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오. 그리고 천하통일.

삼국지에 등장하는 삼국은 모두 ‘천하통일’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었을까. 패왕으로써 한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천하의 질서를 창조해 내려고 했던 조조의 위. 그리고 전한과 후한을 거치며 400년 유구의 역사를 지닌 한을 계속적으로 이어가려했던 유비의 촉. 적어도 이 두 나라는 삼국지연의 전편에 묘사되는 행적을 보았을 때, 자신들만의 신념에 의한 천하통일을 꿈꾸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아마도 다수의 사람들은 강남지역에 또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던 오에 대해서는 긍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손권이 통치하던 시기의 오는 ‘No'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손권은 형 손책이 임종시에 남겼던 평가처럼 창업보다는 수성에 더 어울리는 군주였다는 점은,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 보여준 통치 스타일을 감안했을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조조의 대군과 맞섰던 적벽대전을 극적인 대승으로 이끌면서, 곧바로 형주 북부로 진격하고 익주까지 바라보았던 시기.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손권도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의 꿈이기도 했을 손가에 의한 ‘천하통일’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이 시기의 손오에 의한 천하통일로의 ‘가능성’의 중심에는 그 누구도 아닌 미주랑. 바로 ‘주유 공근’이 있었던 것이다.


2. ‘미주랑’ 주유가 꿈꿨던 천하통일지계.

*손책의 중원 진출에 대한 야망과 주유.
주유는 과연 중원 대륙을 통일하는 꿈. 즉 천하통일에 대한 야망이 있었던 것일까. 결과론적인 접근으로는 ‘그렇다.’는 확답도 ‘아니다.’라는 부인도 할 수 없다. 그 역시 꿈을 향한 날개를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병사하기 직전까지 보여주었던 모습에서 유추해 보았을 때는 '그랬을 것이다.'라는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둘 수 있을 듯 싶다. 

주유는 군주이자 절친한 벗이기도 했던 손책에게 출사한 이래 군사적 참모 역할을 겸임하였고, 그와 함께 강남 지역을 빠른 속도로 하나씩 병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양주지역의 군웅들을 대부분 평정한 이후 크게 확장된 지역과 늘어난 병력 그리고 인재들을 바탕으로, 그들은 점차 드넓은 천하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이는 손책이 조조와 원소가 백마와 연진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던 관도대전 당시, 조조의 배후인 허창을 급습하려는 구체적 계획까지 입안하고 있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북의 원소, 중원의 조조, 그리고 서주의 유비 등 아버지 손견과 비슷한 연배의 노회한 군웅들 사이에서, 손책은 물론 그를 보좌하고 있던 주유에게는 그들에 비해 이십여년 가까이 어린 ‘젊음’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젊음에서 비롯되는 ‘패기’를 바탕으로, 충분히 천하를 두고 경합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만큼이나 정치적 경험이나 술수가 부족했던 탓일까. 조조의 배후를 노리던 손책은 곽가의 평가와도 너무나도 유사하기도 한, 그래서 더욱 ‘조조의 술책’으로 의심되는 자객의 기습(연의에서는 허공의 복수를 노리는 식객들로 묘사되고 있다.)을 받게 되고, '소패왕'이라 불리우며 양주 지역 평정 때 보여준 놀라운 기량을 천하를 향해 펼쳐 보이기도 전에 사망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리고 손책의 유산은 아우인 19세의 손권에게 고스란히 이어받게 된다.

강력한 공격지향적 성향을 지닌 손책의 급사는, 그와 함께 천하를 도모하려 했을 혈기왕성한 주유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애석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손견과 손책 부자의 천하를 향한 꿈은 같은 핏줄인 손권이 아닌, 함께 바라보고 있던 주유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다.

*천하로의 재진출에 대한 계기. 적벽대전.


손권의 집권 이후 주유는 손권과 함께 형주지역의 출병 등을 통해 아버지 손견의 원수인 황조의 목을 베는 등의 전공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손책의 평가만큼이나 외정은 형만큼은 아니었던지 오랜 시간의 대치에도 불구하고, 유표와 형주 지역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 기간 동안 배후의 위협을 차례로 제거한 조조는 놀라운 전략과 대담한 전술을 선보이며, 열세임에도 원소의 대군을 격파하고 하북을 제압하면서 마침내 군웅할거의 일원에서 독보적인 세력으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이런 조조가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최대의 군벌이었던 원소를 패망시키고 하북과 중원을 제압한 시점에서, 그가 형주 및 양주 지역으로의 진출을 늦출 아무런 이유는 없었다. 그 역시 천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유비는 서주에서 조조의 배후 교란에 실패한 채 원소가 무너지는 조짐이 보이자 곧바로 형주 지역으로 남하하여 유표에게 의탁하게 된다. 이 때 유비는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등용하게 된다.

그리고 208년. 드디어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적벽대전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최전선에서 조조의 군과 맞부딪친 유비는 강릉으로 도주하면서, 역시 객관적으로는 열세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손권에게 전략적 동맹을 제안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호족의 영향력이 강한만큼 장소를 비롯한 주화파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주유는 그들의 의견을 제압하고 제갈량의 동맹 제안을 성사시켜, 손권의 지원하에 오의 수군을 이끌고 적벽대전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그리고 황개의 고육책에 이은 화공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면서 중국 戰史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게 된다.

화염과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을 석두관. 즉 적벽을 바라보면서, 아마도 자신에게 패퇴하는 그 조조의 배후를 수년 전 함께 노리던 천부적 싸움꾼인 손책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적벽대전에서의 주유의 대활약은 조조의 천하통일을 향한 파죽지세와도 같던 기세를 꺾어버림과 동시에, 중원의 패자인 조조와도 충분히 겨뤄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주유 역시 조조 너머에 있는 천하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승세를 탄 주유의 행보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적벽대전 이후 주유의 천하통일계책.  
주유가 바라보았던 천하통일의 계책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주유는 노숙이나 제갈량이 논한 천하삼분지계가 아닌 북방의 조조, 그리고 남방의 손권. 이렇게 천하를 이등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삼국의 형태를 유지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견제를 통해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극대화하는 천하삼분지계와는 달리,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형태이다.

즉 천하이분지계에서 조조와 손권의 양 세력은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치러 승부를 내야만 하는, 긴장관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구도이며, 이는 어느 세력이고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마지막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의 승자는 천하통일의 꿈을 현실로 이뤄내는 것이다. 적벽전 이후의 주유의 구상에는 실로 이렇게 대담한 승부수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조는 적벽전에서 패퇴한 이후 강릉마저 주유에게 빼앗기는 등, 형주 이남에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적벽전의 동맹군이자 주유의 입장에서는 방심할 수 없는 유비는 형주의 남4군을 평정한 상태였다. 적벽전 대패의 후유증으로 조조는 곧바로 군을 일으킬 수도 없는 상태였을 뿐더러, 설령 무리하게 다시 군을 일으켜 남하를 시도한다손 치더라도 이미 처음 남하할 때와는 달리 압승은커녕, 승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있었다.

이렇게 조조가 적벽전의 패퇴로 인해 형주를 넘보지 못하고 있었을 이 시기가, 주유에게 있어서 천하이분지계의 방점인 익주를 도모할 수 있는 최고의 시기였다. 실로 조조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저지할 방도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조가 주유보다 먼저 익주를 차지하려면 한중의 장로는 물론 옹, 양주의 마초를 제압하고 들어가던가, 아니면 형주로 남하하여 주유가 가려던 강릉을 기점으로 이릉을 거쳐 백제성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조조가 재남하하면 형주 남부의 유비도 움직이기 때문에 이도 여의치 않는 방법이다. 어떤 방법을 취하든 주유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직접 익주로 진입하는 것보다 시기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주유가 도중에 병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정사의 기록처럼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신속하게 익주를 도모하고 익주, 형주, 양주로 이어지는 국가를 성립할 수 있었을 것이며, 서량의 독자적 세력인 마초와도 연계를 도모하여 조조와 최후의 자웅을 겨루는 천하이분지계를 성사시켰을 것이다.

*주유의 천하이분지계와 유비의 향방.



여기에서 형주 남부에 주둔한 유비의 향방 역시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실제로 역사에서는 병사한 주유 대신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만약 주유가 병사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해본다면, 사실상 유비도 조조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만약 유비가 먼저 익주로 움직이려는 행동이 보인다면 당연히 주유가 좌시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며, 이로 인해 양 세력 사이에 국지전 수준을 뛰어넘는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는 조조에게 있어서 전략적인 호기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주유가 익주로 향한 사이 유비가 강릉을 비롯한 형주 남부 전역을 장악한다면, 곧바로 조조와 전선을 접경하게 됨과 동시에 양주와 익주에서 협격이 가능한 손권과는 적대관계가 되는데, 이 역시 유비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전략적 선택은 아니다.

즉, 실질적으로는 주유가 익주로 향하더라도 형주 남부 4군에 묶여있는 유비가 택할 수 있는 전략적 행동의 폭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주유의 익주행이 성공했더라면, 유비 세력은 지속적으로 견제받으면서 오의 일원으로 반강제적으로 편입되거나, 아니면 조조는 물론 주유 및 손권과 적대관계가 되더라도 무력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비가 이끄는 세력의 면모를 보았을 때,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판단되지만, 실제로 이러한 경우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주유의 익주 공략이 성공적으로 이뤄졌을 경우, 유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촉과 같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주유에게 제압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주유의 천하이분지계가 성공적으로 성사되었다면, 조조와 손권은 동으로는 합비부터 서로는 한중지역까지 매우 길게 전선을 맞대게 된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전의 관도대전이나 적벽대전, 혹은 그를 능가하는 대규모 전쟁을 몇 차례 치르면서 승기를 잡아가는 세력이 천하통일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 것이다.


3. 주유의 병사와 함께 사라진 손오의 천하통일.  

하지만, 적벽전 이후 2년여 만에 주유가 돌연 병사하면서, 그가 계획하고 있었을 모든 계책도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 유비를 늘 껄끄럽게 생각하며 최후에는 적이 될 것으로 상정하던 주유와는 달리,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노숙은 친유비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와 유사한 계책을 손권의 입장에서 구상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조조와 맞서기 위해서는 유비를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주유와 노숙의 유비에 대한 군사 전략적 접근의 차이는, 주유 사후 오의 국가적 전략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동시에 손권 역시 주유가 구상하였을 천하이분지계를 포기하고,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와 같은 방식을 택하게 된다. 즉 형주를 유비에게 양도하고, 조조와 맞서게 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유비가 노골적으로 익주를 도모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에도, 오에서는 익주를 선수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유비에게 익주로 들어가는 대신 형주를 되돌려 달라는 식의 약조를 내걸게 되는데, 이는 주유가 생존해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손권의 오에서는 더 이상 주유의 천하이분지계와 같은 원대한 전략으로 천하를 논하려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대신 관우의 배후를 기습하여 병합한 형주와 양주, 장강을 끼고 있는 두 주에 걸친 '오'를 수성하는데 만족하는 국가가 되고 만다. 이는 이전의 손견, 손책의 부자는 물론 주유까지 천하를 노리려 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지향점을 지닌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국가적 전략의 변화에는 단지 주유의 죽음이라는 것 이외의 국내외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시간이 지날수록 천하를 노리려는 전략을 세울만한 유동성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던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듯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으로 돌아서버리게 된다. 어쩌면 천하를 꿈꾸다 일찍 스러져버린 아버지와 형, 그리고 그 형의 존재감과 유사했을 주유가 바라본 길과 손권이 바라보고 있는 길은 애초부터 같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유의 죽음은 그 자체로서 천하이분지계의 실패를 뜻함과 동시에, 손권에게 지속적으로 천하를 꿈꿀 수 있게끔 할 영향력을 지닌 마지막 무장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반면 유비에게 있어서는 다시 올 수 없는 천운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하이분지계의 시작' 대신, 우리가 익히 알게 될 '천하삼분지계의 완성'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Written by IronmasK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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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XI의 공명과 관우>

1.제갈공명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의 등장 배경

적벽전 직전부터 연의 전편에 걸쳐 뛰어난 능력을 과시하는 제갈공명이 유독 힘을 쓰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형주가 상실되는 시점이다. 그렇기에 관우와의 2인자 다툼에 이은 고의 방치설, 제거설 등이 나오기도 하였다. 추측컨데 당시 신인이나 다름없는 제갈공명에게 있어서 유비의 맏의제이자 자부심이 매우 높은, 게다가 연령차이까지 상당한 관우를 상대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탓인지 연의에서는 적벽전에서 군령장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유 사후 순조롭게 형주 남부 전역을 점령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인재와 병력으로 익주까지 도모하며 난세에 극적으로 비약을 꿈꾸던 유비군은, 낙성 공략 과정에서 방통의 뜻하지 않은 사망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서, 형주를 진수하고 있던 제갈공명은 일군을 이끌고 유비를 돕기에 이른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 역사의 분기점이 시작되며 동시에 그 결과 제갈공명과 관우의 2인자 다툼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2.제갈공명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 시기의 진행 과정 

*형주 진수를 관우에게 맡긴 이유.
제갈공명이 형주 진수의 수장으로 장비, 조운이 아닌 관우를 남긴 이유에 대해서는 유협의 무리와도 같았던 방랑군 시절의 유비군의 체제와 서열 순위를 고려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유비의 첫째 의제인 관우를 형주 수비장으로 임명한 것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의 형주 진수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제갈공명은 관우의 강직한 성격을 감안하여 ‘북거 조조, 동화 손권’ 이라는 큰 지침을 관우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의 손권은 유비가 형주를 바탕으로 익주까지 병합하여 순식간에 오를 제치고 위 다음가는 전력을 형성하게 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유비 세력을 견제하려 들었다. 이는 난세를 평정하고 한왕실을 복귀시키려는 유비의 대의의 실현에 있어서 자신이 진수하고 있는 형주 지역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관우는 형주 북부로의 북진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형주 접경지역에서 오와의 잦은 국경 분쟁과 더불어 외교를 통한 형주 동부 3군의 반환을 겪게 된다. 그리고 적벽전 등을 통해 익히 기량을 파악하고 있었을 당시 오의 지휘관인 여몽을 위협적인 장수로 간주하고, 오와의 접경지역에 방비에 대해 소홀하지 않았다.

즉, 그는 오를 결코 만만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대비를 바탕으로 번성 포위전까지 그는 북진을 훌륭하게 수행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까지 관우의 형주 진수에는 아무런 전략적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 2인자 다툼설의 빌미가 되고 만다.

*관우의 북진과 천하삼분지계의 천하통일지계로의 발전.
관우가 이끄는 형주군은, 칠군을 이끌고 저지하던 우금을 격파하고 양양성을 점령하는 등의 눈부신 전황을 일궈내기에 이른다. 이렇게 관우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조조는 허도에서 업으로의 천도까지도 고려하게 된다. 당시의 조조가 천도를 하겠다는 것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여 수도를 안전한 후방지역으로 옮겨놓고, 북진하는 관우군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이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당시 관우군의 북진은 성공적이었으며, 천하를 진동시킬 정도로 군세가 위력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마의의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삼국지 전편에 보여줬던 조조의 스타일을 감안하였을 때,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도 정사에서는 마파까지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더 내려오지 않은 이유는 이 시점에서 서황이 강릉을 탈취당해 퇴각하는 관우의 진영을 돌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위가 천도를 선택하여 형주 북부를 내주고 관우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게 된다면, 낙양을 분기점으로 위는 양분되는 양상이 되며 이는 차후 옹주-양주, 그리고 장안을 비롯한 낙양 서북부는 고스란히 촉에게 내어줄 위기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이 이루어지면, 분명 한중왕에 오른 성도의 유비가 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본대를 이끌고 한중을 통해 장안과 옹-양주 방향으로 북진하였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모습은 지난날 제갈량이 출사 직전에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 등을 논하던 ‘융중계책’과도 그야말로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관우의 북진 성공은 곧 유비가 천하통일로의 첫발을 내딛게 됨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관우의 북진과 위.오의 연합대응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오의 손권이 지닌 형주에 대한 욕심을 파악하고 있던 사마의의 차도살인격 계책이 나오게 된다. 바로 형주를 놓고 흥정한 '위-오 비밀동맹'이 맺어지면서 일거에 전황은 역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관우군의 성공적인 북진을 막아야만 하는 위와, 그러한 성공적인 북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형주 탈환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던 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비밀동맹과 더불어 번성을 공격하던 관우에게 결정적인 오판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오의 계책이 진행되는데, 바로 오군의 지휘관이 여몽에서 육손으로 교체되는 것이었다. 후에 이릉대전에서 오의 총사령관으로 육손을 추천할 때에도 감택 외에는 모두 반대할 정도로 오 내부에서도 백면서생이었는데, 하물며 당시 천하를 진동시키며 북진을 지휘하는 관우에게 있어 이름도 듣지 못한 육손은 애송이로 비춰졌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사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비병 차출'이라는 관우의 판단에 대해 논하자면, 형주 지역을 둘러싼 관우와 오의 소규모 분쟁과 외교적 논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적벽전 이래로 준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촉-오 관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주유의 후임이자 여몽의 선임이었던 노숙은 이러한 삼국의 정립구도를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형주로 인한 촉-오의 갈등을 최대한 봉합하여 동맹국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부분도 이를 반증하는 부분이다.

즉, 적벽전 이래 촉이나 오 모두 단독으로는 위에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불 동맹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관우 역시 이렇게 판단하진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 오를 위와 같은 적국으로 간주하였다면, 측면의 충분한 견제 없이는 애초에 형주 관우군의 단독 북진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공성전을 할 여유까지는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공성전을 위해 형주의 수비 병력까지 차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오의 전면적인 형주 침공은, 아마도 관우는 물론 촉으로 입성한 유비와 제갈공명을 위시한 촉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제갈공명의 관우 제거설의 논리적 비약에 대한 비판.
그러데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형주 전장 상황하에서 제갈공명이 일부러 관우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갈공명이 유비에게 출사한 이유는 유비의 극진한 간청도 이유가 되겠지만, 유비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한왕실 복귀라는 대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제갈공명이 단지 관우가 껄끄럽다고 해서, 걸출한 능력을 지닌 야전사령관인 '관우'는 물론 천하통일을 위해 필수적일 수 밖에 없는 전략적 요충지 '형주'를 포기하는 자승자박을 두는 것이 과연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가능한 일이었을까.

