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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별칭  자 자룡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상산


삼국지 전편에 걸쳐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만능형 무장으로 활약하는 유비의 4번째 형제와도 다름없는 조운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1. 상산의 조자룡.



조운은 하북지역 상산(常山)의 진정(眞定) 출신이다. 조운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조자룡’에서는 조운이 젊었을 때 말을 팔러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실제로도 말을 사고 파는 말장수였다는 설도 있다. 조운의 출신 지역인 상산은 분명 북방 유목민과는 근접한 지역이었으니,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이러한 조운도 언제나 전장에서는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장비가 ‘연인’을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는 것과 유사한데, 속을 좀 더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장비와는 사뭇 다른 이유가 있다.


조운의 아버지도 무사였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조운이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조운의 무예 실력을 향상시켜 주기 위해 상산에 있는 무예에 능한 사부를 소개시켜 주었다고 한다. 조운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상산으로 가 운산도사라고 불리는 사부를 만나 십팔반무예를 섭렵하고 특히 장창 72식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사부를 능가할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조운에게 사부는 운(雲)이라는 이름과 자룡(子龍)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조운은 하산한 뒤에도 사부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언제나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후세에 엮어진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삼국지 전편에 그려지는 조운의 무용(武勇)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들을 보면 그는 분명 젊은 날 무예 실력을 상당한 경지까지 단련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유비 관우 장비 그리고 조운.



사실 조운이 유비군에 합류하게 되는 과정은 관우, 장비와는 달리 조금 복잡하다.


본래 조운은 하북 지방의 최대 세력을 지니고 있던 원소군에 합류하지만, 의외로 발탁이 되지 못한다. 이는 조운의 실력보다는 원소의 출신 배경과 인재 기용 스타일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소는 사세삼공을 지낸 후한의 명문 중의 명문 가문이었다. 그리고 조운이 합류할 시점에는 하북에서 최대 세력을 구가하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당연히 원소 진영에는 소위 상류층의 수많은 인사들이 끈을 대기 위해 북적대고 있었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여기에 젊었을 때 너무 빈곤해서 타고 다니던 말을 팔아야할 정도였던 조운임을 감안해본다면,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소의 진영에서 고위직으로 쉽게 발탁되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야 할 정도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한 참에 원소의 하북 점령 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원소를 떠나 그와 맞서던 공손찬에게 가던 중 문추에게 쫓기던 그의 목숨을 구해주게 된다. 이 장면에서 조운은 홍안의 소년 장수로 그려지는데, 사실 조운의 나이(158-229) 역시 촉의 장수인 요화만큼이나 가늠하기가 힘든 상태이다. 기록에 의거한 나이로 보면 조운은 유비는 물론 관우, 장비보다도 나이가 많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나관중의 고의적인 의도인지는 몰라도 3형제보다 훨씬 어린 소년 장수로 그려지게 된다. 이후 4번째 형제와 다름없는 활약을 펼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면 아무래도 3형제보다 나이가 어린 편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부분에서 유비와 조운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고, 이때의 만남은 후에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한 이후 유비를 찾아 나서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고 있다. 연의에서는 당시 조운은 유비와 만나보고 공손찬 대신 곧바로 유비에게 신종(臣從)하려고 하지만 유비는 이를 만류하고 일단은 공손찬에게 합류하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곧바로 유비에게 합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공손찬 패망 후 여남에서 재회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3형제와의 극적인 만남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후 조운은 유비 관우 장비에 이은 4번째 형제와 같은 모습으로 활약하게 된다.



3. 유비군에서의 경호실장 조운.



사실 유비와 한 침상을 사용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조운은 실제로 기록에서 보이는 직위를 보면 촉이 건국된 이후 관우, 장비는 물론 조운보다도 뒤늦게 합류하는, 소위 ‘오호 장군’에 속하는 황충, 마초, 심지어는 위연보다도 장군직이 낮다. 이러한 정사와 연의의 괴리는 물론 연의의 작가인 나관중의 ‘촉한 정통론’에 의해 힘입은 바가 크다.


