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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는 명장인가.


사실 근래에 삼국지연의에 내용에 대한 재평가 작업, 즉 소설적인 장치를 제거해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여 인물 및 사건을 평가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일반화된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제공하고 있는 삼국지 상의 인물은 역시 중국에서 '군신'의 지위까지 오른 '관우'와, 삼국지 상의 최대의 악인으로 묘사되던 '조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Daum 삼국지 천하와 삼국지 카페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우는 명장인가?’에 대한 논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삼국지연의에서 모습만으로 관우를 완벽한 무장이라고 규정을 내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춘추라는 책을 읽고, 상대적으로 장비보다 침착하고 냉정하며, 유비가 제갈량이라는 참모를 얻기 전까지는 언제나 전장에서 조언을 구하는 믿음직한 의제로 그려지곤 했다.

 

1. 관우에 대한 자료


‘관우는 명장인가.’


이 질문에 대해 ‘예’ 혹은 ‘아니오’ 라고 단정을 짓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가 관우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소설적 요소가 가미된 ‘삼국지연의’라는 소설과, 관우 생애에서 상당부분 누락되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 관우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정사에서의 관우는 안량을 참살하고, 장판파에서 유비의 도주를 도우며, 213년 익주를 공략에 어려움을 겪던 유비를 돕기 위해 제갈량을 비롯한 장수들이 출전하자, 적벽전 이후 차지한 형주 남부를 진수하게 된다.


그리고 한중전이 촉의 승리로 끝난 219년. 관우가 북진을 시도하여, 우금을 격파하고 번성을 포위하여 조조가 천도까지 고려하였으나, 위의 책략에 의한 손오의 형주 기습으로 일거에 형주를 상실하고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다가 사로잡혀 사망하게 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일단 정사를 놓고 관우를 평가하기에는 그 근거자료들이 너무나 부족하다. 상황설명도 생략되어 있고, 대략적인 전개과정과 결과만 기술되어 있다. 때문에 이러한 사서에서의 공백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 역시 일정 부분 참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하 글은 정사와 연의의 혼합)


2. 명장의 자격 조건.


일반적으로 명장이란 말 그대로 이름난 장수, 또는 뛰어난 장수를 의미한다. 이 정도의 정의라고 한다면 관우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우를 논함에 있어서 ‘명장’이라는 정의에 대해 손자병법에서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며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다.


일찍이 손자병법의 손자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이것은 군사들이 따를 수 있는, 즉 절대 복종할 수 있는 자질과 마음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지도자는 반드시 ‘지(智)·인(仁)·용(勇)·신(信)·엄(嚴)’의 다섯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지도자와 부하들 사이는 마음으로 친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과연 관우는 이러한 명장의 구체적인 요건을 얼마나 구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관우의 용(勇)·신(信)·엄(嚴), 즉 관우의 무력과 신의 그리고 엄격함에는 명장의 요건에 근접한다고 판단하고, 특히 지(智)·인(仁)에 대해서 논하도록 하겠다.


3. 지(智)


예전에는 관우를 일컬어 흔히 ‘문무겸장(文武兼將)’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나 ‘명장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불어 관우를 명장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관우의 문무겸장 이미지는 아무래도 연의 상에서 춘추라는 역사서를 암송할 정도이고, 후에 제갈량을 영입하기 전까지, 언제나 전장에서의 맏형 유비의 참모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용력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초반부터 맹활약한 것에서 이러한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사실 정사에서는 물론 연의에서도 관우의 ‘지략’을 보여준 일화는, 219년 관우의 북진 시 조조가 보냈던 우금을 수공으로 대파한 것 이외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초반에 유비군에서의 참모를 맡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관우가 그의 전략을 단독으로 전개할 정도로, 유비군이 세를 얻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소수 정예군인데다가, 대부분의 전투가 관우와 장비의 걸출한 무용을 바탕으로 돌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관우가 진정한 전략을 구사할 정도의 위치에 오른 것은, 213년 익주로 출정한 제갈량에 이어 형주 진수를 담당하게 될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219년 형주군을 이끌고 북진을 시도하는 시기야말로, 관우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략 구사가 실행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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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 그리고 수공으로 우금 격퇴


초반에는 여러 번 논의되었던 것처럼, 형주 지역의 익숙한 지형과 기후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수공으로 우금을 격파하고, 양양을 점령하며, 번성을 포위하는 등의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그 위명을 삼군에 진동시켰다.


