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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後漢) 말의 무장(武將).

별칭  자 봉선(奉先)

국적  중국 후한(後漢)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주위안[九原]


자 봉선(奉先). 주위안[九原]현 출생.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병주자사(幷州刺使) 정원(丁原)을 따라 뤄양[洛陽]으로 가서 동탁(董卓)과 싸우다가 마침내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로 귀순, 그의 심복이 되어 장안(長安)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뒤 동탁이 그를 소외시키자, 192년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결탁하여 동탁을 살해하였다. 동탁의 부장 이각(李?)의 공격을 받아 장안을 빠져나와 난양[南陽]의 원술(袁術)에게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원소(袁紹)에게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원소가 죽이려 하자 이번에는 진류(陳留)의 장막(張邈)에게로 도피, 원주목(袁州牧)으로 임명되어 조조(曹操)와 싸웠지만 패하고 유비(劉備)에게로 도피하였다. 이어 원술을 공격하여 하비(下)를 점령, 스스로 쉬저우자사[徐州刺使]라 칭하였다. 곧이어 원술과 결탁하여 하비에서 유비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조조가 유비를 도와 그를 공격해와 조조에게 붙잡혀 죽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관우로 시작한 인물평이 조운까지 촉의 인물들 위주로 단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시대가 달라도, 여전히 단연 삼국지 최고의 무장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삼국지 초반부에 나름대로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1. 여포의 출신지?



최근에 삼국지연의에 관련된 책자들을 보면, 여포의 출신지를 가지고 갖가지 해석을 제기하고 있다.


여포의 출신지는 오원군 구원현으로 지금의 내몽고 지역의 바오터우(包豆)시 지역이다. 지도로 보면 장안 지역에서 정북 방향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지역으로, 당시에는 병주와 인접한 흉노족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지역 출신이 삼국지연의가 나관중에 의해 지어지는 시점인 원말기와 맞물리면서, 몽고지역 출신인 여포에 대한 혹평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삼국지 해제’와 김운회 교수의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여포에 대한 폄훼에 대한 이유로 상당히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 상에서 시랑(豺狼)과 같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여포가, 나관중의 중화주의 사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의는 삼국지연의 재해석이 붐을 이루고 있는 근래의 상황을 비추어봤을 때,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는 본다.


사실 여포는 연의 초반부에 동탁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악의 대명사로 그려지고 있다. 확실히 이러한 연의의 묘사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정사에서 보이는 여포에 대한 기록 역시 그다지 호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여포의 이런 묘사에 대한 모든 것이, 단지 나관중의 중화주의적인 성향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물론 여포의 출신이 한족과는 다르고, 사고방식 역시 한족과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가정해 본다면, 그의 행동 모두를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고는 하더라도, 상당부분 여포가 일반적인 상식 특히 유교적인 부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여포가 연의에서처럼 과장되게 악행만 저지는 무장은 아니었다고는 해도, 그의 당시 보여주고 있는 행적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그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볼 수 없는 여지를, 여포 그 자신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나관중은 여포의 그러한 행적을 바탕으로 좀 더 소설적인 덧칠을 그에게 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연의상의 反동탁 연합군 측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역사서는 패자에게는 상대적으로 가혹한 평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정사에서의 기록이 호의적이지 않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최근의 여포에 대한 나관중의 중화주의적인 폄훼설은, 연의에 대한 지나친 분석이 낳은 결과가 아닌가 싶다. 연의는 역사소설이지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 개인적인 견해로는 삼국지연의라는 역사소설을 역사적 사실에 맞춰 과도하게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물론 실제와 다른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어디까지나 역사서가 아닌 역사소설이다. 당연히 소설적 허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학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굳이 정사와 같은 사실과 비교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면, 삼국지연의라는 걸출한 작품이 빛이 바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것이 비록 연의에서 악평을 받는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2. 비장(飛將) 여포.



앞서 이야기 했듯이 여포의 출신지는 흉노족의 영역으로 병주 지역과 인접한 지역이었다. 또한 여포는 용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절륜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창술과 궁술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때문에 여포는 한무제 때의 명장 이광(李廣)에 대해 흉노족이 비장군(飛將軍)라고 부르던 것을 흉내 내어 스스로를 비장(飛將)이라고 칭했다.


