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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전략가.


별칭  자 공명, 시호 충무, 와룡선생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한

활동분야  정치·군사

출생지  중국 산둥성


본문

자 공명(孔明). 시호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山東省 沂水縣) 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 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 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陝西省 톱縣)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에서 인용...


시작을 촉의 관우로 하니, 계속 촉의 인물들 위주로 다루게 되는데, 이렇게 이어지는 것. 촉이라는 나라의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리고 삼국지의 진정한 삼국을 구축하는데 큰 공헌을 한, 촉의 명참모이자, 삼국지 상에서도 최고의 참모라고 일컬어지는 제갈량 공명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1. 삼고초려와 천하삼분지계.



최근에 조조를 중심으로 한 삼국지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촉의 인물들은 기존의 호의적인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우, 그리고 제갈량도 그런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아 보인다.


최근에는 삼고초려의 진위 여부 역시 의심받고 있는 처지인데, 당시 유비군의 규모나 행색을 고려했을 때, 스스로 자신을 관중, 악의에 비교하며 속으로 큰 뜻을 품은 제갈량이 유비에게 먼저 찾아가 합류하였다는 것은 필자의 소견으로는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유비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종의 탐색을 했을 수는 있다고 본다.


그리고 후세의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후출사표와는 달리 제갈량의 글로 인정받고 있는 전출사표를 보면 ‘유비의 삼고초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유비가 인재를 얻는 스타일과 당시 조조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황에서 유비군의 앞날을 고려했을 때, 유비는 걸출한 참모를 얻기 위해 충분히 삼고초려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비는 신야에 머무르면서 일찍이 서서라는 뛰어난 참모를 얻었지만, 적벽전 전초전 당시 서서의 어머니를 인질로 한 조조군의 계략에 넘어가 유비를 떠나가 되면서 ‘제갈량 공명’을 추천하게 된다. 줄곧 형주지방에 거주하면서 사마휘 등, 형주 명사들을 통해 풍문으로 '와룡'이라 불리우던 제갈량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을 유비는 곧바로 제갈량이 거주하던 융중으로 찾아가 그 유명한 ‘삼고초려’를 하게 된다.


삼고초려는 제갈량과 유비간의 서로에 대한 탐색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스로 큰 뜻을 품고 있던 제갈량이 당시 소수군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명성이 있던 유비가 직접 찾아왔다고 해서 한번에 합류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으며, 또한 유비라는 사람이 주군으로 모실만한 기량 등이 있는지 가늠했을 것이고, 유비 역시 서서를 통해 참모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제갈량을 영입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우리가 알게 되는 ‘삼고초려’로 그려지게 된 것은 아닐까.


제갈량은 이렇게 자신을 영입하려고 3번이나 자택을 방문하는 유비의 모습에서 아마도 일종의 신뢰감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삼고초려 당시 제갈량이 형주지방에서 제법 명성을 얻고 있었다지만, 조조와 대립하며 난세를 헤집고 형주까지 내려온 유비의 전국적인 명성에 비하면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유비가 제갈량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 보여줬던 모습에 제갈량은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지 않았을까. 삼국지 전편에 걸쳐 유비의 인재를 얻는 모습은 이 ‘삼고초려’에서 극대화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한왕실의 부흥이라는 대의명제에 의기투합하게 되면서 제갈량은 유비에게 ‘융중대, 또는 융중계책’이라고도 알려진 ‘천하삼분지계’를 유비에게 설명하게 된다.


그런데 이 천하삼분지계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당시 조조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태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약간은 억지스러운 것이 아닐까.


적벽 대전 이후 유비군의 행적을 상기해 보면, 관우의 사망 전까지 유비군은 융중 계책의 100%에 가까운 모습과 전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는 과연 우연이었을까. 제갈량이 유비군에 합류하지 않았어도 그려질 수 있는 모습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적벽대전 발발 직후부터 관우의 사망 전까지 완벽하게 융중계책의 구상대로 그려진 유비군의 모습만으로도 융중계책에 대한 비판은 논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즉 제갈량은 당시 유비에게는 큰 전략의 얼개만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었다는 것이다. 조조군의 남하에 대한 전술은 직접 상황에 직면해야 보여줄 수 있는 것이지, 말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다루게 되겠지만, 제갈량의 전략, 전술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하지만 불과 신야의 일군에 불과하던 유비군을 삼국지 3대 대전 중의 하나인 적벽대전을 거치면서 형주와 익주를 병합하며 일약 삼국에서 오를 누르고 위 다음가는 촉을 건국하게 되는 그 중심에는 바로 제갈량이 있었다. 이 점만 봐도 제갈량의 군사적인 면모는 저평가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난세가 훨씬 유동적이었던 유비군이 제갈량이 합류하기 전에는 방랑군으로 떠돌다가, 난세가 오히려 고착될 분위기가 높아지던 때에 제갈량이 합류하고, 적벽대전을 거치면서 유비군의 세력이 급격히 비약하여 삼국 중 일약 2위로 도약하는 촉을 건국하게 된 역사적 사실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제갈량이라는 참모의 존재가 유비군에 있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사마휘의 '와룡과 봉추 둘 중 한 명만 얻어도 왕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라는 평은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2.적벽대전. 제갈량은 한 것이 없었다?