당시 제갈공명은 새롭게 편입한 익주의 재편을 거쳐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또다시 불거진 형주 문제를 형주 동부 3군을 손권에게 내주는 것으로 절충지어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된다. 아니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형주에 대한 손권의 욕심은 제갈공명은 물론 촉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갈공명의 전략에서, 손권까지 위와 동급의 적국으로 가정을 한다면, 관우 단독의 북진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출병이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으로 촉 내부에서 관우와 필적할만한 장수 -장비 혹은 조운- 를 최소 한명은 형주에 더 배치해야 했다. 또한 제갈공명은 익주로 가기 전에 '동화손권, 북거조조'라는 대명제를 관우에게 알려주었다. 이 명제 역시 '손권의 오'가 동맹국이라는 조건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촉이 눈치채지 못했을지언정,  손견 시절부터 늘 차지하려고 했던 형주를 손권 역시 온전히 차지하기를 원했고, 관우의 북진이 잠시 주춤한 사이에 위의 계책을 수락하고 배후를 기습하여 결국 차지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제갈공명이 융중대에서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를 깨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형주가 없이는 -구체적으로는 관우의 형주지역에서의 위에 대한 견제 없는 제갈공명의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후 벌어지는 이릉대전 역시 '관우의 복수'라는 상징적인 의미 이상으로, 촉에게 있어 '형주지역의 재탈환'이라는 현실적인 목표가 있었을 것임은 일련의 과정을 보았을 때,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의 형주 진수 및 북진의 약점
본래 213년 익주를 공략하던 유비와 방통이 성공적으로 점령해야 했으나, 낙성에서 방통이 유시에 사망하고 유비가 고립되자 형주의 주력군이 출병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먼저 출발한 황충, 위연 등은 물론 형주를 진수하던 제갈공명을 위시하여, 장비, 조운 등 실질적으로 촉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의 대부분이 유비를 구원하고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촉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기서 참모의 부재를 우려한 제갈공명이 '동화손권, 북거조조'라는 전략의 얼개를 관우에게 알려주고 떠난다.

위, 오와 모두 접경하고 있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에서, 촉의 주력군이 모두 성도로 향해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우가 이끄는 형주군은 손오의 급습 이전까지 형주 진수는 물론, 조조에게 천도를 고려하게 할 만큼 병력을 신장시켜, 북진을 놀라울만큼이나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참모의 부재
물론 그러한 관우가 치명적인 오판을 범해, 결과적으로 형주를 상실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관우의 곁에는 흔히 말하는 참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촉의 주력 인물들은 모두 익주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다. 관우와 아이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우 혼자 형주에서 버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위의 조인, 서황 등의 노련한 무장들과 사마의의 계책, 그리고 촉을 저버린 오에서는 여몽과 육손을 앞세운 기만전술과 배후급습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형주를 둘러싼 전황은 이미 관우의 역량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가정이지만 북진을 하던 과정에서 만약 관우 곁에 서서 또는 방통이나 제갈공명과 같은, 전략적 판단을 해줄 수 있는 참모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형주를 내어주었을까? 아마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2)대오 방어라인의 급격한 붕괴
또한 오의 형주 침공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던 부분에 대해서는, 강릉과 공안을 수비하던 미방과 부사인의 저항없는 무조건 항복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강릉과 공안을 거점으로 이들이 농성을 벌였다면, 양양을 포위하던 관우군의 회귀와 더불어 백제성에 주둔하던 군대가 이동하고, 나아가 촉에서 장비 내지는 조운으로 하여금 구원군을 출병시켜, 충분히 오군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오군도 더는 형주에서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위군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촉과 형주에서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면, 양쪽 모두 공멸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마도 잠재적 동맹을 깨고 침공한 오군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물러나 외교적으로 타결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관우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을 갖고 있던 미방과 부사인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고, 강릉과 공안을 비롯한 형주 남부 전역이 오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즉, 관우군이 회귀하고, 익주의 본대에서 구원군이 올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관우가 설령 천하의 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병력이 대거 이탈해가는데 구원군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 같은 위, 오의 협격을 막아내는 것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큰형 유비의 숙원을 바로 자신이 깨트렸다는 책임과 자책이 있었던 것일까. 관우는 곧바로 촉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합리적 선택 대신, 상용의 유봉과 맹달에게 원군을 청하고 강릉 재탈환을 시도하다가 결국 산화해버리고 만다.

또한 이러한 관우의 결정과 그로 인한 결말은 훗날 유비로 하여금 이릉대전을 불러오는 중요한 도화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3.제갈공명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에 대한 평가

결과적으로 형주 상실은 관우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끝남과 동시에, 제갈공명이 세웠던 '촉의 한왕실 복귀'라는 대전략의 붕괴를 의미한다. 또한 이로 인해 관우와 제갈공명 사이의 2인자 다툼설이 나올 정도로 극단적인 견해도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관우가 북진을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관우의 형주 상실 과정을 지켜보면, 위.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재층이 엷던 촉의 내부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는 생각도 든다.

설령 제갈공명이 진실로 연의에서처럼 신기묘산 했다고 하더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수백리 떨어진 형주의 전장의 상황 변동까지 완벽하게 대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제갈공명과 관우의 2인자 다툼에 의해 관우가 방치되었고 결국 형주 상실과 더불어 사망하게 되었다는 이른바 '2인자 다툼설'은 진행과정을 도외시하고 주어진 결과를 지나치게 인물 결정론으로 몰고 가는, 근거와 논리가 부족한 말 그대로 추상적인 '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공명이 관우를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치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물론 연의에서의 내용이지만) 마초와 경쟁의식을 갖던 관우를 제갈량이 편지 한통으로 잠재웠던 일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제갈공명은 관우를 능히 자신의 역량으로 제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필자만의 지나친 해석일 것인가.

여담이지만 Koei의 삼국지 영걸전과 공명전을 보면 재미있게도 관우에 대한 상반된 시나리오를 지니고 있다. 즉 유비가 주인공인 영걸전은 플레이어에게 관우를 구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주고 있지만, 주인공이 제갈공명인 공명전은 플레이어가 무슨 수를 써도 관우를 구할 수가 없다. 혹 이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Koei의 제작자는 '2인자 다툼설'을 의식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

Written by IronmasK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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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智將' 강유.

연의 상에서의 강유의 등장은 자못 화려하다. 삼고초려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제갈공명은 적벽대전 이후로 줄곧 주유와 조조를 비롯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희대의 지략가로 그려지지만, 그러한 그를 1차 북벌에서 유일하게 군략으로 제동을 건 무장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훗날 제갈공명의 유지를 받들어 촉한의 북벌을 이끄는 강유이다. 정사에서는 그저 천수태수의 의심을 받아 기현으로 이동했다가 제갈량에게 갔다고만 서술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주랑' 주유도, '중원의 패자' 조조도, 그리고 '숙명의 라이벌'인 사마의도 공명을 상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물론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연의의 저자인 나관중의 특별한 배려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공명과도 결과적으로 패하긴 했지만 일시적이나마 막상막하로 멋들어진 지략대결을 보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훗날 공명의 유지를 이어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음은 물론 북벌을 이어 진행하는 주연으로 격상시켜 줄 수 있는 복선을 화려하게 깔아두었던 것이다. 과연 공명이 '천수의 기린아'라고 감탄할만 했다.

이러한 장면의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정사에서의 공명의 강유에 대한 평가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갈량이 유부장사(留府長史)장예 및 참군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강백약(姜伯約)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 및 계상 등의 사람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에서 최고의 인물입니다."

 또 말했다.
"반드시 먼저 중호보병(中虎步兵) 5,6천 명을 그에게 훈련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한왕실에 있으며, 재능은 일반 사람을 넘으므로 군사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 궁궐로 보내 군주를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촉서 강유전>

연의에서의 공명은 정말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간상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꼭 그러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인재를 가늠하는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약점들이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는데, 1차 북벌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인 가정 전투에서 지략은 갖추고 있었으나 실전경험이 전무한 마속을 기용한 점(공명의 입장에서 마속을 기용한 것은 타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인선으로 거론된다. 유비의 임종시 선견지명과 비교된 부분)이 가장 크게 작용했고, 그리고 촉한의 오호장 사후 촉군 최고의 맹장인 위연과의 내면적 갈등관계로 인한 공명 사후의 분열 과정도 공명의 약점으로 지적받았다. (물론 이 부분도 유비 사후를 전후한 촉한에서의 제갈량의 입지 변화와도 큰 연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 정사의 기록에서 보듯 적어도 '강유'에 대해서만큼은 공명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의 사후 유비-공명으로 이어지는 북벌을 통한 '한왕실 부흥'을 이어받아 죽는 그 순간까지 추구한 이가 바로 '강유'였기 때문이다.

2. 제갈공명과 강유. 그리고 북벌.

강유는 공명과의 지략대결을 통해 등장한 이래 그와의 인연은 필연적으로 길고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명 사후 그의 유지를 이어 북벌을 추진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유의 북벌이 마감됨과 거의 동시에 촉한이 무너졌다는 사실에서부터 논쟁은 촉발하게 된다. 공명의 북벌과는 달리 강유의 북벌에는 늘 '내정을 도외시했다.'는 꼬리표가 뒤따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는 촉한의 멸망의 원인과 강유의 북벌의 결과를 하나의 인과관계라는 동일선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 결과는 그를 등용한 주체이자 그에게 북벌의 유지를 심어준 공명의 북벌과도 비교될 여지도 제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왜 공명의 북벌은 비슷한 횟수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30여년을 더 지탱했지만, 강유의 북벌은 촉한의 멸망과 이어지게 되었을까. 이렇게 진행되었던 것은 단지 한 두가지의 원인이 아닌 당시 촉한 내외의 상황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강유의 북벌을 평함에 있어서 가장 큰 화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답을 구해보고자 한다.

* 제갈공명과 강유의 입지. 무엇이 달랐나.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두 사람이 진행한 북벌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변수라고 단언한다. 강유의 북벌에 있어서 촉한의 내부와 연결되는 모든 문제점들이 유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성에서 유비 사후 그의 탁고인 유선을 받들어 2대 황제로 모시고 승상으로서 촉의 국정과 군권을 총괄하며, 안으로는 내정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군을 이끌어 '한의 부흥'을 위한 북벌을 주도하는, 그야말로 촉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실질적인 리더가 바로 제갈공명이었다.

제갈공명은 무인이 아닌 문인이다. 촉한의 정치가이자 유비군의 군사적 참모이기도 하였다. 그는 유비의 신임을 바탕으로 스스로 관중, 악의에 비유하던 젊은 날 쌓아왔던 지식과 재능을 유비군에 합류한 후 마음껏 펼쳐 보여 융중대에서 유비와 논했다고 전해지는 천하삼분지계를 적벽대전을 거쳐 현실화시켰으며, 입촉 이후에는 익주의 내정을 총괄담당했고, 유비 사후를 전후하여 촉한의 오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걸출한 무장들 중 조운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이 사망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군권까지 확보하며,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인물이다.

유선이라는 황제가 있었지만 실상 그에게 있어 공명은 유비의 유언처럼 아버지와도 같은 어려우면서도 의지해야할 존재였으며, 촉한이라는 국가는 실상 유비의 입촉 이후부터 263년 멸망에 이르기까지 조조와의 한중공방전으로 시작하여 유비가 동정했던 이릉전을 비롯해 공명의 남만 정벌과 육출기산 그리고 강유의 7차례에 걸친 북벌 등 전쟁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늘 準전시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명은 국정운영과 군권을 동시에 쥔, 어찌보면 모든 전권을 극한까지 발휘할 수 있는 전시상황 하에서의 일인 독재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당시 왕조시대의 최고위인 '황제'를 꿈꾸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본래 정치란, 최고의 권력을 공인 -왕조시대라면 문무관료 및 지배계층의 지지, 민주주의 시대라면 국민의 지지- 을 통해 쥐려고 하는 활동이다. 정치기반이 약하거나 정치력이 부족한데도 힘과 야심이 있다면 쿠데타 등의 절차를 무시한 방법을 통해 권력을 탈취하기도 한다. 옆 국가였던 조위가 바로 그러했다. 왕조시대에서는 그렇게 권력을 독점한 인물에 의해 기존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적이 무수히 많았음에도, 그 두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공명은 단 한번도 그러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후세의 극찬을 받을만한 큰 그릇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유비 사후의 촉한에서 제갈공명의 위치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임종직전 유비가 평했던 것처럼 '조비의 10배'에 이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이릉대전 대패의 후유증을 수습해 손권의 동오와 다시금 동맹을 맺었으며, 형주 상실에서 비롯된 물자와 인구수 축소라는 국력 저하를 남정을 통해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굴복시켜 어느정도 후유증을 감쇄함으로써 비로소 다시금 북벌을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육출기산 전까지의 일련의 눈부신 재도약 준비 과정으로 말미암아 중국 사학계에서는 오늘날 촉한 정통론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공명의 병법에는 의문부호를 붙여도, 그의 정치력에 대해서만큼은 대다수가 '최고의 정치가 또는 재상'이라는 거의 일치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유는 이러한 제갈공명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비록 강유가 촉한에 귀순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공명의 측근으로,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유지를 이어받아 최전선에서 북벌을 이끌면서 훗날 대장군의 직위에까지 오르지만, 촉한에서의 공명의 입지와 강유의 입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일단 위에서 촉한으로 귀순한 장수였다. 정사를 보면 그 당시 강유가 위에서 어떤 입지를 확보한 인물도 아니었으며 그저 지방의 평범한 무장에 불과했다. 다만 인재가 부족한 촉한의 상황으로서는 공명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수하로 거두어 활용을 하였고, 강유는 마속과는 달리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을 하였던 것이다. 촉한 내부에서의 강유는 비록 공명의 신임을 얻었을지언정 유비가 공명을 얻던 상황과는 크게 다를 수 밖에 없었으며, 공명 자신도 군략은 전수해주었을지언정, 자신이 지녔던 권력 모두를 강유에게 온전히 인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설령 공명이 심정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이미 그럴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이미 국가체제가 확고해지는 시점에서 적국인 위나라의 출신이라는 점도, 그가 방랑군이었던 유비군에 합류한 공명과는 같은 출발선상에 있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강유는 기본적으로 무장이었다. 병법과 무예를 익히고 군을 통솔하는데는 뛰어난 기량을 지녔지만, 그는 공명처럼 국정 전반을 운영하는 능력까지는 지니지는 못했다. 그러한 점을 이미 간파한 공명은 자신이 임종할 즈음에 우선적으로 국정의 전반적인 총괄은 그 기량을 인정받은 장완과 비의 라인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자신의 군권의 후임으로는 위연 등이 아닌 강유를 내정하는 방식의 이원화를 택했던 것이다. 정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강유는 당시 오장원에 종군 중이던 여러 장수들 중에서 특히 양의, 비의와 함께 무장으로서는 독자적으로 공명의 유지를 받들게 됨으로써, 그에 대한 공명의 두터운 신임을 알 수 있다.

건흥12년 (234) 가을, 제갈량이 병이 심해지자, 은밀히 장사(長史) 양의(楊儀), 사마 비의(費褘) 호군 강유(羌維) 등과 자신이 죽은 후에 퇴군하는 방법을 만들어 주고, 위연에게 영을 내려 후방을 끊게 하고, 강유는 그 다음에 있게 하였다. 만약 위연이 혹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대가 바로 직접 출발토록 했다.
<정사 위연전>

건흥 12년(234)에 제갈량이 죽자, 강유는 성도로 돌아와 우감군 및 보한장군(輔漢將軍)이 되어 군사들을 통솔하고, 승진하여 평야후(平襄侯)로 봉해졌다.
연희 원년(238)에 대장군 장완을 따라 한중에 주둔했다. 장완이 대사마로 승진한 후, 강유는 사마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 한 군대를 인솔하여서쪽으로 침입했다.
(~중략~)

연희 19년(256) 봄에 강유는 원정에 앞서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하략~)
<정사 강유전>

강유는 성도로 되돌아가 우감군 및 보한장군의 직위에 올랐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사마로 임명되어 독자적으로 일군을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으며, 군무를 총괄하는 대장군의 직위에는 공명 사후 20년이 넘게 지난 후인 256년에 이르러서야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상당한 세월이 지나 군권의 총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강유가 촉한의 국정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관여한 흔적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공명처럼 국정을 총괄하면서 군권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외지에서 위군을 상대로 북벌을 진행하면서 군공을 세우는 방식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는 공명과는 달리 2대 황제인 유선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얻지 못한 것도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호 등의 발호를 제압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위나라 출신이라는 한계로 인한 촉한 조정 내부에서의 입지 확보의 어려움과 더불어 제갈공명의 유지를 이어받아 촉한 중기 및 말기의 국정을 책임진 장완, 비의, 동윤 등의 유능한 인물들이 조정에서 잇달아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촉한을 망국으로 이끄는 환관 황호 등으로 대변되는 간신배들의 발호와 현실에 안주하려는 관료 및 호족 집단의 의식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때가 공교롭게도 그가 군권의 총수인 대장군이 되었던 시기와 비슷하게 겹치게 되면서, 실질적인 힘을 지녔음에도 이러한 점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성도 밖으로 물러나버린 사실은 공명과는 여실히 다른 그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공명에서 강유로. 촉한 지배 패러다임의 변화

예전에 유비에 관한 인물론을 쓸 때도 그랬지만 필자는 유비 집단이 난세에서 스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 결국 촉한을 건국하게 된 것은,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바로 '한 왕실의 부흥'이라는 대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의지가 무척이나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형주지역의 신진 명사였던 제갈공명이 당시 고작 객장의 신분이었던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라는 대전략을 제시하며 합류했던 이유도, 바로 그 꿈을 함께 실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개인의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굳이 그렇게 험한 길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인재가 넘쳐난다지만 공명 정도의 능력과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지역 명성을 바탕으로 조조의 관심과 발탁을 받을 수도 있었으며, 형이 중신으로 있는 손권의 오도 출세 지향적이 조건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것을 마다하고 유비가 간절히 내미는 손을 잡고 결국은 '한 왕실 부흥'의 최종 목표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천하삼분지계'를 현실로 이뤄냈다.