인물평을 하다보면 한 인물에 대해 정사와 연의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상당부분 보인다. 정사는 말 그대로 정통 역사서인 반면, 연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니 작가의 집필 방향에 의해 어느 정도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유비와 제갈량을 중심으로 한 촉의 인물들에게는 대체적으로 후하게 묘사를 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어쨌든, 조운은 유비군에 합류한 직후부터 거의 유비의 경호 담당을 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군의 주축을 이루는 일군의 장을 담당하였지만, 조운은 관우, 장비와는 달리 방랑군 상태의 유비의 신변 보호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야에 정착한 이래 유비를 호시탐탐 노린 형주 채모와의 만남에 동행, 그리고 적벽전 당시 퇴각하는 유비 가족의 경호를 담당했던 것, 적벽전 이후 주유의 계략에 의해 손부인과의 결혼식 참가 등등을 보면 의제인 관우, 장비보다도 유비의 곁에 더욱 그림자처럼 호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중에서 적벽전 초반부 당시에는, 장비의 당양 장판파에서의 조조의 추격병을 막아세운 것 이상으로, 조운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도 바로 유비 가족의 경호를 담당하면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조운은 퇴각하다가 헤어진 미부인과 아두를 되찾기 위해 조조군을 돌파해 들어가 결국 우물가에서 미부인과 아두를 찾지만, 미부인이 자결하자 아두만을 데리고 유비군을 향해 이동하기까지의 과정을 연의의 작가는 호로관에서의 여포와 유비 삼형제의 1:3 일기토 이후 최고로 멋들어지는 묘사를 했다. 10만명의 조조군이 에워싼 가운데, 홀로 분투하는 장면을 목격한 조조가 생포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결국 조운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게 만드는 명령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실 당시 조조의 추격군은 연의의 묘사처럼 10만 대군이 아닌, 경기병을 위주로 한 5000여명 안팎의 군사들이었다. 1/20로 줄어들었다고는 하더라도 아두를 품에 안은 조운이 홀로 돌파하기엔 수천여명의 병사 역시 엄청난 병력이었음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아수라장을 무사히 돌파해 나온 조운의 무용은, 연의의 묘사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타 호걸들에 비해 뒤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또 눈여겨볼 장면은 어렵사리 구출한 아두를 유비가 내던지며 조운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 보이는데, 유비는 그만큼 조운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적벽전을 거치며 유비군의 세력이 확장되자 그제야 조운도 일군의 장수로써 계양을 점령하고, 익주 점령전에 병력을 이끌고 가서 유비를 돕는 등의 일군의 장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비록 정식적인 직급은 타 장군들에 비해 다소 뒤떨어졌을지 몰라도, 유비의 신임만큼은 그의 직위와는 상관없이 변함이 없었다. 후에 관우 복수를 내세운 이릉전을 일으킬 때에도 조운은 유비에게 물러섬 없이 간언을 하였던 것도 이러한 관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고, 이릉전에 대패하고 백제성으로 도주하는 유비를 가장 먼저 구출하였던 이도 바로 조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병사 직전 제갈량과 함께 유비에게 후사를 부탁받은 인물 역시 조운이었던 것을 보면 유비가 조운을 얻고 나서 한 침상을 사용할 만큼 신뢰하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4. 이릉대전. 조운은 왜 배제되었던 것인가?



앞서 조운이 얼마만큼이나 유비에게 신뢰를 받았는가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런데 정작 관우의 복수를 위한 삼국지 역사상 3번째 대전(관도대전, 적벽대전에 이은)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릉대전에 왜 조운은 선봉을 담당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과연 연의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단지 유비가 강행하였던 이릉전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배제되었던 것일까.


이 부분은 단순히 유비, 조운과의 인간관계 이외에도 이릉대전이 갖는 성격에 대해서도 고려를 해야 한다. 이릉대전은 전면에 내세웠던 관우의 복수(물론 이것이 가장 큰 이유임은 틀림없다고 본다.)외에도 형주 탈환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즉, 제갈량이 구상하던 천하삼분지계, 그리고 나아가서 촉이 내세운 대의명분. 즉 한 왕실의 복귀를 위해서는 형주는 유비와 촉에게 있어서 전략적으로도 필수불가결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주 탈환과 더불어 한중 이북 지역인 양주, 옹주 지역으로 출병하는 동시 병진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필자 개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물론 촉의 병력으로 위, 오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릉대전 발발 직전의 분위기는 촉의 서슬퍼런 기세에 오는 완전히 눌려있었으며, 위는 애매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필자는 아마도 이릉대전에 유비와 제갈량이 다양한 전략을 수립해 놓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릉대전을 일패지도의 기세로 승리로 이끌어 최단기간에 형주지역을 회복한 다음 오와 화친을 맺고, 동시에 후방에서 대기하던 조운과 형주 진격군을 재편해 형주 북부로 한중과 촉에 남아있던 위연, 마초, 마대와 군수물자를 관리하던 제갈량이 본대를 이끌고 북진을 시도해서 옹주 양주는 물론 장안 지역까지 점령을 시도하는 이른바 ‘동시병진’을 기획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생각에 상당부분 현실적인 무리수가 엿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촉이 이러한 전략을 계획하고 이릉대전을 시작했는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 촉은 형주를 오의 배신으로 빼앗긴 뒤 삼국 중 최약체로 전락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당시에 남은 여력으로 유비 생전에 한 왕조 복귀를 추구하였다면 이릉대전은 그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마지막 전쟁이었던 것이다.


