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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智將' 강유.

연의 상에서의 강유의 등장은 자못 화려하다. 삼고초려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제갈공명은 적벽대전 이후로 줄곧 주유와 조조를 비롯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희대의 지략가로 그려지지만, 그러한 그를 1차 북벌에서 유일하게 군략으로 제동을 건 무장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훗날 제갈공명의 유지를 받들어 촉한의 북벌을 이끄는 강유이다. 정사에서는 그저 천수태수의 의심을 받아 기현으로 이동했다가 제갈량에게 갔다고만 서술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주랑' 주유도, '중원의 패자' 조조도, 그리고 '숙명의 라이벌'인 사마의도 공명을 상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물론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연의의 저자인 나관중의 특별한 배려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공명과도 결과적으로 패하긴 했지만 일시적이나마 막상막하로 멋들어진 지략대결을 보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훗날 공명의 유지를 이어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음은 물론 북벌을 이어 진행하는 주연으로 격상시켜 줄 수 있는 복선을 화려하게 깔아두었던 것이다. 과연 공명이 '천수의 기린아'라고 감탄할만 했다.

이러한 장면의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정사에서의 공명의 강유에 대한 평가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갈량이 유부장사(留府長史)장예 및 참군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강백약(姜伯約)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 및 계상 등의 사람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에서 최고의 인물입니다."

 또 말했다.
"반드시 먼저 중호보병(中虎步兵) 5,6천 명을 그에게 훈련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한왕실에 있으며, 재능은 일반 사람을 넘으므로 군사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 궁궐로 보내 군주를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촉서 강유전>

연의에서의 공명은 정말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간상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꼭 그러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인재를 가늠하는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약점들이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는데, 1차 북벌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인 가정 전투에서 지략은 갖추고 있었으나 실전경험이 전무한 마속을 기용한 점(공명의 입장에서 마속을 기용한 것은 타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인선으로 거론된다. 유비의 임종시 선견지명과 비교된 부분)이 가장 크게 작용했고, 그리고 촉한의 오호장 사후 촉군 최고의 맹장인 위연과의 내면적 갈등관계로 인한 공명 사후의 분열 과정도 공명의 약점으로 지적받았다. (물론 이 부분도 유비 사후를 전후한 촉한에서의 제갈량의 입지 변화와도 큰 연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 정사의 기록에서 보듯 적어도 '강유'에 대해서만큼은 공명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의 사후 유비-공명으로 이어지는 북벌을 통한 '한왕실 부흥'을 이어받아 죽는 그 순간까지 추구한 이가 바로 '강유'였기 때문이다.

2. 제갈공명과 강유. 그리고 북벌.

강유는 공명과의 지략대결을 통해 등장한 이래 그와의 인연은 필연적으로 길고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명 사후 그의 유지를 이어 북벌을 추진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유의 북벌이 마감됨과 거의 동시에 촉한이 무너졌다는 사실에서부터 논쟁은 촉발하게 된다. 공명의 북벌과는 달리 강유의 북벌에는 늘 '내정을 도외시했다.'는 꼬리표가 뒤따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는 촉한의 멸망의 원인과 강유의 북벌의 결과를 하나의 인과관계라는 동일선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 결과는 그를 등용한 주체이자 그에게 북벌의 유지를 심어준 공명의 북벌과도 비교될 여지도 제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왜 공명의 북벌은 비슷한 횟수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30여년을 더 지탱했지만, 강유의 북벌은 촉한의 멸망과 이어지게 되었을까. 이렇게 진행되었던 것은 단지 한 두가지의 원인이 아닌 당시 촉한 내외의 상황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강유의 북벌을 평함에 있어서 가장 큰 화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답을 구해보고자 한다.

* 제갈공명과 강유의 입지. 무엇이 달랐나.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두 사람이 진행한 북벌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변수라고 단언한다. 강유의 북벌에 있어서 촉한의 내부와 연결되는 모든 문제점들이 유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성에서 유비 사후 그의 탁고인 유선을 받들어 2대 황제로 모시고 승상으로서 촉의 국정과 군권을 총괄하며, 안으로는 내정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군을 이끌어 '한의 부흥'을 위한 북벌을 주도하는, 그야말로 촉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실질적인 리더가 바로 제갈공명이었다.