이 '한 왕실 부흥'이라는 대의명제는 헌제의 선양을 거치면서 촉의 유비가 후한의 명맥을 잇기 위함이라는 목적으로 황제의 위에까지 오르게 되는 원동력이 되며, 또한 왕조를 찬탈한 위를 상대로 총체적 국력 결집을 필요로 하는 북벌의 정당성까지 부여하게 된다. 즉 촉이라는 국가는 유비를 중심으로 하는 어떤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위함이 아닌 '후한'의 명맥을 그대로 온전히 잇기 위함이라는 것에서 그 존재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후세의 사가들은 유비가 건국한 촉을 '전한','후한'과 구별하기 위해 '촉한'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갈공명의 북벌을, 단지 익주에 한정된 촉한이라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책으로 '이공위수'을 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통일을 이뤄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전쟁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제갈공명 시대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북벌을 통한 한 왕실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공명의 북벌이 진정으로 수비를 위한 '이공위수'였다면 그렇게 주기적으로 여러차례에 걸쳐 촉한의 국력을 한계점까지 잔뜩 끌어올려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또한 굳이 장안이나 옹.양주를 목표로 삼을 필요도 없었으며, 그저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에 의지하다가 먼저 공격해 들어오는 위군을 요격하거나, 아니면 군사적 거점을 신속하게 타격하는 소규모 국지전에서 그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육출기산을 통해 생전에 북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강유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유비 사후 제갈공명은 촉한에서 절대적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다. 더불어 유비의 유지를 이어받음과 동시에 스스로도 신중하였으며 '읍참마속'의 예와 군량 수송 실패로 이엄을 곧바로 내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엄격하면서도 공평무사한 통치를 구사하여, 그가 북벌 정책을 추진해도 불만이 적었을 뿐더러 설령 있다고 해도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또한 공명은 스스로 국정도 동시에 챙겼기 때문에, 북벌을 진행함에 있어서도 절대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즉 언제나 촉한의 국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진행했다는 것이다. 상당히 상세한 정황 분석을 바탕으로 가능성이 적지 않은 기습을 제안했던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물리친 이유도 이러한 공명의 성향과 판단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명의 육출기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인 성공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결국 여섯번째 오장원 출병에서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과 대치 중 질병(폐결핵으로 추측된다.)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실질적으로 유비가 이뤄내려 했던 '한왕조 부흥'이라는 대의에 공감하며, 그와 방랑군 시절부터 함께 행동해 촉한을 건국했던 1세대들은 대부분 퇴장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장으로서는 맹장 위연이 남아있었지만 그는 공명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공명을 비롯한 문신들과 갈등관계에 있었기에 후계자는 커녕 결국 반란자로 낙인찍혀 허무하게 사망하게 되었으며, 공명에게 자신처럼 문무를 지니고 군과 국정을 모두 총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심어주며 내심 후계자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던 마속은, 그에게 실전경험을 심어주려했던 가정 수비의 실패로 인해 오히려 1차 북벌 패퇴의 책임을 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장완은 과거 제갈양이 진천(秦川)을 자주 엿보았으므로, 길이 험난하고 운반하기 어려워 결국에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많은 배를 만들어 한수와 면수로부터 위흥(魏興)과 상용(上庸)을 습격하려고 했다. 마침 장완은 지병이 연속적으로 발작하여 제때에 행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승리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므로 훌륭한 계책이 못된다고 했다. 그래서 장완은 상서령 비의, 중감군 강유 등을 보내 유선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도록 했다.
<촉서 장완전>

그래도 공명 사후 후임으로 내정된 장완은 군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명의 유지를 이으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정사에서 보면 장완은 강유를 그대로 북진하게끔 하고, 스스로는 공명의 북벌의 한계점이 군량 수송에 있음에 착안하여, 물자 수송이 훨씬 수월한 물길을 타고 위흥과 상용 등 형주 서북부를 공략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찍 병사하게 됨으로써 실행조차 하지 못하고 백지화가 되어버렸다. 물론 당대를 비롯한 후대에서도 장완의 이러한 상용 급습책에 대해 군략 그 자체로는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았으나, 일단 공명과 같이 어떠한 형태로든 북벌을 이어가려했던 노력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완이 그렇게 부현에 입성한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고 비의가 그 뒤를 잇게 되면서부터 촉한에서는 점차 북벌에 대한 회의론적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공명 사후 나눠졌던 국정과 북벌에 대한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희 12년(249)에 강유에게 부절을 주어 또 서평(西平)으로 출정하도록 했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는 스스로 서쪽 지역의 풍속에 익숙하며, 겸하여 자기의 재능과 무력에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강족과 호족을 유인하여 자신의 오른쪽 날개로 삼으려고 하며, 농산 서쪽을 위나라에서 끊어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항상 대규모로 출병하려고 하여 비의는 늘 그것을 제지하며, 그에게 준 병력은 만 명에 불과했다.
<촉서 강유전>

장완은 공명과는 다른 북벌을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고 스스로 실현하려고 하였지만,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비의는 오히려 강유의 출병을 제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비의가 강유의 움직임을 원천봉쇄한 것은 아니다. 대규모 출병은 막고 단지 일만의 군사를 내주었을 뿐이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드디어 유비에서 공명으로 그리고 장완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던 북벌이라는 국가적 대사가 당시 대장군이자 녹상서사였던 비의, 즉 촉한 최고의 관료로부터 부정을 당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34년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병사한 이래 촉한에서는 238년 강유가 몇 차례 출병하여 공격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244년 위군의 침입을 격퇴한 것, 그리고 247년 강유가 곽회 및 하후패와 교전을 벌인 것 그리고 250년 강유가 서평으로 출격한 것 정도가 촉-위간에 발발했던 전투에 대한 전부이다. 장완이 새로운 계책을 내놓았다지만 공명 사후 무려 13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공명이 진행했던 북벌과 같은 전쟁은 진행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누적된 기간들은 공명의 북벌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무장 출신인 강유에게는 답답함과 조급증을 충분히 유발하고도 남을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유의 출병을 제지하던 비의가 253년 정월 자객에 의해 불시에 사망하게 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것들을 한 번에 풀어내려했는지 그해 4월부터 254년, 255년, 256년, 257년 이렇게 5년 연속으로 매년 출병을 감행하였는데, 사마의가 '천하의 기재'라고 평했던 공명도 이렇게 매년 북벌을 진행하진 않았다. 바로 이 시기가 강유의 무리한 중원 정벌로 촉한의 내정을 피폐하게 만들어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근거가 되는데, 확실히 강유가 지나친 출병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62년 한차례 더 북벌에 나섰으나 역시 등애에게 막혀 대패를 당하고 답중에 머무르고 있는데, 이듬해 등애, 종회 등을 앞세운 위나라의 대규모 촉정벌군이 남진하게 되고 강유가 이끄는 군을 비롯한 다수의 촉군이 검각 등 요충지에서 분전하고 있었으나, 초주 등 익주 토착 호족 세력이 주축이 된 항복론에 의해 유선이 항복을 결심하게 되면서 결국 촉한은 유비와 제갈량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들이 뿌린 피와 꿈을 뒤로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3. 촉한의 꿈을 품었던 강유.


강유가 비의가 사망한 이후부터 단기간에 지나치게 잦은 북벌을 진행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매번 출병 규모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잖은 군사를 동원했음은 비의가 제지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완에서 비의로 넘어가면서 북벌을 바라보는 촉한 지배층의 시각이 변하게 되는 과정도 추정할 수 있었으며, 유선을 항복으로 이끈 일등 공신인 초주의 '구국론'에서는 익주의 토착 인사들의 북벌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넘어선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또한 246년 동윤이 사망하고 나서부터는 촉한 체제의 정점인 황제 유선이 환관 황호의 농단과 이에 결탁한 진지 등의 발호 등을 방치함으로 인해,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촉한은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균열현상을 보이면서 결국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강유는 대장군으로써 촉한의 멸망에 대한 책임과, 그의 북벌이 5년 연속으로 대규모로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촉한의 내정이 피폐해졌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대규모 출병을 제지했던 비의가 사망한 시점에서 그는 북벌에 대해 촉한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도 의지대로 추진할 수가 있었기에, 그 동안의 기다림만큼이나 차분하고도 대국적인 관점에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전략과 전술로써 적절한 기간을 두고 국력을 탕진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북벌을 진행했어야 옳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따랐던 제갈공명이 추진한 북벌이 아니었던가.

본래 전쟁은 국가를 피폐하게 만드는 최고의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자병법의 도국편에서는 '한 번 전쟁해서 승리하면 황제가 되지만, 다섯 번 전쟁해서 승리하면 망한다.'라고 비유하질 않았겠는가.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고구려를 원정하다가 2대만에 망한 ‘수’를 봐도 그 진리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득실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선행되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강유는 너무 성급했다. 그는 병법과 무예를 갖추고 북벌을 통한 전쟁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지속적으로 주고 받았지만, 위와 촉한 사이의 기본적인 국력 수준에서 심한 격차가 있음을 감안하였다면, 그렇게 잦은 출병을 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리한 외정은 곧 내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공명과는 달리 강유가 무장 출신이라는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 험준한 지세에 의지해 버티기만 해도 수개월 내에 공략할 수 없을 나라로 평가받던 촉한이, 강유를 비롯한 각지에서 촉군이 항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군의 침공이 시작된지 초단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2개월 만에 성도가 함락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물론 위군의 전력이 강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이 시기 강유를 중심으로 하는 무장들과 촉한 조정의 관료와 호족들이 지향했던 방향에 대해 극명한 차이점이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종국에는 출신도 다르며 만나지도 않았던 유비로부터 비롯되어 자신이 곁에서 보좌했던 공명이 품고 이루려했던 대의를 이어가려던 강유, 바로 그 자신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던 것이다.


4. 글을 마치며


강유는 공명 사후의 촉한을 대표하는 무장이었다. 극정의 평가에서 보듯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강유는 훌륭했다. 마치 생활태도는 공명과도 큰 차이가 없었을 정도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의 중임을 맡아 신하들의 위에 있었지만, 초라한 집에 살았으며 여분의 재산이 없었고, 별당에 첩을 두어 불결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후당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오락이 없었고, 의복은 입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수레와 말을 준비하고, 음식은 절제했으며, 사치스럽지도 않고 빈곤하지도 않아 관에서 지급하는 비용은 손을 따라 모두 썼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한 까닭을 고찰하면, 탐욕스런 자나 불결한 자를 거세게 질책하고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의 애욕을 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하여 만족하면 많음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견해는 항상 성공을 칭찬하고 실패를 헐뜯으며, 지위의 높음을 기대고 낮음을 떨어뜨리며, 모두 강유가 잘못된 곳에 의지하여 자신을 죽게 하고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폄하하고 다시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춘추》에서 말하는 폄하의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강유처럼 학습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청렴하고 소박하며 절약하는 인물은 한 시대의 모범입니다.
<정사 강유전>

강유는 유비와 공명의 꿈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제갈공명과는 달리 촉한의 조정에 입지를 다지지 못함으로써, 간신배들의 발호를 막지 못하였으며 결국 스스로 무장 출신이라는 점을 끝내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공명과는 달리 단기간에 지나치게 과도한 출병을 행함으로써 내정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단지 물적 인적 손해만이 아닌 익주 토착 호족들을 중심으로 한 촉한 신료들의 북벌에 대한 지지까지 상실했다는 점에서 강유의 패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공명의 유지를 이어가려 했으며, 군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청렴한 생활태도와 함께 후주 유선이 투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촉한을 부흥시키려했던 그의 충정만큼은 촉한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강유는 공명 이후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줄곧 고독한 싸움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늘 인재가 부족한 촉이었다지만 제갈공명 시기보다도 강유 주변에 인재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래서일까. 문득 장완의 요청대로 마속이 죽지 않고 경험을 쌓고 살아남아 강유와 유비와 공명의 꿈을 이어가는 내.외정의 파트너를 이루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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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는 명장인가.


사실 근래에 삼국지연의에 내용에 대한 재평가 작업, 즉 소설적인 장치를 제거해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여 인물 및 사건을 평가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일반화된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제공하고 있는 삼국지 상의 인물은 역시 중국에서 '군신'의 지위까지 오른 '관우'와, 삼국지 상의 최대의 악인으로 묘사되던 '조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Daum 삼국지 천하와 삼국지 카페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우는 명장인가?’에 대한 논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삼국지연의에서 모습만으로 관우를 완벽한 무장이라고 규정을 내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춘추라는 책을 읽고, 상대적으로 장비보다 침착하고 냉정하며, 유비가 제갈량이라는 참모를 얻기 전까지는 언제나 전장에서 조언을 구하는 믿음직한 의제로 그려지곤 했다.

 

1. 관우에 대한 자료


‘관우는 명장인가.’


이 질문에 대해 ‘예’ 혹은 ‘아니오’ 라고 단정을 짓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가 관우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소설적 요소가 가미된 ‘삼국지연의’라는 소설과, 관우 생애에서 상당부분 누락되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 관우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정사에서의 관우는 안량을 참살하고, 장판파에서 유비의 도주를 도우며, 213년 익주를 공략에 어려움을 겪던 유비를 돕기 위해 제갈량을 비롯한 장수들이 출전하자, 적벽전 이후 차지한 형주 남부를 진수하게 된다.


그리고 한중전이 촉의 승리로 끝난 219년. 관우가 북진을 시도하여, 우금을 격파하고 번성을 포위하여 조조가 천도까지 고려하였으나, 위의 책략에 의한 손오의 형주 기습으로 일거에 형주를 상실하고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다가 사로잡혀 사망하게 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일단 정사를 놓고 관우를 평가하기에는 그 근거자료들이 너무나 부족하다. 상황설명도 생략되어 있고, 대략적인 전개과정과 결과만 기술되어 있다. 때문에 이러한 사서에서의 공백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 역시 일정 부분 참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하 글은 정사와 연의의 혼합)


2. 명장의 자격 조건.


일반적으로 명장이란 말 그대로 이름난 장수, 또는 뛰어난 장수를 의미한다. 이 정도의 정의라고 한다면 관우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우를 논함에 있어서 ‘명장’이라는 정의에 대해 손자병법에서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며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다.


일찍이 손자병법의 손자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이것은 군사들이 따를 수 있는, 즉 절대 복종할 수 있는 자질과 마음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지도자는 반드시 ‘지(智)·인(仁)·용(勇)·신(信)·엄(嚴)’의 다섯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지도자와 부하들 사이는 마음으로 친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과연 관우는 이러한 명장의 구체적인 요건을 얼마나 구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관우의 용(勇)·신(信)·엄(嚴), 즉 관우의 무력과 신의 그리고 엄격함에는 명장의 요건에 근접한다고 판단하고, 특히 지(智)·인(仁)에 대해서 논하도록 하겠다.


3. 지(智)


예전에는 관우를 일컬어 흔히 ‘문무겸장(文武兼將)’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나 ‘명장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불어 관우를 명장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관우의 문무겸장 이미지는 아무래도 연의 상에서 춘추라는 역사서를 암송할 정도이고, 후에 제갈량을 영입하기 전까지, 언제나 전장에서의 맏형 유비의 참모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용력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초반부터 맹활약한 것에서 이러한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사실 정사에서는 물론 연의에서도 관우의 ‘지략’을 보여준 일화는, 219년 관우의 북진 시 조조가 보냈던 우금을 수공으로 대파한 것 이외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초반에 유비군에서의 참모를 맡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관우가 그의 전략을 단독으로 전개할 정도로, 유비군이 세를 얻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소수 정예군인데다가, 대부분의 전투가 관우와 장비의 걸출한 무용을 바탕으로 돌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관우가 진정한 전략을 구사할 정도의 위치에 오른 것은, 213년 익주로 출정한 제갈량에 이어 형주 진수를 담당하게 될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219년 형주군을 이끌고 북진을 시도하는 시기야말로, 관우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략 구사가 실행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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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 그리고 수공으로 우금 격퇴


초반에는 여러 번 논의되었던 것처럼, 형주 지역의 익숙한 지형과 기후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수공으로 우금을 격파하고, 양양을 점령하며, 번성을 포위하는 등의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그 위명을 삼군에 진동시켰다.


지(智)를 바탕으로 한 전략의 완성형은 적군의 패퇴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의 성공을 위한 작전, 즉 전술 구사에 있어서, 전장의 지형에 대한 사전 지식은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이 촉으로 들어간 이후 육출 기산을 통한 북벌이, 적벽전 등의 형주 지역에서 보여주었던 활약보다 못했던 것에 대한 이유의 하나가, 바로 촉의 지형과 기후를 제갈량이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그 당시에 전장의 특성에 대한 파악은 곧 성공적인 전략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적어도 관우는 적을 격퇴할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였으므로, 평범한 수준은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때문에 관우의 지형과 기후의 활용을 통한 성공적인 수공은 칭찬받을 수 있을지언정, 전략의 부재라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덕의 건의를 묵살하는 등 적장인 우금이 보여준 어리석은 행동은, 관우의 군공을 세울 수 있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만약 우금이 그렇게 불리한 포진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격퇴하였다거나 탈출에 성공하였다면, 그때야말로 관우의 전략에 대해 비판을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공은, 관우가 아닌 당시 형주에 장기간 머물렀던 조운이나 장비가, 관우의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신야에 기거한 이래 촉으로 진공하기 전까지, 관우와 마찬가지로 장기간 형주지역에서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들이 관우가 실행한 수공 방법에 대해, 전혀 모르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번성 공략과 형주 수비병력 차출


이렇게 우금을 지략으로 격파하고 사로잡은 관우는 이어 양양을 점령하고, 조인이 수비하는 번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바로 공성전이 시작되는 부분인데, 일반적으로 공성전에는 공격병력이 수비 병력의 3배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공격할 성 근처의 지역을 제압하고, 성 외부에서 오는 지원을 차단해야 했으며, 직접적으로 성을 공격하거나 혹은 탄탄한 포위공격을 펼쳐야만 했다.


여기에서 관우의 전략을 다시 한 번 논할 상황에 이르게 된다. 바로 공성을 위한 형주 수비 병력의 차출이 바로 그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다각적이 접근이 필요하다. 즉, ‘후방이 허술해지는 위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고, 결국 오의 기습으로 형주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에, 관우의 수비병력 차출은 어리석은 행동이었고, 그의 북진은 실패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명장이 될 전략을 갖추지 못했다.’ 고 결과론적으로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관우의 북진과 오의 급습


관우는 북진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형주 접경지역에서 오와의 잦은 국경 분쟁과, 외교를 통한 형주 동부 3군의 반환, 그리고 적벽전 등을 통해 익히 기량을 파악하고 있었을, 당시 오의 지휘관인 여몽을 위협적인 장수로 간주하고, 오와의 접경지역에 방비를 튼튼하게 한다.


즉, 그는 오를 결코 만만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우금을 격파하는 등 성공적으로 북진 중이던 관우군의 기세에, 조조는 허도에서 업으로의 천도까지도 고려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도 평가절하 하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지나친 것이다. 분명 조조는 천도를 고려한 것이 사실이었고, 당시의 조조가 천도를 하게 된다는 것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여 수도를 안전한 업으로 옮겨놓고, 북진하는 관우군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이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당시 관우군의 북진은 성공적이었으며, 천하를 진동시킬 정도로 군세가 드높았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사마의의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삼국지 전편에 보여줬던 조조의 스타일을 감안하였을 때,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위가 천도를 하고, 형주 북부를 내주고 관우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게 된다면, 낙양을 분기점으로 위는 양분되어, 옹주-양주, 그리고 장안을 비롯한 낙양 서북부는 고스란히 촉에게 내어줄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이루어지면, 분명 한중왕에 오른 성도의 유비가 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본대를 이끌고, 한중을 통해 장안과 옹-양주 방향으로 북진하였을 것이다.


