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前 대통령을 좋아했다. 노사모의 구성원만큼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난 그를 좋아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어제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주체하기가 힘들었음을 보면 말이다. 운 좋게 지난 참여정부에 그가 퇴임하는 그 전날까지 반 년 가까이 대통령 비서실 기록관리비서관실에서 잠시나마 근무한 것은, 그를 직접 볼 수 있던 것은 아니지만 아주 미약하나마 그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참으로 뿌듯하게 여겨졌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느즈막한 오전에 티비 속보로 급작스럽게 전해들은 그의 투신으로 인한 서거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현실에 대해 끝내 타협하지 않는 '노무현다운 선택'이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국민경선을 치루기 전까지는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민주당 국민경선을 거치는 중 광주에서 1위를 차지하며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이런저런 책과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그의 정치적 소신과 신념에 대해 신선함과 더불어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되었던 듯 싶다. 물론 그 과정에서의 도전으로 점철된 드라마틱한 정치 역정도 매력을 느끼는 주요한 요소가 되었을 듯도 싶다.

 

의경으로 복무하던 시절에 처음으로 행사한 투표권을 미련없이 그에게 던졌으며, 투표가 마감되고 개표가 시작되면서 자정 무렵 방범순찰을 위해 탄 순찰차에서 접전 끝에 당선이 확실시 된다는 방송을 듣고, 옆에 있는 젊은 순경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그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신념이라면 해방 이후 지금까지 모순이 누적되어 온 한국 정치와 사회 전반의 환부를 도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학 후 1년 정도 지난 즈음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친구가 먼저 수화기 너머로 흥분한 채 전해 주었던 탄핵 소식을 듣고, 분노했었다. 그리고 한 달여 뒤에 있는 총선과 지자체 선거에서 모두 열린우리당에 투표를 했다. 할 일이 많은 그가 여기서 기득권의 반발에 의해 무너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정치판에서 밀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 막강하다는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해서 일거에 다 쓸어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들 정도였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라고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노무현은 노무현이었다.

 

그렇게 정적은 물론이고 지지세력까지도 등을 돌리는 상황 속에서 비판은 물론 가당찮은 비난까지 받아가면서도, 자신의 소신대로 대통령 직위를 수행했다. 물론 그 소신을 항상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노무현에게 정치인으로써 부족한 것은 유연한 정치술수가 아니냐는 지적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역시 기존의 숱한 정치인들처럼 정치에 노회함을 발휘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다면 오늘날 이 비극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까지의 우리가 알고 있는 노무현이 있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노무현답기 때문에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노무현다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지 고작 1년 반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투신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 역시 그에게 언제나 지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재임 중에 있었던 한.FTA는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비판 일색으로 인해,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힘들어서 당시 봇물 터지듯이 출간되는 책들을 갖다 놓고 정부의 설명과 비교하기도 했다. 정말 진보 진영의 주장처럼 노무현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서 우측으로 가버린 것일까.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행하는 집무는 단지 어느 한 정파의 주장이나 견해만을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국가의 이익과 국민 다수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선택하고 추진해야 함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하나의 당파성에 매몰되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적과 아군으로 단순하게 구분짓던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던 시대는 90년대에 사실상 끝났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다극화, 다원화 된 사회에서 개별 사안별로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 관계를 따져가며 처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한 쪽에 100%의 만족을 줄 수가 없다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탈권위주의적인 행보는 재임 기간 동안 한국 사회가 지닌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 과정은 도외시한채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라는 말 한마디로 쉽게대통령 1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조롱하는 상황들을 초래했다. 국민이 역대 가장 훌륭한 대통령 중 한명으로 꼽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면, 그가 재임 중에 겪었던 그러한 상황을 용납할 수 있었을까.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약해진 대통령직의 권력과 권한이라지만, 결심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그 정도는 틀어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건 굳이 과거까지 가지 않고도 당장 지금의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는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주권자인 국민이 통치자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정치적 신념의 크기는 이미 일반적으로 권력에 경도되어 있는 흔해빠진 정치인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은 분명하다.

 

그의 임기 5년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극소수로 전락해버린 지지자들을 제외하면 진보니 보수니 가릴 것 없이 그는 공격당하기만 했다. 과거의 대통령직이 지니고 있던 초법적 권력을 내려놓고맞서 싸우자니 그 힘은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과거의 어두운 현대사를 상징하던 힘을 끌어다 쓰지 않고 임기를 마쳤다. 이제는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100% 완벽하게 수행하고 국민 개개인 모두에게 동일한 만족감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이 명백한 현실임에도 다수의 국민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지 구별할 줄을 몰랐다. 노무현이 우리에게 대통령으로써 무엇을 해주었는지는 비로소 정부가 교체되고 나서야 알았을만큼 각자의 욕망에 매몰되어 갔다.

 

그리고 그렇게 국민 개개인이 갈구하던 욕망의 집합체로 잉태되어 새롭게 등장한 권력은, 그가 도입했던 법과 제도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기 시작했으며, 종국에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그마저도 가만히 놔두지 않고 절벽 끝으로 내몰았다. 우리는 또 과거와 같이 너무나도 편하게 현 대통령과 정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지만, 과연 지금 정부가 지닌 그 권력은 누가 위임하였는가? 지난 대선에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 보며 차분히 생각해 보길 바란다.

 

퇴임 직후부터 시작되어 13개월간의 당사자와 가족, 친인척과 측근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수사기관 등이 동원되어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뇌물을 받았다는 어떠한 명백한 법적 사실이나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지저분한 추정과 3류 소설같은 의혹들을 언론에 흘렸으며, 참여정부 말기에 추진했던 취재 선진화 지원방안에 대해 기자실 통폐합이라며 진보.보수 언론 가릴 것 없이 그가 마치 독재자인마냥 성토하던 언론권력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날뛰며 하루가 멀다하고 기사로 포장된 배설물을 쏟아내어 그에게 인격적 살인을 가하고, 뇌물수수를 한 부패한 정치인으로써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리고 다수의 국민들은 그러한 언론 다수의 추측성 보도만으로 이를 기정사실화 해버렸다.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은 완벽하게 고립되었고 벼랑 끝으로 내밀리고 있었다. 퇴임한 대통령으로서 정계의 큰 어른은 고사하고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노무현의 삶마저도 유지될 수가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결국 그 마지막을 비극으로. 한편으로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오랜 기간 보아왔던 노무현다움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사는 법을 진정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어찌보면 두려울 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고 있는 정의감과 도덕성에 대한 강렬하리만큼의 신념은 그를 대통령직의 도전까지 성공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반대로 조그마한 흠집에도 쉽게 깨질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닌 것으로, 한국 정치의 평균적인 수준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만큼, 정치적 난도질에 의해 쉽게 손상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지난 대선 국민의 선택이었지만, 국민은 그를 버렸다. 냉혹하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서 추진한 개혁 또는 혁신과 국민 개개인 다수가 추구하는 극히 현실적인 욕망의 방향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비극적인 투신은 현 정부와 언론 등 기득권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며, 그 정부를 탄생시키고 그들의 가당찮은 주장과 졸렬한 행태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국민 다수에 의한 것이었음을. 그의 초상화를 보며 헌화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지금은 깨닫고 있을까?

있을 때는 소중한지를 모른다. 사라질 때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의 어리석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국민의 정치 수준은 그러한 그에게 5년 시한부인 대통령의 권력을 주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이를 반납하고 자연인으로 되돌아간 그를 끝까지 믿고 지켜주지는 못하는 수준에 그쳤다.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고 살아온 발자취가 어찌 되었든 상관없이 그저 당장의 자신의 금전적 이해관계와 맞는 정치인을 선호하는데 급급했다. 부패했든, 범법자든 그런 것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땅값, 집값으로 대변되는 욕망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려줄 수 있을 정도의 대통령.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그의 서거 소식은 더욱 가슴 아프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헌정 사상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품위가 공존하는 멋진 전직 대통령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끝끝내 지켜줄 수가 없었던 이 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국민의 정치 의식에 대한 수준낮음은 역겨울 정도다. 뒤늦은 국민들의 추모행렬도 이를 변명할 수는 없다.

 

그의 서거가 정말 슬프다면 그래서 이 후진적인 정치 수준과 환경이 싫다면,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교훈은 단 하나다.

 

정치가 아무리 혐오스러워도 관심을 갖고, 자신에게 부여된 정치 권력인 선거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것이다. 노무현은 지난 촛불 집회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에 대한 퇴진 요구는 지나치다고 언급했던 적이 있다. 쿠데타나 혁명을 제외한다면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현행 법과 제도 내에서는 11표제의 선거권을 행사하는 것이, 소시민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정치 개입이자 변화에 대한 시발점일 수 밖에 없다.

 

국민 개개인이 위임한 권력의 집합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는다면, 그래서 다시는 오늘날과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면, 자신의 조그마한 사익보다도 국민과 국가 전체에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정치적 신념과 그러한 정치 역경을 걸어온 정치인에게 자신의 조그마한 권력을 위임할 수 있다면.

 

평생을 독재정권의 퇴진과 민주주의의 부활, 지역감정에 기반한 낡은 정치구조의 타파, 수도권 대신 지역의 균형발전, 대통령 중심이 아닌 정부와 여당의 존중, 법과 제도에 기반한 행정의 합리적 선진화 등을 추구했던 그가 더 이상 여한이 남지 않고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삼가 노무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문'

한때. 10여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분명 한때나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에 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 알고 있던 팩트와 그 이후에 알게 된 팩트 사이의 간극은 내게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원 사이드만이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극단적인 진실은 그 당시의 현실이기도 했으니까.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문이 그의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에 올라왔다고 한다. 지난 여름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 집회를 듣고 보고 몇 차례 참여하면서 너무나도 답답한 나머지 그의 홈페이지를 들러 이런 저런 글들을 보며 이 땅의 민주주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위안을 삼았던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저 한 사람의 정치인이기도 하면서 그 자체로 변화된 한 갈래 진보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론 진보 학자와 진보 칼럼니스트와 진보 언론과도 날카로운 대립도 했으며 모든 사안에 대해 일반적으로 진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기준에 맞춰 정책을 집행하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끈 참여정부의 최대 화두는 '도덕적 청렴'과 그에 의한 '개혁'이었다. 사회 전방위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등 각계 각층의 기득권력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경제 부문은 수치상으로는 더디지만 여전히 성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양극화 해소'라는 경제에 있어 신자유주의 하의 최대 부작용을 효율적으로 치유해내지 못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국민들의 체감 경제 불만족도를 유발하였으며 그로 인해 결국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1년 후.

참여정부의 주된 모토로 내세웠던 '도덕적 청렴'은 박연차 리스트에 의해 측근으로 시작해 결국 권양숙 여사까지 연루되면서 사과문을 올리며 사실상 무너져내리기에 이르렀다. 재임시절 그렇게도 강조했던 부정부패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무색해질 정도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배신감을 느낀다면 충분히 이해한다. 또 평범한 국민들이 실망하거나 허탈하다고 해도 백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들이대고 있는 그 같은 잣대를 들이댈 경우 입이 100개라고 해도 할말이 없는 작자들이 모인 정당들이 꺼리낌없이 내뱉는 후안무치한 논평으로 듣자니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을 듯 하다.