제갈공명은 무인이 아닌 문인이다. 촉한의 정치가이자 유비군의 군사적 참모이기도 하였다. 그는 유비의 신임을 바탕으로 스스로 관중, 악의에 비유하던 젊은 날 쌓아왔던 지식과 재능을 유비군에 합류한 후 마음껏 펼쳐 보여 융중대에서 유비와 논했다고 전해지는 천하삼분지계를 적벽대전을 거쳐 현실화시켰으며, 입촉 이후에는 익주의 내정을 총괄담당했고, 유비 사후를 전후하여 촉한의 오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걸출한 무장들 중 조운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이 사망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군권까지 확보하며,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인물이다.

유선이라는 황제가 있었지만 실상 그에게 있어 공명은 유비의 유언처럼 아버지와도 같은 어려우면서도 의지해야할 존재였으며, 촉한이라는 국가는 실상 유비의 입촉 이후부터 263년 멸망에 이르기까지 조조와의 한중공방전으로 시작하여 유비가 동정했던 이릉전을 비롯해 공명의 남만 정벌과 육출기산 그리고 강유의 7차례에 걸친 북벌 등 전쟁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늘 準전시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명은 국정운영과 군권을 동시에 쥔, 어찌보면 모든 전권을 극한까지 발휘할 수 있는 전시상황 하에서의 일인 독재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당시 왕조시대의 최고위인 '황제'를 꿈꾸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본래 정치란, 최고의 권력을 공인 -왕조시대라면 문무관료 및 지배계층의 지지, 민주주의 시대라면 국민의 지지- 을 통해 쥐려고 하는 활동이다. 정치기반이 약하거나 정치력이 부족한데도 힘과 야심이 있다면 쿠데타 등의 절차를 무시한 방법을 통해 권력을 탈취하기도 한다. 옆 국가였던 조위가 바로 그러했다. 왕조시대에서는 그렇게 권력을 독점한 인물에 의해 기존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적이 무수히 많았음에도, 그 두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공명은 단 한번도 그러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후세의 극찬을 받을만한 큰 그릇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유비 사후의 촉한에서 제갈공명의 위치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임종직전 유비가 평했던 것처럼 '조비의 10배'에 이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이릉대전 대패의 후유증을 수습해 손권의 동오와 다시금 동맹을 맺었으며, 형주 상실에서 비롯된 물자와 인구수 축소라는 국력 저하를 남정을 통해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굴복시켜 어느정도 후유증을 감쇄함으로써 비로소 다시금 북벌을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육출기산 전까지의 일련의 눈부신 재도약 준비 과정으로 말미암아 중국 사학계에서는 오늘날 촉한 정통론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공명의 병법에는 의문부호를 붙여도, 그의 정치력에 대해서만큼은 대다수가 '최고의 정치가 또는 재상'이라는 거의 일치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유는 이러한 제갈공명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비록 강유가 촉한에 귀순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공명의 측근으로,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유지를 이어받아 최전선에서 북벌을 이끌면서 훗날 대장군의 직위에까지 오르지만, 촉한에서의 공명의 입지와 강유의 입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일단 위에서 촉한으로 귀순한 장수였다. 정사를 보면 그 당시 강유가 위에서 어떤 입지를 확보한 인물도 아니었으며 그저 지방의 평범한 무장에 불과했다. 다만 인재가 부족한 촉한의 상황으로서는 공명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수하로 거두어 활용을 하였고, 강유는 마속과는 달리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을 하였던 것이다. 촉한 내부에서의 강유는 비록 공명의 신임을 얻었을지언정 유비가 공명을 얻던 상황과는 크게 다를 수 밖에 없었으며, 공명 자신도 군략은 전수해주었을지언정, 자신이 지녔던 권력 모두를 강유에게 온전히 인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설령 공명이 심정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이미 그럴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이미 국가체제가 확고해지는 시점에서 적국인 위나라의 출신이라는 점도, 그가 방랑군이었던 유비군에 합류한 공명과는 같은 출발선상에 있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강유는 기본적으로 무장이었다. 병법과 무예를 익히고 군을 통솔하는데는 뛰어난 기량을 지녔지만, 그는 공명처럼 국정 전반을 운영하는 능력까지는 지니지는 못했다. 그러한 점을 이미 간파한 공명은 자신이 임종할 즈음에 우선적으로 국정의 전반적인 총괄은 그 기량을 인정받은 장완과 비의 라인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자신의 군권의 후임으로는 위연 등이 아닌 강유를 내정하는 방식의 이원화를 택했던 것이다. 정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강유는 당시 오장원에 종군 중이던 여러 장수들 중에서 특히 양의, 비의와 함께 무장으로서는 독자적으로 공명의 유지를 받들게 됨으로써, 그에 대한 공명의 두터운 신임을 알 수 있다.