이는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를 이야기하던 융중대에서 "만일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고 험요한 곳을 지키며, 서쪽으로 여러 오랑캐들과 화해하고 남쪽으로 이월을 어루만지며, 밖으로 손권과 결련하고 안으로 내정을 정비하였다가, 천하가 일변하면 한 명의 상장에게 명하여 형주의 군을 인솔하고 완, 낙으로 향하게 하며, 장군(유비)께서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몸소 진천으로 나오시면 백성들이 어찌 감히 단사호장을 가지고 장군을 맞이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유비에게 말하던 그 구상도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조조가 그러한 사태를 좌시하고 있을 인물은 분명 아니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바로 손오의 형주 욕심을 파악했던, 사마의의 차도살인의 계책이 나오게 된다. 바로 형주를 놓고 흥정한 '위-오 비밀동맹'이 맺어지면서 일거에 전황은 역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관우군의 성공적인 북진을 막아야만 하는 위와, 그러한 성공적인 북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형주 탈환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던 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부터 오의 손권은 형주를 바탕으로 익주까지 병합하여 순식간에 오에 버금가는 전력을 유비가 형성하게 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유비군을 견제하려 들었고, 이는 형주를 진수하는 입장에 있는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은 새롭게 편입한 익주 재편을 거쳐,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또다시 불거진 형주 문제를 형주 동부 3군을 손권에게 내주는 것으로 절충지어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된다. 아니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형주에 대한 오의 욕심은 촉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제갈량 역시 손권이 조조와 연합하여 동맹을 깰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손권도 촉과 연합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에, 형주에 대한 미련은 3군의 반환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번성을 공격하던 관우에게 결정적인 오판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오군의 지휘관이 여몽에서 육손으로 교체되는 것이었다. 후에 이릉대전 지휘관으로 육손을 추천할 때에도, 감택 외에는 모두 반대할 정도로 오 내부에서도 백면서생이었는데, 하물며 천하를 진동시키며 북진을 지휘하는 관우에게 있어서, 이름도 듣지 못한 육손은 애송이로 비춰졌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여몽이 육손을 후임으로 천거한 이유도 바로 관우의 심리를 간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갓 부임한 육손의 공손한 편지는 관우에게 있어서, 오군을 대비한 수비 병력을 북진군으로 차출하도록 결정하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결정 하나가 관우를 명장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에서 아니라는 방향으로 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사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의 관우의 판단에 대해 논하자면 형주 지역에 대한 소규모 분쟁과 외교적 논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적벽전 이래로 준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촉-오 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유의 후임이자 여몽의 선임이었던 노숙은, 이러한 삼국의 정립구도를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형주로 인한 촉-오의 갈등을 최대한 봉합하여 동맹국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적벽전 이래 촉이나 오 모두 단독으로는 위에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동맹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관우 역시 이렇게 판단하진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 오를 위와 같은 적국으로 간주하였다면, 측면의 충분한 견제 없이는 애초에 형주 관우군의 단독 북진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공성전을 할 여유까지는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공성전을 위해 형주의 수비 병력까지 차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오의 전면적인 형주 침공은, 아마도 촉으로 입성한 유비와 제갈량을 위시한 촉 내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았을 때, 관우의 ‘수비병력 차출’ 결정은, 결과적으로 그의 전략을 송두리째 망가트리는 결정적 오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관우가 아닌 촉의 어느 장군이든 관우의 입장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관우와 다른 결정을 내렸을까. 관우가 비록 말년에 자부심이 매우 높았지만, 삼국지 전편에 보이는 그의 모습을 고려할 때, 신중하고 사려 깊고 냉정한 모습이라고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또한 그는 신의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비에 대한 신의가 그랬고, 비록 오관육참장을 하며 조조의 곁을 떠났지만, 분명 공을 세우고 돌아가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아마 촉과 오의 동맹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낭만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비 병력을 차출할 때에도, 비록 형주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며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설마 위를 공격하는 촉의 뒤를 들이치는, 그야말로 ‘설마 대놓고 배신까지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동맹 역시 국가 대 국가의 신의로 간주했을 가능성 역시 농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는 형주을 차지하기 위해, 위를 공략 중이던 관우의 등 뒤에 칼을 꽂았다.


하지만 이런 어떠한 이유를 갖다 대더라도 결국 관우의 결정은, 형주 수비의 부실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고, 이는 오에게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목숨과 형주의 상실을 초래하게 된다.


분명 결과적으로 관우는 ‘명장’의 최고봉에 다다를 수 있는 갈림길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우를 단순히 용맹만 뽐내는 용장 혹은 맹장이라고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본래 213년 성도를 공략하던 유비와 방통이 촉을 성공적으로 점령해야 했으나 낙성에서 방통이 유시에 사망하고, 유비가 고립되자 형주의 주력군이 출병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먼저 출발한 황충, 위연 등은 물론 형주를 진수하던 제갈량을 위시하여, 장비, 조운 등 실질적으로 촉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의 대부분이 유비를 구원하고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촉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기서 참모의 부재를 우려한 제갈량이 '동화손권, 북거조조'라는 전략의 얼개를 관우에게 알려주고 떠난다.


위, 오와 모두 접경하고 있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에서, 촉의 주력군이 모두 성도로 향해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오의 급습 이전까지 형주 진수는 물론, 조조에게 천도를 고려하게 할 만큼 병력을 신장시켜, 북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던, 관우의 형주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그러한 관우가 치명적인 오판을 범해, 결과적으로 형주를 상실하는 것은 사실이고 인정한다. 하지만 당시 관우의 곁에는 흔히 말하는 참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촉의 주력 인물들은 모두 익주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다. 관우와 아이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우 혼자 형주에서 버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위의 조인, 서황 등을 비롯한 주력군과 사마의의 계책, 그리고 촉을 저버린 오에서는 여몽과 육손을 앞세운 전략과 전술이었다.


가정이지만 북진을 하던 과정에서 만약 관우 곁에 서서 또는 방통이나 제갈량과 같은, 전략적 판단을 해줄 수 있는 참모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형주를 내어주었을까? 아마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관우의 형주 상실은, 상대적으로 인재층이 엷던 촉의 내부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4. 인(仁)


또한 오의 형주 침공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던 부분에 대해서는, 강릉과 공안을 수비하던 미방과 부사인의 저항없는 무조건 항복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만약 강릉과 공안을 거점으로 이들이 농성을 벌였다면, 양양을 포위하던 관우군의 회귀와 더불어 백제성에 주둔하던 군대가 이동하고, 나아가 촉에서 장비 내지는 조운으로 하여금 구원군을 출병시켜, 충분히 오군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군도 더는 형주에서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위군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촉과 형주에서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면, 양쪽 모두 공멸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마도 잠재적 동맹을 깨고 침공한 오군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물러나 외교적으로 타결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관우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을 갖고 있던 미방과 부사인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고, 강릉과 공안을 비롯한 형주 남부 전역이 오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즉, 관우군이 회귀하고, 익주의 본대에서 구원군이 올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히 관우의 인덕 문제 혹은 휘하 장수 통솔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관우의 인덕과 통솔력을 논하기 이전에, 미방과 부사인의 신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미방은 유비를 초창기부터 수행했던 미축, 그리고 유비의 처인 미부인의 혈족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관우 역시 부사인은 차치하고서라도 미방의 항복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우는 오만하긴 하였지만 순수한 무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때문에 스스로의 기준에 맞춰 주변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고, 북진 전에 실수를 저지른 미방과 부사인에 대한 엄포도, 아마 다분히 경고성 멘트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리 절을 받은 관우라고 한들, 미축의 동생인 미방을 임의로 참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주의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오군에게 항복해버리고 마는, 미방과 부사인을 기용한 것이 관우의 실책이라면 실책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를 놓고, 관우의 리더쉽이나, 인을 논하는 것은 지나친 결과주의적 시각이라고 본다. 즉 선후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관우의 어조가 다소 강경하였다고 하더라도, 상명하복이 우선인 군 내부의 기강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공적인 꾸짖음을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우선 문제가 있는 것이다. 관우가 얼마나 그들을 경시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위에는 오만하여도 아랫사람은 아꼈다는 평가에 기준을 둔다면, 관우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분명 그들에게 우선적인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촉에 인재가 풍성하다면 아마도 관우의 기준에 맞는 인물로, 진작 보직 변경을 시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인해 초래한 결과를, 단지 지휘관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사적 원한으로 빚어진 감정적인 결과까지 더해서, 관우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 지나친 것이라고 본다. 


4. 관우는 명장인가?


세상에 완벽한 지휘관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관우 역시 완벽한 지휘관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북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오의 급습까지 막아냈다면 애초 이러한 논쟁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 관우의 상황에서는 한신의 배수진이나 한니발의 칸나이 전투와 같은 결과가 나오기 힘들었다. 오군의 급습으로 관우가 번성에서 군사를 되돌리는 순간, 조인과 서황이 추격하기 시작하고, 오는 이미 강릉과 공안을 손에 넣고, 관우의 형주군을 이탈시키며 관우의 도주로를 차단하였다.


관우가 설령 천하의 덕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병력이 대거 이탈해가는 상황에서 이 같은 위, 오의 협격을 막아내는 것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우 역시 곧바로 촉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대신, 상용의 유봉과 맹달에게 원군을 청하고 강릉 재탈환을 시도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형주 상실로 인해 관우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끝남과 동시에, 관우 자신의 한계로 작용하게 되는 요인이 되지만, 이는 관우가 북진을 너무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명장이란 나 홀로 명장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더욱이 대군을 이끄는 군의 최고 지휘자야 말로, 개인의 능력과 더불어 그를 받쳐주는 수하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더해질 때, 비로소 명장이 탄생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관우에게는 개인적 능력만으로 이끌던 군이 있을 뿐이었다.


관우는 결과적으로 북진도, 형주 진수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의 복잡한 전개 과정을 고려해보았을 때, 진행 과정 중에서도 눈에 띌만한 성공 요소 역시 모두 우연 혹은 평범함으로 치부하고, 실패한 결과로 인해 ‘명장의 지략’을 지니지 못한 맹장 혹은 용장으로 결론지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부족한 글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덧-

 

필자 역시 이 글을 마치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관우는 명장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예'라고 대답하고 싶어질만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형주에서 외로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결국 홀로 산화했다.

 

그가 명장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당시 상대했던 전략가인 사마의, 또는 여몽이나 육손과 같은 '전략'이었다면 당연히 그는 명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결과적으로 형주 진수에 실패하였더라도, 홀로 상대했던 양국가의 전략가들이 그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 논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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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後漢) 말의 무장(武將).

별칭  자 봉선(奉先)

국적  중국 후한(後漢)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주위안[九原]


자 봉선(奉先). 주위안[九原]현 출생.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병주자사(幷州刺使) 정원(丁原)을 따라 뤄양[洛陽]으로 가서 동탁(董卓)과 싸우다가 마침내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로 귀순, 그의 심복이 되어 장안(長安)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뒤 동탁이 그를 소외시키자, 192년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결탁하여 동탁을 살해하였다. 동탁의 부장 이각(李?)의 공격을 받아 장안을 빠져나와 난양[南陽]의 원술(袁術)에게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원소(袁紹)에게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원소가 죽이려 하자 이번에는 진류(陳留)의 장막(張邈)에게로 도피, 원주목(袁州牧)으로 임명되어 조조(曹操)와 싸웠지만 패하고 유비(劉備)에게로 도피하였다. 이어 원술을 공격하여 하비(下)를 점령, 스스로 쉬저우자사[徐州刺使]라 칭하였다. 곧이어 원술과 결탁하여 하비에서 유비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조조가 유비를 도와 그를 공격해와 조조에게 붙잡혀 죽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관우로 시작한 인물평이 조운까지 촉의 인물들 위주로 단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시대가 달라도, 여전히 단연 삼국지 최고의 무장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삼국지 초반부에 나름대로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1. 여포의 출신지?



최근에 삼국지연의에 관련된 책자들을 보면, 여포의 출신지를 가지고 갖가지 해석을 제기하고 있다.


여포의 출신지는 오원군 구원현으로 지금의 내몽고 지역의 바오터우(包豆)시 지역이다. 지도로 보면 장안 지역에서 정북 방향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지역으로, 당시에는 병주와 인접한 흉노족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지역 출신이 삼국지연의가 나관중에 의해 지어지는 시점인 원말기와 맞물리면서, 몽고지역 출신인 여포에 대한 혹평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삼국지 해제’와 김운회 교수의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여포에 대한 폄훼에 대한 이유로 상당히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 상에서 시랑(豺狼)과 같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여포가, 나관중의 중화주의 사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의는 삼국지연의 재해석이 붐을 이루고 있는 근래의 상황을 비추어봤을 때,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는 본다.


사실 여포는 연의 초반부에 동탁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악의 대명사로 그려지고 있다. 확실히 이러한 연의의 묘사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정사에서 보이는 여포에 대한 기록 역시 그다지 호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여포의 이런 묘사에 대한 모든 것이, 단지 나관중의 중화주의적인 성향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물론 여포의 출신이 한족과는 다르고, 사고방식 역시 한족과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가정해 본다면, 그의 행동 모두를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고는 하더라도, 상당부분 여포가 일반적인 상식 특히 유교적인 부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여포가 연의에서처럼 과장되게 악행만 저지는 무장은 아니었다고는 해도, 그의 당시 보여주고 있는 행적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그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볼 수 없는 여지를, 여포 그 자신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나관중은 여포의 그러한 행적을 바탕으로 좀 더 소설적인 덧칠을 그에게 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연의상의 反동탁 연합군 측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역사서는 패자에게는 상대적으로 가혹한 평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정사에서의 기록이 호의적이지 않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최근의 여포에 대한 나관중의 중화주의적인 폄훼설은, 연의에 대한 지나친 분석이 낳은 결과가 아닌가 싶다. 연의는 역사소설이지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 개인적인 견해로는 삼국지연의라는 역사소설을 역사적 사실에 맞춰 과도하게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물론 실제와 다른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어디까지나 역사서가 아닌 역사소설이다. 당연히 소설적 허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학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굳이 정사와 같은 사실과 비교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면, 삼국지연의라는 걸출한 작품이 빛이 바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것이 비록 연의에서 악평을 받는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2. 비장(飛將) 여포.



앞서 이야기 했듯이 여포의 출신지는 흉노족의 영역으로 병주 지역과 인접한 지역이었다. 또한 여포는 용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절륜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창술과 궁술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때문에 여포는 한무제 때의 명장 이광(李廣)에 대해 흉노족이 비장군(飛將軍)라고 부르던 것을 흉내 내어 스스로를 비장(飛將)이라고 칭했다.


여포가 변경의 이민족 출신임에도 발탁된 것을 보면, 단순히 걸출한 무예 기량뿐만이 아닌, 어쩌면 한족과의 혼열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여포는 이러한 무용을 바탕으로 삼국지 전편은 물론 중국 역사상 ‘최강‘의 자리를 논할 정도의 무장으로 군림하게 된다. 흉노족은 본래 유목민족으로 기마술은 한족에 비해 기본적으로 월등하게 능통해 있는 민족이다. 거기에 타고난 용력에 창술과 궁술까지 일류급이면, 이미 무장으로써 갖출 수 있는 기술은 모두 최고조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포에게 말 중의 말이라는 적토마가 더해졌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가 달린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에 그는 특히 화극이라는 무기를 잘 다루었는데, 화극은 찌르고 베기가 모두 가능한 무기이다. 이 무기와 얽힌 일화가 있는데 조운의 경우처럼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여포는 어렸을 적부터 무예 익히기를 좋아했는데, 이를 본 아버지가 그가 15세 되던 해에 종산(鍾山)에 있는 세공도인이라는 고수에게 수업을 받게끔 주선했다. 세공도인은 특히 화극의 사용에 있어서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세공도인에게 화극 72식 중 36식을 전수받은 시점에서 여포는 인간성 시험을 받았으나, 결국 실패하고 36식만을 전수 받은 채 하산하였는데, 그 36식만으로도 삼국지 최강의 무장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피소드 역시 여포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생겨난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여포는 호로관 전투에서 유,관,장 3형제와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게 되는데, 물론 이는 정사에는 없는 연의에서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연의 상에서 관우와 장비의 무력의 수준이 최상급으로 묘사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관우, 장비에 유비까지 상대하면서도 30여 합을 겨룬 것으로 그려지는 호로관 전투의 여포는 그야말로 나관중도 인정한 최강의 무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후 삼국지 사상 관우, 장비를 동시에 상대하는 무장은 여포를 제외하면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는 점이, 여포가 별 무리 없이 최강의 무장 지위를 차지하는데 가장 큰 단초를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호로관 전투 이후에도 여포는 원소에게 잠시 의탁했다가 곧 유랑군이 된다. 여기에 진궁이 합류하면서 조조의 배후를 급습하고, 유비의 서주를 탈취하면서 기반을 잡는 과정에서 조조군과의 숱한 충돌을 겪게 되는데, 여기에서도 여포의 절륜한 무력은 조조군에서의 주축 무장들과 칼을 맞대면서 또 한 번 실력을 과시하게 된다. 조조군 내에서 맹장에 속하는 하후돈, 허저 등을 수십 합내에 제압하고, 나중에는 조조의 명으로 1:6이라는 매우 불공평한 대결에서도 물론 패퇴하기는 하지만, 그의 무력은 6명을 동시에 상대했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빛을 발한다.


삼국지연의 전편에 걸쳐 여포처럼 일 대 다수로 일기토를 하는 경우는, 삼국지 후반부에 등장하는 조운의 한덕 부자 토벌전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여포의 상대가 다들 한창 때의 쟁쟁한 장수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운 역시 당시에 노장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여포 쪽의 수준이 좀 더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포의 걸출한 궁술 역시 연의에서는 빠뜨리지 않고 묘사를 하고 있다. 서주에 머무르는 당시, 유비군과 원술의 상장 기령이 이끄는 일군과의 대치를 중재하기 위해 여포는 화극의 가지를 맞추는 조건으로 양측의 화해를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여포의 제안을 양측은 각각의 속셈에 따라 승낙하게 되고, 호기롭게 술 한잔 걸친 여포는 100보나 떨어진 지점에서 화극의 잔가지. 즉 화극이 보일듯 말듯한 거리에서 월아를 맞춰버리고 만다. 당시의 활의 정확도가 지금의 양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궁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관중에 의해 후에 무신으로 추앙받게 되는 관우와 장판교에서 조조군의 추격을 단기로 막았던 장비를 동시에, 그리고 조조군 휘하에서 손꼽히는 무장들을 6명이나 상대하면서도 수 십합을 겨뤘던 점을 상기해본다면, 삼국지 사상 武에 있어서 으뜸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飛將 ‘여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주군을 두 번이나 바꾸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여포는 뛰어난 무용을 바탕으로 그 당시 출신지와 인접해 있던 당시 병주자사 정원의 눈에 띄어 발탁된 후, 십상시의 난을 거치면서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낙양의 집금오로 부임한 정원을 따라 수도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여포는 동탁의 눈에 띄어 적토마로 유혹하자 이에 넘어가, 정원을 살해하고 동탁측에 합류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부터 여포의 악행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 연의에서는 정원과 여포의 사이를 ‘부자지간’으로 얽매고 있지만, 기록 어디를 뒤져봐도 정원과 여포가 ‘부자의 의’를 맺었다는 사실은 없다. 이 부분은 확실히 나관중의 소설적인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둘 사이를 부자지간으로 엮게 되면, 통상적인 군신관계일 때보다 훨씬 여포의 행위는 유교적인 관점에서 정말 용납받기 힘든 패륜적인 행동이 된다. 그리고 나관중은 바로 그러한 효과를 노렸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동탁과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사이는 부자지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는 동탁이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지어진 것으로서, 그들이 부자 관계라고 하여도 도의적인 중요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여포가 동탁 진영에 합류하는 장면도, 난세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타 군주의 유능한 부하를 영입하려는 모습의 하나로, 그다지 보기 어려운 장면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손책이 태사자를 영입하려 하는 것과 동탁이 여포를 영입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하지만 손책은 태사자를 결투를 통해 남자다운 방법으로 영입한 것이고, 동탁은 여포를 적토마 등을 이용한 뇌물로 회유한 것으로, 방법상의 차이만 있는 것이다. 여포가 동탁에게 합류하면서 정원의 수급을 취한 것은, 동탁과 정원 사이의 정치적인 이해 충돌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여포를 비난하는 단지 윤리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한다면, 삼국지연의 상에 벌어지는 온갖 정치적 암투는 모두 여포가 했던 행위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된다.


단지 나관중은 여포의 행위에서 패륜적인 측면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상당부분 소설적 기질을 발휘했던 것이다.