연의를 보면 이러한 질문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갈량은 사실 연의에서처럼 화살을 10만개를 얻었다거나 동남풍을 불어일으키는 등의 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유와 오의 수군이 이뤄낸 승리다.’ 라고 단언하는 것도 지나친 일일 것이다.


물론 연의처럼 제갈량은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지만, 개전을 망설이던 손권을 설득시켜 조조와의 결전을 이끌어 냈다. 당시 손권의 곁에는 장소를 필두로 주화파들의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노숙과 주유와 같은 주전론자가 있었으나, 손권이 확실히 개전을 할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제갈량이 세객으로 오의 진영으로 가 주화파를 물리치고 손권을 설득시켜 조조와의 결전을 이끌어 낸 것은 분명 제갈량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유비와 손권은 동맹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전력차이가 심했지만, 제갈량은 유비를 손권의 부장급 정도가 아닌 손권과 동급 위치에서의 동맹을 성사시켰다. 이 또한 평가받을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제갈량의 활약으로 손권은 개전을 결심하게 되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후로는 유비군과 제갈량은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군의 통수권은 총사령관이었던 주유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적벽전의 과정에서 제갈량은 주유와 황개가 쓰려던 화공 전술을 간파하고 있었던 듯 보이며, 유비군은 적벽에서 화공으로 패퇴한 조조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제갈량은 연의에서처럼 화려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시 오군 위주의 편제를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유비가 형주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적벽전을 손권에게서 이끌어 낸 점은, 범상치 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3.형주 상실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



이것은 이전에 관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도 다루었던 내용이다.


분명 제갈량에게 있어서, 유비의 의제이자, 연령차이도 많이 나고 자부심이 매우 높았던 관우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연의에서는 적벽전에서 군령장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하지만 주유 사후 순조롭게 형주를 점령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인재와 병력으로 익주까지 병합하려 하였던 유비군이, 방통의 죽음과 함께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하자 형주를 진수하고 있던 제갈량은 일군을 이끌고 유비를 도와 익주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제갈량이 장비, 조운이 아닌 관우를 남긴 이유는 유비군의 서열 체계를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비의 첫째 의제인 관우를 형주 수비장으로 임명한 것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의 형주 진수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갈량은 관우의 성격을 감안하여 ‘북거 조조, 동화 손권’ 이라는 큰 지침을 관우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오의 손권은 형주를 바탕으로 익주까지 병합하여 순식간에 오를 제치고 위 다음가는 전력을 유비가 형성하게 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유비군을 견제하려 들었고, 이는 난세를 평정하고, 한왕실을 복구하려는 유비의 뜻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은 새롭게 편입한 익주 재편을 거쳐,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또다시 불거진 형주 문제를 형주 동부 3군을 손권에게 내주는 것으로 절충지어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된다. 그리고 형주의 관우가 북진하여 번성을 포위하게 된다.


여기까지의 모습은 지난날 제갈량이 융중에서 유비에게 이야기하던 ‘융중계책’과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데 제갈량이 여기서 일부러 관우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출사한 이유는, 유비의 극진한 간청도 이유가 되겠지만, 유비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한왕실 복귀라는 대의를 알고 있는 제갈량이 관우가 껄끄럽다고 해서 뛰어난 야전사령관인 관우와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형주를 포기하는 자승자박을 두는 것이 과연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마도 제갈량은 손권이 조조와 연합하여 동맹을 깰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손권도 촉과 연합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에, 형주에 대한 미련은 3군의 반환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와 별개로 손권과 잦은 마찰을 겪었던 관우는, 북진 당시 손권의 급습에 대비해 상당한 군사를 후방에 배치하는 등의 노련함을 보여주었으나, 도중에 여몽이 육손으로 교체되었다는 정보를 얻자, 수비병까지 번성 공략에 동원하게 되고, 이는 후방이 허술함을 초래하여, 위. 오 연합군의 공격을 자초하게 되고,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제갈량의 고의성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보다, 관우의 곁에 정황 판단을 해줄 군략을 지닌 참모가 없었던 점이 더욱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방통의 유시에 의한 죽음이 촉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의 죽음과 형주의 피탈에 대해 정리하자면, 제갈량은 유비에게 출사하여 당시 ‘융중계책’에 가장 근접한 판도를 꾸며놓고도, 설령 관우와의 사이가 불편하다고 하더라도, 관우와 형주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동맹이었던 오의 손권이 형주 문제로 배신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관우 곁에 군략을 지닌 참모의 부재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 있지 않고 익주에 있던 제갈량이 연의에서처럼 신기묘산 하였더라도, 시시각각변하는 수백리 떨어진 형주의 전장의 상황 변동까지 대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제갈량이 관우를 제어하지 못해서 방치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마초와 경쟁의식을 갖던 관우를 제갈량이 편지 한통으로 잠재웠던 것을 본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제갈량은 관우를 능히 제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필자의 지나친 해석일까.