건흥12년 (234) 가을, 제갈량이 병이 심해지자, 은밀히 장사(長史) 양의(楊儀), 사마 비의(費褘) 호군 강유(羌維) 등과 자신이 죽은 후에 퇴군하는 방법을 만들어 주고, 위연에게 영을 내려 후방을 끊게 하고, 강유는 그 다음에 있게 하였다. 만약 위연이 혹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대가 바로 직접 출발토록 했다.
<정사 위연전>

건흥 12년(234)에 제갈량이 죽자, 강유는 성도로 돌아와 우감군 및 보한장군(輔漢將軍)이 되어 군사들을 통솔하고, 승진하여 평야후(平襄侯)로 봉해졌다.
연희 원년(238)에 대장군 장완을 따라 한중에 주둔했다. 장완이 대사마로 승진한 후, 강유는 사마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 한 군대를 인솔하여서쪽으로 침입했다.
(~중략~)

연희 19년(256) 봄에 강유는 원정에 앞서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하략~)
<정사 강유전>

강유는 성도로 되돌아가 우감군 및 보한장군의 직위에 올랐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사마로 임명되어 독자적으로 일군을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으며, 군무를 총괄하는 대장군의 직위에는 공명 사후 20년이 넘게 지난 후인 256년에 이르러서야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상당한 세월이 지나 군권의 총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강유가 촉한의 국정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관여한 흔적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공명처럼 국정을 총괄하면서 군권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외지에서 위군을 상대로 북벌을 진행하면서 군공을 세우는 방식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는 공명과는 달리 2대 황제인 유선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얻지 못한 것도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호 등의 발호를 제압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위나라 출신이라는 한계로 인한 촉한 조정 내부에서의 입지 확보의 어려움과 더불어 제갈공명의 유지를 이어받아 촉한 중기 및 말기의 국정을 책임진 장완, 비의, 동윤 등의 유능한 인물들이 조정에서 잇달아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촉한을 망국으로 이끄는 환관 황호 등으로 대변되는 간신배들의 발호와 현실에 안주하려는 관료 및 호족 집단의 의식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때가 공교롭게도 그가 군권의 총수인 대장군이 되었던 시기와 비슷하게 겹치게 되면서, 실질적인 힘을 지녔음에도 이러한 점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성도 밖으로 물러나버린 사실은 공명과는 여실히 다른 그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공명에서 강유로. 촉한 지배 패러다임의 변화

예전에 유비에 관한 인물론을 쓸 때도 그랬지만 필자는 유비 집단이 난세에서 스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 결국 촉한을 건국하게 된 것은,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바로 '한 왕실의 부흥'이라는 대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의지가 무척이나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형주지역의 신진 명사였던 제갈공명이 당시 고작 객장의 신분이었던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라는 대전략을 제시하며 합류했던 이유도, 바로 그 꿈을 함께 실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개인의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굳이 그렇게 험한 길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인재가 넘쳐난다지만 공명 정도의 능력과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지역 명성을 바탕으로 조조의 관심과 발탁을 받을 수도 있었으며, 형이 중신으로 있는 손권의 오도 출세 지향적이 조건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것을 마다하고 유비가 간절히 내미는 손을 잡고 결국은 '한 왕실 부흥'의 최종 목표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천하삼분지계'를 현실로 이뤄냈다.

