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XI의 공명과 관우>

1.제갈공명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의 등장 배경

적벽전 직전부터 연의 전편에 걸쳐 뛰어난 능력을 과시하는 제갈공명이 유독 힘을 쓰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형주가 상실되는 시점이다. 그렇기에 관우와의 2인자 다툼에 이은 고의 방치설, 제거설 등이 나오기도 하였다. 추측컨데 당시 신인이나 다름없는 제갈공명에게 있어서 유비의 맏의제이자 자부심이 매우 높은, 게다가 연령차이까지 상당한 관우를 상대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탓인지 연의에서는 적벽전에서 군령장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유 사후 순조롭게 형주 남부 전역을 점령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인재와 병력으로 익주까지 도모하며 난세에 극적으로 비약을 꿈꾸던 유비군은, 낙성 공략 과정에서 방통의 뜻하지 않은 사망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서, 형주를 진수하고 있던 제갈공명은 일군을 이끌고 유비를 돕기에 이른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 역사의 분기점이 시작되며 동시에 그 결과 제갈공명과 관우의 2인자 다툼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2.제갈공명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 시기의 진행 과정 

*형주 진수를 관우에게 맡긴 이유.
제갈공명이 형주 진수의 수장으로 장비, 조운이 아닌 관우를 남긴 이유에 대해서는 유협의 무리와도 같았던 방랑군 시절의 유비군의 체제와 서열 순위를 고려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유비의 첫째 의제인 관우를 형주 수비장으로 임명한 것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의 형주 진수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제갈공명은 관우의 강직한 성격을 감안하여 ‘북거 조조, 동화 손권’ 이라는 큰 지침을 관우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의 손권은 유비가 형주를 바탕으로 익주까지 병합하여 순식간에 오를 제치고 위 다음가는 전력을 형성하게 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유비 세력을 견제하려 들었다. 이는 난세를 평정하고 한왕실을 복귀시키려는 유비의 대의의 실현에 있어서 자신이 진수하고 있는 형주 지역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관우는 형주 북부로의 북진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형주 접경지역에서 오와의 잦은 국경 분쟁과 더불어 외교를 통한 형주 동부 3군의 반환을 겪게 된다. 그리고 적벽전 등을 통해 익히 기량을 파악하고 있었을 당시 오의 지휘관인 여몽을 위협적인 장수로 간주하고, 오와의 접경지역에 방비에 대해 소홀하지 않았다.

즉, 그는 오를 결코 만만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대비를 바탕으로 번성 포위전까지 그는 북진을 훌륭하게 수행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까지 관우의 형주 진수에는 아무런 전략적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 2인자 다툼설의 빌미가 되고 만다.

*관우의 북진과 천하삼분지계의 천하통일지계로의 발전.
관우가 이끄는 형주군은, 칠군을 이끌고 저지하던 우금을 격파하고 양양성을 점령하는 등의 눈부신 전황을 일궈내기에 이른다. 이렇게 관우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조조는 허도에서 업으로의 천도까지도 고려하게 된다. 당시의 조조가 천도를 하겠다는 것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여 수도를 안전한 후방지역으로 옮겨놓고, 북진하는 관우군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이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당시 관우군의 북진은 성공적이었으며, 천하를 진동시킬 정도로 군세가 위력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마의의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삼국지 전편에 보여줬던 조조의 스타일을 감안하였을 때,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도 정사에서는 마파까지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더 내려오지 않은 이유는 이 시점에서 서황이 강릉을 탈취당해 퇴각하는 관우의 진영을 돌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위가 천도를 선택하여 형주 북부를 내주고 관우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게 된다면, 낙양을 분기점으로 위는 양분되는 양상이 되며 이는 차후 옹주-양주, 그리고 장안을 비롯한 낙양 서북부는 고스란히 촉에게 내어줄 위기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이 이루어지면, 분명 한중왕에 오른 성도의 유비가 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본대를 이끌고 한중을 통해 장안과 옹-양주 방향으로 북진하였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모습은 지난날 제갈량이 출사 직전에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 등을 논하던 ‘융중계책’과도 그야말로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관우의 북진 성공은 곧 유비가 천하통일로의 첫발을 내딛게 됨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관우의 북진과 위.오의 연합대응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오의 손권이 지닌 형주에 대한 욕심을 파악하고 있던 사마의의 차도살인격 계책이 나오게 된다. 바로 형주를 놓고 흥정한 '위-오 비밀동맹'이 맺어지면서 일거에 전황은 역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관우군의 성공적인 북진을 막아야만 하는 위와, 그러한 성공적인 북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형주 탈환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던 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비밀동맹과 더불어 번성을 공격하던 관우에게 결정적인 오판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오의 계책이 진행되는데, 바로 오군의 지휘관이 여몽에서 육손으로 교체되는 것이었다. 후에 이릉대전에서 오의 총사령관으로 육손을 추천할 때에도 감택 외에는 모두 반대할 정도로 오 내부에서도 백면서생이었는데, 하물며 당시 천하를 진동시키며 북진을 지휘하는 관우에게 있어 이름도 듣지 못한 육손은 애송이로 비춰졌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사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비병 차출'이라는 관우의 판단에 대해 논하자면, 형주 지역을 둘러싼 관우와 오의 소규모 분쟁과 외교적 논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적벽전 이래로 준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촉-오 관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주유의 후임이자 여몽의 선임이었던 노숙은 이러한 삼국의 정립구도를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형주로 인한 촉-오의 갈등을 최대한 봉합하여 동맹국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부분도 이를 반증하는 부분이다.