한국에서 정치는 대체 얼마나 돈이 필요하고 돈을 요구하고 돈을 받아야 행할 수 있는 것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도 천상 정치인이다. 그라고 해서 정부 수립 이후 기형적인 한국 정치의 구조 속에서 돈 한푼 쓰지 않고 국회의원을 하고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미 재임 초기에 대선자금 수수설로 인해 한차례 곤혹을 치뤘던 그였다. 자금의 총 액수와 무관하게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실망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털고감으로써 앞으로 그러한 구태의연한 정치행태를 근절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이 뇌물과 관련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급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것도 그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수치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퇴임 후 친형의 뇌물 수수와 관련된 구속. 그리고 측근과 권양숙 여사까지 돈과 관련된 추문에 휩싸이면서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그렇게 척결하려고 했던 친인척과 측근에 의헤 권력형 부정부패로 비춰지는 사건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한때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구시대 정치인은 자신으로 끝나기를 바란다.'는 언급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발언은 새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는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번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사람이 대통령이든 그 친인척과 최측근이든 그에 합당한 법적 처벌을 받는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 다시한번 확인함과 더불어, 이번 사건들에 들이댔던 엄중한 법적 기준은 현 대통령의 퇴임 후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국민 사이에 널리 형성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이번 사건 역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보복' 수준으로 훗날 평가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정치판은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대통령은 수백억원, 국회의원은 수십억원을 써야 한다. 수백억원대의 자산가였던 문국현 창조한국당 의원도 지난 대선 후 비용 문제로 그렇잖아도 조그마한 당이 쪼개지다시피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선거와 관련된 비용의 투명성을 미국과 같은 해외 수준으로 높일 필요성이 있다. 엄청난 비용을 소진하고 정치 권력을 잡게 된다면 당연히 그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다. 그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빚을 지면 빚을 갚고 싶어하고, 재산이 줄었다면 그 재산을 채우는 정도가 아니라 최대한 수십배로 늘리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적 욕망에 자신에게 다수의 국민이 부여한 정치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게 된다. 부정 부패는 그 정치권력으로 돈을 요구하는 자와 돈으로 그 정치권력을 사려는 자의 암묵적 합의 하에 그 싹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온갖 후안무치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국민들에게 일반적으로 각인된 진보와 보수에 대한 도덕성의 이중 잣대도 이참에 폐기해야 한다. 한때 부패한 보수에 대해 도덕성으로 무장한 진보가 정치권력을 획득한 적이 있었다. 지난 10년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간의 역사는 정치권력이 지닌 본원적 속성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진보와 보수는 사회 변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인식과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에 결합되어 있는 한 진보든 보수든 어느쪽이든 정치권력을 획득한 세력에게는 끊임없이 돈과 결탁하는 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인간의 본능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법과 제도로 그것을 최소화 할 수는 있다. 자신들이 저지른 위법 행위는 훗날 언제든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그 분명한 전제가 확립되게 된다면, 완벽하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의 미래와 현실을 바꾸는 어리석은 욕망을 어느 정도는 자제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안은 그저 과거의 추문을 들춰내고 덮어버리는 1회용 수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노 전 대통령이 내세웠던 도덕적 기치가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정치적 상황과 구조와 배경에 대한 국민들의 냉정한 현실인식과 판단이 요구된다. 단지 한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제 하에서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던 이같은 전철이 왜 반복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국민들에게 있어 정치가 혐오스러워질수록 역설적이게도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09년의 대한민국의 모습에서도 일면 엿보이기도 한, 다수의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게 되면 정치인인척 하는 자와 그에 결탁한 소수의 작자들이 국가를 통제하고 쥐락펴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판은 경제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압축되어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기에 그 과정에 온갖 폐단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도는 민주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정치인과 국민 다수의 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한때 국가를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했던 독재자를 무너뜨렸고 독재를 하는 동안 천문학적 액수의 뇌물을 챙긴 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보내기도 했으며 그 사이에 부정부패의 액수는 역시 대폭 줄어들었다. 이제는 그 줄어든 액수마저 제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게 된 시점이다. 지난 대선에서 보여준 국민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그 통치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인식은 통치자와 관련된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소액이라고 하더라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정도로 높아진 듯 하다. 이는 또다시 정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실로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처벌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인 제도들이 마련되어 있고 그렇게 참여하는 자들의 의사로 만들어지는 공화국가임을 헌법 1조 1항에서 보장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의 국민들은 끊임없이 정치에 참여하고 선거를 통해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정치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권리도 행사하지 않으면서 비난만 일삼는 무책임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 여전히 기형적인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 정치판이지만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 다수의 사람에 의한 참여가 모인다면 그 참여만큼의 발전을 이뤄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일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나 한때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번 사안으로 국민들이 지난 대선 투표 당시와 다른 생각들을 갖게 될 수만 있다면, 차후 비슷한 처지에 놓이는 제 2 제 3의 노무현의 출현을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사잡지 중에 정기구독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애독하는 잡지가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경향 신문에서 발간하는 '위클리 경향'과 한겨레 신문에서 발간하는 '한겨레21', 그리고 마지막으로 옛 시사저널에서 삼성사태에 반발하여 이탈한 기자들이 만든 '시사IN'이다. 이 중에서 시사 IN을 가장 많이 사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Daum 메인 화면에 글 제목과도 같은 타이틀로 기사가 올라왔다. 제목을 보니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끌어들인 것 보니 보수보다는 진보(딱히 이렇게 구분짓는 것도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경향을 크게 놓고 이야기 할 때 갖는 입장 차이로 규정할 따름이다.)매체에서 올려놓았거니 생각했다.

나름 흥미로운 주제여서 클릭을 하고 기사를 확인해 보았더니 예상 밖으로 낯익은 시사 IN의 주진우 기자가 쓴 글이었다. 글을 내용은 양비론을 넘어서 삼비론에 가까웠다. '정권 편향적인 인사'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잘못' 임명했고, 그 인사들을 이명박 정부가 용이하게 활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전에 신방과 과목을 들었을 때 교수님께 들었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의 기자들은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한다. 그건 어떻게 보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할 수 있는데, 즉 자신이 기사를 쓰기 위해 이리저리 취재를 다니다보면 학식이나 명망이 높은 전문가 집단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또 현안에 대한 실무를 맡는 정부 당국의 담당자에게 취재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모은 정보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다 보면, 양 그룹군에 장단점을 파악하게 되고, 그것을 종합하여 아우르는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자의 마인드는 하루 아침에 형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취재 노하우를 쌓게 되다 보면, 그 경험이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편협함과 아집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직업군에 있고,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자만심은 스스로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적이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고, 자신의 위치와 위상이 상승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인간 본성의 약점이기도 하다. 

필자가 주진우 기자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기사에서 묻혀 나오는 느낌이 딱 이와 같았다. 길지 않은 기사에 마치 자신이 3자적 관점에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식으로 비판에 결론까지 내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시사 IN을 애독하는 독자로써 이 기사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듯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대략 몇 가지 잘못 재단한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용인술은 재임 기간 내내 '코드 인사'로 불리우며 언론에게 뭇매를 맞았던 부분이다. 물론 일부 보수 언론들이 노 전 대통령의 인사를 폄훼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겠지만, 시사 IN의 이번 기사를 보면 이는 결국 과대포장에 왜곡보도였다는 셈이 된다. 더불어 노 전 대통령이 자기와 같은 철학을 가진 인물만 중용했다는 것도 '거짓말'인 것이다. 즉 이는 보수-진보 따지지 않고 다양한 색깔을 지닌 인물들을 두루 기용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편향없는' 인사를 통해 등장한 인물들이 성격이 다른 현 정부까지 직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의 인사가 '객관적'이었고 '합리적'이었고 '중립적'이며 '배포'가 두둑했다는 증거가 되면 모를까, 그에게 그 인사들 개개인의 정권 친화적인 부분까지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아전인수'격 해석일 뿐이다.


두 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 철학과 국정 운영 스타일이 다르다는 부분이다. 기자는 이 부분을 매우 간과하고 기사를 작성한 것 같은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록 소신과 고집을 넘나들며 국정을 운영하였지만, 그 과정은 대체적으로 민주적이었다. 최근에 정부 산하 기관에 근무하시는 분께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참여정부 시절에는 정부에서 선임한 인사가 발령받아 오게 되면, 조직 내부의 게시판에 찬.반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졌다고 한다. 즉 일반 직원들도 선임되는 간부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이러한 다수의 의견은 어느정도 반영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그러한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즉 관계 부처 고위 인사가 들러서 상황을 설명하고, 잡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부탁하고 가면, 조직 내부의 그 누구도 정부의 인사 발령에 딴지를 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참여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통치 스타일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적인 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도 마찬가지다. 비록 코드가 다르고, 성향이 달라도 일단 임명장을 주어 일을 맡겼고, 그들도 굳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평소 소신대로 조직을 운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다르다. 자신들과 노선이 같고, 사고 방식이 같고, 뭔가 하나라도 연줄이 닿아야 기용하는 상황에서, 참여 정부 시절의 고위 공직자들 역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면 결국 박차고 나오게 되는 것이고,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기회주의적' 즉 정권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즉 이것은 노무현의 문제라기 보다는 각자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자는 통치 스타일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들까지도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개개인의 소신을 문제삼기 보다는 모두 노 전 대통령의 '잘못된 인사'로 규정지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편한 논리인가. 

마지막으로 한편으로는 한국 정치판에는 그만큼 보수적인 인물이 많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령 노무현 대통령이 진짜 일부 보수 언론의 보도처럼 자신과 코드가 부합한 인사들로만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반세기동안 한국의 통치 계층은 지속적으로 보수적인 인사들의 차지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진보적 성향을 지닌 인물로 기용한다는 것이 그 정도였고, 그것만으로도 임기 내내 '코드 인사'한다며 비난을 받던 그였던 것이다. 당연히 정권이 바뀐 뒤에 그들이 본래 지닌 속성을 드러내 현 정부와 코드를 맞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또한 '노무현 탓'이라고 하니 이 또한 지난 5년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멘트가 아니던가.


아랫사람은 윗사람 하기 나름이다. 가장 상위에 있는 사람이 압력을 넣지 않고 자율성을 부여하고 민주적으로 통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래로 그 영향력이 파급되기 마련이다. 특히 행정부와 같은 관료조직은 그 구조상 정도가 훨씬 클 것이다. 그래서 그 최고 통치자가 바뀌고 통치 스타일이 바뀌자 아랫사람들도 드러나지 않았던 기질이 드러난 것이다. 자신이 지닌 부와 명예와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슷한 통치 방식을 보여주었다면  그들도 정치적으로 자신의 일신을 지키려고 하기 보다는 한 조직의 수장으로써 그 업무에 소신있게 전념하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구조적 문제와 개개인의 정치적 신념을 배제한 채 그저 이 모든 상황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사 실수'로 간단명료하게 결론짓는 기자의 성급한 일반화를 보고 그의 짧은 식견에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차라리 그렇게 변절한 자들에 대해 국민의 공복으로써의 자신을 망각하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정치적 신념을 저버린 부분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썼다는 차라리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아래로부터의 권력위임과 위로부터의 삼권분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민주는 민주주의의 민주일터이다. 그렇다면 과연 2009년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일까?

이미 작년 민주적이던 '촛불집회'에 대한 공권력의 억압과정을 거치며 87년 이래 지속적으로 확장되어가던 민주주의에 대한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는 새해 벽두부터 청와대의 하부조직과도 다름없던 다수 여당의 날치기와도 다름없는 일방적인 법안 상정 등과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입법부인 국회의 독립성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이어야 할 사법부도 그 독립성에 대한 강력한 의구심이 들만한 일이 터져나왔으니 바로 '신영철 대법관의 e-mail' 파문일 것이다.

법관 개개인은 사법부의 주체로서 헌법과 양심에 따라 합리적이고도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한 축을 이루는 사법부의 중요한 권한이자 의무이다. 그렇기에 촛불집회를 형사 단독 13부에만 일괄 배정하는 것에 대해 소장판사들은 의문과 이의를 제기했으며, 또한 판결과정에 있어서 '촛불집회'로 인한 집시법과 헌법의 충돌이 과연 위법인지에 대해 판단을 구하기 위해 '헌재의 위헌제청'을 수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과정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법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판사들의 합리적이고도 합법적인 결정이 불편했던 것일까. 판사 개개인의 자율성이 최대한 확보되어야 할 사법부 역시 조직의 특성상 있을 수 밖에 없는 위계질서의 구조를 악용하여, 신영철 대법관이 청와대와 검찰의 입장을 대변하는 식의 '신속한 판결을 종용'하는 뉘앙스가 담긴 e-mail을 사건 담당 판사들에게 보낸 점은, 어떠한 이유와 변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무언의 압력'이자 분명히 '정치적 독립성'을 훼손하는 행위임은 자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신영철 대법관은 대법원 다수의 의견이자 법질서 확립을 위한 행위였다고 강변하면서 사퇴는 불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 질서 확립?' 어디선가. 그리고 누군가 아주 많이 하던 이야기 아닌가? 이상하게도 법 질서를 그렇게도 확립하자던 자들은 법과 상식의 테두리가 벗어난 방법을 동원하니 그들의 '법 질서'는 과연 누구를 또 무엇을 위함이던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한 축이자 최후에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가려 국민의 권리와 정의를 수호해야 할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근간을 위로부터 뒤흔든 이번 사건은, 역시 그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해야 할 것이다. 신영철 대법관은 물론 이영훈 대법원장의 연루 의혹과 나아가 대법원을 넘어선 정치적 배경이 있는지 등에 대한 관련된 여러가지 의문스러운 사안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밝혀야 할 것은 당연하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법부는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이 훼손될 때마다 이른바 '사법파동'을 일으켜 그 소중한 가치들을 지속적으로 지켜왔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래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일방적으로 행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 거듭되면서 '독립성'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는 이 때에, 이번 사안은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자성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부디 국민 앞에 한점 부끄러움도 없는 그래서 다시금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써, 신뢰하고 신뢰받을 수 있는 사법기구가 될 수 있도록 뼈를 깎는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덧-

신영철 대법관의 e-mail 파문을 보면서 최근에 판결되었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 : KBS 신임 사장 결의에 대한 효력 정지 신청 기각, 조중동 광고 불매 운동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미네르바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등을 보면 과연 청와대가 '법 질서 확립'을 기세등등하게 '운운'할만한 연유가 다 있었구나라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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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에 집에 내렸갔을 때, 잠시 서점에 들렀다가 눈에 띄어서 샀던 책 중에 하나. 사실 '살림지식총서'라는 타이틀로 나오는 이 핸드북 수준의 책들은 작고 가벼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상당한 수준의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구입한 '보수와 진보의 정신분석'도 마찬가지다. 특히 논문을 정당과 관련된 주제로 준비하고 있는만큼 새로운 관점에서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서 좋았으며, 읽고 나서도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 많았다.

저자는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 정의를 서구에서의 파생 배경과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으로 의미를 규정하며, 그를 바탕으로 다시 한국적 '특수성'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에서의 '보수'와 '진보'는 여전히 이념지향적 성격으로 규정되고 있으며, 특히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함부로 포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특정 정당이 슬로건으로 내세우거나 정책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그것이 곧 '보수' 또는 '진보'로 규정되어지는 '협소함'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역시 이러한 부분에서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학'을 전공했던 필자도 매우 공감이 가는 부분일 수 밖에 없었다. 일본 패망 뒤 미국과 소련의 의지가 아닌 한반도에서의 한국 민족의 자력에 의해 '일제의 잔재 세력'을 프랑스의 친독파 숙청과 같이 명백하게 청산하고 그 이후 '좌-우'의 이념의 대립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천천히 융합되어 갔더라면, 사사건건 대립하는 오늘날의 이 현실과는 매우 다른 정치적 토양을 쌓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자주적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해방 후 5년만에 냉전이 열전으로 '화'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에서는 '좌'에 대한 극심한 국가적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이후 잇달아 들어서게 되는 군사독재정권들이 정권의 정당성 확보로 사용하게 되고, 그 후유증은 민주화를 거친지 20년이 훌쩍 넘은 현재까지도 정치와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서구 사회와 같은 건전한 정치적 논의의 장으로써의 '진보'와 '보수'가 아닌, 기형적이고 파벌적인 정치적 대립현상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저자는 '퇴행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결론에서 갈수록 다극화 및 다양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냉전 이데올로기 시절처럼 '진보'와 '보수'로써 모든 사안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는 없으며, 개별 사안에 대해 합리적인 근거와 판단을 바탕으로 세분화하여 접근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는 필자도 공감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제도권 정치에 반영이 되어야 할 지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는 지난 촛불집회에 대해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주문하기도 했던 '정당의 역할'의 정상화도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지극히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혀있는 한국의 후진적인 정치판이 과연 이러한 건전한 의지를 흡수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촛불집회를 경험하면서 다양한 사회 및 학계 차원의 논의를 통한 해결책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반년이 지난 지금 실질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기에는 우리 사회의 잠재력이 너무나도 아깝다. 민주화 이후 20여년간 반복되고 있는 '퇴행적' 정치 행태에 질렸다면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사익'이 아닌 '공익'적 관점에서 함께 모두가 다 잘 살 수 있는 사회적 변화에 조금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민주주의에서의 정치적 변화는 '무관심'이 아닌 '관심'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수와 진보의 정신분석'이라는 책에 3,300원 정도는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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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오. 그리고 천하통일.