지(智)를 바탕으로 한 전략의 완성형은 적군의 패퇴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의 성공을 위한 작전, 즉 전술 구사에 있어서, 전장의 지형에 대한 사전 지식은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이 촉으로 들어간 이후 육출 기산을 통한 북벌이, 적벽전 등의 형주 지역에서 보여주었던 활약보다 못했던 것에 대한 이유의 하나가, 바로 촉의 지형과 기후를 제갈량이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그 당시에 전장의 특성에 대한 파악은 곧 성공적인 전략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적어도 관우는 적을 격퇴할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였으므로, 평범한 수준은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때문에 관우의 지형과 기후의 활용을 통한 성공적인 수공은 칭찬받을 수 있을지언정, 전략의 부재라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덕의 건의를 묵살하는 등 적장인 우금이 보여준 어리석은 행동은, 관우의 군공을 세울 수 있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만약 우금이 그렇게 불리한 포진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격퇴하였다거나 탈출에 성공하였다면, 그때야말로 관우의 전략에 대해 비판을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공은, 관우가 아닌 당시 형주에 장기간 머물렀던 조운이나 장비가, 관우의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신야에 기거한 이래 촉으로 진공하기 전까지, 관우와 마찬가지로 장기간 형주지역에서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들이 관우가 실행한 수공 방법에 대해, 전혀 모르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번성 공략과 형주 수비병력 차출


이렇게 우금을 지략으로 격파하고 사로잡은 관우는 이어 양양을 점령하고, 조인이 수비하는 번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바로 공성전이 시작되는 부분인데, 일반적으로 공성전에는 공격병력이 수비 병력의 3배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공격할 성 근처의 지역을 제압하고, 성 외부에서 오는 지원을 차단해야 했으며, 직접적으로 성을 공격하거나 혹은 탄탄한 포위공격을 펼쳐야만 했다.


여기에서 관우의 전략을 다시 한 번 논할 상황에 이르게 된다. 바로 공성을 위한 형주 수비 병력의 차출이 바로 그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다각적이 접근이 필요하다. 즉, ‘후방이 허술해지는 위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고, 결국 오의 기습으로 형주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에, 관우의 수비병력 차출은 어리석은 행동이었고, 그의 북진은 실패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명장이 될 전략을 갖추지 못했다.’ 고 결과론적으로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관우의 북진과 오의 급습


관우는 북진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형주 접경지역에서 오와의 잦은 국경 분쟁과, 외교를 통한 형주 동부 3군의 반환, 그리고 적벽전 등을 통해 익히 기량을 파악하고 있었을, 당시 오의 지휘관인 여몽을 위협적인 장수로 간주하고, 오와의 접경지역에 방비를 튼튼하게 한다.


즉, 그는 오를 결코 만만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우금을 격파하는 등 성공적으로 북진 중이던 관우군의 기세에, 조조는 허도에서 업으로의 천도까지도 고려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도 평가절하 하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지나친 것이다. 분명 조조는 천도를 고려한 것이 사실이었고, 당시의 조조가 천도를 하게 된다는 것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여 수도를 안전한 업으로 옮겨놓고, 북진하는 관우군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이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당시 관우군의 북진은 성공적이었으며, 천하를 진동시킬 정도로 군세가 드높았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사마의의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삼국지 전편에 보여줬던 조조의 스타일을 감안하였을 때,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위가 천도를 하고, 형주 북부를 내주고 관우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게 된다면, 낙양을 분기점으로 위는 양분되어, 옹주-양주, 그리고 장안을 비롯한 낙양 서북부는 고스란히 촉에게 내어줄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이루어지면, 분명 한중왕에 오른 성도의 유비가 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본대를 이끌고, 한중을 통해 장안과 옹-양주 방향으로 북진하였을 것이다.