즉, 적벽전 이래 촉이나 오 모두 단독으로는 위에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불 동맹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관우 역시 이렇게 판단하진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 오를 위와 같은 적국으로 간주하였다면, 측면의 충분한 견제 없이는 애초에 형주 관우군의 단독 북진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공성전을 할 여유까지는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공성전을 위해 형주의 수비 병력까지 차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오의 전면적인 형주 침공은, 아마도 관우는 물론 촉으로 입성한 유비와 제갈공명을 위시한 촉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제갈공명의 관우 제거설의 논리적 비약에 대한 비판.
그러데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형주 전장 상황하에서 제갈공명이 일부러 관우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갈공명이 유비에게 출사한 이유는 유비의 극진한 간청도 이유가 되겠지만, 유비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한왕실 복귀라는 대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제갈공명이 단지 관우가 껄끄럽다고 해서, 걸출한 능력을 지닌 야전사령관인 '관우'는 물론 천하통일을 위해 필수적일 수 밖에 없는 전략적 요충지 '형주'를 포기하는 자승자박을 두는 것이 과연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가능한 일이었을까.

당시 제갈공명은 새롭게 편입한 익주의 재편을 거쳐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또다시 불거진 형주 문제를 형주 동부 3군을 손권에게 내주는 것으로 절충지어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된다. 아니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형주에 대한 손권의 욕심은 제갈공명은 물론 촉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갈공명의 전략에서, 손권까지 위와 동급의 적국으로 가정을 한다면, 관우 단독의 북진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출병이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으로 촉 내부에서 관우와 필적할만한 장수 -장비 혹은 조운- 를 최소 한명은 형주에 더 배치해야 했다. 또한 제갈공명은 익주로 가기 전에 '동화손권, 북거조조'라는 대명제를 관우에게 알려주었다. 이 명제 역시 '손권의 오'가 동맹국이라는 조건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촉이 눈치채지 못했을지언정,  손견 시절부터 늘 차지하려고 했던 형주를 손권 역시 온전히 차지하기를 원했고, 관우의 북진이 잠시 주춤한 사이에 위의 계책을 수락하고 배후를 기습하여 결국 차지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제갈공명이 융중대에서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를 깨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형주가 없이는 -구체적으로는 관우의 형주지역에서의 위에 대한 견제 없는 제갈공명의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후 벌어지는 이릉대전 역시 '관우의 복수'라는 상징적인 의미 이상으로, 촉에게 있어 '형주지역의 재탈환'이라는 현실적인 목표가 있었을 것임은 일련의 과정을 보았을 때,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의 형주 진수 및 북진의 약점
본래 213년 익주를 공략하던 유비와 방통이 성공적으로 점령해야 했으나, 낙성에서 방통이 유시에 사망하고 유비가 고립되자 형주의 주력군이 출병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먼저 출발한 황충, 위연 등은 물론 형주를 진수하던 제갈공명을 위시하여, 장비, 조운 등 실질적으로 촉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의 대부분이 유비를 구원하고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촉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기서 참모의 부재를 우려한 제갈공명이 '동화손권, 북거조조'라는 전략의 얼개를 관우에게 알려주고 떠난다.