삼국지에 등장하는 삼국은 모두 ‘천하통일’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었을까. 패왕으로써 한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천하의 질서를 창조해 내려고 했던 조조의 위. 그리고 전한과 후한을 거치며 400년 유구의 역사를 지닌 한을 계속적으로 이어가려했던 유비의 촉. 적어도 이 두 나라는 삼국지연의 전편에 묘사되는 행적을 보았을 때, 자신들만의 신념에 의한 천하통일을 꿈꾸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아마도 다수의 사람들은 강남지역에 또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던 오에 대해서는 긍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손권이 통치하던 시기의 오는 ‘No'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손권은 형 손책이 임종시에 남겼던 평가처럼 창업보다는 수성에 더 어울리는 군주였다는 점은,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 보여준 통치 스타일을 감안했을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조조의 대군과 맞섰던 적벽대전을 극적인 대승으로 이끌면서, 곧바로 형주 북부로 진격하고 익주까지 바라보았던 시기.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손권도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의 꿈이기도 했을 손가에 의한 ‘천하통일’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이 시기의 손오에 의한 천하통일로의 ‘가능성’의 중심에는 그 누구도 아닌 미주랑. 바로 ‘주유 공근’이 있었던 것이다.


2. ‘미주랑’ 주유가 꿈꿨던 천하통일지계.

*손책의 중원 진출에 대한 야망과 주유.
주유는 과연 중원 대륙을 통일하는 꿈. 즉 천하통일에 대한 야망이 있었던 것일까. 결과론적인 접근으로는 ‘그렇다.’는 확답도 ‘아니다.’라는 부인도 할 수 없다. 그 역시 꿈을 향한 날개를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병사하기 직전까지 보여주었던 모습에서 유추해 보았을 때는 '그랬을 것이다.'라는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둘 수 있을 듯 싶다. 

주유는 군주이자 절친한 벗이기도 했던 손책에게 출사한 이래 군사적 참모 역할을 겸임하였고, 그와 함께 강남 지역을 빠른 속도로 하나씩 병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양주지역의 군웅들을 대부분 평정한 이후 크게 확장된 지역과 늘어난 병력 그리고 인재들을 바탕으로, 그들은 점차 드넓은 천하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이는 손책이 조조와 원소가 백마와 연진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던 관도대전 당시, 조조의 배후인 허창을 급습하려는 구체적 계획까지 입안하고 있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북의 원소, 중원의 조조, 그리고 서주의 유비 등 아버지 손견과 비슷한 연배의 노회한 군웅들 사이에서, 손책은 물론 그를 보좌하고 있던 주유에게는 그들에 비해 이십여년 가까이 어린 ‘젊음’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젊음에서 비롯되는 ‘패기’를 바탕으로, 충분히 천하를 두고 경합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만큼이나 정치적 경험이나 술수가 부족했던 탓일까. 조조의 배후를 노리던 손책은 곽가의 평가와도 너무나도 유사하기도 한, 그래서 더욱 ‘조조의 술책’으로 의심되는 자객의 기습(연의에서는 허공의 복수를 노리는 식객들로 묘사되고 있다.)을 받게 되고, '소패왕'이라 불리우며 양주 지역 평정 때 보여준 놀라운 기량을 천하를 향해 펼쳐 보이기도 전에 사망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리고 손책의 유산은 아우인 19세의 손권에게 고스란히 이어받게 된다.

강력한 공격지향적 성향을 지닌 손책의 급사는, 그와 함께 천하를 도모하려 했을 혈기왕성한 주유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애석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손견과 손책 부자의 천하를 향한 꿈은 같은 핏줄인 손권이 아닌, 함께 바라보고 있던 주유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다.

*천하로의 재진출에 대한 계기. 적벽대전.


손권의 집권 이후 주유는 손권과 함께 형주지역의 출병 등을 통해 아버지 손견의 원수인 황조의 목을 베는 등의 전공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손책의 평가만큼이나 외정은 형만큼은 아니었던지 오랜 시간의 대치에도 불구하고, 유표와 형주 지역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 기간 동안 배후의 위협을 차례로 제거한 조조는 놀라운 전략과 대담한 전술을 선보이며, 열세임에도 원소의 대군을 격파하고 하북을 제압하면서 마침내 군웅할거의 일원에서 독보적인 세력으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이런 조조가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최대의 군벌이었던 원소를 패망시키고 하북과 중원을 제압한 시점에서, 그가 형주 및 양주 지역으로의 진출을 늦출 아무런 이유는 없었다. 그 역시 천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유비는 서주에서 조조의 배후 교란에 실패한 채 원소가 무너지는 조짐이 보이자 곧바로 형주 지역으로 남하하여 유표에게 의탁하게 된다. 이 때 유비는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등용하게 된다.

그리고 208년. 드디어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적벽대전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최전선에서 조조의 군과 맞부딪친 유비는 강릉으로 도주하면서, 역시 객관적으로는 열세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손권에게 전략적 동맹을 제안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호족의 영향력이 강한만큼 장소를 비롯한 주화파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주유는 그들의 의견을 제압하고 제갈량의 동맹 제안을 성사시켜, 손권의 지원하에 오의 수군을 이끌고 적벽대전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그리고 황개의 고육책에 이은 화공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면서 중국 戰史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게 된다.

화염과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을 석두관. 즉 적벽을 바라보면서, 아마도 자신에게 패퇴하는 그 조조의 배후를 수년 전 함께 노리던 천부적 싸움꾼인 손책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적벽대전에서의 주유의 대활약은 조조의 천하통일을 향한 파죽지세와도 같던 기세를 꺾어버림과 동시에, 중원의 패자인 조조와도 충분히 겨뤄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주유 역시 조조 너머에 있는 천하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승세를 탄 주유의 행보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적벽대전 이후 주유의 천하통일계책.  
주유가 바라보았던 천하통일의 계책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주유는 노숙이나 제갈량이 논한 천하삼분지계가 아닌 북방의 조조, 그리고 남방의 손권. 이렇게 천하를 이등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삼국의 형태를 유지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견제를 통해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극대화하는 천하삼분지계와는 달리,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형태이다.

즉 천하이분지계에서 조조와 손권의 양 세력은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치러 승부를 내야만 하는, 긴장관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구도이며, 이는 어느 세력이고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마지막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의 승자는 천하통일의 꿈을 현실로 이뤄내는 것이다. 적벽전 이후의 주유의 구상에는 실로 이렇게 대담한 승부수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조는 적벽전에서 패퇴한 이후 강릉마저 주유에게 빼앗기는 등, 형주 이남에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적벽전의 동맹군이자 주유의 입장에서는 방심할 수 없는 유비는 형주의 남4군을 평정한 상태였다. 적벽전 대패의 후유증으로 조조는 곧바로 군을 일으킬 수도 없는 상태였을 뿐더러, 설령 무리하게 다시 군을 일으켜 남하를 시도한다손 치더라도 이미 처음 남하할 때와는 달리 압승은커녕, 승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있었다.

이렇게 조조가 적벽전의 패퇴로 인해 형주를 넘보지 못하고 있었을 이 시기가, 주유에게 있어서 천하이분지계의 방점인 익주를 도모할 수 있는 최고의 시기였다. 실로 조조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저지할 방도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조가 주유보다 먼저 익주를 차지하려면 한중의 장로는 물론 옹, 양주의 마초를 제압하고 들어가던가, 아니면 형주로 남하하여 주유가 가려던 강릉을 기점으로 이릉을 거쳐 백제성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조조가 재남하하면 형주 남부의 유비도 움직이기 때문에 이도 여의치 않는 방법이다. 어떤 방법을 취하든 주유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직접 익주로 진입하는 것보다 시기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주유가 도중에 병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정사의 기록처럼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신속하게 익주를 도모하고 익주, 형주, 양주로 이어지는 국가를 성립할 수 있었을 것이며, 서량의 독자적 세력인 마초와도 연계를 도모하여 조조와 최후의 자웅을 겨루는 천하이분지계를 성사시켰을 것이다.

*주유의 천하이분지계와 유비의 향방.



여기에서 형주 남부에 주둔한 유비의 향방 역시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실제로 역사에서는 병사한 주유 대신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만약 주유가 병사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해본다면, 사실상 유비도 조조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만약 유비가 먼저 익주로 움직이려는 행동이 보인다면 당연히 주유가 좌시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며, 이로 인해 양 세력 사이에 국지전 수준을 뛰어넘는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는 조조에게 있어서 전략적인 호기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주유가 익주로 향한 사이 유비가 강릉을 비롯한 형주 남부 전역을 장악한다면, 곧바로 조조와 전선을 접경하게 됨과 동시에 양주와 익주에서 협격이 가능한 손권과는 적대관계가 되는데, 이 역시 유비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전략적 선택은 아니다.

즉, 실질적으로는 주유가 익주로 향하더라도 형주 남부 4군에 묶여있는 유비가 택할 수 있는 전략적 행동의 폭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주유의 익주행이 성공했더라면, 유비 세력은 지속적으로 견제받으면서 오의 일원으로 반강제적으로 편입되거나, 아니면 조조는 물론 주유 및 손권과 적대관계가 되더라도 무력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비가 이끄는 세력의 면모를 보았을 때,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판단되지만, 실제로 이러한 경우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주유의 익주 공략이 성공적으로 이뤄졌을 경우, 유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촉과 같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주유에게 제압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주유의 천하이분지계가 성공적으로 성사되었다면, 조조와 손권은 동으로는 합비부터 서로는 한중지역까지 매우 길게 전선을 맞대게 된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전의 관도대전이나 적벽대전, 혹은 그를 능가하는 대규모 전쟁을 몇 차례 치르면서 승기를 잡아가는 세력이 천하통일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 것이다.


3. 주유의 병사와 함께 사라진 손오의 천하통일.  

하지만, 적벽전 이후 2년여 만에 주유가 돌연 병사하면서, 그가 계획하고 있었을 모든 계책도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 유비를 늘 껄끄럽게 생각하며 최후에는 적이 될 것으로 상정하던 주유와는 달리,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노숙은 친유비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와 유사한 계책을 손권의 입장에서 구상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조조와 맞서기 위해서는 유비를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주유와 노숙의 유비에 대한 군사 전략적 접근의 차이는, 주유 사후 오의 국가적 전략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동시에 손권 역시 주유가 구상하였을 천하이분지계를 포기하고,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와 같은 방식을 택하게 된다. 즉 형주를 유비에게 양도하고, 조조와 맞서게 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유비가 노골적으로 익주를 도모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에도, 오에서는 익주를 선수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유비에게 익주로 들어가는 대신 형주를 되돌려 달라는 식의 약조를 내걸게 되는데, 이는 주유가 생존해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손권의 오에서는 더 이상 주유의 천하이분지계와 같은 원대한 전략으로 천하를 논하려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대신 관우의 배후를 기습하여 병합한 형주와 양주, 장강을 끼고 있는 두 주에 걸친 '오'를 수성하는데 만족하는 국가가 되고 만다. 이는 이전의 손견, 손책의 부자는 물론 주유까지 천하를 노리려 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지향점을 지닌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국가적 전략의 변화에는 단지 주유의 죽음이라는 것 이외의 국내외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시간이 지날수록 천하를 노리려는 전략을 세울만한 유동성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던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듯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으로 돌아서버리게 된다. 어쩌면 천하를 꿈꾸다 일찍 스러져버린 아버지와 형, 그리고 그 형의 존재감과 유사했을 주유가 바라본 길과 손권이 바라보고 있는 길은 애초부터 같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유의 죽음은 그 자체로서 천하이분지계의 실패를 뜻함과 동시에, 손권에게 지속적으로 천하를 꿈꿀 수 있게끔 할 영향력을 지닌 마지막 무장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반면 유비에게 있어서는 다시 올 수 없는 천운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하이분지계의 시작' 대신, 우리가 익히 알게 될 '천하삼분지계의 완성'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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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XI의 공명과 관우>

1.제갈공명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의 등장 배경

적벽전 직전부터 연의 전편에 걸쳐 뛰어난 능력을 과시하는 제갈공명이 유독 힘을 쓰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형주가 상실되는 시점이다. 그렇기에 관우와의 2인자 다툼에 이은 고의 방치설, 제거설 등이 나오기도 하였다. 추측컨데 당시 신인이나 다름없는 제갈공명에게 있어서 유비의 맏의제이자 자부심이 매우 높은, 게다가 연령차이까지 상당한 관우를 상대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탓인지 연의에서는 적벽전에서 군령장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유 사후 순조롭게 형주 남부 전역을 점령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인재와 병력으로 익주까지 도모하며 난세에 극적으로 비약을 꿈꾸던 유비군은, 낙성 공략 과정에서 방통의 뜻하지 않은 사망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서, 형주를 진수하고 있던 제갈공명은 일군을 이끌고 유비를 돕기에 이른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 역사의 분기점이 시작되며 동시에 그 결과 제갈공명과 관우의 2인자 다툼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2.제갈공명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 시기의 진행 과정 

*형주 진수를 관우에게 맡긴 이유.
제갈공명이 형주 진수의 수장으로 장비, 조운이 아닌 관우를 남긴 이유에 대해서는 유협의 무리와도 같았던 방랑군 시절의 유비군의 체제와 서열 순위를 고려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유비의 첫째 의제인 관우를 형주 수비장으로 임명한 것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의 형주 진수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제갈공명은 관우의 강직한 성격을 감안하여 ‘북거 조조, 동화 손권’ 이라는 큰 지침을 관우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의 손권은 유비가 형주를 바탕으로 익주까지 병합하여 순식간에 오를 제치고 위 다음가는 전력을 형성하게 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유비 세력을 견제하려 들었다. 이는 난세를 평정하고 한왕실을 복귀시키려는 유비의 대의의 실현에 있어서 자신이 진수하고 있는 형주 지역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관우는 형주 북부로의 북진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형주 접경지역에서 오와의 잦은 국경 분쟁과 더불어 외교를 통한 형주 동부 3군의 반환을 겪게 된다. 그리고 적벽전 등을 통해 익히 기량을 파악하고 있었을 당시 오의 지휘관인 여몽을 위협적인 장수로 간주하고, 오와의 접경지역에 방비에 대해 소홀하지 않았다.