4. 읍참마속.



왜 마속이 선봉이 되어야 했는가? 마속이 가정 전투의 선봉이 된 이유는 제갈량의 1차 북벌의 목적을 일단 파악해야 한다. 1차 북벌때 제갈량의 목적은 기산의 확보에 있었다. 이 기산을 확보하게 되면, 위수를 따라 동진하여 장안의 배후를 습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량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위연이 자오곡을 통한 장안을 탈취하자는 이른바 '자오곡(子午谷)의 계책'이 있었지만, 촉의 전력을 가지고, 위와 전쟁을 수행하는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무리수가 많다고 판단, 좀 더 안정적인 전술을 통해 장안과 옹,양주를 탈취하려 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든, 제갈량은 양동작전을 구사해 조운과 등지의 별동대를 기곡도를 통해 미성을 공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 조진의 대군을 기곡도로 유도함과 동시에 제갈량의 본대는 기산을 점령하려 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자 남안, 천수, 안정 3군은 촉군에 호응하게 되어 양,옹주를 진동시키자, 위의 명제(조예)는 장합(연의에서는 사마의)을 구원군으로 보내게 된다.


그러자 제갈량은, 기산으로 진군하는 장합의 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전략적 요지인 가정의 수비장을 선정하게 되는데, 바로 마속을 기용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왜 마속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게 되는 것이다.


제갈량이 위연이 아닌 마속을 가정의 수비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가정에서 장합의 군을 격파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군사적 요충지에서 수비위주로 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장합이 위의 명장이긴 하지만, 계곡과도 같은 좁은 길에서는, 대군의 잇점을 살릴 수 없게 된다. 군과 군이 맞부딪치는 면이, 한정되어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위연이 나아가지 않아도, 그간의 마속의 기량을 감안할 때 제갈량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본다.


제갈량은 유비 사후, 촉의 건국 공신이라 할 수 있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등 일당백 장군들의 사후 촉을 이끌어갈 만한 신진 인재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는 마속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릉전에서 마량 사후 제갈량은 이 재기 넘치는 준재인 마속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특히 남정 전 마속이 진언했던 "힘으로 꺾기보다는 마음으로 깨우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 후 제갈량은 마속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을 것이다. 당시 촉의 입장에서는 마속 정도의 준재는 드물었고, 실전 경험을 쌓게 해 촉의 기둥으로 키우려는 제갈량의 의도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가정의 수비가 비중이 큰 만큼 마속이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앞으로도 중임을 맡기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고, 장차 자신의 유지까지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마속의 첫 실전인 가정 전투는 무리해서 적과 맞서는 것도 아니었고, 군사적 요충지인 가정을 제갈량이 기산을 점령하는 동안 사수하는 역할이었다.