이는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를 이야기하던 융중대에서 "만일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고 험요한 곳을 지키며, 서쪽으로 여러 오랑캐들과 화해하고 남쪽으로 이월을 어루만지며, 밖으로 손권과 결련하고 안으로 내정을 정비하였다가, 천하가 일변하면 한 명의 상장에게 명하여 형주의 군을 인솔하고 완, 낙으로 향하게 하며, 장군(유비)께서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몸소 진천으로 나오시면 백성들이 어찌 감히 단사호장을 가지고 장군을 맞이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유비에게 말하던 그 구상도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조조가 그러한 사태를 좌시하고 있을 인물은 분명 아니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바로 손오의 형주 욕심을 파악했던, 사마의의 차도살인의 계책이 나오게 된다. 바로 형주를 놓고 흥정한 '위-오 비밀동맹'이 맺어지면서 일거에 전황은 역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관우군의 성공적인 북진을 막아야만 하는 위와, 그러한 성공적인 북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형주 탈환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던 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부터 오의 손권은 형주를 바탕으로 익주까지 병합하여 순식간에 오에 버금가는 전력을 유비가 형성하게 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유비군을 견제하려 들었고, 이는 형주를 진수하는 입장에 있는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은 새롭게 편입한 익주 재편을 거쳐,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또다시 불거진 형주 문제를 형주 동부 3군을 손권에게 내주는 것으로 절충지어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된다. 아니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형주에 대한 오의 욕심은 촉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제갈량 역시 손권이 조조와 연합하여 동맹을 깰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손권도 촉과 연합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에, 형주에 대한 미련은 3군의 반환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번성을 공격하던 관우에게 결정적인 오판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오군의 지휘관이 여몽에서 육손으로 교체되는 것이었다. 후에 이릉대전 지휘관으로 육손을 추천할 때에도, 감택 외에는 모두 반대할 정도로 오 내부에서도 백면서생이었는데, 하물며 천하를 진동시키며 북진을 지휘하는 관우에게 있어서, 이름도 듣지 못한 육손은 애송이로 비춰졌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여몽이 육손을 후임으로 천거한 이유도 바로 관우의 심리를 간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갓 부임한 육손의 공손한 편지는 관우에게 있어서, 오군을 대비한 수비 병력을 북진군으로 차출하도록 결정하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결정 하나가 관우를 명장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에서 아니라는 방향으로 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사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의 관우의 판단에 대해 논하자면 형주 지역에 대한 소규모 분쟁과 외교적 논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적벽전 이래로 준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촉-오 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유의 후임이자 여몽의 선임이었던 노숙은, 이러한 삼국의 정립구도를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형주로 인한 촉-오의 갈등을 최대한 봉합하여 동맹국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적벽전 이래 촉이나 오 모두 단독으로는 위에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동맹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관우 역시 이렇게 판단하진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 오를 위와 같은 적국으로 간주하였다면, 측면의 충분한 견제 없이는 애초에 형주 관우군의 단독 북진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공성전을 할 여유까지는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공성전을 위해 형주의 수비 병력까지 차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오의 전면적인 형주 침공은, 아마도 촉으로 입성한 유비와 제갈량을 위시한 촉 내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았을 때, 관우의 ‘수비병력 차출’ 결정은, 결과적으로 그의 전략을 송두리째 망가트리는 결정적 오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관우가 아닌 촉의 어느 장군이든 관우의 입장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관우와 다른 결정을 내렸을까. 관우가 비록 말년에 자부심이 매우 높았지만, 삼국지 전편에 보이는 그의 모습을 고려할 때, 신중하고 사려 깊고 냉정한 모습이라고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또한 그는 신의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비에 대한 신의가 그랬고, 비록 오관육참장을 하며 조조의 곁을 떠났지만, 분명 공을 세우고 돌아가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아마 촉과 오의 동맹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낭만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비 병력을 차출할 때에도, 비록 형주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며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설마 위를 공격하는 촉의 뒤를 들이치는, 그야말로 ‘설마 대놓고 배신까지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동맹 역시 국가 대 국가의 신의로 간주했을 가능성 역시 농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는 형주을 차지하기 위해, 위를 공략 중이던 관우의 등 뒤에 칼을 꽂았다.


하지만 이런 어떠한 이유를 갖다 대더라도 결국 관우의 결정은, 형주 수비의 부실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고, 이는 오에게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목숨과 형주의 상실을 초래하게 된다.


분명 결과적으로 관우는 ‘명장’의 최고봉에 다다를 수 있는 갈림길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우를 단순히 용맹만 뽐내는 용장 혹은 맹장이라고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본래 213년 성도를 공략하던 유비와 방통이 촉을 성공적으로 점령해야 했으나 낙성에서 방통이 유시에 사망하고, 유비가 고립되자 형주의 주력군이 출병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먼저 출발한 황충, 위연 등은 물론 형주를 진수하던 제갈량을 위시하여, 장비, 조운 등 실질적으로 촉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의 대부분이 유비를 구원하고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촉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기서 참모의 부재를 우려한 제갈량이 '동화손권, 북거조조'라는 전략의 얼개를 관우에게 알려주고 떠난다.


위, 오와 모두 접경하고 있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에서, 촉의 주력군이 모두 성도로 향해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오의 급습 이전까지 형주 진수는 물론, 조조에게 천도를 고려하게 할 만큼 병력을 신장시켜, 북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던, 관우의 형주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그러한 관우가 치명적인 오판을 범해, 결과적으로 형주를 상실하는 것은 사실이고 인정한다. 하지만 당시 관우의 곁에는 흔히 말하는 참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촉의 주력 인물들은 모두 익주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다. 관우와 아이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우 혼자 형주에서 버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위의 조인, 서황 등을 비롯한 주력군과 사마의의 계책, 그리고 촉을 저버린 오에서는 여몽과 육손을 앞세운 전략과 전술이었다.