즉, 그는 오를 결코 만만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대비를 바탕으로 번성 포위전까지 그는 북진을 훌륭하게 수행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까지 관우의 형주 진수에는 아무런 전략적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 2인자 다툼설의 빌미가 되고 만다.

*관우의 북진과 천하삼분지계의 천하통일지계로의 발전.
관우가 이끄는 형주군은, 칠군을 이끌고 저지하던 우금을 격파하고 양양성을 점령하는 등의 눈부신 전황을 일궈내기에 이른다. 이렇게 관우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조조는 허도에서 업으로의 천도까지도 고려하게 된다. 당시의 조조가 천도를 하겠다는 것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여 수도를 안전한 후방지역으로 옮겨놓고, 북진하는 관우군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이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당시 관우군의 북진은 성공적이었으며, 천하를 진동시킬 정도로 군세가 위력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마의의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삼국지 전편에 보여줬던 조조의 스타일을 감안하였을 때,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도 정사에서는 마파까지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더 내려오지 않은 이유는 이 시점에서 서황이 강릉을 탈취당해 퇴각하는 관우의 진영을 돌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위가 천도를 선택하여 형주 북부를 내주고 관우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게 된다면, 낙양을 분기점으로 위는 양분되는 양상이 되며 이는 차후 옹주-양주, 그리고 장안을 비롯한 낙양 서북부는 고스란히 촉에게 내어줄 위기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이 이루어지면, 분명 한중왕에 오른 성도의 유비가 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본대를 이끌고 한중을 통해 장안과 옹-양주 방향으로 북진하였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모습은 지난날 제갈량이 출사 직전에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 등을 논하던 ‘융중계책’과도 그야말로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관우의 북진 성공은 곧 유비가 천하통일로의 첫발을 내딛게 됨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관우의 북진과 위.오의 연합대응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오의 손권이 지닌 형주에 대한 욕심을 파악하고 있던 사마의의 차도살인격 계책이 나오게 된다. 바로 형주를 놓고 흥정한 '위-오 비밀동맹'이 맺어지면서 일거에 전황은 역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관우군의 성공적인 북진을 막아야만 하는 위와, 그러한 성공적인 북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형주 탈환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던 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비밀동맹과 더불어 번성을 공격하던 관우에게 결정적인 오판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오의 계책이 진행되는데, 바로 오군의 지휘관이 여몽에서 육손으로 교체되는 것이었다. 후에 이릉대전에서 오의 총사령관으로 육손을 추천할 때에도 감택 외에는 모두 반대할 정도로 오 내부에서도 백면서생이었는데, 하물며 당시 천하를 진동시키며 북진을 지휘하는 관우에게 있어 이름도 듣지 못한 육손은 애송이로 비춰졌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사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비병 차출'이라는 관우의 판단에 대해 논하자면, 형주 지역을 둘러싼 관우와 오의 소규모 분쟁과 외교적 논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적벽전 이래로 준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촉-오 관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주유의 후임이자 여몽의 선임이었던 노숙은 이러한 삼국의 정립구도를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형주로 인한 촉-오의 갈등을 최대한 봉합하여 동맹국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부분도 이를 반증하는 부분이다.

즉, 적벽전 이래 촉이나 오 모두 단독으로는 위에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불 동맹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관우 역시 이렇게 판단하진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 오를 위와 같은 적국으로 간주하였다면, 측면의 충분한 견제 없이는 애초에 형주 관우군의 단독 북진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공성전을 할 여유까지는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공성전을 위해 형주의 수비 병력까지 차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오의 전면적인 형주 침공은, 아마도 관우는 물론 촉으로 입성한 유비와 제갈공명을 위시한 촉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제갈공명의 관우 제거설의 논리적 비약에 대한 비판.
그러데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형주 전장 상황하에서 제갈공명이 일부러 관우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갈공명이 유비에게 출사한 이유는 유비의 극진한 간청도 이유가 되겠지만, 유비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한왕실 복귀라는 대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제갈공명이 단지 관우가 껄끄럽다고 해서, 걸출한 능력을 지닌 야전사령관인 '관우'는 물론 천하통일을 위해 필수적일 수 밖에 없는 전략적 요충지 '형주'를 포기하는 자승자박을 두는 것이 과연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가능한 일이었을까.

당시 제갈공명은 새롭게 편입한 익주의 재편을 거쳐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또다시 불거진 형주 문제를 형주 동부 3군을 손권에게 내주는 것으로 절충지어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된다. 아니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형주에 대한 손권의 욕심은 제갈공명은 물론 촉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갈공명의 전략에서, 손권까지 위와 동급의 적국으로 가정을 한다면, 관우 단독의 북진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출병이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으로 촉 내부에서 관우와 필적할만한 장수 -장비 혹은 조운- 를 최소 한명은 형주에 더 배치해야 했다. 또한 제갈공명은 익주로 가기 전에 '동화손권, 북거조조'라는 대명제를 관우에게 알려주었다. 이 명제 역시 '손권의 오'가 동맹국이라는 조건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촉이 눈치채지 못했을지언정,  손견 시절부터 늘 차지하려고 했던 형주를 손권 역시 온전히 차지하기를 원했고, 관우의 북진이 잠시 주춤한 사이에 위의 계책을 수락하고 배후를 기습하여 결국 차지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제갈공명이 융중대에서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를 깨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형주가 없이는 -구체적으로는 관우의 형주지역에서의 위에 대한 견제 없는 제갈공명의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후 벌어지는 이릉대전 역시 '관우의 복수'라는 상징적인 의미 이상으로, 촉에게 있어 '형주지역의 재탈환'이라는 현실적인 목표가 있었을 것임은 일련의 과정을 보았을 때,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의 형주 진수 및 북진의 약점
본래 213년 익주를 공략하던 유비와 방통이 성공적으로 점령해야 했으나, 낙성에서 방통이 유시에 사망하고 유비가 고립되자 형주의 주력군이 출병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먼저 출발한 황충, 위연 등은 물론 형주를 진수하던 제갈공명을 위시하여, 장비, 조운 등 실질적으로 촉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의 대부분이 유비를 구원하고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촉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기서 참모의 부재를 우려한 제갈공명이 '동화손권, 북거조조'라는 전략의 얼개를 관우에게 알려주고 떠난다.

위, 오와 모두 접경하고 있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에서, 촉의 주력군이 모두 성도로 향해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우가 이끄는 형주군은 손오의 급습 이전까지 형주 진수는 물론, 조조에게 천도를 고려하게 할 만큼 병력을 신장시켜, 북진을 놀라울만큼이나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참모의 부재
물론 그러한 관우가 치명적인 오판을 범해, 결과적으로 형주를 상실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관우의 곁에는 흔히 말하는 참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촉의 주력 인물들은 모두 익주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다. 관우와 아이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우 혼자 형주에서 버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위의 조인, 서황 등의 노련한 무장들과 사마의의 계책, 그리고 촉을 저버린 오에서는 여몽과 육손을 앞세운 기만전술과 배후급습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형주를 둘러싼 전황은 이미 관우의 역량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가정이지만 북진을 하던 과정에서 만약 관우 곁에 서서 또는 방통이나 제갈공명과 같은, 전략적 판단을 해줄 수 있는 참모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형주를 내어주었을까? 아마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2)대오 방어라인의 급격한 붕괴
또한 오의 형주 침공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던 부분에 대해서는, 강릉과 공안을 수비하던 미방과 부사인의 저항없는 무조건 항복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강릉과 공안을 거점으로 이들이 농성을 벌였다면, 양양을 포위하던 관우군의 회귀와 더불어 백제성에 주둔하던 군대가 이동하고, 나아가 촉에서 장비 내지는 조운으로 하여금 구원군을 출병시켜, 충분히 오군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오군도 더는 형주에서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위군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촉과 형주에서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면, 양쪽 모두 공멸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마도 잠재적 동맹을 깨고 침공한 오군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물러나 외교적으로 타결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관우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을 갖고 있던 미방과 부사인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고, 강릉과 공안을 비롯한 형주 남부 전역이 오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즉, 관우군이 회귀하고, 익주의 본대에서 구원군이 올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관우가 설령 천하의 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병력이 대거 이탈해가는데 구원군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 같은 위, 오의 협격을 막아내는 것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큰형 유비의 숙원을 바로 자신이 깨트렸다는 책임과 자책이 있었던 것일까. 관우는 곧바로 촉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합리적 선택 대신, 상용의 유봉과 맹달에게 원군을 청하고 강릉 재탈환을 시도하다가 결국 산화해버리고 만다.

또한 이러한 관우의 결정과 그로 인한 결말은 훗날 유비로 하여금 이릉대전을 불러오는 중요한 도화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3.제갈공명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에 대한 평가

결과적으로 형주 상실은 관우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끝남과 동시에, 제갈공명이 세웠던 '촉의 한왕실 복귀'라는 대전략의 붕괴를 의미한다. 또한 이로 인해 관우와 제갈공명 사이의 2인자 다툼설이 나올 정도로 극단적인 견해도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관우가 북진을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관우의 형주 상실 과정을 지켜보면, 위.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재층이 엷던 촉의 내부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는 생각도 든다.

설령 제갈공명이 진실로 연의에서처럼 신기묘산 했다고 하더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수백리 떨어진 형주의 전장의 상황 변동까지 완벽하게 대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제갈공명과 관우의 2인자 다툼에 의해 관우가 방치되었고 결국 형주 상실과 더불어 사망하게 되었다는 이른바 '2인자 다툼설'은 진행과정을 도외시하고 주어진 결과를 지나치게 인물 결정론으로 몰고 가는, 근거와 논리가 부족한 말 그대로 추상적인 '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공명이 관우를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치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물론 연의에서의 내용이지만) 마초와 경쟁의식을 갖던 관우를 제갈량이 편지 한통으로 잠재웠던 일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제갈공명은 관우를 능히 자신의 역량으로 제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필자만의 지나친 해석일 것인가.

여담이지만 Koei의 삼국지 영걸전과 공명전을 보면 재미있게도 관우에 대한 상반된 시나리오를 지니고 있다. 즉 유비가 주인공인 영걸전은 플레이어에게 관우를 구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주고 있지만, 주인공이 제갈공명인 공명전은 플레이어가 무슨 수를 써도 관우를 구할 수가 없다. 혹 이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Koei의 제작자는 '2인자 다툼설'을 의식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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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선생의 뉴라이트 비판.



서점에서도 눈에 띄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도서관에서 다른 책 빌리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냉큼 빌려와서 3일만에 다 읽어 버렸다.
책 전편에 걸쳐 조목조목 뉴라이트의 인식과 역사관과 행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빈판을 하였는데,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애초에 상식밖의 기준과 범위를 한정지어놓고 그에 맞춰 이론을 억지로 때려 맞춰넣으려고 하니 당연히 비논리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고, 이는 참여하는 역사학자가 한명도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학문적으로 논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저질스러운 수준을 고스란히 반증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대안 교과서라느니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되었느니 등의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국민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고 하니까 당연히 비판만 부지기수로 먹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론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뉴라이트 단체들의 구성원과 또 그를 추종하는 일부 사람들은 한번쯤은 필독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책을 덮는 순간에도 광복 직후부터 분단의 시기까지. 민족. 즉 적어도 한반도 이내의 정치적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했던 현실(물론 그 현실은 일제 패망기의 2차 세계대전의 결과와도 연관이 되지만)이 너무나도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덧-
오늘자 기사를 보니 4.3 항쟁은 무장폭동이었고, 5.18 민주화 운동도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를 해체하고 재조사 요구도 나왔다고 한다. 그래. 너네 본심까지 모두 드러내라. 그만큼 되돌려 받을 것들이 늘어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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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근무를 하기 전 연구원에 들어오는 20여가지의 일간지를 장식하는 기사들을 보며 들었던 정치에 대한 단상.

정치는 단지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치는 모든 영역에 대한 정책을 만들어내고, 그 정책은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순환 논리를 외면하고 정치는 나 또는 내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그러한 현상으로 인식한다면, 자의가 아닌 타의의 집합으로 인한 결과에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즉 교육, 취업, 결혼, 직장생활, 세금지출 등등의 열거하기도 힘들만큼 일상적인 사회 문화 경제활동에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제도들의 근원은 바로 정치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에 있어서 선거는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하기 위한 것이며, 기권은 최선의 선택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함과 동시에 최악의 선택에 대한 암묵적 동조의 의미만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선거권의 행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

하나.