여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동탁측에 합류하게 되고, 왕윤에 의한 초선의 ‘연환계’가 실행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의 동탁의 신변보호를 담당하면서 군신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여기서 초선이 등장하게 되는 ‘연환계’ 역시 나관중의 소설적인 허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탁과 여포의 군신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에, 바로 여자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나관중은 여기서 초선이라는 상상적 인물을 등장시켜, 연환계를 통해 그의 필치를 또 한 번 유감없이 펼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환계와 왕윤의 화술에 넘어가 결국 여포는 동탁을 다시 배신하게 된다. 물론 한조부흥의 기치를 내세우고는 있지만, 여포의 이후 행적을 감안한다면, 진정으로 한조부흥을 위해 동탁을 주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다만 여포는 초선과의 애정 묘사 등 연의 전반적으로 보면, 이민족 출신 치고는 상당히 미남축에 속한 듯 싶다.  그래서 '인걸 중에는 여포가 있고, 말 중에는 적토가 있다.'는 말 역시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최근에는 여포가 조운, 허저, 관우, 장비 등을 제치고 중국인이 뽑은 호남(豪男) 1순위에 들었던 것도 이같은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여포가 연의에서 전체적으로 악인으로 묘사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바로 주군을 두 번이나 주살하는 경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포가 주군을 바꾸게 되는 계기도 이른바 대의명분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사소하거나 보잘것없는 이유가 우선적이기 때문인 것도 그의 악평에 일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뇌물이나 여자에게 약한 그의 행동에, 당시의 절대적인 사회 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란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당연히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 해제’나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제기되는 여포의 출신문제. 즉 그가 정통 한족이 아니기 때문이었던 점도 고려되었을 법 하다.


연의에서는 이들 동탁과 여포는 반동탁 연합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이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당들로 묘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포와 동탁이 있었기에, 조조의 주도로 일어나는 반동탁 연합군의 결성도 호기롭게 보였고, 그와 대적하는 유,관,장 3형제도 호로관 전투를 통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포에 대한 연의의 악인 묘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중국인의 중화주의 사상이니, 국수주의니 하며 너무 부정적으로 볼 필요만은 없을 듯하다. 물론 여포 본인은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4. 진궁과 함께 천하를 논하다?



여포는 여자문제로 갈등을 겪은 동탁을 암살한 뒤, 낙양을 벗어나 장연을 토벌하던 원소를 도왔으나, 오히려 자신을 암살하려던 속 좁은 원소에게서 벗어나 다시금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연주의 조조가 보수설한의 기치를 내세우며 서주 원정을 떠난 사이에, 진류태수를 맡고 있던 장막과 진궁이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추대하여 드디어 여포는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천하를 논하는 주군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과연 여포 자신이 천하를 논하려 했는가에 대해서는, 필자는 다소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진궁이 서주 대학살을 핑계 삼아 여포에게 추대한 이유는, 여포를 전면에 내세워 천하를 노려보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처음에는 조조의 의기를 높이 사 그에게 가담하였지만, 여백사 사건(물론 정사에는 없는 것으로 조조를 악인으로 만들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 보는 편이 옳다.)이나 서주 대학살 등을 겪으면서 조조에 대한 인간적인 비정함과 더불어, 조조의 능력을 고려해 봤을 때 진궁 자신이 조조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못됨을 알게 된 것도, 진궁이 여포를 추대한 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여포와 결탁 이후의 행보를 보았을 때도, 분명 천하의 싸움꾼 여포를 내세워 천하를 쥐어보려는 욕심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즉 황제는 여포가 되고, 자신은 여포 밑의 승상이 되어 천하의 정사를 좌우하는 그러한 구도를 그리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군사는 여포, 정사는 진궁. 이러한 구도.


여포도 자신의 처지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진궁의 추대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여포는 이러한 제안에 대해 분명 그 의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덥석 받아들였을 것임은, 그의 그간의 행적을 보았을 때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궁은 주군을 조조가 아닌 여포로 택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당시 주변 지역 정세를 보면, 북으로는 원소, 서로는 조조, 남으로는 원술과 손책 등의 세력이 할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서주를 기반으로 천하를 노리기에는 여포군의 세나 인재, 여러 면에서 아무래도 가장 뒤처지고 조건 또한 불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유비가 서주를 근거로 자립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고의적으로 여포에게 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궁이 여포를 추대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진궁은 결국 여포를 천하의 주인으로 만드는데 실패했고, 결국 조조에게 사로잡혀 천하를 꿈꾸던 야심가답게 최후에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죽게 된다.



5. 배신으로 생애를 마감하다.



앞서 이야기 했던, 진궁은 죽음 앞에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 진궁이 주군으로 추대했던 여포는 다르다. 여포는 이 와중에서도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와 버금가는 무용을 지니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여타 무장들의 마지막 ‘산화’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포는 하비성에서 조조에 의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모사인 진궁의 진언을 채택하기 보다는 부인의 말에 더 의지하는 등 군주로서의 모습으로는 매우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주령에 대해서도 그의 융통성 없는 판단으로 결국 수하 장수들의 배신을 초래하게 된다.


이렇게 말년의 모습을 비롯하여 삼국지연의에서 전반적으로 그려지는 모습들을 종합해 보면, 여포가 상당히 단순하고 귀가 엷은 인물임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즉 군주감으로서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반증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조조에게 사로잡힌 여포는 형장에서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여기에서 유비는 이상하리만큼 단호하게 여포의 구명요청을 묵살해버리고 만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이야기를 조조에게 한다.


이처럼 유비가 하비성에서 조조에게 잡힌 여포를 죽이라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조조가 여포를 제어하기에 충분한 그릇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유비가 서주에 머무는 동안 여러 번 여포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여포 또한 유비를 배신했지만 그의 가족을 손대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유비가 조조에게 여포의 목숨을 간청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결국 유비는 사사로운 정보다 유비 자신이 품고 있던 대의를 위해서 미리 걸림돌을 제거하려한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즉 여포라는 희대의 맹장이 조조군에 합류하는 사태만큼, 조조를 최대, 최후의 양립할 수 없는 적(한조 부흥의 최대 걸림돌)으로 생각하는 유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의 이야기를 논외로 하더라도, 조조 입장에서는 기마대를 이끌며 야전에서 최강의 모습을 보여준 여포였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매번 주군을 배신하던 그의 불안정한 모습과 여포 밑에 있던 장료라는 여포에 버금가는 장수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굳이 충성이라는 측면에서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여포를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조조와 유비의 복합적인 이해관계와, 장료라는 유능한 무장, 그리고 이전의 여포 자신의 행적 등으로 인해, 여포가 그렇게 인재를 탐하던 조조의 눈에는 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삼국지 내에서는 물론, 나아가서는 중국 역사상 ‘최강’의 칭호를 논하는 무용을 지니고도, 한창 나이에 허무하게 교수형으로 생애를 마감 짓고 만다.



6. 글을 마치며...



여포에게 있어서 자신의 뛰어난 무력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이건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어쩌면 여포라는 무장은 그냥 싸움터를 전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았던 이민족 출신의 순진한 무인은 아니었을까. 정치가 됐든, 한족의 대의명분이 어떠하던지 간에 그런 머리 아픈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전장에서만이 자신의 의미를 찾았던 맹장.


삼국지연의에서는 비열하고 욕심 많고 파렴치하고 눈치 없이 악행만을 행하는, 무력은 최고이되 어딘가 모자란 듯한 무장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어쩌면 실제로는 그는 단지 순진하고 단순하며, 그저 싸움을 즐기는 본능에 충실한 무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포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고지식한 정원이나, 폭군으로 알려진 동탁 말고 처음부터 조조와 같은 ‘여포의 스타일을 능히 살려줄 수 있는 군주를 먼저 만났더라면.’ 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언제나 먼저 들게 된다.


그가 삼국지상에 수없이 등장하는 여느 평범한 무장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그의 놀라운 무용을 꿈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속절없이 스러져가버렸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여포가 군주를 잘 만났더라면, 난세에 그의 엄청난 무력을 마음껏 과시하며, 지금 우리가 보는 그러한 삶이 아닌 멋진 무장으로써 한평생 살았을 가능성도 농후하기에, 아까운 점도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포가 한족이 아니었기에, 여타 비슷한 무력을 지닌 한족 무장과는 판이한 삶을 살게 되었고, 여포의 생애는 이민족이었던 그가 한족 사회에 뛰어들어 만들어진 필연적인 궤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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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별칭  자 자룡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상산


삼국지 전편에 걸쳐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만능형 무장으로 활약하는 유비의 4번째 형제와도 다름없는 조운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1. 상산의 조자룡.



조운은 하북지역 상산(常山)의 진정(眞定) 출신이다. 조운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조자룡’에서는 조운이 젊었을 때 말을 팔러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실제로도 말을 사고 파는 말장수였다는 설도 있다. 조운의 출신 지역인 상산은 분명 북방 유목민과는 근접한 지역이었으니,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이러한 조운도 언제나 전장에서는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장비가 ‘연인’을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는 것과 유사한데, 속을 좀 더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장비와는 사뭇 다른 이유가 있다.


조운의 아버지도 무사였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조운이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조운의 무예 실력을 향상시켜 주기 위해 상산에 있는 무예에 능한 사부를 소개시켜 주었다고 한다. 조운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상산으로 가 운산도사라고 불리는 사부를 만나 십팔반무예를 섭렵하고 특히 장창 72식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사부를 능가할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조운에게 사부는 운(雲)이라는 이름과 자룡(子龍)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조운은 하산한 뒤에도 사부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언제나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후세에 엮어진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삼국지 전편에 그려지는 조운의 무용(武勇)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들을 보면 그는 분명 젊은 날 무예 실력을 상당한 경지까지 단련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유비 관우 장비 그리고 조운.



사실 조운이 유비군에 합류하게 되는 과정은 관우, 장비와는 달리 조금 복잡하다.


본래 조운은 하북 지방의 최대 세력을 지니고 있던 원소군에 합류하지만, 의외로 발탁이 되지 못한다. 이는 조운의 실력보다는 원소의 출신 배경과 인재 기용 스타일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소는 사세삼공을 지낸 후한의 명문 중의 명문 가문이었다. 그리고 조운이 합류할 시점에는 하북에서 최대 세력을 구가하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당연히 원소 진영에는 소위 상류층의 수많은 인사들이 끈을 대기 위해 북적대고 있었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여기에 젊었을 때 너무 빈곤해서 타고 다니던 말을 팔아야할 정도였던 조운임을 감안해본다면,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소의 진영에서 고위직으로 쉽게 발탁되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야 할 정도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한 참에 원소의 하북 점령 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원소를 떠나 그와 맞서던 공손찬에게 가던 중 문추에게 쫓기던 그의 목숨을 구해주게 된다. 이 장면에서 조운은 홍안의 소년 장수로 그려지는데, 사실 조운의 나이(158-229) 역시 촉의 장수인 요화만큼이나 가늠하기가 힘든 상태이다. 기록에 의거한 나이로 보면 조운은 유비는 물론 관우, 장비보다도 나이가 많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나관중의 고의적인 의도인지는 몰라도 3형제보다 훨씬 어린 소년 장수로 그려지게 된다. 이후 4번째 형제와 다름없는 활약을 펼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면 아무래도 3형제보다 나이가 어린 편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부분에서 유비와 조운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고, 이때의 만남은 후에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한 이후 유비를 찾아 나서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고 있다. 연의에서는 당시 조운은 유비와 만나보고 공손찬 대신 곧바로 유비에게 신종(臣從)하려고 하지만 유비는 이를 만류하고 일단은 공손찬에게 합류하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곧바로 유비에게 합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공손찬 패망 후 여남에서 재회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3형제와의 극적인 만남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후 조운은 유비 관우 장비에 이은 4번째 형제와 같은 모습으로 활약하게 된다.



3. 유비군에서의 경호실장 조운.



사실 유비와 한 침상을 사용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조운은 실제로 기록에서 보이는 직위를 보면 촉이 건국된 이후 관우, 장비는 물론 조운보다도 뒤늦게 합류하는, 소위 ‘오호 장군’에 속하는 황충, 마초, 심지어는 위연보다도 장군직이 낮다. 이러한 정사와 연의의 괴리는 물론 연의의 작가인 나관중의 ‘촉한 정통론’에 의해 힘입은 바가 크다.


인물평을 하다보면 한 인물에 대해 정사와 연의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상당부분 보인다. 정사는 말 그대로 정통 역사서인 반면, 연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니 작가의 집필 방향에 의해 어느 정도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유비와 제갈량을 중심으로 한 촉의 인물들에게는 대체적으로 후하게 묘사를 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어쨌든, 조운은 유비군에 합류한 직후부터 거의 유비의 경호 담당을 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군의 주축을 이루는 일군의 장을 담당하였지만, 조운은 관우, 장비와는 달리 방랑군 상태의 유비의 신변 보호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야에 정착한 이래 유비를 호시탐탐 노린 형주 채모와의 만남에 동행, 그리고 적벽전 당시 퇴각하는 유비 가족의 경호를 담당했던 것, 적벽전 이후 주유의 계략에 의해 손부인과의 결혼식 참가 등등을 보면 의제인 관우, 장비보다도 유비의 곁에 더욱 그림자처럼 호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중에서 적벽전 초반부 당시에는, 장비의 당양 장판파에서의 조조의 추격병을 막아세운 것 이상으로, 조운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도 바로 유비 가족의 경호를 담당하면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조운은 퇴각하다가 헤어진 미부인과 아두를 되찾기 위해 조조군을 돌파해 들어가 결국 우물가에서 미부인과 아두를 찾지만, 미부인이 자결하자 아두만을 데리고 유비군을 향해 이동하기까지의 과정을 연의의 작가는 호로관에서의 여포와 유비 삼형제의 1:3 일기토 이후 최고로 멋들어지는 묘사를 했다. 10만명의 조조군이 에워싼 가운데, 홀로 분투하는 장면을 목격한 조조가 생포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결국 조운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게 만드는 명령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실 당시 조조의 추격군은 연의의 묘사처럼 10만 대군이 아닌, 경기병을 위주로 한 5000여명 안팎의 군사들이었다. 1/20로 줄어들었다고는 하더라도 아두를 품에 안은 조운이 홀로 돌파하기엔 수천여명의 병사 역시 엄청난 병력이었음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아수라장을 무사히 돌파해 나온 조운의 무용은, 연의의 묘사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타 호걸들에 비해 뒤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또 눈여겨볼 장면은 어렵사리 구출한 아두를 유비가 내던지며 조운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 보이는데, 유비는 그만큼 조운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적벽전을 거치며 유비군의 세력이 확장되자 그제야 조운도 일군의 장수로써 계양을 점령하고, 익주 점령전에 병력을 이끌고 가서 유비를 돕는 등의 일군의 장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비록 정식적인 직급은 타 장군들에 비해 다소 뒤떨어졌을지 몰라도, 유비의 신임만큼은 그의 직위와는 상관없이 변함이 없었다. 후에 관우 복수를 내세운 이릉전을 일으킬 때에도 조운은 유비에게 물러섬 없이 간언을 하였던 것도 이러한 관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고, 이릉전에 대패하고 백제성으로 도주하는 유비를 가장 먼저 구출하였던 이도 바로 조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병사 직전 제갈량과 함께 유비에게 후사를 부탁받은 인물 역시 조운이었던 것을 보면 유비가 조운을 얻고 나서 한 침상을 사용할 만큼 신뢰하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4. 이릉대전. 조운은 왜 배제되었던 것인가?



앞서 조운이 얼마만큼이나 유비에게 신뢰를 받았는가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런데 정작 관우의 복수를 위한 삼국지 역사상 3번째 대전(관도대전, 적벽대전에 이은)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릉대전에 왜 조운은 선봉을 담당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과연 연의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단지 유비가 강행하였던 이릉전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배제되었던 것일까.


이 부분은 단순히 유비, 조운과의 인간관계 이외에도 이릉대전이 갖는 성격에 대해서도 고려를 해야 한다. 이릉대전은 전면에 내세웠던 관우의 복수(물론 이것이 가장 큰 이유임은 틀림없다고 본다.)외에도 형주 탈환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즉, 제갈량이 구상하던 천하삼분지계, 그리고 나아가서 촉이 내세운 대의명분. 즉 한 왕실의 복귀를 위해서는 형주는 유비와 촉에게 있어서 전략적으로도 필수불가결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주 탈환과 더불어 한중 이북 지역인 양주, 옹주 지역으로 출병하는 동시 병진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필자 개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물론 촉의 병력으로 위, 오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릉대전 발발 직전의 분위기는 촉의 서슬퍼런 기세에 오는 완전히 눌려있었으며, 위는 애매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필자는 아마도 이릉대전에 유비와 제갈량이 다양한 전략을 수립해 놓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릉대전을 일패지도의 기세로 승리로 이끌어 최단기간에 형주지역을 회복한 다음 오와 화친을 맺고, 동시에 후방에서 대기하던 조운과 형주 진격군을 재편해 형주 북부로 한중과 촉에 남아있던 위연, 마초, 마대와 군수물자를 관리하던 제갈량이 본대를 이끌고 북진을 시도해서 옹주 양주는 물론 장안 지역까지 점령을 시도하는 이른바 ‘동시병진’을 기획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생각에 상당부분 현실적인 무리수가 엿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촉이 이러한 전략을 계획하고 이릉대전을 시작했는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 촉은 형주를 오의 배신으로 빼앗긴 뒤 삼국 중 최약체로 전락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당시에 남은 여력으로 유비 생전에 한 왕조 복귀를 추구하였다면 이릉대전은 그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마지막 전쟁이었던 것이다.


즉 기습적인 공격으로 형주와 옹주, 양주를 탈취해서 위와 결판을 내려하는 전략을 세우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촉을 대표하는 맹장들은 모두 남겨두고 관흥, 장포 등의 신출내기 장수들을 데리고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킨 것은 그만큼 오를 상대하여 형주를 회복할 자신감이 있었다는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겨둔 또 다른 온전한 전력으로 북진을 시도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위는 ‘촉의 북진’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위의 오판 가능성이 높을수록 촉의 이릉대전의 종결과 동시에 북진을 하는 도박 역시 성공 가능성 역시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가능성을 가진 촉의 ‘동시병진’의 전략은 이릉대전이 촉의 참패로 끝나면서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설령 계획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릉대전의 패배와 동시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조운이 백제성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이러한 원대한 촉의 전략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히 유비의 이릉대전을 만류했다고 해서, 또는 위의 공격을 막아내려는 수비가 중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만한 장수를 촉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대전에 선봉은 고사하고 본진으로도 데려가지 않았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러한 요소를 감안해 ‘동시병진’을 계획하였던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해보는 것이다.



5. 만능형 장수의 대표적인 인물. 조운.

 


삼국지연의 전편에 걸쳐 조운과 같은 다방면에 만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꼽으라면 위의 장료 정도가 조운과 유사한 궤적을 갖고 있긴 하지만, 오를 원정하던 조비를 대신해 전장에서 얻은 상처로 허무하게 사망하게 되는 말년의 모습을 감안해본다면, 조운은 한평생의 마무리까지도 그야말로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조운은 삼국지 전편에 등장하는 수많은 호걸들과도 비교해 보아도 어디하나 부족한 점이 없다. 무용은 관우, 장비에 뒤지지 않고, 일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 패배한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조운의 판단력은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유비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 그리고 여타 무장과는 달리 이릉대전을 만류하는 직언도 행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겸양지덕을 갖추고 있었다.