가정이지만 북진을 하던 과정에서 만약 관우 곁에 서서 또는 방통이나 제갈량과 같은, 전략적 판단을 해줄 수 있는 참모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형주를 내어주었을까? 아마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관우의 형주 상실은, 상대적으로 인재층이 엷던 촉의 내부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4. 인(仁)


또한 오의 형주 침공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던 부분에 대해서는, 강릉과 공안을 수비하던 미방과 부사인의 저항없는 무조건 항복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만약 강릉과 공안을 거점으로 이들이 농성을 벌였다면, 양양을 포위하던 관우군의 회귀와 더불어 백제성에 주둔하던 군대가 이동하고, 나아가 촉에서 장비 내지는 조운으로 하여금 구원군을 출병시켜, 충분히 오군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군도 더는 형주에서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위군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촉과 형주에서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면, 양쪽 모두 공멸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마도 잠재적 동맹을 깨고 침공한 오군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물러나 외교적으로 타결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관우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을 갖고 있던 미방과 부사인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고, 강릉과 공안을 비롯한 형주 남부 전역이 오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즉, 관우군이 회귀하고, 익주의 본대에서 구원군이 올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히 관우의 인덕 문제 혹은 휘하 장수 통솔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관우의 인덕과 통솔력을 논하기 이전에, 미방과 부사인의 신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미방은 유비를 초창기부터 수행했던 미축, 그리고 유비의 처인 미부인의 혈족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관우 역시 부사인은 차치하고서라도 미방의 항복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우는 오만하긴 하였지만 순수한 무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때문에 스스로의 기준에 맞춰 주변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고, 북진 전에 실수를 저지른 미방과 부사인에 대한 엄포도, 아마 다분히 경고성 멘트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리 절을 받은 관우라고 한들, 미축의 동생인 미방을 임의로 참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주의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오군에게 항복해버리고 마는, 미방과 부사인을 기용한 것이 관우의 실책이라면 실책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를 놓고, 관우의 리더쉽이나, 인을 논하는 것은 지나친 결과주의적 시각이라고 본다. 즉 선후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관우의 어조가 다소 강경하였다고 하더라도, 상명하복이 우선인 군 내부의 기강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공적인 꾸짖음을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우선 문제가 있는 것이다. 관우가 얼마나 그들을 경시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위에는 오만하여도 아랫사람은 아꼈다는 평가에 기준을 둔다면, 관우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분명 그들에게 우선적인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촉에 인재가 풍성하다면 아마도 관우의 기준에 맞는 인물로, 진작 보직 변경을 시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인해 초래한 결과를, 단지 지휘관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사적 원한으로 빚어진 감정적인 결과까지 더해서, 관우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 지나친 것이라고 본다. 


4. 관우는 명장인가?


세상에 완벽한 지휘관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관우 역시 완벽한 지휘관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북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오의 급습까지 막아냈다면 애초 이러한 논쟁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 관우의 상황에서는 한신의 배수진이나 한니발의 칸나이 전투와 같은 결과가 나오기 힘들었다. 오군의 급습으로 관우가 번성에서 군사를 되돌리는 순간, 조인과 서황이 추격하기 시작하고, 오는 이미 강릉과 공안을 손에 넣고, 관우의 형주군을 이탈시키며 관우의 도주로를 차단하였다.


관우가 설령 천하의 덕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병력이 대거 이탈해가는 상황에서 이 같은 위, 오의 협격을 막아내는 것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우 역시 곧바로 촉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대신, 상용의 유봉과 맹달에게 원군을 청하고 강릉 재탈환을 시도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형주 상실로 인해 관우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끝남과 동시에, 관우 자신의 한계로 작용하게 되는 요인이 되지만, 이는 관우가 북진을 너무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명장이란 나 홀로 명장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더욱이 대군을 이끄는 군의 최고 지휘자야 말로, 개인의 능력과 더불어 그를 받쳐주는 수하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더해질 때, 비로소 명장이 탄생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관우에게는 개인적 능력만으로 이끌던 군이 있을 뿐이었다.


관우는 결과적으로 북진도, 형주 진수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의 복잡한 전개 과정을 고려해보았을 때, 진행 과정 중에서도 눈에 띌만한 성공 요소 역시 모두 우연 혹은 평범함으로 치부하고, 실패한 결과로 인해 ‘명장의 지략’을 지니지 못한 맹장 혹은 용장으로 결론지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부족한 글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덧-

 

필자 역시 이 글을 마치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관우는 명장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예'라고 대답하고 싶어질만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형주에서 외로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결국 홀로 산화했다.

 

그가 명장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당시 상대했던 전략가인 사마의, 또는 여몽이나 육손과 같은 '전략'이었다면 당연히 그는 명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결과적으로 형주 진수에 실패하였더라도, 홀로 상대했던 양국가의 전략가들이 그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 논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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