동아일보에 기고한 경찰대학 교수의 글 중 용산 참사에 대한 경찰의 대응의 정당성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강경 진압에 대한 예를 들었는데, 그렇다면 문제 발생의 원인에 대해서도 역시 미국에서 찾아보는 건 어떤가? 과연 세입자의 권익은 깡그리 무시하고 허술한 법망 뒤에서 일방적인 피해만을 강요받는, 그러한 폭압적 형태의 도시 재개발이 현재의 미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지는지 말이다.

또 하나.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통해 현 정부의 주요 보직에 임명되려는 후보들의 부적격 사례들이 즐비하게 쏟아지고 있음에도, 직무수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이라며 임명을 강행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원탁토론에서 연초에 있었던 국회 파행의 모습을 대해 미국의 의회를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 자신은 장관 등 주요 인사의 임명에 대한 미국의 인사청문회 시스템을 본받는 건 어떤가?

최소 검증 절차만 9주에 이르며 업무와는 상관없는 조그마한 개인적 결점이라도 발견되면, 후보 본인의 자진 사퇴는 물론 대통령도 임명을 취소하는 그야말로 합리적인 검증 시스템 말이다. 그래야 역시 국회와 행정부간의 형평성이 유지되며 국회에게 훈수라도 한수 둘 수 있는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하지만 당연히 그럴 리가 없겠지.이것이 오늘날 한국 주류 정치집단의 의식 수준이다.  

때문에 기권을 던지는 것을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영원히 이러한 수준에 머무르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분명히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정당한 절차를 통해 표출해야만 한다. 그래야 점진적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느린 진화를 하게 될테니까.

1.신해철과 입시학원 광고 논란에 대해


엇그제부터 가수 신해철을 내세운 입시학원의 광고 한 컷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평소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해 독설 수준의 진보적 성향을 표출해왔으며 현행 교육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그였기에 이번 입시학원 광고는 그동안 그를 지지하던 팬과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이변'이자 '배신'에 가까운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하다.

2.광고를 둘러싼 원인. 흐름. 경과.

*'왜' 광고를 찍었을까.
나 역시 신해철의 입시학원 광고 카피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건 역시 '왜?'라는 의문이었다. 그에게 격한 비난을 퍼붓는 대다수의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각자의 해답을 찾았기에 그를 근거로 신해철을 비판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신해철은 사전에,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재의 반응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던 것일까. 이분법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정말로 예상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그 예상을 뛰어넘을 수 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었거나.


그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던 '하루'정도 지나고 내놓은 답변을 보면 어느정도 예상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해명으로는 이미 그에게 비판의 날을 세운 네티즌들을 예의 그답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여러 네티즌들이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차라리 금전적인 문제라면,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그다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태연자약한 모습인 듯하게 보이면서까지 무엇인가 감춰야 할 속사정이 있다고 짐작하는 편도 이해가 가는 반응이다.

*광고논란을 통해 신해철이 잃어버린 것.


그가 굳이 입시학원 광고를 찍어야 했는지에 대한 속사정은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풀릴 수도 있는 문제이겠지만, 그보다도 그에게 있어 더 큰 치명타는 그동안 그가 직접 락 장르의 자작곡으로 담아냈던 사회 비판적인 메세지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각종 언론매체를 통한 주류 사회를 향한 독설로 오랜시간 형성해왔던, 그래서 현존 최고의 토론 프로그램인 MBC 손석희의 100분 토론에 곧잘 초대될만큼의 '비주류에서의 논객' 이미지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는 점이다.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유명 대학에서 교수라는 타이틀로 사회 주류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점잖은 척 궤변을 늘어놓는 자들에게, 직설적인 언변을 날려대며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심어주었던 그 '논객' 신해철의 모습은 이번 사건이 어떤 식으로 매듭이 지어지든 이제는 그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어버린 것이다.

주류도 그렇겠지만 비주류에서 비주류의 지지를 끝까지 고수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표리부동'하지 않는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소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고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그 스스로의 논리만큼이나 팬 혹은 지지층이나 시청자들에게 '논객'으로써 어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해철은 이제 이번 논란을 통해 그 무기를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더우기 이미지라는 것이 매우 크게 작용하는 연예인 중의 하나인 '가수'라는 직업을 가진 그이기에 그 타격은 상당할 것이다.

3.논란. 그 이후.

그가 향후 어떻게 입장 표명을 하든 이번 일은 앞으로 족쇄처럼 따라다니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그가 앞으로 사회 비판적 발언을 계속 하게 되더라도 과거와 같은 정치적 파괴력이나 힘이 실리지 않을 수 있게 될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그가 그렇게 가식적이라고 비판하던 대상들의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듯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단지 '비주류의 달변가'를 한 명 잃었다는 점보다도 더 큰 상징성을 지닌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현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평소 피력하던 신념마저도 뭉개버릴 수 있는 광고를 찍게끔 하는 밝힐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이 바로 돈을 먹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현존하는 가장 이상적인 듯한 체제인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본 모습이라는 것이다.

덧-

하지만 그가 그간 자신이 보여준 신념과 명백하게 다른 실수를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닌 해명글을 올린 시점에서, 나의 반응이 '성급한 것'이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타당한 설명을 해주기를 아직까지 한 명의 팬으로써 기대한다.

 


노동자의 권익 등을 위해 설립된 조합이라지만
準정치적 집단인만큼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노동자라는 계급을 뛰어넘는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여느 정치 조직 못지않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유지해야 함은 필수적인 요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민주노총 측의 대응을 보면 마치 현 정권의 용산사태에 대한 대응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한심하기 짝이 없다.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애초부터 자신이 속한 정치적 집단에서의 위치를 감안했더라면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했으며, 일이 벌어졌다면 개인적인 책임은 물론 그가 소속된 민주노총 차원에서의 명확한 진상규명과 진실된 대국민사과와 그에 따른 합당하고도 신속한 조처들이 취해져야 했다.

비록 그것이 이미 땅에 떨어진 조직의 위신을 곧바로 되살려 놓을 수 없다고 해도, 합리적인 수순에 따라 이 사안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했다면 작금의 정부의 처사에 대한 비교 우위를 점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그러한 자기반성에 대해 국민들도 어느정도 수긍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금의 민주노총 지도부의 모습은 어떠한가?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먼 구태의연한 정치적인 행태만을 보여주고 있다. 신속한 진상규명는 개인적 수준으로 폄하하면서 지지부진하고 있으며, 오히려 계파간의 갈등만 수면 위로 표출되고 있다. 또한 제대로 된 규명이 없기에, 조직 수준의 사후 대책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노총의 수준낮은 모습은 국민들에게 반감과 비판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며, 나아가 진보적 성향의 단체들도 그들이 상대적으로 비판하는 보수단체에 비해 도덕성으로 나을 것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뿐이다. 이는 향후 상당 기간 동안 민주노총으로 벌이는 여러가지 활동들에 커다란 제약이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이미 그러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은 여러 기사를 통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성폭력'이라는 전근대적 수준으로 편향된 젠더 인식으로 인한 질낮은 성범죄를 저지른 간부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 더불어 이번 사태에 대한 조직 수준의 책임을 통감하는 지도부 총사퇴와 대국민사과, 그리고 차후의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통해 큰 폭으로 잃어가고 있는 국민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친비지니스적인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 기구인 '민주노총'의 '민주적인 처리 과정'을 조금이나마 기대해 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비관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정부란 대체 뭐하라고 있는 정부인가?
그들은 철거민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생존권 등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 국민들이다. 무턱대고 정부 정책에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자비한 공권력을 투입하여 일방적으로 진압해야 할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

사회적 약자 계층에 속한 그들의 절규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본 적이 있는가? 불법이니 폭력이니를 외치기 전에 왜 그들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는지, 아니 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인과 관계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법 운운은 그러한 양자간의 합의 과정이 절차적으로 적법하게 진행된 이후에 논해도 충분한 문제다. 또한 그 법이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법인지에 대해서도 심각한 검토가 필요하다. 사람이 우선이지 법이 우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이명박 정부의 70년대 개발독재 시절의 밀어붙이기식 정책에 의해 일어난 비극적인 참사지만, 그 뒤편에는 뉴타운이니 대운하니 따위의 '경제 회생'이라는 허울좋은 명목하에 온갖 범법 행위에 대해 묵인하면서까지, 그들에게 거대한 권력을 쥐어 줬던 돈이면 뭐든 좋다며 기본적인 양심과 도덕을 저버린 다수의 국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을 손가락질 하는 자신을 보며 부디 깨닫기를 바란다.

스스로가 지닌 과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들은 언제고 당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온갖 미사여구를 내세워 권력을 잡겠지.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 당신들의 당연한 요구를 모두 다 들어주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당연하게 의무적으로 보호해야 할 정부가 그들의 목숨까지 앗아가면서도 오히려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며 고작 법치니 엄정대응이니 양비론 따위를 운운하는 오늘날의 현실.

그 모든 것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찬양해 마지않던, 그 박정희 대통령 시절로 회귀하고 있는 듯한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습은 이미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미 그 자체로 비극일 뿐이다.

.....

더불어 고인이 된 철거민과 경찰관 등 6인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히틀러에 의한
홀로코스트를 당했던 유대인.

그들의 이스라엘에 의해
가자 지구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또 다른 홀로코스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무리 어떠한 이유를 갖다 붙인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이 저지르는 짓은 중대한 전쟁 범죄일뿐.

그대들의 믿음 위에 있는 신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추악한 행위에 대해서 말야.

오늘 손에 피를 묻혀놓고 
내일 회개하면 그만인가?

오랜기간 핍박의 세월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의 잔인한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는 
당연한 수단이 아님을 깨닫길.

......

신의 섭리와 절대 보편타당한 진리는
 
결국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갈 뿐이다.


이게 게임에서 심판 매수와 다른 것이 뭐야?

그나마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일 수 있는 가장 큰 기능인 비판적 여론의 형성조차도, 모두 걷어 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전근대적 군사독재시절틱한 폭압적 발상에 그저 어이가 없을 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대체 이명박 정부는 어디까지 막장으로 만들고 싶은 셈인지?

하긴 4년 뒤에 정권을
도로 내놓을 가능성조차 없게끔 작당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걱정도 없겠지. 다음 대선에서는 촛불 문화제 등을 주도한 10대들의 상당수도 투표권을 지닐텐데, 제발 하찮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한표가 얼마나 큰 결과를 불러 오는지 선택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통감할 수 있길.

어차피 정치에서 선거란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하기 위한 의미가 더 큰 법이니. 하지만 그 댓가로의 4년 간의 시간은 어찌보면 아득하게 느껴질만도 하다


 최근 며칠 동안 언론의 헤드라이트를 장식한 사건이 있으니 바로 '노건평 뇌물 수수 의혹'에 관한 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과실에 대해 광범위한 탐색을 펼치던 검찰의 입장에서는 지쳐가던 차에 걷어올린 횡재에 미소가 그득할 것일터다.

 필자의 부모님이 거주하는 집에서는 한겨레 신문을 그리고 필자 스스로는 경향 신문을 읽는다. 주요 신문사들 중 이 두 신문사가 그래도 진보적 성향을 띄고 있다는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경향신문도 최근 노건평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의 수사 보도 내용에 대해 거의 확신에 찬 듯한 논조로 기사를 작성하였다. 무슨 까닭일까.

 물론 진보 언론이라고 해서 덮어두고 노건평 의혹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써내야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진보'라는 타이틀에 내포된 중립적인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명박 정부든, 참여정부든 시시비비는 분명하게 가릴 필요가 있고 그에 따라 보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노건평 의혹에 대한 기사는 과연 그러한 가치를 고수하며 보도를 내고 있는 것인가. 검찰의 보도를 보더라도 노건평씨는 본인에게 집중된 의혹에 대해서는 모두 부정을 하고 있었고, (오늘 신문에는 구치소로 가기 전에 일부 혐의는 인정했다고 한다.) 검찰 역시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채 심증과 관계자들의 증언에만 의존한 상태였다. 시일이 더 지나 수사가 진척되면 정말 구체적인 뇌물 수수에 대한 물증이 밝혀질지도 모를 일이나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요 며칠간 경향신문의 기사는 노건평씨의 의혹에 대해 줄곧 '수수 확정'이 된 듯마냥 당연한 듯한 결론을 내리는 논조로 기사를 보도했고, 어제 사설에서는 참여정부의 도덕성에 대한 준엄한 질타를 날리는 사설을 게재했다. 법원에서 부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증거인멸의 우려와 도주의 가능성 때문에 '구속영장'까지 발부했으니 충분히 그럴만도 싶었다. 적어도 이 사안에 관한한 말이다. 

 법에는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범인으로 간주할 수 없는 '무죄 추정'이라는 유명한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보수 언론이야 이 사안에 대해 애시당초 공정한 보도따위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진보 언론은 명확한 혐의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최소한의 중립적인 기사의 보도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언론이 사실성과 객관성 그리고 공정성을 지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요소이기에, 보수언론과 다를바 없는 검찰의 보도내용과 별다를 바 없는 공격적 기사는 조금은 실망스러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법률적 판단이 유.무죄로 나오는 것과는 별도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내세우던 '도덕성'은 '노건평의 의혹'이 불거져나오는 것만으로 이미 큰 치명타를 입었다. 이는 BBK 등 수많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그래서 상대적으로 도덕적 의무감에 대한 압박을 덜 느낄 수도 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기존의 YS, DJ 정부의 부정부패와도 차별성을 내세웠던 '도덕성'이라는 무기가 한없이 무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국민의 냉소는 다시금 정치 활동의 반경을 넓혀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보폭을 당분간은 제한하게 될 것이다. 검찰이 애초부터 이러한 목적을 지녔다면 그야말로 목표를 초과달성하여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보수언론은 물론 진보언론과도 상당한 마찰이 있었던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일명 기자실 통폐합)등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갈등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번 사안에 대한 보도가 시종일관 그렇게 공격적이었을까. 필자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죽어가는 태양을 되살리기 위한 대원들의 이야기.