여포가 변경의 이민족 출신임에도 발탁된 것을 보면, 단순히 걸출한 무예 기량뿐만이 아닌, 어쩌면 한족과의 혼열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여포는 이러한 무용을 바탕으로 삼국지 전편은 물론 중국 역사상 ‘최강‘의 자리를 논할 정도의 무장으로 군림하게 된다. 흉노족은 본래 유목민족으로 기마술은 한족에 비해 기본적으로 월등하게 능통해 있는 민족이다. 거기에 타고난 용력에 창술과 궁술까지 일류급이면, 이미 무장으로써 갖출 수 있는 기술은 모두 최고조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포에게 말 중의 말이라는 적토마가 더해졌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가 달린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에 그는 특히 화극이라는 무기를 잘 다루었는데, 화극은 찌르고 베기가 모두 가능한 무기이다. 이 무기와 얽힌 일화가 있는데 조운의 경우처럼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여포는 어렸을 적부터 무예 익히기를 좋아했는데, 이를 본 아버지가 그가 15세 되던 해에 종산(鍾山)에 있는 세공도인이라는 고수에게 수업을 받게끔 주선했다. 세공도인은 특히 화극의 사용에 있어서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세공도인에게 화극 72식 중 36식을 전수받은 시점에서 여포는 인간성 시험을 받았으나, 결국 실패하고 36식만을 전수 받은 채 하산하였는데, 그 36식만으로도 삼국지 최강의 무장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피소드 역시 여포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생겨난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여포는 호로관 전투에서 유,관,장 3형제와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게 되는데, 물론 이는 정사에는 없는 연의에서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연의 상에서 관우와 장비의 무력의 수준이 최상급으로 묘사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관우, 장비에 유비까지 상대하면서도 30여 합을 겨룬 것으로 그려지는 호로관 전투의 여포는 그야말로 나관중도 인정한 최강의 무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후 삼국지 사상 관우, 장비를 동시에 상대하는 무장은 여포를 제외하면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는 점이, 여포가 별 무리 없이 최강의 무장 지위를 차지하는데 가장 큰 단초를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호로관 전투 이후에도 여포는 원소에게 잠시 의탁했다가 곧 유랑군이 된다. 여기에 진궁이 합류하면서 조조의 배후를 급습하고, 유비의 서주를 탈취하면서 기반을 잡는 과정에서 조조군과의 숱한 충돌을 겪게 되는데, 여기에서도 여포의 절륜한 무력은 조조군에서의 주축 무장들과 칼을 맞대면서 또 한 번 실력을 과시하게 된다. 조조군 내에서 맹장에 속하는 하후돈, 허저 등을 수십 합내에 제압하고, 나중에는 조조의 명으로 1:6이라는 매우 불공평한 대결에서도 물론 패퇴하기는 하지만, 그의 무력은 6명을 동시에 상대했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빛을 발한다.


삼국지연의 전편에 걸쳐 여포처럼 일 대 다수로 일기토를 하는 경우는, 삼국지 후반부에 등장하는 조운의 한덕 부자 토벌전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여포의 상대가 다들 한창 때의 쟁쟁한 장수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운 역시 당시에 노장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여포 쪽의 수준이 좀 더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포의 걸출한 궁술 역시 연의에서는 빠뜨리지 않고 묘사를 하고 있다. 서주에 머무르는 당시, 유비군과 원술의 상장 기령이 이끄는 일군과의 대치를 중재하기 위해 여포는 화극의 가지를 맞추는 조건으로 양측의 화해를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여포의 제안을 양측은 각각의 속셈에 따라 승낙하게 되고, 호기롭게 술 한잔 걸친 여포는 100보나 떨어진 지점에서 화극의 잔가지. 즉 화극이 보일듯 말듯한 거리에서 월아를 맞춰버리고 만다. 당시의 활의 정확도가 지금의 양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궁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관중에 의해 후에 무신으로 추앙받게 되는 관우와 장판교에서 조조군의 추격을 단기로 막았던 장비를 동시에, 그리고 조조군 휘하에서 손꼽히는 무장들을 6명이나 상대하면서도 수 십합을 겨뤘던 점을 상기해본다면, 삼국지 사상 武에 있어서 으뜸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飛將 ‘여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주군을 두 번이나 바꾸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여포는 뛰어난 무용을 바탕으로 그 당시 출신지와 인접해 있던 당시 병주자사 정원의 눈에 띄어 발탁된 후, 십상시의 난을 거치면서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낙양의 집금오로 부임한 정원을 따라 수도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여포는 동탁의 눈에 띄어 적토마로 유혹하자 이에 넘어가, 정원을 살해하고 동탁측에 합류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부터 여포의 악행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 연의에서는 정원과 여포의 사이를 ‘부자지간’으로 얽매고 있지만, 기록 어디를 뒤져봐도 정원과 여포가 ‘부자의 의’를 맺었다는 사실은 없다. 이 부분은 확실히 나관중의 소설적인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둘 사이를 부자지간으로 엮게 되면, 통상적인 군신관계일 때보다 훨씬 여포의 행위는 유교적인 관점에서 정말 용납받기 힘든 패륜적인 행동이 된다. 그리고 나관중은 바로 그러한 효과를 노렸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동탁과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사이는 부자지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는 동탁이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지어진 것으로서, 그들이 부자 관계라고 하여도 도의적인 중요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여포가 동탁 진영에 합류하는 장면도, 난세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타 군주의 유능한 부하를 영입하려는 모습의 하나로, 그다지 보기 어려운 장면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손책이 태사자를 영입하려 하는 것과 동탁이 여포를 영입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하지만 손책은 태사자를 결투를 통해 남자다운 방법으로 영입한 것이고, 동탁은 여포를 적토마 등을 이용한 뇌물로 회유한 것으로, 방법상의 차이만 있는 것이다. 여포가 동탁에게 합류하면서 정원의 수급을 취한 것은, 동탁과 정원 사이의 정치적인 이해 충돌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여포를 비난하는 단지 윤리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한다면, 삼국지연의 상에 벌어지는 온갖 정치적 암투는 모두 여포가 했던 행위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된다.