이처럼, 기량에 비해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마속에게 1차 북벌의 키라고 할 수 있는 가정 수비를 맡기면서, 일종의 실전 경험과 함께 공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려는 제갈량의 의도도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우직하게 수비에만 임하라."고 세부적인 지시까지 해주게 된다. 더불어 부장을 우직한 무장인 '왕평'을 붙여준다. 제갈량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왕평이라면, 경험 부족의 마속을 도와 적절한 상황 판단을 해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마속이 왕평의 조언을 무시함으로써 양 장수간의 직위나 위치가 부적절했지만, 제갈량은 수비만 확고히 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였고, 마속과 왕평이라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수행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형까지 촉군에 수비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마속이 지시를 어겨가면서까지 장합을 이기려 들려고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속이 패배한 이유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군사력과 지형에서, 마속이 공명심이 앞서 장합을 이기려들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나 싶다. 만약 마속이 제갈량의 당부대로 수비에만 치중했다면 결과는 180도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러한 마속의 결과론적 실패로 인해 제갈량의 용병술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기엔 다소간의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마속이 실전경험이 없었던 점이 역시 뼈아픈 패배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고, 이는 결국 제갈량의 전략 전체에 차질을 불러, 1차 북벌을 중단하고 사곡의 조운군과 기산을 공략하던 촉군 본대의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 패인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연의처럼 제갈량이 직접 마속에게 수비를 지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속을 가정에서 장합군을 저지하는 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분명 제갈량이고,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하더라도, 군사력이나 지형을 고려했을 때, 싸워 이기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1차 북벌의 총사령관은 제갈량이지만, 퇴각의 빌미를 제공한 직접적인 원인은 마속이었고, 제갈량의 군령(장합군의 저지)을 위반한 마속은, 일벌백계를 위해서라도 처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사의 상랑전에 마속이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시기가 나오지 않아, 가정에서 패퇴하고 도망쳐오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인지, 아니면 투옥된 다음에 다시 탈주를 감행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인지 그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가정에서 패퇴하고 한중으로 도주해 온 것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속이 전자에 해당해, 가정에서 패퇴하고 도주해 온 것이라면, 당연히 1차 북벌 전체 전세에 영향을 주는 가정의 수비라는 군령을 위반하였으므로, 그에 따른 처벌을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고, 만약 투옥된 뒤 도주하려 한 것이었다면, 더욱 더 용서 받기 어려운 행동이었을 것이고, 역시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총사령관의 군령을 따르지 않은 한명의 장수로 인한 패배때문에, 총사령관 자신도 중형에 처해져야 한다면, 관도대전 대패 후 원소나, 장수와의 전투에서 아들과 조카까지 잃은 조조 역시 그 직후 처단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제갈량은 마속과는 달리 촉의 승상이었고, 선주인 유비의 유지를 이어 후주 유선을 보좌하고, 이릉전 이후 급격히 기운 촉의 내정과 군사력을 일으켜 세우고, 남만 정벌까지 이루어 북벌에 도전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한 제갈량이 1차 북벌 패퇴의 책임을 지고 죽는다면, 그러한 행동은 일개 필부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제갈량의 어깨에는 마속의 죽음까지 짊어지게 되고, 그만큼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내심 자신의 후계자로까지 염두해 뒀을 법한 마속을 좀 더 가르치지 못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후회와, 선주의 유언까지(마속의 중용에 관한 이야기) 더해 대의를 그르쳤다는 자책감에 충분히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육출 기산과 오장원에서의 마지막.



제갈량은 유비의 유지를 이어 6차 북벌을 하는 등의 한실 부흥에 전력을 다 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234년 한여름, 오장원에서 54세의 일기로 눈을 감게 된다.


이 6차례 북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란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채택하지 않은 점과 6차례에 걸친 북벌을 하였음에도 뚜렷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결과에서 제갈량의 군략에 대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고 비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군략을 논하기 전에 위와 촉의 국력을 먼저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위와 촉의 영토는 5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더욱이 당시 중국의 경제적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하북 지역이었지, 외딴 산골의 익주는 아니었다. 이는 당시 중국이라고 논할 수 있던 지역은 대부분이 위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흔히 위,오,촉의 국력을 6:3:1의 비율로 비교하곤 한다. 물론 수치상의 비율이 전부라고 할 수 는 없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은 시작부터가 군사, 경제적으로 위에게 대적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안고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벌은 성패 여부를 떠나 촉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연의 자오곡 계책은 그 전략의 성사 여부를 떠나 안정적인 성향을 가진 제갈량의 눈에는 도박과도 같이 비춰졌을 것이다. 위연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총사령관의 위치에 있는 제갈량은 빠듯한 군사력으로 성패 확률이 반반인 기책에 모험을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에, 여러사람들은 '소수군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면 일거에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기책을 활용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제갈량의 군략을 비판하지만, 촉군을 통괄하고 있는 제갈량은 실패에 대해서도 충분히 계산을 하고 있어야 하는 위치였다. 무턱대고 가능성이라는 측면만을 가지고 공격해 들어갈 수 있는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현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6차례 북벌 모두 실패라는 최종 결과를 얻게 되지만, 가능성 측면에서 본다면 1차 북벌을 비롯하여, 옹주 양주는 물론 장안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적이 있었다. 비록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것은 촉의 군사들에게 사기 재고라는 측면과, 차후 북벌 진행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매번 제갈량의 북벌을 가로막았던 사마의가 수비 위주의 전술이 아닌 제갈량과 정식으로 공격전술로서 맞대결을 하였다면 과연 그 때에도 제갈량에게 승리 할 수 있었을까. 사마의는 언제나 촉군보다 대군을 이끌고 와서도 매번 수비적인 전술로 임했다. 일단 군략이라는 것을 쓰려면 상대가 맞받아치고 나와야 가능한데, 도무지 상대를 하려고 하지 않으니 제갈량이 아니라 조조가 오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사마의나 위의 장수들이 제갈량과 정면으로 맞부딪친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그들은 항상 패배했다. 즉 국지전에서의 대결은 제갈량은 승리로 이끌었지만,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대규모 전쟁은 하지를 못했다.