즉 관우의 자부심이나, 장비의 경솔함 또는 위연의 대인관계 등에서 보여주는 성격적 결함이 그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조운은 관우, 장비와 거의 동급인 촉의 개국 공신이며, 후주인 유선의 목숨을 구해준 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러한 위치를 내세운 적이 없으며, 자신보다도 훨씬 늦게 합류한 제갈량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갈량 또한 1차 북벌 당시 퇴각한 조운이 책임을 지고 장군직을 강등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또한 군수물자를 포상으로 분배하려고 하자 이를 만류하는 모습을 보여 제갈량은 조운을 더욱 공경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2차 북벌 직전에 조운이 병사하자 제갈량은 슬픔을 금치 못했고, 어렸을 적 조운 때문에 목숨을 부지한 후주 유선도 그의 죽음에 통곡하였다.


이처럼 조운은 평생에 걸쳐 잡음 없이 말 그대로 무장이지만 선비적인 기질을 지닌, 순수한 무인으로 살다간 것이다.



6. 글을 마치며...



최근에 촉한 정통론이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나관중에 의해 충의의 화신으로 그려지던 관우가 성격적 결함에 의해 예전보다 상당부분 저평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방면에서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겸양지덕을 갖춘 조운은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욱 추앙받는다고 한다.


사실 난세에서 조운과 같이 초지일관의 자세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더욱이 자신의 실력과 비례하여 갖추고 있던 그의 겸양지덕은 평생을 잡음 없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비록 관우, 장비에 가려져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그들에 뒤지지 않는 충성심과 용맹을 갖추고 있는 무장이었다. 또한 그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분수를 잘 지켰고, 공평무사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은 최대한 발휘하여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는 그야말로 뛰어난 장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그의 모습 때문에 유비는 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후사까지도 부탁하는 중임을 조운에게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군주의 입장에서는 조운과 같은 무장이야 말로 덕장, 지장에 용장의 풍모까지 갖춘, 즉 한마디로 완벽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 장비와 같은 일기당천의 맹장에다가 조운과 같은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무장까지 지닌 유비를, 특히나 무장을 우대하였던 조조가 부러워했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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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전략가.


별칭  자 공명, 시호 충무, 와룡선생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한

활동분야  정치·군사

출생지  중국 산둥성


본문

자 공명(孔明). 시호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山東省 沂水縣) 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 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 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陝西省 톱縣)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에서 인용...


시작을 촉의 관우로 하니, 계속 촉의 인물들 위주로 다루게 되는데, 이렇게 이어지는 것. 촉이라는 나라의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리고 삼국지의 진정한 삼국을 구축하는데 큰 공헌을 한, 촉의 명참모이자, 삼국지 상에서도 최고의 참모라고 일컬어지는 제갈량 공명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1. 삼고초려와 천하삼분지계.



최근에 조조를 중심으로 한 삼국지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촉의 인물들은 기존의 호의적인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우, 그리고 제갈량도 그런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아 보인다.


최근에는 삼고초려의 진위 여부 역시 의심받고 있는 처지인데, 당시 유비군의 규모나 행색을 고려했을 때, 스스로 자신을 관중, 악의에 비교하며 속으로 큰 뜻을 품은 제갈량이 유비에게 먼저 찾아가 합류하였다는 것은 필자의 소견으로는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유비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종의 탐색을 했을 수는 있다고 본다.


그리고 후세의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후출사표와는 달리 제갈량의 글로 인정받고 있는 전출사표를 보면 ‘유비의 삼고초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유비가 인재를 얻는 스타일과 당시 조조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황에서 유비군의 앞날을 고려했을 때, 유비는 걸출한 참모를 얻기 위해 충분히 삼고초려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비는 신야에 머무르면서 일찍이 서서라는 뛰어난 참모를 얻었지만, 적벽전 전초전 당시 서서의 어머니를 인질로 한 조조군의 계략에 넘어가 유비를 떠나가 되면서 ‘제갈량 공명’을 추천하게 된다. 줄곧 형주지방에 거주하면서 사마휘 등, 형주 명사들을 통해 풍문으로 '와룡'이라 불리우던 제갈량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을 유비는 곧바로 제갈량이 거주하던 융중으로 찾아가 그 유명한 ‘삼고초려’를 하게 된다.


삼고초려는 제갈량과 유비간의 서로에 대한 탐색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스로 큰 뜻을 품고 있던 제갈량이 당시 소수군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명성이 있던 유비가 직접 찾아왔다고 해서 한번에 합류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으며, 또한 유비라는 사람이 주군으로 모실만한 기량 등이 있는지 가늠했을 것이고, 유비 역시 서서를 통해 참모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제갈량을 영입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우리가 알게 되는 ‘삼고초려’로 그려지게 된 것은 아닐까.


제갈량은 이렇게 자신을 영입하려고 3번이나 자택을 방문하는 유비의 모습에서 아마도 일종의 신뢰감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삼고초려 당시 제갈량이 형주지방에서 제법 명성을 얻고 있었다지만, 조조와 대립하며 난세를 헤집고 형주까지 내려온 유비의 전국적인 명성에 비하면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유비가 제갈량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 보여줬던 모습에 제갈량은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지 않았을까. 삼국지 전편에 걸쳐 유비의 인재를 얻는 모습은 이 ‘삼고초려’에서 극대화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한왕실의 부흥이라는 대의명제에 의기투합하게 되면서 제갈량은 유비에게 ‘융중대, 또는 융중계책’이라고도 알려진 ‘천하삼분지계’를 유비에게 설명하게 된다.


그런데 이 천하삼분지계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당시 조조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태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약간은 억지스러운 것이 아닐까.


적벽 대전 이후 유비군의 행적을 상기해 보면, 관우의 사망 전까지 유비군은 융중 계책의 100%에 가까운 모습과 전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는 과연 우연이었을까. 제갈량이 유비군에 합류하지 않았어도 그려질 수 있는 모습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적벽대전 발발 직후부터 관우의 사망 전까지 완벽하게 융중계책의 구상대로 그려진 유비군의 모습만으로도 융중계책에 대한 비판은 논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즉 제갈량은 당시 유비에게는 큰 전략의 얼개만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었다는 것이다. 조조군의 남하에 대한 전술은 직접 상황에 직면해야 보여줄 수 있는 것이지, 말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다루게 되겠지만, 제갈량의 전략, 전술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하지만 불과 신야의 일군에 불과하던 유비군을 삼국지 3대 대전 중의 하나인 적벽대전을 거치면서 형주와 익주를 병합하며 일약 삼국에서 오를 누르고 위 다음가는 촉을 건국하게 되는 그 중심에는 바로 제갈량이 있었다. 이 점만 봐도 제갈량의 군사적인 면모는 저평가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난세가 훨씬 유동적이었던 유비군이 제갈량이 합류하기 전에는 방랑군으로 떠돌다가, 난세가 오히려 고착될 분위기가 높아지던 때에 제갈량이 합류하고, 적벽대전을 거치면서 유비군의 세력이 급격히 비약하여 삼국 중 일약 2위로 도약하는 촉을 건국하게 된 역사적 사실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제갈량이라는 참모의 존재가 유비군에 있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사마휘의 '와룡과 봉추 둘 중 한 명만 얻어도 왕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라는 평은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2.적벽대전. 제갈량은 한 것이 없었다?



연의를 보면 이러한 질문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갈량은 사실 연의에서처럼 화살을 10만개를 얻었다거나 동남풍을 불어일으키는 등의 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유와 오의 수군이 이뤄낸 승리다.’ 라고 단언하는 것도 지나친 일일 것이다.


물론 연의처럼 제갈량은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지만, 개전을 망설이던 손권을 설득시켜 조조와의 결전을 이끌어 냈다. 당시 손권의 곁에는 장소를 필두로 주화파들의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노숙과 주유와 같은 주전론자가 있었으나, 손권이 확실히 개전을 할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제갈량이 세객으로 오의 진영으로 가 주화파를 물리치고 손권을 설득시켜 조조와의 결전을 이끌어 낸 것은 분명 제갈량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유비와 손권은 동맹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전력차이가 심했지만, 제갈량은 유비를 손권의 부장급 정도가 아닌 손권과 동급 위치에서의 동맹을 성사시켰다. 이 또한 평가받을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제갈량의 활약으로 손권은 개전을 결심하게 되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후로는 유비군과 제갈량은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군의 통수권은 총사령관이었던 주유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적벽전의 과정에서 제갈량은 주유와 황개가 쓰려던 화공 전술을 간파하고 있었던 듯 보이며, 유비군은 적벽에서 화공으로 패퇴한 조조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제갈량은 연의에서처럼 화려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시 오군 위주의 편제를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유비가 형주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적벽전을 손권에게서 이끌어 낸 점은, 범상치 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3.형주 상실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



이것은 이전에 관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도 다루었던 내용이다.


분명 제갈량에게 있어서, 유비의 의제이자, 연령차이도 많이 나고 자부심이 매우 높았던 관우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연의에서는 적벽전에서 군령장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하지만 주유 사후 순조롭게 형주를 점령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인재와 병력으로 익주까지 병합하려 하였던 유비군이, 방통의 죽음과 함께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하자 형주를 진수하고 있던 제갈량은 일군을 이끌고 유비를 도와 익주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제갈량이 장비, 조운이 아닌 관우를 남긴 이유는 유비군의 서열 체계를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비의 첫째 의제인 관우를 형주 수비장으로 임명한 것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의 형주 진수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갈량은 관우의 성격을 감안하여 ‘북거 조조, 동화 손권’ 이라는 큰 지침을 관우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오의 손권은 형주를 바탕으로 익주까지 병합하여 순식간에 오를 제치고 위 다음가는 전력을 유비가 형성하게 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유비군을 견제하려 들었고, 이는 난세를 평정하고, 한왕실을 복구하려는 유비의 뜻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은 새롭게 편입한 익주 재편을 거쳐,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또다시 불거진 형주 문제를 형주 동부 3군을 손권에게 내주는 것으로 절충지어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된다. 그리고 형주의 관우가 북진하여 번성을 포위하게 된다.


여기까지의 모습은 지난날 제갈량이 융중에서 유비에게 이야기하던 ‘융중계책’과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데 제갈량이 여기서 일부러 관우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출사한 이유는, 유비의 극진한 간청도 이유가 되겠지만, 유비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한왕실 복귀라는 대의를 알고 있는 제갈량이 관우가 껄끄럽다고 해서 뛰어난 야전사령관인 관우와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형주를 포기하는 자승자박을 두는 것이 과연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마도 제갈량은 손권이 조조와 연합하여 동맹을 깰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손권도 촉과 연합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에, 형주에 대한 미련은 3군의 반환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와 별개로 손권과 잦은 마찰을 겪었던 관우는, 북진 당시 손권의 급습에 대비해 상당한 군사를 후방에 배치하는 등의 노련함을 보여주었으나, 도중에 여몽이 육손으로 교체되었다는 정보를 얻자, 수비병까지 번성 공략에 동원하게 되고, 이는 후방이 허술함을 초래하여, 위. 오 연합군의 공격을 자초하게 되고,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제갈량의 고의성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보다, 관우의 곁에 정황 판단을 해줄 군략을 지닌 참모가 없었던 점이 더욱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방통의 유시에 의한 죽음이 촉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의 죽음과 형주의 피탈에 대해 정리하자면, 제갈량은 유비에게 출사하여 당시 ‘융중계책’에 가장 근접한 판도를 꾸며놓고도, 설령 관우와의 사이가 불편하다고 하더라도, 관우와 형주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동맹이었던 오의 손권이 형주 문제로 배신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관우 곁에 군략을 지닌 참모의 부재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 있지 않고 익주에 있던 제갈량이 연의에서처럼 신기묘산 하였더라도, 시시각각변하는 수백리 떨어진 형주의 전장의 상황 변동까지 대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제갈량이 관우를 제어하지 못해서 방치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마초와 경쟁의식을 갖던 관우를 제갈량이 편지 한통으로 잠재웠던 것을 본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제갈량은 관우를 능히 제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필자의 지나친 해석일까.



4. 읍참마속.



왜 마속이 선봉이 되어야 했는가? 마속이 가정 전투의 선봉이 된 이유는 제갈량의 1차 북벌의 목적을 일단 파악해야 한다. 1차 북벌때 제갈량의 목적은 기산의 확보에 있었다. 이 기산을 확보하게 되면, 위수를 따라 동진하여 장안의 배후를 습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량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위연이 자오곡을 통한 장안을 탈취하자는 이른바 '자오곡(子午谷)의 계책'이 있었지만, 촉의 전력을 가지고, 위와 전쟁을 수행하는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무리수가 많다고 판단, 좀 더 안정적인 전술을 통해 장안과 옹,양주를 탈취하려 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든, 제갈량은 양동작전을 구사해 조운과 등지의 별동대를 기곡도를 통해 미성을 공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 조진의 대군을 기곡도로 유도함과 동시에 제갈량의 본대는 기산을 점령하려 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자 남안, 천수, 안정 3군은 촉군에 호응하게 되어 양,옹주를 진동시키자, 위의 명제(조예)는 장합(연의에서는 사마의)을 구원군으로 보내게 된다.


그러자 제갈량은, 기산으로 진군하는 장합의 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전략적 요지인 가정의 수비장을 선정하게 되는데, 바로 마속을 기용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왜 마속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게 되는 것이다.


제갈량이 위연이 아닌 마속을 가정의 수비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가정에서 장합의 군을 격파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군사적 요충지에서 수비위주로 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장합이 위의 명장이긴 하지만, 계곡과도 같은 좁은 길에서는, 대군의 잇점을 살릴 수 없게 된다. 군과 군이 맞부딪치는 면이, 한정되어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위연이 나아가지 않아도, 그간의 마속의 기량을 감안할 때 제갈량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본다.


제갈량은 유비 사후, 촉의 건국 공신이라 할 수 있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등 일당백 장군들의 사후 촉을 이끌어갈 만한 신진 인재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는 마속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릉전에서 마량 사후 제갈량은 이 재기 넘치는 준재인 마속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특히 남정 전 마속이 진언했던 "힘으로 꺾기보다는 마음으로 깨우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 후 제갈량은 마속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을 것이다. 당시 촉의 입장에서는 마속 정도의 준재는 드물었고, 실전 경험을 쌓게 해 촉의 기둥으로 키우려는 제갈량의 의도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가정의 수비가 비중이 큰 만큼 마속이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앞으로도 중임을 맡기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고, 장차 자신의 유지까지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마속의 첫 실전인 가정 전투는 무리해서 적과 맞서는 것도 아니었고, 군사적 요충지인 가정을 제갈량이 기산을 점령하는 동안 사수하는 역할이었다.


이처럼, 기량에 비해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마속에게 1차 북벌의 키라고 할 수 있는 가정 수비를 맡기면서, 일종의 실전 경험과 함께 공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려는 제갈량의 의도도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우직하게 수비에만 임하라."고 세부적인 지시까지 해주게 된다. 더불어 부장을 우직한 무장인 '왕평'을 붙여준다. 제갈량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왕평이라면, 경험 부족의 마속을 도와 적절한 상황 판단을 해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마속이 왕평의 조언을 무시함으로써 양 장수간의 직위나 위치가 부적절했지만, 제갈량은 수비만 확고히 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였고, 마속과 왕평이라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수행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형까지 촉군에 수비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마속이 지시를 어겨가면서까지 장합을 이기려 들려고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속이 패배한 이유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군사력과 지형에서, 마속이 공명심이 앞서 장합을 이기려들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나 싶다. 만약 마속이 제갈량의 당부대로 수비에만 치중했다면 결과는 180도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러한 마속의 결과론적 실패로 인해 제갈량의 용병술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기엔 다소간의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마속이 실전경험이 없었던 점이 역시 뼈아픈 패배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고, 이는 결국 제갈량의 전략 전체에 차질을 불러, 1차 북벌을 중단하고 사곡의 조운군과 기산을 공략하던 촉군 본대의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 패인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연의처럼 제갈량이 직접 마속에게 수비를 지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속을 가정에서 장합군을 저지하는 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분명 제갈량이고,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하더라도, 군사력이나 지형을 고려했을 때, 싸워 이기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1차 북벌의 총사령관은 제갈량이지만, 퇴각의 빌미를 제공한 직접적인 원인은 마속이었고, 제갈량의 군령(장합군의 저지)을 위반한 마속은, 일벌백계를 위해서라도 처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사의 상랑전에 마속이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시기가 나오지 않아, 가정에서 패퇴하고 도망쳐오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인지, 아니면 투옥된 다음에 다시 탈주를 감행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인지 그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가정에서 패퇴하고 한중으로 도주해 온 것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속이 전자에 해당해, 가정에서 패퇴하고 도주해 온 것이라면, 당연히 1차 북벌 전체 전세에 영향을 주는 가정의 수비라는 군령을 위반하였으므로, 그에 따른 처벌을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고, 만약 투옥된 뒤 도주하려 한 것이었다면, 더욱 더 용서 받기 어려운 행동이었을 것이고, 역시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총사령관의 군령을 따르지 않은 한명의 장수로 인한 패배때문에, 총사령관 자신도 중형에 처해져야 한다면, 관도대전 대패 후 원소나, 장수와의 전투에서 아들과 조카까지 잃은 조조 역시 그 직후 처단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제갈량은 마속과는 달리 촉의 승상이었고, 선주인 유비의 유지를 이어 후주 유선을 보좌하고, 이릉전 이후 급격히 기운 촉의 내정과 군사력을 일으켜 세우고, 남만 정벌까지 이루어 북벌에 도전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한 제갈량이 1차 북벌 패퇴의 책임을 지고 죽는다면, 그러한 행동은 일개 필부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제갈량의 어깨에는 마속의 죽음까지 짊어지게 되고, 그만큼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내심 자신의 후계자로까지 염두해 뒀을 법한 마속을 좀 더 가르치지 못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후회와, 선주의 유언까지(마속의 중용에 관한 이야기) 더해 대의를 그르쳤다는 자책감에 충분히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육출 기산과 오장원에서의 마지막.



제갈량은 유비의 유지를 이어 6차 북벌을 하는 등의 한실 부흥에 전력을 다 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234년 한여름, 오장원에서 54세의 일기로 눈을 감게 된다.