단지 나관중은 여포의 행위에서 패륜적인 측면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상당부분 소설적 기질을 발휘했던 것이다.


여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동탁측에 합류하게 되고, 왕윤에 의한 초선의 ‘연환계’가 실행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의 동탁의 신변보호를 담당하면서 군신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여기서 초선이 등장하게 되는 ‘연환계’ 역시 나관중의 소설적인 허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탁과 여포의 군신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에, 바로 여자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나관중은 여기서 초선이라는 상상적 인물을 등장시켜, 연환계를 통해 그의 필치를 또 한 번 유감없이 펼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환계와 왕윤의 화술에 넘어가 결국 여포는 동탁을 다시 배신하게 된다. 물론 한조부흥의 기치를 내세우고는 있지만, 여포의 이후 행적을 감안한다면, 진정으로 한조부흥을 위해 동탁을 주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다만 여포는 초선과의 애정 묘사 등 연의 전반적으로 보면, 이민족 출신 치고는 상당히 미남축에 속한 듯 싶다.  그래서 '인걸 중에는 여포가 있고, 말 중에는 적토가 있다.'는 말 역시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최근에는 여포가 조운, 허저, 관우, 장비 등을 제치고 중국인이 뽑은 호남(豪男) 1순위에 들었던 것도 이같은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여포가 연의에서 전체적으로 악인으로 묘사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바로 주군을 두 번이나 주살하는 경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포가 주군을 바꾸게 되는 계기도 이른바 대의명분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사소하거나 보잘것없는 이유가 우선적이기 때문인 것도 그의 악평에 일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뇌물이나 여자에게 약한 그의 행동에, 당시의 절대적인 사회 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란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당연히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 해제’나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제기되는 여포의 출신문제. 즉 그가 정통 한족이 아니기 때문이었던 점도 고려되었을 법 하다.


연의에서는 이들 동탁과 여포는 반동탁 연합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이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당들로 묘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포와 동탁이 있었기에, 조조의 주도로 일어나는 반동탁 연합군의 결성도 호기롭게 보였고, 그와 대적하는 유,관,장 3형제도 호로관 전투를 통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포에 대한 연의의 악인 묘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중국인의 중화주의 사상이니, 국수주의니 하며 너무 부정적으로 볼 필요만은 없을 듯하다. 물론 여포 본인은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4. 진궁과 함께 천하를 논하다?



여포는 여자문제로 갈등을 겪은 동탁을 암살한 뒤, 낙양을 벗어나 장연을 토벌하던 원소를 도왔으나, 오히려 자신을 암살하려던 속 좁은 원소에게서 벗어나 다시금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연주의 조조가 보수설한의 기치를 내세우며 서주 원정을 떠난 사이에, 진류태수를 맡고 있던 장막과 진궁이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추대하여 드디어 여포는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천하를 논하는 주군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과연 여포 자신이 천하를 논하려 했는가에 대해서는, 필자는 다소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진궁이 서주 대학살을 핑계 삼아 여포에게 추대한 이유는, 여포를 전면에 내세워 천하를 노려보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처음에는 조조의 의기를 높이 사 그에게 가담하였지만, 여백사 사건(물론 정사에는 없는 것으로 조조를 악인으로 만들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 보는 편이 옳다.)이나 서주 대학살 등을 겪으면서 조조에 대한 인간적인 비정함과 더불어, 조조의 능력을 고려해 봤을 때 진궁 자신이 조조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못됨을 알게 된 것도, 진궁이 여포를 추대한 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여포와 결탁 이후의 행보를 보았을 때도, 분명 천하의 싸움꾼 여포를 내세워 천하를 쥐어보려는 욕심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즉 황제는 여포가 되고, 자신은 여포 밑의 승상이 되어 천하의 정사를 좌우하는 그러한 구도를 그리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군사는 여포, 정사는 진궁. 이러한 구도.