사실적인 영상.
철학적인 상징.
앰비언트 음악.

S.F지만 감상적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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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아웃사이더 콤플렉스 독파.


노무현 전 대통령에 호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시각으로 형성되어 있을 노 전대통령의 이미지는 형해화가 되어버릴 수도 있을 정도의 강렬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참여정부에서 내세웠던 개혁과 그로 인한 현실과 그 결과에 대한 괴리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과격하다 할지라도, 분명히 겸허하게 인정하고 반성해야할 생산적인 의제 제기이자 논의라고 본다.

인물 중심의 정치. 증오의 정치.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달라진 위치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방법의 변화. 소신과 신념을 유연하게 굽혀나가며 거시적인 상생의 정치는 언제쯤 이뤄질 것인가. 

날이 갈수록 발전적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이념과 정책의 방향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과도한 정쟁의 악순환과 그 폐혜에 의해 국민의 외면과 무관심의 정도가 확산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의 한국 정치에 있어서 필요한 자기 성찰과 고민의 최대 화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론과 실재.
현실과 이상.
정치와 경제.
민주와 독재.
국민과 주권.

모든 것들이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한 한국 사회 구성원의 관심과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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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 따위는 구별하지 않는다. 그것이 생존법.

...........

스스로 그래도 진보적이라고 자처한다면
갈 길은 까마득히도 멀었다.

인터넷에서 그렇게 소리 높여 불만을 표출하면 무엇할 것인가.

정작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여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기회는
스스로 외면해 버리는 것을.

틀에 박힌 대학입시 교육 제도 하에
초.중.고 학생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은 뭉개지고
미친쇠고기가 뒷거래를 통해 급식으로 제공될 수도 있으며
영어 몰입 교육과 자율형 사립 고교 등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자식을 살아남기기 위해
천문학적인 사교육비가 필요하게 되더라도

가정 소득 상황이 어떠하든
모든 서울 시민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연간 6조원의 막대한 교육 예산을 집행하는
서울시 교육감을 비롯한 교육 수뇌부들이
또다시 어떠한 부정부패를 저지르더라도
그것 역시 '세상은 그런거지.'라며 눈감아 줘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는 그 모든 가능성을 용인하는 결과를 내었으니까.
당신들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이니까.

뭐라고 떠들든
결국 2008년의 대한민국 서울 시민의 민주주의의 수준과 결과는
고작 이것 뿐이다.

...........

'절망'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아까운 현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월 하순의 어느날. 국가기록원 홍보 담당자에게 메일 한통을 받았다. 위에 포스터도 걸어놓았지만 대한민국 '건국 60 주년'을 기념하는 국가기록 특별전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다면서, 학과 차원에서의 홍보를 대신 부탁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점 하나가 대한민국의 '건국 60 주년'이라는 용어였다. 대한민국의 광복이 아닌 건국이라. 왜 하필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거기에 60주년이라면 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1948년 당시 이승만을 주축으로 하는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때였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건국의 사전적 용어는 '나라가 세워짐. 또는 나라를 새로 세움'으로 정의된다. 사실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라는 말 자체는 아주 틀렸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대한민국이 '언제 건국이 되었는가.'라는 문제로 들어가게 되면 이야기가 크게 달라지게 된다. 현 정부가 홍보하고 있는 것과 같이 '건국 60주년'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광복 이후 남한 단독으로 수립된 이승만 정부를 적통으로 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것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는 현재까지 수차례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부동의 1번 조항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처음으로 내세우며, 1919년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 등 독립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최초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임시정부를 구축하였던 역사적 정통성을 부인하는 뜻이 (의도하였든, 그러지 않았든) 함축적으로 포함되게 되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용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제 강점기 시절에 수립되어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선포하기까지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을 때, '건국'이라는 용어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왕건의 고려도 그러했고, 이성계의 조선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함에 있어서 도와준 이들에 대해 '개국공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 '건국공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그들이 '건국'과 '개국'에 대한 용어의 개념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세시대의 서막을 알린 고려는 삼국시대의 고(구)려<이미 장수왕 시절 勾를 빼고 국명을 '고려'로 변경하였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를 잇는다는 뜻으로 국가명을 고려라고 하였으며, 중세의 모순을 해결하며 근세로 나아갔던 이성계의 조선도 국명을 단군 조선에서 다시 가져와 사용하게 되었고, 후에 학계에서 단군의 조선과 이성계의 조선을 구별하기 위해 단군 조선에 '古'를 붙여 고조선으로 명칭하는 것은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만한 역사적 진실이기도 하다.

흔히 민주주의 시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던 왕조 시대의 위정자들 역사관이 이러했거늘, 어찌 작금의 현실에 존재하는 위정자들이란 이렇게도 역사에 무지하고 역사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일까. 

최근의 언론보도를 통해 보면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담긴 '광복절'을 뒷전으로 밀치고,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1919년의 임시정부 수립일도 아니고,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나 역사적 의의가 약하며 남북 분단의 시발점이 되었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일을 '건국절'이라는 낯선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기를 쓰고 국가기념일까지 만들려고 추진하는 세력의 뒷편엔 아니나 다를까 '보수'를 자처하는 '뉴라이트'단체들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이명박 대통령의 정부가 앞장서서 홍보도우미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고.

반면 지난 참여정부 시기에 대통령 소속으로 활동하였던 각종 과거사 위원회는 이러한 잘못된 역사의 흐름을 규명하고 바로잡아보자는 취지에서 추진되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온갖 정치적 공세와 훼방을 당하곤 하였다. 비록 소기의 목적에는 100%  달성하지 못하였을지언정 5년의 비교적 짧은 시간과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성과들을 내고 있다. 그러나 '과거를 잊자'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들을 내년까지 대부분 정리하겠다고 이미 밝힌 상태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그 개념을 어디까지 한정지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부나 일부 단체의 정치적인 색깔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역사학계의 치밀한 연구와 냉철한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역사적 의미'가 담긴 '역사용어'로써 '규정'되어진 후 사용되어야 할 부분인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그러한 고민이 없이 너무나도 단순한 논리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식 홍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부의 하는 짓들이란 하나같이 이렇게 답답하고 한심스러운 것들 뿐이다. 자신들의 과오와 치부를 덮기 위해 당연한 역사적 진실의 규명은 물론 정통성까지 훼손하는 그네들의 탐욕과 망상을 보면, 참으로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지적하기 이전에 대한민국은 이러한 교묘한 방식을 통해 스스로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크게 반성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비오던 날 밤에 보았던 GP506.

나름대로 잘 짜여진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였다.

........

上命下服 이라는 군대의 필연적인 속성으로 인한
 
폐쇄성과 동시에 부작용을 꼬집은듯한 공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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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크게 흥행했던 조폭영화였던 '친구'에서 장동건이 맡았던 '동수'에게서 이런 명대사가 나온다.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이 대사는 당시 큰 유행을 불러 일으켰으며 지금도 심심찮게 사용되곤 한다.

지난 6월 중순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에 의해 '대통령 기록물'을 '유출'한 것처럼 되어버린 노무현 전 대통령도, 한달이 넘도록 현 청와대와 '기록물'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을 겪으면서 이같은 이야기를 내뱉을만도 할 법하다. 아니 이미 그러한 심경을 담은 편지를 이명박 대통령 앞으로 발송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당한 권리와 법적 유권해석을 바탕으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열람권 보장'이라는 것이 시스템으로 구현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자신이 직접 생산했던 '기록물'들을, 결국 갖은 언론 플레이와 권력을 앞세운 압력을 견디다 못해 성남의 대통령 기록관에 반납하고야 말았다.

현 청와대가 그렇게 주장했던 '무단반출'한 기록물들을 제자리로 되돌려줬으니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고 왜 그렇게 꼬여있는지 몰라도, 현 청와대는 단지 '사본의 반납'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나보다. 이젠 아예 그 기록물들을 볼 수 있도록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업무 및 기록관리시스템이었던 'e-지원'을 구축한 서버까지 내놓란다.

이것이야 말로 적반하장격이자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었더니 보따리까지 내놔라하는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본 기록물 소유'에 대한 현 청와대에서 주장하는 '불법행위'이며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을러대고 있는 모습은 -참여정부 말기에 이와 관련된 현행법에 대한 법제처의 법률적 검토와 담당기관이었던 국가기록원의 '한시적'이라는 양해까지 얻고 '사본'을 소유할 수 있던 과정을 보았을 때- 그저 동네 협잡꾼과도 같이 우위에 있는 권력을 바탕으로 한 협박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본을 돌려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자비를 들여 구축한 서버까지 되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현재까지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이기도 한데, 데일리 서프라이즉 취재기사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서버'까지도 '사본 기록물'과 함께 모두 반납한 상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이미 자신들의 주장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어냈다. 이미 반납한 것인데도 계속 '반납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되돌려준 하드를 과연 확인하고 나서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르쇠'식의 일방적인 정치 공세인가? 그도 아니면 '로그인 사태'에 버금가는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는 컴맹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정말 코믹한 점이 무엇이냐 하면 현 청와대가 반납을 요구하고 있는 'e-지원'시스템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아이디를 제공하였으며, e-지원 개발에 참여한 비서진을 비롯해 5명의 명의로 국유특허(명칭은 '통합 업무관리시스템 및 이의 운영방법'이며, 직무상 발명을 촉진하기 위한 공무원 직무발명제도에 따라 진행된 국유특허의 모델케이스였음)를 받은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특허 출원까지 되어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당시 김만수(金晩洙) 청와대 대변인은 "경제적 목적이 아닌 공무원직무 보상에 관한 규정에 따라 진행된 국유특허라서 앞으로 이를 필요로 하는 기관이나 개인, 단체가 무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즉, 이러한 e-지원의 성격에 비춰봤을 때, 사비로 구축한 독립 서버까지 모두 내놓으란 이야기는 IT에 대해서 모르는 무식함에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법적으로 보장된 전직 대통령 열람권을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이거나, 그도 아니면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기록을 돌려받는 과정의 이슈화를 통해 무엇인가 정치적 농간을 부려보려고 하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미 취임 직후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의 작품이기도 한 e-知園 시스템을 위민(爲民)시스템으로 개명하며 전 정부의 흔적을 지워버렸으며, 그와 동시에 e-지원 시스템의 핵심 기능이기도 하였던 '문서관리시스템'(이 기능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은 비서진들의 업무 보고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비롯해 칭찬과 질책 등 일일히 코멘트를 달았으며, 이는 그대로 전산화되어 '대통령 기록물'에 고스란히 남아있게 된다.)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관리 기능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직접 만나 보고를 듣는 '독대'와 같은 취향 탓인지 본래의 기능에서 사실상 50%가 넘게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한다.

이처럼 국가 운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위해 도입했던 기록의 생산 및 관리 시스템인 'e-지원' 시스템을 개발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대통령기록물 법'과 이에 근거한 이관 프로세스는 참여정부 초반부터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하여 관계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하였던 것으로, 그 어느 국가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민주적이며 최선진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발전적인 방향의 개선은 커녕 오히려 시스템은 물론이고 법까지 그 모든 것들이 고작 구태의연한 '정쟁'의 소재로 사용되면서, 이렇게나 급속도로 무너지게 될 줄을 그 어느 누가 예측하였을까.

비록 기록물 관리에 관한 학문적 이론은 아직까지는 서구 유럽과 호주 및 북미에 비해 뒤쳐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자정부라는 테마에 걸맞는 전자적 기록관리시스템에 있어서는 그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아깝지 않을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지원과 같은 시스템을 통해 업무영역에 있어 전 과정을 전자기록화 함으로써 '투명성'과 '책임성'을 담보하여 한층 더 성숙된 정치와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전자적 기록관리의 장점들을 계속 살려나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생산된 기록들은 일정시간의 법률적 보존 기간을 거쳐 선별적인 공개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모든 기록에 담겨진 '정보'들을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되돌려 준다는 점에서 21세기 민주주의 국가가 갖춰야 할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작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통령 기록물을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과 법률 그리고 그를 존중하는 문화까지 모두 뜯어고쳐내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청와대가 옛 시절로 시계를 부단히 되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기록관리학을 공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 말기 대통령 비서실에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기록물의 이관 작업에 5개월 가량 참여하였던 필자의 경험과 기억으로는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참으로 기가 막히며 한심스러울 따름일 뿐이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또 어디로 가는가.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명제에 대한 진지한 풀이를
 
단순하면서도 흡입력 있게 진행시켜갔던 놀라운 영화.

......

스스로 생각할 때
생각이 흐름이 편향적이지 않고
지적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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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일본의 태도가 대다수의 국민들의 민족정서를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 잊을만 하면 다시 끄집어내어 문제를 야기하고 다시금 사과하는 그간의 일본의 근성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이다. 그런데 이번 문제는 지금까지의 일부 우익 정치인들의 '망언' 수준과는 그 격을 달리한다. 물론 망언 자체도 적잖은 정치적 함의 -독도에 대한 일본 우익의 관점이라든가- 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한국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하면 '개인적 차원'으로 물러서는 수준에서 대부분 수습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한 개인의 '망언' 차원에서 문제가 터진 것이 아니다.