이 '한 왕실 부흥'이라는 대의명제는 헌제의 선양을 거치면서 촉의 유비가 후한의 명맥을 잇기 위함이라는 목적으로 황제의 위에까지 오르게 되는 원동력이 되며, 또한 왕조를 찬탈한 위를 상대로 총체적 국력 결집을 필요로 하는 북벌의 정당성까지 부여하게 된다. 즉 촉이라는 국가는 유비를 중심으로 하는 어떤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위함이 아닌 '후한'의 명맥을 그대로 온전히 잇기 위함이라는 것에서 그 존재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후세의 사가들은 유비가 건국한 촉을 '전한','후한'과 구별하기 위해 '촉한'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갈공명의 북벌을, 단지 익주에 한정된 촉한이라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책으로 '이공위수'을 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통일을 이뤄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전쟁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제갈공명 시대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북벌을 통한 한 왕실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공명의 북벌이 진정으로 수비를 위한 '이공위수'였다면 그렇게 주기적으로 여러차례에 걸쳐 촉한의 국력을 한계점까지 잔뜩 끌어올려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또한 굳이 장안이나 옹.양주를 목표로 삼을 필요도 없었으며, 그저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에 의지하다가 먼저 공격해 들어오는 위군을 요격하거나, 아니면 군사적 거점을 신속하게 타격하는 소규모 국지전에서 그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육출기산을 통해 생전에 북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강유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유비 사후 제갈공명은 촉한에서 절대적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다. 더불어 유비의 유지를 이어받음과 동시에 스스로도 신중하였으며 '읍참마속'의 예와 군량 수송 실패로 이엄을 곧바로 내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엄격하면서도 공평무사한 통치를 구사하여, 그가 북벌 정책을 추진해도 불만이 적었을 뿐더러 설령 있다고 해도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또한 공명은 스스로 국정도 동시에 챙겼기 때문에, 북벌을 진행함에 있어서도 절대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즉 언제나 촉한의 국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진행했다는 것이다. 상당히 상세한 정황 분석을 바탕으로 가능성이 적지 않은 기습을 제안했던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물리친 이유도 이러한 공명의 성향과 판단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명의 육출기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인 성공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결국 여섯번째 오장원 출병에서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과 대치 중 질병(폐결핵으로 추측된다.)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실질적으로 유비가 이뤄내려 했던 '한왕조 부흥'이라는 대의에 공감하며, 그와 방랑군 시절부터 함께 행동해 촉한을 건국했던 1세대들은 대부분 퇴장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장으로서는 맹장 위연이 남아있었지만 그는 공명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공명을 비롯한 문신들과 갈등관계에 있었기에 후계자는 커녕 결국 반란자로 낙인찍혀 허무하게 사망하게 되었으며, 공명에게 자신처럼 문무를 지니고 군과 국정을 모두 총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심어주며 내심 후계자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던 마속은, 그에게 실전경험을 심어주려했던 가정 수비의 실패로 인해 오히려 1차 북벌 패퇴의 책임을 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장완은 과거 제갈양이 진천(秦川)을 자주 엿보았으므로, 길이 험난하고 운반하기 어려워 결국에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많은 배를 만들어 한수와 면수로부터 위흥(魏興)과 상용(上庸)을 습격하려고 했다. 마침 장완은 지병이 연속적으로 발작하여 제때에 행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승리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므로 훌륭한 계책이 못된다고 했다. 그래서 장완은 상서령 비의, 중감군 강유 등을 보내 유선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도록 했다.
<촉서 장완전>