즉 기습적인 공격으로 형주와 옹주, 양주를 탈취해서 위와 결판을 내려하는 전략을 세우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촉을 대표하는 맹장들은 모두 남겨두고 관흥, 장포 등의 신출내기 장수들을 데리고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킨 것은 그만큼 오를 상대하여 형주를 회복할 자신감이 있었다는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겨둔 또 다른 온전한 전력으로 북진을 시도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위는 ‘촉의 북진’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위의 오판 가능성이 높을수록 촉의 이릉대전의 종결과 동시에 북진을 하는 도박 역시 성공 가능성 역시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가능성을 가진 촉의 ‘동시병진’의 전략은 이릉대전이 촉의 참패로 끝나면서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설령 계획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릉대전의 패배와 동시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조운이 백제성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이러한 원대한 촉의 전략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히 유비의 이릉대전을 만류했다고 해서, 또는 위의 공격을 막아내려는 수비가 중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만한 장수를 촉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대전에 선봉은 고사하고 본진으로도 데려가지 않았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러한 요소를 감안해 ‘동시병진’을 계획하였던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해보는 것이다.



5. 만능형 장수의 대표적인 인물. 조운.

 


삼국지연의 전편에 걸쳐 조운과 같은 다방면에 만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꼽으라면 위의 장료 정도가 조운과 유사한 궤적을 갖고 있긴 하지만, 오를 원정하던 조비를 대신해 전장에서 얻은 상처로 허무하게 사망하게 되는 말년의 모습을 감안해본다면, 조운은 한평생의 마무리까지도 그야말로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조운은 삼국지 전편에 등장하는 수많은 호걸들과도 비교해 보아도 어디하나 부족한 점이 없다. 무용은 관우, 장비에 뒤지지 않고, 일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 패배한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조운의 판단력은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유비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 그리고 여타 무장과는 달리 이릉대전을 만류하는 직언도 행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겸양지덕을 갖추고 있었다.


즉 관우의 자부심이나, 장비의 경솔함 또는 위연의 대인관계 등에서 보여주는 성격적 결함이 그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조운은 관우, 장비와 거의 동급인 촉의 개국 공신이며, 후주인 유선의 목숨을 구해준 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러한 위치를 내세운 적이 없으며, 자신보다도 훨씬 늦게 합류한 제갈량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갈량 또한 1차 북벌 당시 퇴각한 조운이 책임을 지고 장군직을 강등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또한 군수물자를 포상으로 분배하려고 하자 이를 만류하는 모습을 보여 제갈량은 조운을 더욱 공경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2차 북벌 직전에 조운이 병사하자 제갈량은 슬픔을 금치 못했고, 어렸을 적 조운 때문에 목숨을 부지한 후주 유선도 그의 죽음에 통곡하였다.


이처럼 조운은 평생에 걸쳐 잡음 없이 말 그대로 무장이지만 선비적인 기질을 지닌, 순수한 무인으로 살다간 것이다.



6. 글을 마치며...



최근에 촉한 정통론이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나관중에 의해 충의의 화신으로 그려지던 관우가 성격적 결함에 의해 예전보다 상당부분 저평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방면에서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겸양지덕을 갖춘 조운은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욱 추앙받는다고 한다.


사실 난세에서 조운과 같이 초지일관의 자세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더욱이 자신의 실력과 비례하여 갖추고 있던 그의 겸양지덕은 평생을 잡음 없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비록 관우, 장비에 가려져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그들에 뒤지지 않는 충성심과 용맹을 갖추고 있는 무장이었다. 또한 그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분수를 잘 지켰고, 공평무사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은 최대한 발휘하여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는 그야말로 뛰어난 장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그의 모습 때문에 유비는 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후사까지도 부탁하는 중임을 조운에게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군주의 입장에서는 조운과 같은 무장이야 말로 덕장, 지장에 용장의 풍모까지 갖춘, 즉 한마디로 완벽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 장비와 같은 일기당천의 맹장에다가 조운과 같은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무장까지 지닌 유비를, 특히나 무장을 우대하였던 조조가 부러워했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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