다름이 아닌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관련 문구를 명기를 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해설서에서  독도는 물론이고 러시아와 여전히 영토 분쟁 중인 북방의 4개의 섬과도 유사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독도 문제 역시 북방 영토와 마찬가지로 자국의 섬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이 불법 점령하고 있는 듯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이 해설서는 학습지도요령처럼 어떠한 법적인 구속력을 지니고 있진 않지만, 실제 교과서 편집은 해설서를 참고해 이뤄진다고 한다. 이는 예전에 후쇼사의 왜곡된 검정 교과서와는 그 파급력이 또 다르다. 당시에는 일선 학교에서 교과서로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해설서에 실리면 무조건 가르쳐야하기 때문이다. 즉 왜곡된 정보를 Fact인양 자국민들과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일본의 수작은 날이 갈수록 거침없어지건만 한국의 대응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인 2월 29일 이미 통합민주당의 김원웅 의원은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명기한 지도를 제작하여 시판하기 시작하였는데도, 국가적 차원에서의 대응책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실제 한국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어떠한 공식적 반응도 없었다.

또한 4월 19일 중앙일보의 권철현 신임 주일대사의 인터뷰 기사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권 대사는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과거에 속박당하지도, 작은 것에 천착하지도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 "낡은 과제이면서도 현안인 독도,교과서 문제는 다소 일본 쪽에서 도발하는 경우가 있어도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드러내지 말자"는 이 대통령의 말을 전했다. 역시 같은 날 4월19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에서는 "주일한국대사관, 독도·동해 입장 빠졌다 복원"이라는 제목으로 주일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서 생긴 일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기사에는 "주일한국대사관이 홈페이지에 한일관계에서 민감한 현안인 역사교과서, 독도, 동해표기, 북한핵 문제 입장에 관한 본문 내용을 모두 삭제했다가 논란이 일자 내용을 복원시킨 것으로 확인됐다."고 언급하고 있다.

주체적이고도 당당하게 대응해야 할 문제에 대해 얼마나 소극적이며 안일하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취임 이후 벌어진 일본과 독도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인식이 어떠한지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들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한 것이 바로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4,766명 친일명단 발표를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은"우리가 일본도 용서하는데"라며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 한다", "이런저런 과거사청산위원회 분들은 과거 정부에서 임명된 분들", "위원회들을 정비하려면 법을 바꿔야 한다." 등의 발언들을 했었다. 이 당시에도 매우 거센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역사 인식이며 한일 관계에 대한 현실 인식인 것이다.

그의 역사 인식 부재는 비단 한일 관계뿐만이 아니다. 대선 후보 시절에도 반독재.반유신 투쟁이었던 부마항쟁을 멋대로 '부마사태'라고 언급했는가 하면,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광주사태'라는 뉴라이트 식의 발언을 하였고,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을 '안창호씨', 일왕을 '천황'이라고 언급하는 등 이미 이명박 대통령의 역사 의식은 "부재중"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얽힌 역사는 독립된지 63년이 지난 현재에도 청산되지 않은 부분들이 대단히 많다. 독립 당시부터 이미 첫단추를 잘못 끼워 맞췄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동시대의 비교대상이 되곤 하는 독일과 같은 진심어린 사과와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그리고 다시 지난날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반성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전후 일본은 언제나 강성했던 제국주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그 시절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국가이다.

물론 우리도 프랑스와 같은 과거에 대한 확실한 청산을 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확실하고도 깨끗하게 매듭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되고 한일간의 국교를 수립한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한국 현대사의 우울한 단면이다. 그리고 자칭 우익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국익과 직접 연관되는 문제에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 아닌가. 일본더러 독일처럼 반성하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프랑스처럼 과거 청산을 하는 것 역시 당연하지 않겠는가.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논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신사참배와 태평양 전쟁 등 군국주의 시대의 옹호. 그리고 흔히 위안부라고 불리우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 어느 하나 경계를 풀고 진심으로 믿어주기에는 일본의 행태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한 일본을 상대로 멋대로 '우리가 일본을 용서하는데'라는 1인칭 주어의 표현으로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견해와 감정을 대변하는 듯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실용과는 멀리 떨어진 안이하고도 경솔하며 천박하기 짝이 없는 생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가볍게 보인 댓가가 바로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드러내놓고 야욕을 보여주는 '건방진 화답'이다.

한일관계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끝났다.' 또는 '용서한다.'라고 선언해서 정말 '끝'이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해방 63년이 지난 오늘날.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본의 행태를 보았다면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는 끝나지 않은 과거와 작금의 현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용서받을 것은 확실하게 받고나서야 용서를 하는 진실로 '실용'에 어울리는 대일 정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에 부응을 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여전히 미덥지가 못하단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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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참여정부 시절 생산된 자료의 유출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료'가 아니라 '기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맞다. 청와대를 비롯한 공공기관과 영역에서 업무 수행과 관련하여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해 말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임 중에 생산했던 기록들을 고스란히 남겨 그 중 장기 보존을 할만한 가치를 지닌 기록들의 진본 825만건을 국가기록원 산하 대통령 기록관으로  이관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도 기존의 기록물관리법에 의해 '기록'을 이관하였지만, 그 질적 및 양적 측면에서는 참여정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 이 문제는 언론에서 연일 보도하는 것만큼 심각한 사안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진 사본에 대한 문제는 담당부서인 국가기록원과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한 가지 문제만을 해결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 정부와 청와대가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국가기록물의 무단반출 여부'이다. 일단 이것에 대한 관련 법령부터 살펴보는 것이 우선적일 것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에관한법률 : http://www.lawnb.com/lawinfo/law/info_law_searchview.asp?ljo=l&lawid=00686650)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란.

2007년 4월 27일 제정된 '대통령기록물관리에관한법률'은 제정 목적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기존까지의 정권 교체기마다 이뤄지는 무분별한 '기록'의 파기를 방지하고, 국가적 및 역사적 가치가 높은 대통령 기록물들을 보호 및 보존하고자 도입된 법률이다. 그리고 이는 향후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시기에 적극적 공개를 하여, 국민의 활용과 더불어 국정 운영에 대한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자 함인 것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하여 참여정부 기간 내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기록관리정책'과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것으로, 한국의 공공기관 기록관리의 성숙도를 알려주는 척도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연 그 역대 그 어느 정부에서 이렇게 자신들의 정책 집행 과정을 소상히 기록하여 남기고자 하였던가. 과거 정권 획득을 위한 정치를 했던 그네들로써는 훗날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정책 집행 과정에 대한 '기록'은 아예 생산하지 않거나, 남겼다고 하더라도 종국에는 무조건적으로 파기해버려 정권에 대한 증거를 인멸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반복되었던 악순환의 고리를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끊어내기 시작했다. 1999년 2월 최초의 기록물관리법인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으로 '기록관리'에 대한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며, 참여정부가 들어선 2004년에는 학계의 꾸준한 관심과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로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로 한층 더 범위가 넓어지고 보완된 법률로 개정이 되었다. 더불어 대통령 비서실과 국가기록원 그리고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산하 국가기록관리혁신위원회를 설치하여, 기록관리혁신에 대한 4대 목표와 9개의 아젠다를 설정하여 임기 내내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정부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였다.

그 결과물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비점을 보완하여 법령이 개정되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청와대 업무 및 기록관리시스템인 e-지원을 개발하였고, 마침내 2007년 대통령 기록물을 관리할 수 있는 '대통령기록물관리에관한법률'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한 이를 이관받아 관리할 수 있는 '대통령 기록관'이 성남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논란의 핵심. '국가기록물의 무단반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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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임기 중에 이러한 행정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 차원의 '기록관리혁신정책'을 주도했던 노무현 대통령이건만, 정작 퇴임 후에는 현 정부에 의해 '국가기록물의 무단반출'이라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처럼 '중앙일보'를 비롯해 일부 수구 언론들에 의해 연일 보도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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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이 문제에 대해 중심적으로 풀어가야 할 행정자치부 산하 국가기록원의 정진철 원장은 이번 정부 출범 초인 3월에 새로 부임된 인물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료 회수'라고 언급함으로써, 적어도 지난 참여정부 시절 말기에 진행된 대통령 기록물의 성격과 이관 상황에 대해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졌다.

법률에도 규정되어 있는 내용이지만, 지난 참여정부에서 생산된 대통령 관련 기록물들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지정', '비밀' 등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이는 각각의 종류에 따라 15년에서 최대 30년까지 열람 및 공개가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이 기록들의 열람에 대해서는 현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도 볼 수 없으며, 오직 16대 대통령 기록물의 생산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업무와 관련하여 대통령 기록관장에게 허가받은 대통령 기록관의 구성원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문제와 예산 배정 문제에 부딪쳐 재임 기간내에 결국 전직 대통령의 열람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기록물법'에 보장된 전직 대통령의 열람권이 보장되는 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참여정부 시설 생산했던 대통령 기록물에 대한 사본 1부를 복제하여 사저에 당시 사용하던 e-지원 시스템을 구축하고 필요할 때마다 열람하는 임시적인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때문에 청와대와 일부 수구 언론에서 주장하는 '자료의 무단 유출'이란 표현은 전혀 적절하지 않으며, 분명히 모든 진본은 대통령 기록관으로 이관하였다.

물론 현재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의 사본 확보에 대한 부분은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본 확보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에 의한 프로세스가 처음으로 진행된 상황에서 '열람권 확보'가 구축되지 않는 현실적인 환경 하에서의 '임시적인 방편'이었으며, 이미 노무현 전 대통령 측에서도 이 '열람' 시스템이 구축되는 대로 사본을 '반환 내지는 파기'를 하겠다고 재임 말기부터 논의를 하여 인수위 시절에도 협의를 했던 내용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정권의 인수와 활용에 필요한 기록들은 따로 분류하여, 이미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17대 대통령직 인수 위원회와 여러 차례 논의가 되었으나, 정작 당시에는 인수위는 참여정부와는 차별되는 정책 발표에 여념이 없었으며 그들에게 넘겨주겠다던 참여정부의 기록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는 국민일보의 보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결국 이 문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요구하는 대로 '전용선에 의한 전직 대통령의 열람권 허용'이라는 문제가 기술적으로 해결되는 동시에 모두 해결되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가 6월 초순부터 이 문제를 가지고 문제를 삼기 시작했다. 국가 기록에 대한 '무단 유출'이라는 무식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참여정부 시절 구축된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과 그 프로세스에 대해 한번만이라도 확인했다면 도저히 이런 식으로 사실을 호도하여 주장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측이 소유하고 있는 참여정부 시절 생산된 대통령 기록물 사본에 대한 회수를 주장했다. 이는 이러한 국가기록관리 시스템과 프로세스에 대해 공부를 하거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단히 정치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 기록물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강력한 정치적 파급력을 지닌 기록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교체시 정치보복이 서슴없이 자행되던 과거에는, 언제나 대통령 퇴임과 더불어 자신들의 정치 및 정책적 과오도 포함된 방대한 양의 정부 및 대통령 기록들이 대부분 소실되거나 사저로 이동되었다.

이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역대 과거 정권 기간동안 생산된 대통령 기록물은 이승만 7400건, 박정희 3만7600건, 전두환 4만2500건, 노태우 2만1200건, 김영삼 1만7000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기록물은 이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엄청난 양인 825만건이라는 수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왜 재임시절 '역사적 평가'에 대한 언급을 자주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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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통령 기록물의 성격상 당연히 전직 대통령이 생산한 기록물에 대해 현 대통령과 정부가 '국가기록'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유권'과 '열람권'까지 주장하고 나선다면, 대체 어떤 대통령이 자신의 치부까지 담긴 기록을 고스란히 남기겠는가. 현 청와대가 요구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지금과 같은 작태는 취임 직후 '로그인 사건'과 더불어 지난 10년간 국가기록관리시스템이 어떻게 진일보하여 왔는지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전혀 준비는 물론이고 인식도 하지 못했다는 반증일 따름이다.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측 인사들이 청와대에 들어가서 보니 참여정부의 기록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당황스러웠을 수 밖에. 그래서 뒤적거려보니까 그 기록이 사저로 이동되었고. 대통령 기록관에 이관된 것은 법으로 볼 수 없으니까 사저의 기록을 유출이라고 호도하고 여론몰이를 해서 되찾아와 꼬일대로 꼬인 대내외 정국에 대한 해법을 찾아볼 요량이었겠지. 물론 털면 먼지안나는 사람 없다고 뒤져서 뭔가 꼬투리를 잡으면 국내 정국 전환용으로 더욱 좋고. 겨우 이 정도 생각으로 접근했을 것이 너무나 뻔하지 않는가. 어쩌면 집권층이 이렇게나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다를 수 있을까. 그저 한숨만이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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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부활한 대통령 기록물 관리의 유지를 위해.

세계 기록유산으로도 지정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왕조 시절 국왕이 붕어하면 사관이 기록한 사초와 임금의 거동 등과 관련된 시정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직필을 바탕으로 잘잘못을 모두 가감없이 기록하였기에 대신은 물론 신임 국왕도 수정이나 열람을 요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러한 관행을 존중하였다. 자신들의 공과는 단지 기록을 바꾼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역사'라는 이름 속에서 평가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나 권신이 강압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하는 경우에는 직필을 했던 사관을 비롯한 다수의 정치적 희생자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이는 그 기록이 지닌 성격상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연산군 시절의 '조의제문'으로 빚어진 무오사화가 그러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대는 달라지고 정치제도도 바뀌었지만 대통령 기록물의 성격은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전임 통치자가 최대한 가감없이 남긴 기록물에 대한 성격을 감안한 법적 보장도 무시하고 법률을 개정한다느니, 검찰에 고발하겠다느니의 치졸한 협박을 통해 모두 내놓으라는 식의 발상은, 차후 그 기록에 담겨진 정보를 공유하고 활용해야 할 국민들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전근대적인 국가 권력의 폭압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청와대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의 임기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4년하고도 절반 정도 남았을 뿐이다. 지금 정략적인 목적을 위해 제멋대로 법을 뜯어 고치고 이제서야 다시금 정착하기 시작한 기록관리에 대한 문화를 무너뜨린다면, 당신들 역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될 때 노무현 전 대통령만큼이나 떳떳하게 자신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는가. 대답은 뻔한 것이 아닌가. 결국 한국의 정치문화는 과거의 암울한 시대로 퇴행하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안에 대해 수많은 청문회가 열려도 '기록'이 남지않아 진실을 확인할 수 없고 증명할 수가 없어 의혹과 추정만이 난무했던, 그래서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던 그 시절로 말이다.