그래도 공명 사후 후임으로 내정된 장완은 군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명의 유지를 이으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정사에서 보면 장완은 강유를 그대로 북진하게끔 하고, 스스로는 공명의 북벌의 한계점이 군량 수송에 있음에 착안하여, 물자 수송이 훨씬 수월한 물길을 타고 위흥과 상용 등 형주 서북부를 공략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찍 병사하게 됨으로써 실행조차 하지 못하고 백지화가 되어버렸다. 물론 당대를 비롯한 후대에서도 장완의 이러한 상용 급습책에 대해 군략 그 자체로는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았으나, 일단 공명과 같이 어떠한 형태로든 북벌을 이어가려했던 노력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완이 그렇게 부현에 입성한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고 비의가 그 뒤를 잇게 되면서부터 촉한에서는 점차 북벌에 대한 회의론적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공명 사후 나눠졌던 국정과 북벌에 대한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희 12년(249)에 강유에게 부절을 주어 또 서평(西平)으로 출정하도록 했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는 스스로 서쪽 지역의 풍속에 익숙하며, 겸하여 자기의 재능과 무력에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강족과 호족을 유인하여 자신의 오른쪽 날개로 삼으려고 하며, 농산 서쪽을 위나라에서 끊어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항상 대규모로 출병하려고 하여 비의는 늘 그것을 제지하며, 그에게 준 병력은 만 명에 불과했다.
<촉서 강유전>

장완은 공명과는 다른 북벌을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고 스스로 실현하려고 하였지만,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비의는 오히려 강유의 출병을 제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비의가 강유의 움직임을 원천봉쇄한 것은 아니다. 대규모 출병은 막고 단지 일만의 군사를 내주었을 뿐이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드디어 유비에서 공명으로 그리고 장완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던 북벌이라는 국가적 대사가 당시 대장군이자 녹상서사였던 비의, 즉 촉한 최고의 관료로부터 부정을 당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34년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병사한 이래 촉한에서는 238년 강유가 몇 차례 출병하여 공격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244년 위군의 침입을 격퇴한 것, 그리고 247년 강유가 곽회 및 하후패와 교전을 벌인 것 그리고 250년 강유가 서평으로 출격한 것 정도가 촉-위간에 발발했던 전투에 대한 전부이다. 장완이 새로운 계책을 내놓았다지만 공명 사후 무려 13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공명이 진행했던 북벌과 같은 전쟁은 진행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누적된 기간들은 공명의 북벌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무장 출신인 강유에게는 답답함과 조급증을 충분히 유발하고도 남을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유의 출병을 제지하던 비의가 253년 정월 자객에 의해 불시에 사망하게 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것들을 한 번에 풀어내려했는지 그해 4월부터 254년, 255년, 256년, 257년 이렇게 5년 연속으로 매년 출병을 감행하였는데, 사마의가 '천하의 기재'라고 평했던 공명도 이렇게 매년 북벌을 진행하진 않았다. 바로 이 시기가 강유의 무리한 중원 정벌로 촉한의 내정을 피폐하게 만들어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근거가 되는데, 확실히 강유가 지나친 출병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62년 한차례 더 북벌에 나섰으나 역시 등애에게 막혀 대패를 당하고 답중에 머무르고 있는데, 이듬해 등애, 종회 등을 앞세운 위나라의 대규모 촉정벌군이 남진하게 되고 강유가 이끄는 군을 비롯한 다수의 촉군이 검각 등 요충지에서 분전하고 있었으나, 초주 등 익주 토착 호족 세력이 주축이 된 항복론에 의해 유선이 항복을 결심하게 되면서 결국 촉한은 유비와 제갈량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들이 뿌린 피와 꿈을 뒤로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3. 촉한의 꿈을 품었던 강유.


강유가 비의가 사망한 이후부터 단기간에 지나치게 잦은 북벌을 진행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매번 출병 규모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잖은 군사를 동원했음은 비의가 제지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완에서 비의로 넘어가면서 북벌을 바라보는 촉한 지배층의 시각이 변하게 되는 과정도 추정할 수 있었으며, 유선을 항복으로 이끈 일등 공신인 초주의 '구국론'에서는 익주의 토착 인사들의 북벌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넘어선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또한 246년 동윤이 사망하고 나서부터는 촉한 체제의 정점인 황제 유선이 환관 황호의 농단과 이에 결탁한 진지 등의 발호 등을 방치함으로 인해,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촉한은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균열현상을 보이면서 결국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강유는 대장군으로써 촉한의 멸망에 대한 책임과, 그의 북벌이 5년 연속으로 대규모로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촉한의 내정이 피폐해졌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대규모 출병을 제지했던 비의가 사망한 시점에서 그는 북벌에 대해 촉한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도 의지대로 추진할 수가 있었기에, 그 동안의 기다림만큼이나 차분하고도 대국적인 관점에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전략과 전술로써 적절한 기간을 두고 국력을 탕진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북벌을 진행했어야 옳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따랐던 제갈공명이 추진한 북벌이 아니었던가.

