 방식을 보여주었다면  그들도 정치적으로 자신의 일신을 지키려고 하기 보다는 한 조직의 수장으로써 그 업무에 소신있게 전념하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구조적 문제와 개개인의 정치적 신념을 배제한 채 그저 이 모든 상황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사 실수'로 간단명료하게 결론짓는 기자의 성급한 일반화를 보고 그의 짧은 식견에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차라리 그렇게 변절한 자들에 대해 국민의 공복으로써의 자신을 망각하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정치적 신념을 저버린 부분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썼다는 차라리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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