이 6차례 북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란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채택하지 않은 점과 6차례에 걸친 북벌을 하였음에도 뚜렷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결과에서 제갈량의 군략에 대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고 비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군략을 논하기 전에 위와 촉의 국력을 먼저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위와 촉의 영토는 5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더욱이 당시 중국의 경제적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하북 지역이었지, 외딴 산골의 익주는 아니었다. 이는 당시 중국이라고 논할 수 있던 지역은 대부분이 위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흔히 위,오,촉의 국력을 6:3:1의 비율로 비교하곤 한다. 물론 수치상의 비율이 전부라고 할 수 는 없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은 시작부터가 군사, 경제적으로 위에게 대적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안고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벌은 성패 여부를 떠나 촉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연의 자오곡 계책은 그 전략의 성사 여부를 떠나 안정적인 성향을 가진 제갈량의 눈에는 도박과도 같이 비춰졌을 것이다. 위연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총사령관의 위치에 있는 제갈량은 빠듯한 군사력으로 성패 확률이 반반인 기책에 모험을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에, 여러사람들은 '소수군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면 일거에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기책을 활용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제갈량의 군략을 비판하지만, 촉군을 통괄하고 있는 제갈량은 실패에 대해서도 충분히 계산을 하고 있어야 하는 위치였다. 무턱대고 가능성이라는 측면만을 가지고 공격해 들어갈 수 있는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현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6차례 북벌 모두 실패라는 최종 결과를 얻게 되지만, 가능성 측면에서 본다면 1차 북벌을 비롯하여, 옹주 양주는 물론 장안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적이 있었다. 비록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것은 촉의 군사들에게 사기 재고라는 측면과, 차후 북벌 진행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매번 제갈량의 북벌을 가로막았던 사마의가 수비 위주의 전술이 아닌 제갈량과 정식으로 공격전술로서 맞대결을 하였다면 과연 그 때에도 제갈량에게 승리 할 수 있었을까. 사마의는 언제나 촉군보다 대군을 이끌고 와서도 매번 수비적인 전술로 임했다. 일단 군략이라는 것을 쓰려면 상대가 맞받아치고 나와야 가능한데, 도무지 상대를 하려고 하지 않으니 제갈량이 아니라 조조가 오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사마의나 위의 장수들이 제갈량과 정면으로 맞부딪친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그들은 항상 패배했다. 즉 국지전에서의 대결은 제갈량은 승리로 이끌었지만,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대규모 전쟁은 하지를 못했다.


6배 가까이 차이나는 국력. 1.5배 이상 차이가 나는 병력. 그리고 초지일관 수비적으로 나오는 적을 상대로 결과적인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해서 제갈량의 전략과 전술을 폄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제갈량의 북벌이 촉의 경제력을 피폐시켜 멸망을 앞당기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본래 무리한 정벌은 국력을 소모시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최고의 길이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도, 2대에 걸친 고구려 원정 때문에 힘없이 멸망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촉은 수치상으로도 위의 1/6, 그것도 지형 등의 요소를 고려했을 때, 국력에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을 감안하고도, 6차례나 북벌을 먼저 감행했다는 것을 볼 때, 제갈량을 위시한 촉의 집권층의 내정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갈량은 언제나 여력을 남겨두었다. 즉 국력 피폐로 이어지지 않을 한계선의 병력으로 북벌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의 그러한 면 때문에, 제갈량을 최근에는 "최고의 행정가" 또는 "평화시 최고의 재상감"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런 수치상으로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매번 공세적인 북벌을 이끌었던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촉이 익주의 험준한 지세에 의지했으면 더욱 오랬동안 버텼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촉이라는 국가가 왜 건국되었는가? 유비는 유언처럼 익주에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려고 촉을 건국한 것이 아니었다. 촉을 개국한 유비와 제갈량을 비롯한 개국 공신들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촉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의 부흥. 그것이 바로 삼국 당시 촉의 정체성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헌제를 폐위하고 한을 멸한 조위는 양립할 수 없는 국가였다. 오나라처럼 양주와 형주에 안주하고 지낼 생각이 촉과 제갈량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제갈량 정도 되는 인물이 위와 촉의 격차를 몰랐을 리 없다. 오히려 북벌의 현실적인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라고 진작에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북벌을 감행했다. 유선을 보좌해 촉을 다스리며, 출사표를 올리고, 촉군을 이끌고 언제나 위를 향해 창끝을 들이댔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승리를 쟁취할 뻔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단지 제갈량에게 부족했던 것은 천운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결코 실패를 미리 염두해 두거나, 성공을 기대하지 않고 북벌을 진행했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6차례의 북벌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지만, 건강을 해칠 정도의 격무에 시달리면서까지 뜻을 이루려 했던 그의 모습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서 누누이 이야기 했던 위의 1/6의 국력의 격차등의 객관적인 조건의 압도적 불리에도 불구하고 ‘선공을 했는데도 승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갈량의 군략은 별 것 아니었다.’라는 단정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6.마무리를 지으며..



쓰다보니 글이 이전 글들보다 두서없이 꽤나 길어졌는데...


제갈량이 1800여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보여준 태도에 있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가 일국을 이끌 정도의 능력을 지녔음에도 후주 유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청렴하며, 공과 사를 구별하고, 상벌을 분명하게 해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며, 선제의 유지를 잇기 위해 위를 향해 지속적인 북벌을 시도하였던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 촉의 정사에서 어떠한 잡음도 없었다는 것도 조예  사후의 위나라나, 손권 말년의 오나라와 비교해 눈여겨 볼만하다.


그의 북벌이 승리를 쟁취하지도 못했고, 촉의 국력만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의 사후에 강유의 더한 북벌에도 불구하고 30여년이나 지탱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제갈량은 조조나 손권의 참모들과는 확실히 다른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유비라는 군주의 스타일과, 촉이라는 나라의 조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겠지만, 제갈량이 걸어온 행보는 일개 참모의 수준이 아닌 거의 군주와도 같은 모습이다.


일개 방랑군이었던 유비의 참모로 영입되어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는 촉을 건국하고, 비록 형주를 빼앗겨, 익주 1개주로 제한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의 건국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6차례나 북벌을 일으켰던 제갈량을, 결과적 성패를 떠나 필자는 삼국지 상의 최고의 참모라고 감히 말하면서...


부족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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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별칭  자 익덕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탁군


자 익덕(益德:翼德). 탁군(褶郡:河北) 출생. 유비(劉備)·관우(關羽)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평생 그 의(義)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후한(後漢) 말 동란기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益州)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巴西太守)가 되었다. 위(魏)나라의 명장 장합(張姸)이 장로(張魯)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車騎將軍)·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었다. 그후 유비가 패사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吳)나라를 치려는 동정(東征)에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荊州)에 있던 유비가 조조(曹操)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급박해졌을 때, 장판교(長坂橋) 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 하고 일갈하여 위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삼국지의 전편에 걸쳐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유,관,장 3형제 중 유비와 관우를 다루고 다른 이로 넘어가면, 이 막내가 되는 장비가 서운해 할 것 같아서... 는 아니고, 당연히 순서상 다루고 넘어가야 맞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연인 장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1. '나는 연인 장비이다.'




삼국지 본문에서는 물론, Koei의 유명한 역사시뮬레이션 게임인 '삼국지' 시리즈를 보면 이 '장비'가 일기토를 할 때 나오는 말이다. 사실 장비는 실제로도 결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연인 장비'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왜 연인일까? 연애나, 다정한(?) 연인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인데, 왜 연인이라고 할까?.. 어렸을 적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인하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애인 관계의 남녀만이 떠올랐으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장비의 조상이 옛 연나라의 황족 내지는 귀족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장비의 출신지인 탁군이 옛 연나라의 땅이었기 때문에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래도 유독 "연인"을 강조하는 것 보면, 후자라고 보기엔 뭔가 부족하고, 아무래도 혈통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사의 평을 보면 작은형 관우는 윗사람에게는 맞먹고, 아랫사람에게는 다정하였다.라는 평과는 반대로, 장비는 윗사람에게는 공손하였으나, 아랫사람에게는 거칠었다.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이러한 성향에는 장비의 옛 '혈통'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때문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러한 개인적인 성향과 지나친 주사로 말년에 수하에게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전편에 걸쳐 호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장비의 일대기에 옥의 티로 남는 것으로,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장비는 힘만 쎈 단순무식?




삼국지에서 장비.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황소만한 덩치에 산도적같이 거칠게 생긴 얼굴에, 호랑이 수염. 그리고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우렁찬 목소리....그리고 술 좋아하고, 주사 심하고, 단순하고, 미련하다...


아마 대부분은 이와 같거나, 비슷한 이미지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장비를 이러한 이미지로 고착시켜버린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나관중의 '연의'라고 할 수 있겠다. 연의는 유비의 독우 매질을 장비에게 슬쩍 넘겨버린 것으로 시작하여, 장비의 이미지를 단순하고 거친 무부로 그려버렸다. 장비를 이러한 케릭으로 만들어버린 나관중의 의도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연의'에서 일종의 '惡'의 개념으로 그려지는 조조에 대해, 촉한을 세우게 되는유비는 최대한 대립각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주인공(?) '유비'의 성격적 결함(?)까지도 막내인 '장비'가 모두 떠맡아 버린 것이다.


서주성을 빼앗기는 부분에서 바로 보편적인 '장비'의 모습이 가장 극대화되고 있다.


이렇듯 장비가 '단순, 무식, 과격, 주사'로 그려지면서, 연의에서는 유비의 과오를 은근슬쩍 덮어버리고, 스토리 진행을 원할하게 하며, 유비와 관우 사이를(관우가 유비보다 두어살 나이가 많다는 설도 있다.) 완만하게 해주는 철부지(?) 막내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러한 연의에서의 장비의 모습과는, 다른 시각에서의 장비를 해석하는 글들이 보인다.


주로 정사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실제로 장비는 시문에 능하고,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평이 보인다. 그리고 장비의 딸 2명 모두가, 유선에게 시집가는 것을 가지고, '장비가 추남이면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 장비의 모습은 상당히 멋지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또, 정군산으로 길을 잃고 헤메들어온 아리따운 처자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보니 하후연의 조카인 하후월희(?)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최근에 중국의 학자가 장비의 부인이 조조의 당질녀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조조,장비,유비는 모두 인척관계'라는 설을 주장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종의 장비와 관련된 야사(?)들을 종합해 보면, 장비의 인상과 성품이 연의에서 그려지는 마냥 '극단'적인 모습은 아니었던듯 싶다.


연의 상에서도 적벽전을 기점으로, 장비의 모습은 전반부와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서주성을 빼앗기는 장면을 비롯하여 망탕산에서 머물면서 관우에게 다짜고짜 달려드는 모습 등 전반부에서 나타난 장비는 '거칠고 성급하며 경솔한' 무장이지만, 중반부 이후에서는 지략적인 면모도 많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엄안을 생포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과, 위의 명장으로 불리우는 장합을 지모로 격파하는 등의 모습 등에서, 우리는 최근의 재해석을 통한 새로운 장비의 이미지와 비슷한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장비가 기존의 이미지와 다르게  멋진 모습을 하고, 시와 문예를 즐기며 마루에서 서화를 치면서 '껄껄껄' 웃는 모습을 생각하니.. 실로 그러하였다면 장비는 '미주랑 주유'의 멋을 뛰어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나관중에 의해 그려지는 '연의'에서의 장비가 아닌, 실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모습을 가진 장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만부부당의 호걸. 연인 장비.




잠시 기존의 장비의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장비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실로 장비를 논한다면, 외모가 아닌 그의 무용(武勇)을 반드시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삼국지 전편을 걸쳐 수많은 일기토와 영웅 호걸들의 멋진 모습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적벽전의 전초전인 조조의 유비 추격전에서 손꼽을만한 멋진 모습들이 두 장면이나 나온다.


첫번째가 바로 '호통소리' 하나로 고작 20여기를 데리고 있는 장비가 장판파에서 조조의 추격병을 막아세우고, 오히려 후퇴하게끔 만든 것이고,  '온 몸이 담덩어리로다'라는 평을 받은 조운의 '아두 구출작전'이 바로 두번째다.


조조군이 장판파에서 장비의 모습을 보고 진격을 멈춘 것은, 장비의 용맹이 조조군의 장수들에게 각인된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삼국지 초장에 보여준 '인걸중의 인걸'이라는 '여포'와의 호로관에서의 일전.

나름대로 내노라하는 제후들의 휘하 용장들이 여포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자, 장비가 "연인 장비의 칼을 받으라"라고 포효하며 그 당대 제일의 무장으로 손꼽히던 여포와 무려 50여합을 겨루고도 승부를 내지 못했던 적이 있었으며, 또한 조조군의 수하 장수들이 고전했던 그 안량의 수급을 쉽게 베어버렸던 관우가 되돌아와서 "저의 의제인 '장비'는 천만대군에서 머리 따내기를 이보다 쉽게 한다."며 나름대로 공손해한다며 했던 말이 당시 조조군의 장수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숫적인 우위는 물론 조조군의 수하에도 맹장, 용장이 꽤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장비 홀로 막고 서 있는 장판파를 돌파하지 못하고 역습까지 우려해 퇴각했다는 것은 당시 장비의 무용이 얼마나 위명이 높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또 여기서 장비는 수십기의 기마로 흙먼지를 내어, 뒤를 받쳐주는 군사가 있는 듯한 위장술을 펼치는 임기응변까지 보여주니 역시 장비는 '단순무식'한 장수는 아니었나 보다.


또한 이후 서량의 '신위 대장군'이자 '금마초'라는 애칭을 지닌 젊은 혈기의 마초와 100여합을 겨루어 비록 승부를 내지 못하였으나, 마초 또한 무용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맹장이었고, 장비 역시 "여포 이래 이러한 무장은 처음이다."라고 평했다는 풍문도 들리니, 장비의 무용을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당시 장비는 50줄이었고, 마초는 한창때였으니, 더더욱 장비의 실력은 허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가 있으니, 익주에서 고립된 주군이자 큰형님인 유비를 구하기 위해 형주에서 출발한 장비는 익주의 수비군을 연전연파하고, 가장 완강히 저항하던 노장 엄안을 지혜로써 생포하고, 호걸답게 엄안의 일갈에 매료되어 그를 풀어주고 빈객의 예우를 하자 역시 이러한 모습에 감동한 엄안도 장비의 군에 합류해 익주를 평정하게 되니, 여기서도 장비의 '쾌남아'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한중전 당시 위의 명장이라고 불리던 '장합'을 상대로 50여일의 교전끝에 장합을 패퇴시켜 다시한번 그 위명을 위나라에 진동시키게 된다.


장비는 일군을 이끌고 전투에 패한적은 있을지언정(삼국지 초반부), 장수간의 맞대결에서 패하거나 등을 돌린 적은 없었으며, 위의 모사 정욱도 '관우와 장비는 만부부당의 호걸들'이라고 평했고, 장판파에서 단기로 조조군의 추격을 막아내고, 자부심의 왕 관우마저도 '의제인 장비의 무예는 나보다 낫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의 무용은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는 삼국지 상의 '武로는 으뜸'이라는 여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초고수였음은 분명하다.




4.자초한.. 그러나 아쉬운 장비의 죽음.




장비는 삼형제 중 가장 비극적으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큰형인 유비도 늘 경계하라고 충고했던 '만취'로 인한 '주사'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는데..


장비는 의형 관우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 했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면 큰형인 유비보다 훨씬 그 감정이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도원결의를 통한 삼형제의 만남에 대한 설은 판본마다 다르지만, 세명이 의용군을 모집할 때 만난 설도 있고, 관우와 장비가 먼저 알고, 유비가 말장사를 위해 이 둘을 고용했다는 설, 그리고 유비가 차를 사러가다가 장비를 만났다는 설..


하여튼 이들의 초반 만남에 대한 설은 여러가지지만, 아마도 두 번째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장비는 청소년기부터 자신을 이끌어준 그러면서 '충과 의'를 설명해줬을 '관우'라는 작은 형을, 형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유비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런만큼 관우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애통해 했을 것임이 틀림없으며, 그러한 심리적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장비의 성격은 평소보다도 상당히 거세졌을 것은 누구라도 어림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관우의 복수전'을 대비해 온통 백색으로 말과 장병들을 무장시키라는 장비의 억지스런 명은 관우의 죽음에 대한 그의 심리 상황을 대변해 줌과 동시에 그러한 그에게 현실적인 답변을 한 범강과 장달.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들에 대한 매질과 그로 인한 장비의 암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인과의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비는 그러한 의제 장비의 성격이 초래할 화를 이미 간파하고 주의를 당부했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하지만 장비가 그러한 분노를 조금만 안으로 갈무리 하여 전장에서 풀었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대목을 볼 때마다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리라.


이릉전 직전에 이렇게 어이없이 목숨을 잃어버려 관우의 복수는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고, 결국 홀로 남은 유비만이 두 아우를 위해 복수전을 강행하지만, 육손의 계략에 의해 대패하여 패퇴하고 만다.


하지만 이 이릉전에 신출내기인 '관흥과 장포'가 아닌 이제는 노회하여 산전수전다 겪은 노련미가 넘치는 맹장 '장비'가 선진을 이끌었다면 과연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하였을까. 물론 제갈량과 같은 뛰어난 군사가 참전한 것과는 그 전술적인 측면에서의 영향력은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역시 이릉전 이전까지 무명에 불과했던 육손의 계략정도는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차후에 이릉전에 대해 논할 때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이릉전 당시의 유비군에게 '장비'의 존재 여부의 차이는 개인적인 기량을 떠나 유비군 전체의 전력에 절반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장비의 존재와 그가 이끄는 일군 그 자체만으로 '오'군에게 엄청난 압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장비가 '기병'을 이끌고 형주 벌판으로 돌파해 나아갔더라면? 아마도 이릉전을 기점으로 사뭇 달라진 삼국지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장비의 암살에 대해 '오군의 사주'가 있지 않았으냐는 필자의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기도 하는데...


즉, 억지스런 명령과 '사형'에 처한다는 장비의 처사에, 불만을 가진 범강과 장달에게, 이미 '촉-오 전쟁'을 선포한 촉군의 선진이자, 주력군이자, 오의 최대의 걸림돌이 될 무장인 '장비'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는 오나라가 접근해 사주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둘이 장비의 목을 가지고 뒤도 안돌아보고 '위'가 아닌 '오'로 도주했다는 것은 이같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외에도 장비가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결말을 맞게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역시 '장비' 자신의 태도. 즉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묘하게도 관우와 장비는 위, 아랫 사람을 대하는 것이 반대였다. 이 둘이 서로의 성향을 서로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쳐 바뀌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5. 글을 마치며...




간만에 쓰는 글인데, 개인적인 일때문에 PC방에서 쓰느라 다소 두서없이.. 그리고 이 전의 글보다는 조금 산만하게 적은 것 같다.


여하튼..


장비 역시 유비, 관우라는 인물에 뒤지지 않는 만부부당의 맹장이자, 호탕한 성격을 지닌 쾌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연의 상의 무식한 장수'가 아닌 나름대로의 멋을 지닌 숨겨진 모습을 지닌 무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의협적인 모습은 도원결의를 하고 형주를 얻기 전까지 방랑군을 이끌던 당시의 유비, 관우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武'와 '의리'만으로 난세를 풍미한 영웅 호걸답지 않게, 관우와는 다른 그러한 선천적인 성격적인 결함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삼국지 상에서 보여지는 다혈질이면서도 호탕하고, 솔직한 장비의 모습은 어느덧 우리를 친근하게 매료시켜버리고 만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가장 친근하면서도 인기가 많은 캐릭이 바로 이 '장비'라고 한다.


그 때문일까. 장비 역시 삼국지를 풍미한, 왠지 일반적이면서 주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타 무장들과는 달리, 틀을 상당히 벗어난 개성만점의 매력을 지닌 무장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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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재위 221∼223).