본래 전쟁은 국가를 피폐하게 만드는 최고의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자병법의 도국편에서는 '한 번 전쟁해서 승리하면 황제가 되지만, 다섯 번 전쟁해서 승리하면 망한다.'라고 비유하질 않았겠는가.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고구려를 원정하다가 2대만에 망한 ‘수’를 봐도 그 진리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득실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선행되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강유는 너무 성급했다. 그는 병법과 무예를 갖추고 북벌을 통한 전쟁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지속적으로 주고 받았지만, 위와 촉한 사이의 기본적인 국력 수준에서 심한 격차가 있음을 감안하였다면, 그렇게 잦은 출병을 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리한 외정은 곧 내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공명과는 달리 강유가 무장 출신이라는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 험준한 지세에 의지해 버티기만 해도 수개월 내에 공략할 수 없을 나라로 평가받던 촉한이, 강유를 비롯한 각지에서 촉군이 항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군의 침공이 시작된지 초단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2개월 만에 성도가 함락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물론 위군의 전력이 강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이 시기 강유를 중심으로 하는 무장들과 촉한 조정의 관료와 호족들이 지향했던 방향에 대해 극명한 차이점이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종국에는 출신도 다르며 만나지도 않았던 유비로부터 비롯되어 자신이 곁에서 보좌했던 공명이 품고 이루려했던 대의를 이어가려던 강유, 바로 그 자신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던 것이다.


4. 글을 마치며


강유는 공명 사후의 촉한을 대표하는 무장이었다. 극정의 평가에서 보듯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강유는 훌륭했다. 마치 생활태도는 공명과도 큰 차이가 없었을 정도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의 중임을 맡아 신하들의 위에 있었지만, 초라한 집에 살았으며 여분의 재산이 없었고, 별당에 첩을 두어 불결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후당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오락이 없었고, 의복은 입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수레와 말을 준비하고, 음식은 절제했으며, 사치스럽지도 않고 빈곤하지도 않아 관에서 지급하는 비용은 손을 따라 모두 썼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한 까닭을 고찰하면, 탐욕스런 자나 불결한 자를 거세게 질책하고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의 애욕을 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하여 만족하면 많음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견해는 항상 성공을 칭찬하고 실패를 헐뜯으며, 지위의 높음을 기대고 낮음을 떨어뜨리며, 모두 강유가 잘못된 곳에 의지하여 자신을 죽게 하고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폄하하고 다시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춘추》에서 말하는 폄하의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강유처럼 학습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청렴하고 소박하며 절약하는 인물은 한 시대의 모범입니다.
<정사 강유전>

강유는 유비와 공명의 꿈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제갈공명과는 달리 촉한의 조정에 입지를 다지지 못함으로써, 간신배들의 발호를 막지 못하였으며 결국 스스로 무장 출신이라는 점을 끝내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공명과는 달리 단기간에 지나치게 과도한 출병을 행함으로써 내정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단지 물적 인적 손해만이 아닌 익주 토착 호족들을 중심으로 한 촉한 신료들의 북벌에 대한 지지까지 상실했다는 점에서 강유의 패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공명의 유지를 이어가려 했으며, 군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청렴한 생활태도와 함께 후주 유선이 투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촉한을 부흥시키려했던 그의 충정만큼은 촉한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강유는 공명 이후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줄곧 고독한 싸움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늘 인재가 부족한 촉이었다지만 제갈공명 시기보다도 강유 주변에 인재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래서일까. 문득 장완의 요청대로 마속이 죽지 않고 경험을 쌓고 살아남아 강유와 유비와 공명의 꿈을 이어가는 내.외정의 파트너를 이루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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