위, 오와 모두 접경하고 있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에서, 촉의 주력군이 모두 성도로 향해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우가 이끄는 형주군은 손오의 급습 이전까지 형주 진수는 물론, 조조에게 천도를 고려하게 할 만큼 병력을 신장시켜, 북진을 놀라울만큼이나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참모의 부재
물론 그러한 관우가 치명적인 오판을 범해, 결과적으로 형주를 상실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관우의 곁에는 흔히 말하는 참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촉의 주력 인물들은 모두 익주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다. 관우와 아이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우 혼자 형주에서 버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위의 조인, 서황 등의 노련한 무장들과 사마의의 계책, 그리고 촉을 저버린 오에서는 여몽과 육손을 앞세운 기만전술과 배후급습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형주를 둘러싼 전황은 이미 관우의 역량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가정이지만 북진을 하던 과정에서 만약 관우 곁에 서서 또는 방통이나 제갈공명과 같은, 전략적 판단을 해줄 수 있는 참모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형주를 내어주었을까? 아마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2)대오 방어라인의 급격한 붕괴
또한 오의 형주 침공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던 부분에 대해서는, 강릉과 공안을 수비하던 미방과 부사인의 저항없는 무조건 항복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강릉과 공안을 거점으로 이들이 농성을 벌였다면, 양양을 포위하던 관우군의 회귀와 더불어 백제성에 주둔하던 군대가 이동하고, 나아가 촉에서 장비 내지는 조운으로 하여금 구원군을 출병시켜, 충분히 오군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오군도 더는 형주에서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위군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촉과 형주에서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면, 양쪽 모두 공멸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마도 잠재적 동맹을 깨고 침공한 오군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물러나 외교적으로 타결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관우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을 갖고 있던 미방과 부사인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고, 강릉과 공안을 비롯한 형주 남부 전역이 오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즉, 관우군이 회귀하고, 익주의 본대에서 구원군이 올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관우가 설령 천하의 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병력이 대거 이탈해가는데 구원군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 같은 위, 오의 협격을 막아내는 것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큰형 유비의 숙원을 바로 자신이 깨트렸다는 책임과 자책이 있었던 것일까. 관우는 곧바로 촉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합리적 선택 대신, 상용의 유봉과 맹달에게 원군을 청하고 강릉 재탈환을 시도하다가 결국 산화해버리고 만다.

또한 이러한 관우의 결정과 그로 인한 결말은 훗날 유비로 하여금 이릉대전을 불러오는 중요한 도화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3.제갈공명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에 대한 평가

결과적으로 형주 상실은 관우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끝남과 동시에, 제갈공명이 세웠던 '촉의 한왕실 복귀'라는 대전략의 붕괴를 의미한다. 또한 이로 인해 관우와 제갈공명 사이의 2인자 다툼설이 나올 정도로 극단적인 견해도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관우가 북진을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관우의 형주 상실 과정을 지켜보면, 위.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재층이 엷던 촉의 내부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는 생각도 든다.

설령 제갈공명이 진실로 연의에서처럼 신기묘산 했다고 하더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수백리 떨어진 형주의 전장의 상황 변동까지 완벽하게 대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제갈공명과 관우의 2인자 다툼에 의해 관우가 방치되었고 결국 형주 상실과 더불어 사망하게 되었다는 이른바 '2인자 다툼설'은 진행과정을 도외시하고 주어진 결과를 지나치게 인물 결정론으로 몰고 가는, 근거와 논리가 부족한 말 그대로 추상적인 '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공명이 관우를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치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물론 연의에서의 내용이지만) 마초와 경쟁의식을 갖던 관우를 제갈량이 편지 한통으로 잠재웠던 일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제갈공명은 관우를 능히 자신의 역량으로 제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필자만의 지나친 해석일 것인가.

여담이지만 Koei의 삼국지 영걸전과 공명전을 보면 재미있게도 관우에 대한 상반된 시나리오를 지니고 있다. 즉 유비가 주인공인 영걸전은 플레이어에게 관우를 구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주고 있지만, 주인공이 제갈공명인 공명전은 플레이어가 무슨 수를 써도 관우를 구할 수가 없다. 혹 이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Koei의 제작자는 '2인자 다툼설'을 의식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

Written by IronmasK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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