여포도 자신의 처지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진궁의 추대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여포는 이러한 제안에 대해 분명 그 의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덥석 받아들였을 것임은, 그의 그간의 행적을 보았을 때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궁은 주군을 조조가 아닌 여포로 택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당시 주변 지역 정세를 보면, 북으로는 원소, 서로는 조조, 남으로는 원술과 손책 등의 세력이 할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서주를 기반으로 천하를 노리기에는 여포군의 세나 인재, 여러 면에서 아무래도 가장 뒤처지고 조건 또한 불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유비가 서주를 근거로 자립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고의적으로 여포에게 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궁이 여포를 추대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진궁은 결국 여포를 천하의 주인으로 만드는데 실패했고, 결국 조조에게 사로잡혀 천하를 꿈꾸던 야심가답게 최후에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죽게 된다.



5. 배신으로 생애를 마감하다.



앞서 이야기 했던, 진궁은 죽음 앞에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 진궁이 주군으로 추대했던 여포는 다르다. 여포는 이 와중에서도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와 버금가는 무용을 지니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여타 무장들의 마지막 ‘산화’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포는 하비성에서 조조에 의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모사인 진궁의 진언을 채택하기 보다는 부인의 말에 더 의지하는 등 군주로서의 모습으로는 매우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주령에 대해서도 그의 융통성 없는 판단으로 결국 수하 장수들의 배신을 초래하게 된다.


이렇게 말년의 모습을 비롯하여 삼국지연의에서 전반적으로 그려지는 모습들을 종합해 보면, 여포가 상당히 단순하고 귀가 엷은 인물임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즉 군주감으로서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반증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조조에게 사로잡힌 여포는 형장에서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여기에서 유비는 이상하리만큼 단호하게 여포의 구명요청을 묵살해버리고 만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이야기를 조조에게 한다.


이처럼 유비가 하비성에서 조조에게 잡힌 여포를 죽이라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조조가 여포를 제어하기에 충분한 그릇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유비가 서주에 머무는 동안 여러 번 여포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여포 또한 유비를 배신했지만 그의 가족을 손대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유비가 조조에게 여포의 목숨을 간청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결국 유비는 사사로운 정보다 유비 자신이 품고 있던 대의를 위해서 미리 걸림돌을 제거하려한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즉 여포라는 희대의 맹장이 조조군에 합류하는 사태만큼, 조조를 최대, 최후의 양립할 수 없는 적(한조 부흥의 최대 걸림돌)으로 생각하는 유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의 이야기를 논외로 하더라도, 조조 입장에서는 기마대를 이끌며 야전에서 최강의 모습을 보여준 여포였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매번 주군을 배신하던 그의 불안정한 모습과 여포 밑에 있던 장료라는 여포에 버금가는 장수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굳이 충성이라는 측면에서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여포를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조조와 유비의 복합적인 이해관계와, 장료라는 유능한 무장, 그리고 이전의 여포 자신의 행적 등으로 인해, 여포가 그렇게 인재를 탐하던 조조의 눈에는 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삼국지 내에서는 물론, 나아가서는 중국 역사상 ‘최강’의 칭호를 논하는 무용을 지니고도, 한창 나이에 허무하게 교수형으로 생애를 마감 짓고 만다.



6. 글을 마치며...



여포에게 있어서 자신의 뛰어난 무력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이건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어쩌면 여포라는 무장은 그냥 싸움터를 전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았던 이민족 출신의 순진한 무인은 아니었을까. 정치가 됐든, 한족의 대의명분이 어떠하던지 간에 그런 머리 아픈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전장에서만이 자신의 의미를 찾았던 맹장.


삼국지연의에서는 비열하고 욕심 많고 파렴치하고 눈치 없이 악행만을 행하는, 무력은 최고이되 어딘가 모자란 듯한 무장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어쩌면 실제로는 그는 단지 순진하고 단순하며, 그저 싸움을 즐기는 본능에 충실한 무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포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고지식한 정원이나, 폭군으로 알려진 동탁 말고 처음부터 조조와 같은 ‘여포의 스타일을 능히 살려줄 수 있는 군주를 먼저 만났더라면.’ 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언제나 먼저 들게 된다.


그가 삼국지상에 수없이 등장하는 여느 평범한 무장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그의 놀라운 무용을 꿈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속절없이 스러져가버렸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여포가 군주를 잘 만났더라면, 난세에 그의 엄청난 무력을 마음껏 과시하며, 지금 우리가 보는 그러한 삶이 아닌 멋진 무장으로써 한평생 살았을 가능성도 농후하기에, 아까운 점도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포가 한족이 아니었기에, 여타 비슷한 무력을 지닌 한족 무장과는 판이한 삶을 살게 되었고, 여포의 생애는 이민족이었던 그가 한족 사회에 뛰어들어 만들어진 필연적인 궤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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