대한민국의 자칭 우파 또는 보수주의라는 세력의 기원은 그리 멀지도 않은 일제강점기 시대라는 아픈 역사의 부작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파'이거나 '보수주의'는 아니다. '우파' 내지는 '보수주의'라며는 자신이 소속된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국심과 긍지가 매우 높고 또한 국가적 권익을 우선시하며 급격한 변화를 지양하고 사회현상의 유지를 우선시하는 부류를 의미한다. 여담이지만 미국의 부시정부에 포진했던 '네오콘'들은 이러한 경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래. 우파거나 보수주의라면 응당 이러한 지향성을 가져야 맞다.

그렇다면 지난 일제강점기의 과거 시절 일신의 안위와 출세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서슴없이 팔아넘기던 '친일'행적을 서슴치 않았던 소위 '친일파'들. 과연 진정한 의미의 대한민국 '우파' 혹은 '보수주의'라면 그들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리고 강대국이 부당한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할 때. 그것이 국가와 민족에 절대적으로 위협와 위해가 될 때. 과연 진정한 의미의 대한민국 '우파' 혹은 '보수주의'라면 어떻게 해야하느냔 말이다.

..........

불행하게도...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이러한 진정한 의미의 '우파'나 '보수주의'를 갖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 일제와 결탁해 민족을 핍박하며 '친일행위'를 꺼리낌없이 저지르던 그들은 해방 이후에 '민족반역죄'로 그에 걸맞는 처단을 했어야 옳았다.

나라를 되찾으려 일신의 안위와 생명도 아끼지 않았던 수많은 독립 투사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35년이 넘는 고난의 세월을 거쳐 되찾은 나라의 정체성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유야무야' 넘겨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이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마땅히 해야만 할 역사적 당위성을 지닌 일이다. 2차 대전 이후 독일 치하에 있던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의 각 국가들이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을 어떻게 단죄하였는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갓 독립을 쟁취한 대한민국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공백을 대신한 '점령국'과도 같은 행동을 했던 미군정의 실무적 필요성에 의해 대다수가 구제되었고, 그들은 그렇게 새로운 힘의 상징과도 같았던 미국에 의존하여 '친일'에서 '친미'로 갈아탔던 것이다.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투쟁을 주도하고, 해방 이후 귀국하여 강대국의 이념대립으로 분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38선을 끌어안고 죽겠다'고 일갈하며, 자주독립을 꿈꾸던 '백범 김구'선생 당연하고도 원대한 꿈은 '빨갱이'로 비난받으며 흉탄에 의해 쓰러져 갔다. 그 외에도 많은 좌우합작을 통한 단일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등을 비롯해 합리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암살되거나 탄압당했다.

반면 일제시대 머나먼 미국에서 일본 대신 미국의 통치를 요청했던 이승만은, 그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 하나에 의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하고, 대다수의 친일파들을 활용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는 이렇게 시작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렇게 친일에서 친미로, 그리고 다시 이승만의 하수인들로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기형적인 집권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국내의 이념대립을 남북간의 대치가 극에 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은 모조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탄압하였으며, 이러한 정권유지 수단은 이승만 정권 이후 등장하는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30여년간 군부독재의 가장 효율적인 통치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이 일컫는 '좌파' 또는 '빨갱이'와는 반대되는 개념에서의 '우파' 또는 '보수주의'가 되어간 것이다.

..........

그 군부독재마저도 문민정부 출범으로 종식된지 15년이 지났고, 지난 10년간 김대중과 노무현 두 명의 대통령이 한때는 '빨갱이'소굴이기도 했던 북한의 국방위원장이자 실질적 지도자인 김정일과 두 번씩이나 포옹하며 남북평화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빨갱이'라는 구호들이 난무한다. 바로 자칭 한국의 우파 또는 보수주의라고 외쳐대는 세력들 속에서.

친일 인명 사전 발간과 관련된 예산을 전부 삭감해버리고 일제시대 반민족행위 진상을 규명하자는 법률을 누더기로 만들었던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지난 2004년 미국 장갑차에 의해 두 명의 소녀가 희생되었을 때 침묵을 넘어 미국을 옹호하던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6.15 선언은 규탄하면서도 8.15에는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이 그렇게 만병통치약처럼 외쳐대는 '빨갱이'를 막기 위해 징집된 병사가 군에서 의문사를 당했을 때, 진상규명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의문사 관련 법률 개정마저도 거부했던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2008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위험성을 지닌 광우병 위험 물질을 지닌 미국산 쇠고기가, 아무런 제제조치 없이 수입되는 것에 대한 다수의 국민들이 반대 의사 표시 및 재협상 요구 운동을 벌이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주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좌파'와 '빨갱이'가 선동하고 있다고 서울시청 앞에서 찬송가를 외쳐대며, 조중동을 옹호하고 MBC와 KBS에 앞에서 가스통에 불붙이는 폭력시위를 주도하고, 여성에게 각목을 휘둘렀음에도 처벌받지 않는 그들은 대체 누구냔 말이다.

.........

불행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는 '우파'나 '보수주의'따위는 단연코 없다. 단지 그 자리를 수구꼴통들이 채우고 있을 뿐이다. 그저 매국노의 후손들이 건국 이후 누려왔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사리사욕의 이기심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그 앞에 국가와 민족은 없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하나의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강한 자에겐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겐 끝없이 야비해지는 그들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우파' 또는 '보수주의'라고 부르짖는 세력의 진실된 모습이다.

이들의 뿌리는 깊다.

그나마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라고 불러줄 수 있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연달아 집권하고 나름대로 대립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지지의 여부를 떠나 지난 대선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어준 대한민국 국민들은 깨달아야 한다. 상대는 단지 이명박 대통령 개인만이 아니다. '우파'니 '보수'니 하며 진실을 은폐하고 여론을 호도하며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 최우선적으로 혈안이 되어 있는,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이 이명박 정부와 여당 뒷편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 대다수가 올바로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참정권과 투표권을 활용하여 이들을 권력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위치에서 끌어내릴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진실된 의미로서의 '우파' 또는 '보수주의'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며, 유럽이나 미국 부럽지 않는 '보수'와 '진보'의 정책 대결이 어우러지면서도 국민의 여론과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한층 성숙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대선 결과를 뼈저리게 반성하고 2008년 어려운 상황에서 일어난 촛불은, 이러한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다.



이번 정부가 들어선 이래
대한민국의 헌법에서 규정하는 삼권분립이 무색할 정도로
행정부의 독주와 그에 동조하는 여당.

현재와 같은 대통령을 정점으로 행사되고 있는
독재적 권력을 견제해야 할
제도권 내의 야당 세력은 극명한 열세와 와해로 인해
그 역할을 전혀 해주지 못하고 있고

국가권력을 국민과 함께 견제해야 할 언론 역시
지극히 권력지향적인 일부 족벌 언론의 '정권 지지 및 물타기'를 남발하여
대다수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국민 다수의 뜻이 전혀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2008년 대한민국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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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올라온
중앙일보의 촛불 문화제에 대해
'촛불을 꺼야'가 58%라는 여론 조사 결과 역시
그간의 행적을 감안한다면
무엇을 근거로 이런 수치를 믿어야 하는지
의심만 증폭될 뿐이다.

일단 신뢰할 수 없는 여론조사 결과일 뿐이며
또한 이러한 결과가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실상 적어도 남은 4년 8개월동안
대한민국에서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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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촛불 문화제에서의 정치적 이슈에 대한 불참'선언은
어떠한 진의에서 발언을 하였고
또 어떠한 과정에서 실제와 달리 왜곡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에서 차지하는 대학의 위치.
최고의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으로서의 위치.
대학 중에서도 서울대의 위상.

그리고 현재 '촛불 문화제가 함의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의미'를
감안한다면

의도와 진의야 어찌되었든
얼마든지 언론에서 입맛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어버린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저딴 발언은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서 했어야 했다.

비록 '광우병 유발 쇠고기 수입반대'로 시작되었지만
50여일이 넘게 꺼지지 않는 '촛불'은
이명박 정부가 '민의'를 외면한 채 일방적으로 추진하려는
다양한 사회 정책까지 확산되었음을 정녕 모르고 한 말인가?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고
대학생 역시 본분인 '학업에 충실'하는 것은 맞지만


그만큼이나 사회에서의 대학이 요구받는 역할에 대한 책임과
대학생으로써 국가적 쟁점 사항에 대해
충분히 자기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라는 과정를 통해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된다는
아주 간단한 논리를 왜 모른단 말인가.

정치를 외면하고 정책만 바라보는 것은
이미 버스가 떠난 뒤 손을 드는 것과 같다.

이런 '정치'가 지닌 정치적 의미를 파악한다면
다소 미약해지나마 꺼지지 않고 있는 '촛불'의 의미 역시
거기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명박 대통령의 2번에 걸친 대국민 담화와
미국과의 추가협상으로 뭔가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입'으로만 이야기 하고 있으며
'추가협상'을 통해서도 검역 주권과 건강권은 여전히 보장받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 와중에 민영화를 선진화로 각 방송사 사장에 측근들을 임명하며
언론과 인터넷을 통제하려는 움직을 보이고 있다.

정권 초반부에 이러한 권력의 독재화 과정을
막지 못하고 지켜만 본다면

앞으로 남은 기간 더 큰 피해를 입을 사람들은
절대 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

바로 당신들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우리가 꾸준히 정치와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며
'촛불'을 꺼트릴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끝이 없다.

이 정부에 있어 잘못된 것은
단지 '광우병 문제'만이 아니다.

그 동안의 정부의 일방적이고도 잘못된 정책을 지적한
수많은 국민들의 목소리에 대한 해답이라고는

진심으로의 '소통'을 통한
합리적인 정책의 제시가 아닌


겨우 80년대식 '언론 통제'를 통해
나아가 국민의 의식과 의사 표명을 '통제'하려는
군부시대의 독재적 발상 뿐이다.

대선과 총선을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움켜쥔 그들에게
이미 그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인 것이다.

......

그래서 이후에도
이 정부가 추진하려는 중요한 현안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의지의 표명이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시기다.

21세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병신같은 정부와 여당을 원내 1당의 국회로 만들어준
원죄를 씻기 위해서는

남은 4년 8개월의 기간.

나아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있어
철저한 권력 견제는

더는 권리가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낸 현실을 해결해야 할
의무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인식수준에 따라
그 발전하는 정도에 차이가 나며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주권자인 국민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얼마나 잘 행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지난 대선 국민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길 원했으며
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기세였다.

그리고 결국은 딱 그 수준에 맞는 인물을
대통령직에 앉혀 놓았고
자신들의 주머니에 무언가 콩고물 하나라도 더 떨어지길
목놓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그들에게 되돌아 온 것은

한반도를 두쪽내는 대운하의 무조건적인 추진 재천명
강대국과의 비굴한 조공 외교와 미친 쇠고기의 무제한 수입
온갖 공공재에 대한 민영화 추진

그리고 이러한 정책에 반발하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들의 권리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까지

어떤가?

당신은 당신이 기대하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았는가?
얻고자 했던 것들을 조금이라도 얻었느냔 말이다.

그를 지지한 이들과
누가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졌던
방관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오늘날의 모습은
지난 대선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직접 그려낸 자화상인 것이다.

.......

민주주의를 잃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것을 다시금 되찾아오는데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피와 땀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고금의 역사 아니 그렇게 멀리 가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의 현대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제발 오늘 이 시간들의 소중한 가르침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대의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써

자신 스스로가 어떠한 의식과 신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를 가장 가깝게
반영해 줄 수 있는 정치 지도자에게
자신이 지닌 뜻을 위임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당당한 행사.

무엇보다도 그 소중한 권리를 위임받을 그가
어떠한 정치적 신념을 지니고
그 아수라장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그 어떤 정치적 감언이설보다도
가장 기본적이자 가장 중요한 덕목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길 바란다...

........

이 정부에게 기대할 것이 있다면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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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1조
작사.작곡 : 윤민석


2008년 5월 31일 새벽부로

대한민국은 이명박의 나라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이명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들을 짓밟아버림으로써
여실히 보여주었다.

......

이제 그렇게 잃어버린
대한민국 헌법 1조를 되찾기 위한
국민들의 저항이 시작될 것이다.


Can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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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거제 대우조선 파업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체부검과 임금협상을 도와주다
당시 노동법의 대표적 독소조항인 '3자개입 금지' 혐의로 구속된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前 대통령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반대 촛불 집회 당시
흘러나왔던 민중 가요 

너흰 아니야.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동안
당신께서 처리했던 역시 모든 사안들에 대해
'옳다'라고 할 수만은 없고
아쉬운 부분들 역시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처럼
더디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을 위시하여
현 정부 및 여당과 수구 언론들이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그저 역겨울 따름이다.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다만 지난 탄핵 사태를 경험하면서
한층 성숙해진 민주 시민 의식을 바탕으로 한 촛불집회를
문화제의 수준으로 한단계 도약시키고 있는

국민들의 모습에서 그래도
'희망'의 불빛은 남아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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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당시 탄핵을 반대하던 촛불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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