별칭 : 자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국적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

활동분야 : 정치


자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公孫瓚)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하지 않고 호협(豪俠)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결의형제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袁紹)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조조(曹操)와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196년 원술(袁術)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鎭東將軍宜城亭侯)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下??)로 탈주하였다. 원소 ·조조의 관도대전(官渡對戰)에서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객장(客將)이 되었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 양(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대파,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 침입을 기도하자,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촉(蜀)에 들어가 유장을 항복시키고 촉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패사하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曹丕)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讓位)를 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사를 제갈 양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유비..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대부분 인자한 덕장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연의상에서 나관중이 각색한 모습이다. 유비는 연의상에서처럼 마냥 후덕하며, 나아가 무능하기까지 한 모습만은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1.'인덕뿐이다?' 유비는 후한 말의 난세를 헤쳐, 3국의 하나인 '촉'을 건국한 인물.


유비는 흔히 관우와 장비의 의형이긴 하지만, 왠지 그 둘에 비해 패기가 떨어지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모습은 특히 고우영의 삼국지에서 매우 심하게 부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비는 탁현 지방에 머무를 때부터, 의협집단의 수장이었다. 단지 '仁'과 ‘德’만으로는 그런 집단의 수장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 상당히 거친 성정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감안해본다면, 그에게도 한 성질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의에서는 독우를 매질하는 자가 의제 장비로 그려지지만, 정사에서는 유비가 직접 매질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역시 유비의 성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러한 유비의 거친 이미지를 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유비를 냉혹한 조조와 대비시키기 위해,  상당 부분을 의제인 장비의 몫으로 떠넘겼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유비를 마냥 패잔병만 이끌고 다니는 무력한 장수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만큼 시류를 잘 보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비는 스스로 확실히 자립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전투는 물론, 한 주도 미련없이 포기할 줄 아는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서주목을 인수 받은 후에도 잘 엿볼 수 있는데, 북으로는 원소, 서로는 조조, 남으로는 원술, 그리고 방랑군인 여포군의 존재를 보았을 때, 서주를 천하 평정의 발판으로 볼 수 없었고, 유비는 과감히 여포에게 내주었다.


물론 장비가 취중에 빼앗기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더 신중한 관우를 남길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장비를 남긴 것은 '서주 포기'라는 삼형제간의 모종의 묵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비 대신 서주를 차지한 여포는 결국, 조조군에게 패망하고 만다. 이 후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의 유비의 행적은,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비상할 기회를 노린 흔적이 나타난다. 원소가 패망하기 전에 그를 떠나 유표에게 의탁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즉, 유비는 단순히 ‘仁과 德’만으로 인재를 모은 것이 아니고, 3국의 하나인 촉을 세우고, 한왕실 부흥을 외칠 정도로 큰 포부와, 조조가 지닌 전략, 전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일군을 이끄는 군주로서의 나름대로 임기응변의 대처방안은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유비를 따르는 인재들도 유비에게 '인덕'만이 아닌, 그의 그릇도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을 것이다.



2.유비의 칭제는 '개인적인 야심'때문이었다? 칭제의 이유에 대해..     

(이 부분은 예전에 토론란에 올라왔던 '유비의 칭제'에 관하여 '나그네'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한중전을 승리로 이끈 후, 위의 문제인 조비가 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게 황제위를 선위 받은 직후, 유비 역시 칭제를 한 점을 가지고, 유비의 칭제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시선도 적잖이 있다.


물론 이런 의혹에 대해 100%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비가 '개인적인 야심'때문에 굳이 칭제를 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혹자들은 "'헌제'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헌제의 장례식을 치루고, '칭제'를 한 것은 야심때문이다"라는 이야기도 하는데, 일단 유비가 '칭제'로 얻을 개인적인 이득은 없다는 것이다. 향후 장안과 낙양을 거쳐 중원을 수복한다는 가정을 한다면,  유비 혈통의 황가가 들어서는 것 정도..물론 그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했을 때 그런 것을 먼저 염두해두고 칭제를 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이외에는 당시 상황에서 '한중왕'으로 있으나, '촉의 황제'가 되는 것이나, 개인 신변상의 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에 헌제의 장례식을 치룬 것은, 정말 헌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치뤘다기 보다는 '조비에 의해 폐위된 헌제에 의해 한의 대통이 끊겼다'라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장례식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혹자의 이야기처럼, 살아있는 헌제를 모셔와 유비가 받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조위가 폐위된 헌제를 방치할리도 없고,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촉의 입장에서는 폐위된 헌제의 생사여부도 확실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자치통감과 같은 사료에는 234년에 운명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촉에 어쩌면 폐위된 뒤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을 가능성도 상정해 본다면, '헌제의 장례식'은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헌제'가 살아있기 때문에, 유비의 '칭제'는 매우 이르다.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설령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기다릴 수 없는게, 이유야 어찌됐든 위의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의 대통은 위가 잇는다는, 대외적인 선포나 다름없는 선양식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3번 거절하는 등의 정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되면, 한의 뒤를 잇는 위에게 대항하는 촉이나 오는 곧바로 역신, 즉 황제에게 거스르는 역적무리가 되버리는 논리가 나온다. 때문에, 촉으로서는 위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폐위되버린 헌제의 뒤를 이어 '유비의 촉'이 한의 뒤를 잇는다는 뜻을 지닌 '촉한'이라는 국호로 위와는 다른, 一國을 세울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산양공으로 강등된 유협이 단지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칭제를 하지 않기에는 정황상 유비에게 유리한 것은 없다. 오히려 명분면에서도 정식 선양을 받은 위에게 밀리게 되는 것이다. 존왕양이를 하기에는 정식 선양식을 통해 산양공으로 강등되어버린 유협의 신분과, 위의 정식 선양에 이은 조비의 황제 선포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분을 지니기 위해서 자연스러운 한 왕조의 복귀 분위기가 형성될 때까지 유비는 칭제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는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에 당시엔 그러한 자연스러운 명분을 얻어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헌제 선위 당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식자층이나 백성들의 분위기를 고려해 본다면, 몰락해버린 한 왕조가 다시 명분을 얻을 가능성 보다는, 그냥 황제위를 선위받은 조비의 위나라를 대세로 받아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한의 유지를 이으려는 촉에게는 위기이자,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버린다면, '조위에 대한 촉이 역적국가'라는 그런 소극적인 개념을 떠나, 유비가 평생의 지론으로 삼던 "한 왕조의 정상적인 복귀"는 무용지물이 되버릴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고, 그럼 기껏 험한 난세를 어렵게 헤쳐나와 형주와 익주를 발판으로 촉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도, 의미없는 일이 되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유비가 조비에 이어 곧바로 '칭제'하는 이유는..


1.조비의 부당한 선양에 의한 위나라 개국과, 한 헌제의 폐위로 인한 자연스러운 명분을 얻기에는 당시 시대 상황이 그렇게 한가하지 못했을 뿐더러 가능성 자체도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2.유비의 칭제 목적은 분명 "한 왕조의 적통은 나"라는 것과, "선양에 의한 조비의 칭제는 무효"라는 2가지의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 한 왕조를 잇는다는 점은 "촉한"이라는 국호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개인적인 야심이다', '당연한 수순이다.'라는 상반된 시선을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다만 필자는 유비의 '칭제'가  '야심'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차선책으로서의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3.관우의 복수. 이릉대전과 유비..



유비, 관우, 장비.. 이 3형제의 우의는 삼국지 첫 부분에서 '도원결의'를 통해, 삼국지 전편에 걸쳐 매우 진하게 그려진다. 바로 이릉대전의 비극은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비의 이릉전에 대한 결심은, 25년 전에 있었던 '5관6참장'을 거치며 우직하게 유비에게 돌아온 관우의 ‘의리’와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유명한 '도원결의'와 '5관6참장'. 2가지를 보면 유비가 이릉전을 한 이유, 아니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유비는 아마도 평생을 함께 해온 의제 관우와 장비의 죽음에, 이성적으로 접근하기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유비의 군주로서의 자질에 대한 비판이 거론되기도 한다.)

 

40여년 가까이 자신을 따르며 천신만고 끝에  '촉'을 건국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실 까놓고 이야기해서 그 둘이 개국공신으로서 '부귀영화'라는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평생을 유비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 하다가 죽어간 '의제'들을 생각하면, 유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복수를 해주지 않고서는 편안히 나날을 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변변한 참모도 없이 홀로 형주에서 산화해버린 '관우', 그리고 그러한 작은 형의 복수를 함께 하자던 '장비'의 암살. 


'유비'의 입장에서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왕실 부흥'이라는 대의와, 평생의 적으로 상정한 '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4번째 형제와도 마찬가지인 '조운'과  후사를 부탁할 정도로 신임하던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릉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복수를 위해 건국한지 2년도 채 안되는 '촉'의 국정을 통괄하고 있는 '제갈량'까지 데려가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유비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죽어간, 관우와 장비를 위해 이릉전을 치루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전쟁에 '제갈량'과 '조운'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릉전에는  관우, 장비의 아들들인 관흥과 장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결국 유비도 참모의 부재 속에, 오의 걸출한 무장인 육손의 계략에 의해 대패하고 백제성으로 패주하고 말지만, 승패의 여부를 떠나 그 시점에서 유비의 속은 이전보다 후련하지 않았을까.


이들 3형제는 219년 10월 관우의 죽음을 기점으로, 1년 반 안팎의 시간을 간격으로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장비 221년 7월, 유비 223년 4월)


'忠義'란 아무 때나 버릴 수도 있는 난세에 40여 년간 걸쳐 이어져온 그들의 '義'는 결국 이렇게 이릉대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삶이 우리들에게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글을 마치며..



사실 유비가 만능형 군주인 조조나, 수성형 손권에 비해 부족한 군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조조는 3명의 군주 중 가장 걸출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비도 조조나 손권처럼 일찍 근거지를 확보했다는 가정을 해본다면, 그 둘에 비해 그다지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둘보다 부족해 보이는 것이겠지만, 초반에 등장한 수많은 영웅들, 그리고 난세를 평정할 수도 있었던 원소나 손견과 손책 부자, 그리고 지역 기반을 가지고 난세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원술, 유표, 공손찬 등이 패망하는 과정에서도, 자립 기반도 없었던 유비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한왕조 부흥'을 꿈꾸며, 동지들을 규합하고, 세를 이루어, 제갈량이라는 삼국지 상의 최고의 명참모를 영입하게 되면서, 결국 난세의 한 축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러한 면모를 보았을 때, 유비는 세간의 이미지처럼 결코 나약하고, 무능한 군주는 더더욱 아니며, 그 역시 비상할 때만을 기다리는, '잠룡'의 모습을 지닌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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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武將).

별칭 : 자 운장(雲長)
국적 : 중국 삼국시대 촉(蜀)
활동분야 : 군사
출생지 : 하동군 해현(河東郡解縣)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윈청현[運城縣]인 하동군 해현(河東郡解縣) 출생하였다. 자 운장(雲長). 후한말(後漢末)의 동란기에 탁현(褶縣:河北省 소재)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혀 조조의 귀순 종용과 함께 예우를 극진히 받았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양(顔良)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208년 적벽전(赤壁戰) 때에는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益州:四川省) 공략 때는 형주(荊州:湖北省)에 머물러, 촉나라의 동방방위를 맡는 등 그 무력과 위풍(威風)은 조조와 손권(孫權)마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격(挾擊)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나라 때 이후로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의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최근에 '관우'에 대한 일련의 재평가가 나오면서 '武와 義'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졌던 '관우'가 '편협하고 거만하며, 이기적인 자부심'을 가진 무장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런 평가는 좀 가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의견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점들로 관우를 매장(?)해버리기엔, 관우가 보여준, 그리고 관우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1.무신(武神)으로 추앙받게 된 관우.


사실 관우의 무력은 삼국지 상에서 최고(最高)는 아닐지언정 손꼽힐만한 무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물론 정사와는 다르지만, 여기서는 정사보다는 연의로 논한다.) 사수관에서 동탁의 장수 화웅의 목을차가 식기 전에 베어버렸다거나, 원소가 내세우는 양대 상장인 안량과 문추의 목을 날려버린 것, 그리고 유비에게 되돌아가면서 오관육참장을 해버린 것, 형주 남부에서 최고의 무력을 뽐내는 '노익장 황충'과의 일진일퇴의 멋진 공방, 그리고 환갑을 바라보는데도 패기로 덤벼드는 방덕과도 막상막하로 겨루는 그의 무력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실 관우의 활약은 정사에서는 그다지 많이 엿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교적인 색깔이 작가인 나관중에 의해 잔뜩 가미된 <三國志演義>를 거치면서 '忠義;의 화신이 되어갔고,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관우의 모습을 빌어 문무대신들의 본보기가 되길 바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대부터 관우에게 '왕'의 칭호를 내려주고 받들기 시작하였으며, 명의 영락제는 정변후 정통성을 갖기 위해 '제'라는 시호를 내려주었고, 청대의 황제들도 '관우'를 매우 숭배해 '관성대제'로 받들었다.

이렇게 관우가 사후 '왕'을 거쳐 '관제'가 되기까지, 정치적인 목적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관우가 생전 보여주었던 강렬한 모습에서 연유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忠'과 '義'를 빼고 관우를 논하지 말라.



항간에는 관우가 '좌씨춘추'를 암송할 정도로 '춘추'라는 책의 매니아였다는 것을 가지고, 문무겸장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그건 솔직히 지나친 비약이다. 춘추가 무슨 병법책도 아니거늘, 단지 그것을 평생 지니고, 암송하고 다녔다고 해서, 문무겸장이라고 지레 판단하고, '왜 그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느냐'고 비판하는데, 춘추는 '병법서'가 아닌 '공자가 집필한 권선징악의 역사서'이다.

어쨌든 이러한 춘추의 내용은 훗날 관우가 보여주게 되는, 관우만의 '忠'과 '義'에 대한 근간을 마련해주게 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관우가 충의의 화신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군주이자 큰형님인 '유비'에게 보여주고 있는 '절대적인 충성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비성에서 조조에게 항복한 뒤 조조의 온갖 환대에도 불구하고, 안량을 목을 벤 뒤, 미련스러울 정도로 우직한 모습으로 주군 유비를 향해 떠나는 그의 한결같은 모습에 우리들은 그에게서 깊은 신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관우가 유비에게 보여주는 '절대적인 충성심'은, 그 자체가 곧 '의'로 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3.제갈량과 관우와의 '불편한(?)' 관계. 2인자 타툼설..



유독 삼국지연의 상에서 신묘한 계략과 혜안을 보여주는 제갈량이 힘을 쓰지 못하는 곳이 바로 형주와 관우의 몰락에 대한 부분이다.

이때문에, 제갈량이 '일부러' 불편한 관우를 고립시킨뒤 위-오의 연합군에 의해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2인자 타툼설이 제기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라고 개인적으로는 보고 있다.

제갈량은 신이 아니라, 그 역시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주군을 구하고 익주를 평정하기 위해, 형주의 주력군을 이끌고 간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형주도 중요하지만, 주군인 유비의 목숨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장기간 동안 익주 공략에 실패한 유비군으로서는 단기간에 익주를 평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형주의 주력군을 데려간 것이고, 이때는 손오와 동맹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서 수많은 장수 중에서도 관우를 남긴 이유는, 관우는 장비, 조운과는 달리 군주 유비의 첫번째 의제이다. 역으로보면, 그만큼 형주 진수에 대한 유비군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유비군 체제를 볼 때도 이는 당연한 것이다. 관우보다 아래뻘인 장비나, 조운에게 형주 수비장을 맡기는 것은 서열체계로 봐도 어긋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제갈량의 고의적인 술책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갈량은 관우에게 형주 진수를 맡기면서 '북거조조, 동화손권'의 계책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동오는 유비군의 익주평정 뒤 자꾸 형주를 반환하라고 요청하여, 형주를 진수하는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관우의 형주와 손오는 표면적으로는 동맹상태였으나, 형주의 촉,오 접경지역에서 끊임없이 잦은 마찰을 일으키며, 사실상 준전시 상태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관우는 형주를 변변한 참모 한명 없이 홀로 진수한다. 익주 평정 후 내정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제갈량이 오의 동향을 파악하여 바로바로 대처하는 것은, 아무리 그 제갈량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나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제갈량은 분명 삼국지상의 최고의 명참모이지만, 그가 현장에 없었던 형주에서나, 이릉전투까지 승리를 이끌 정도의 신적인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오가 형주를 손에 넣기 위해, 위와 손을 잡기전까지 북진한 형주의 관우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때문에 관우의 곁에 정황 판단을 바로바로 해줄 수 있는 군사적인 참모(방통이나 서서)가 있었다면, 그리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주 관우군의 몰락은 제갈량이 어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의적이라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융중계책'을 말하던 제갈량의 천하 통일 계책에는 '익주와 형주'가 필수다. 설령 사이가 불편하였더라도 그러한 '대의'까지 포기하면서 걸출한 야전 사령관인 관우와 형주를 동시에 '팽'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배신한 동오에 의해 형주를 빼앗기고, 관우는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그것은 제갈량이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고, 관우가 북진을 너무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4.관우의 성격적인 결함. 끝모를 자부심..



높은 존경을 받으며 후에는 무신으로 추앙 받기까지 한 관우지만, 그 역시 인간적인 면모, 특히 인간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일종의 약점 같은 것도 있다.

정사에는 관우에 대한 이런 평가가 나온다. '관우는 성질이 너무 거세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 여겼다.' 즉,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였다는 것은 그가 남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군주인 유비가 장비, 조운, 마초, 황충 등과 함께 관우를 오호대장의 하나로 임명하자, 관우는 황충이 자신이 같은 반열에 오른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분이 나온다.

하지만, 관우가 황충과 겨뤘을 때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어떠한 것이 사실적인 모습인지는 다소 애매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2인자 설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공명을 처음 얻어 무척 총애하자 관우는 제갈공명을 시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형주에서의 북진 중 오나라의 육손이 자신을 추켜세우는 내용의 편지와 예물을 바치자 관우는 무척 흡족해하며 방심하고 말았고, 이것은 결국 관우가 패하여 죽음에 이르는 빌미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오에게 배신당해 강릉과 형주를 빼았겼음에도, 익주로 퇴각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강릉을 탈환하려 했던 그 한 장면만으로도, 관우는 이미 성격적 결함을 뛰어넘는 '비장미가 가득한 영웅'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연의상에서 보여지는 관우는, 일을 시작할때는 끝모를 자부심을 보여주며 시작하지만, 막상 일을 마무리지으면 한없이 겸손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 : 화웅, 안량의 목을 베었을 당시.. etc)

또한 이러한 자부심이 그의 잠재력을 100%이상 이끌어 내었다고 볼 수 있고, 부하들에게도 대체로 인정도 많았다.

관우 역시 인간인만큼 장,단점을 지녔음은 당연한 것인데, 최근에는 너무 약점만을 부각시키는 듯 해 아쉬움이 남는다.



4. 마무리를 지으며..



사실 온갖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삼국지 상에서도 관우의 한결같은 태도, 그리고 적을 향해 '쥐새끼같은 무리들'이라고 일갈하는 그의 모습은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리라.

그리고 끝까지 적에게 굴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까지, 관우는 처음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비장미 넘치는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 또한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온다.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다소간의 성격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18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무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관우 운장'이야말로 수많은 삼국지의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여전히 삼국지 최고의 '충과 의' 그리고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무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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