6배 가까이 차이나는 국력. 1.5배 이상 차이가 나는 병력. 그리고 초지일관 수비적으로 나오는 적을 상대로 결과적인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해서 제갈량의 전략과 전술을 폄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제갈량의 북벌이 촉의 경제력을 피폐시켜 멸망을 앞당기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본래 무리한 정벌은 국력을 소모시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최고의 길이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도, 2대에 걸친 고구려 원정 때문에 힘없이 멸망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촉은 수치상으로도 위의 1/6, 그것도 지형 등의 요소를 고려했을 때, 국력에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을 감안하고도, 6차례나 북벌을 먼저 감행했다는 것을 볼 때, 제갈량을 위시한 촉의 집권층의 내정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갈량은 언제나 여력을 남겨두었다. 즉 국력 피폐로 이어지지 않을 한계선의 병력으로 북벌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의 그러한 면 때문에, 제갈량을 최근에는 "최고의 행정가" 또는 "평화시 최고의 재상감"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런 수치상으로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매번 공세적인 북벌을 이끌었던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촉이 익주의 험준한 지세에 의지했으면 더욱 오랬동안 버텼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촉이라는 국가가 왜 건국되었는가? 유비는 유언처럼 익주에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려고 촉을 건국한 것이 아니었다. 촉을 개국한 유비와 제갈량을 비롯한 개국 공신들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촉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의 부흥. 그것이 바로 삼국 당시 촉의 정체성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헌제를 폐위하고 한을 멸한 조위는 양립할 수 없는 국가였다. 오나라처럼 양주와 형주에 안주하고 지낼 생각이 촉과 제갈량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제갈량 정도 되는 인물이 위와 촉의 격차를 몰랐을 리 없다. 오히려 북벌의 현실적인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라고 진작에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북벌을 감행했다. 유선을 보좌해 촉을 다스리며, 출사표를 올리고, 촉군을 이끌고 언제나 위를 향해 창끝을 들이댔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승리를 쟁취할 뻔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단지 제갈량에게 부족했던 것은 천운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결코 실패를 미리 염두해 두거나, 성공을 기대하지 않고 북벌을 진행했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6차례의 북벌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지만, 건강을 해칠 정도의 격무에 시달리면서까지 뜻을 이루려 했던 그의 모습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서 누누이 이야기 했던 위의 1/6의 국력의 격차등의 객관적인 조건의 압도적 불리에도 불구하고 ‘선공을 했는데도 승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갈량의 군략은 별 것 아니었다.’라는 단정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6.마무리를 지으며..



쓰다보니 글이 이전 글들보다 두서없이 꽤나 길어졌는데...


제갈량이 1800여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보여준 태도에 있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가 일국을 이끌 정도의 능력을 지녔음에도 후주 유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청렴하며, 공과 사를 구별하고, 상벌을 분명하게 해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며, 선제의 유지를 잇기 위해 위를 향해 지속적인 북벌을 시도하였던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 촉의 정사에서 어떠한 잡음도 없었다는 것도 조예  사후의 위나라나, 손권 말년의 오나라와 비교해 눈여겨 볼만하다.


그의 북벌이 승리를 쟁취하지도 못했고, 촉의 국력만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의 사후에 강유의 더한 북벌에도 불구하고 30여년이나 지탱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제갈량은 조조나 손권의 참모들과는 확실히 다른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유비라는 군주의 스타일과, 촉이라는 나라의 조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겠지만, 제갈량이 걸어온 행보는 일개 참모의 수준이 아닌 거의 군주와도 같은 모습이다.


일개 방랑군이었던 유비의 참모로 영입되어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는 촉을 건국하고, 비록 형주를 빼앗겨, 익주 1개주로 제한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의 건국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6차례나 북벌을 일으켰던 제갈량을, 결과적 성패를 떠나 필자는 삼국지 상의 최고의 참모라고 감히 말하면서...


부족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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