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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武將).

별칭 : 자 운장(雲長)
국적 : 중국 삼국시대 촉(蜀)
활동분야 : 군사
출생지 : 하동군 해현(河東郡解縣)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윈청현[運城縣]인 하동군 해현(河東郡解縣) 출생하였다. 자 운장(雲長). 후한말(後漢末)의 동란기에 탁현(褶縣:河北省 소재)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혀 조조의 귀순 종용과 함께 예우를 극진히 받았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양(顔良)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208년 적벽전(赤壁戰) 때에는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益州:四川省) 공략 때는 형주(荊州:湖北省)에 머물러, 촉나라의 동방방위를 맡는 등 그 무력과 위풍(威風)은 조조와 손권(孫權)마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격(挾擊)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나라 때 이후로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의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최근에 '관우'에 대한 일련의 재평가가 나오면서 '武와 義'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졌던 '관우'가 '편협하고 거만하며, 이기적인 자부심'을 가진 무장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런 평가는 좀 가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의견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점들로 관우를 매장(?)해버리기엔, 관우가 보여준, 그리고 관우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1.무신(武神)으로 추앙받게 된 관우.


사실 관우의 무력은 삼국지 상에서 최고(最高)는 아닐지언정 손꼽힐만한 무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물론 정사와는 다르지만, 여기서는 정사보다는 연의로 논한다.) 사수관에서 동탁의 장수 화웅의 목을차가 식기 전에 베어버렸다거나, 원소가 내세우는 양대 상장인 안량과 문추의 목을 날려버린 것, 그리고 유비에게 되돌아가면서 오관육참장을 해버린 것, 형주 남부에서 최고의 무력을 뽐내는 '노익장 황충'과의 일진일퇴의 멋진 공방, 그리고 환갑을 바라보는데도 패기로 덤벼드는 방덕과도 막상막하로 겨루는 그의 무력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실 관우의 활약은 정사에서는 그다지 많이 엿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교적인 색깔이 작가인 나관중에 의해 잔뜩 가미된 <三國志演義>를 거치면서 '忠義;의 화신이 되어갔고,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관우의 모습을 빌어 문무대신들의 본보기가 되길 바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대부터 관우에게 '왕'의 칭호를 내려주고 받들기 시작하였으며, 명의 영락제는 정변후 정통성을 갖기 위해 '제'라는 시호를 내려주었고, 청대의 황제들도 '관우'를 매우 숭배해 '관성대제'로 받들었다.

이렇게 관우가 사후 '왕'을 거쳐 '관제'가 되기까지, 정치적인 목적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관우가 생전 보여주었던 강렬한 모습에서 연유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忠'과 '義'를 빼고 관우를 논하지 말라.



항간에는 관우가 '좌씨춘추'를 암송할 정도로 '춘추'라는 책의 매니아였다는 것을 가지고, 문무겸장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그건 솔직히 지나친 비약이다. 춘추가 무슨 병법책도 아니거늘, 단지 그것을 평생 지니고, 암송하고 다녔다고 해서, 문무겸장이라고 지레 판단하고, '왜 그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느냐'고 비판하는데, 춘추는 '병법서'가 아닌 '공자가 집필한 권선징악의 역사서'이다.

어쨌든 이러한 춘추의 내용은 훗날 관우가 보여주게 되는, 관우만의 '忠'과 '義'에 대한 근간을 마련해주게 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관우가 충의의 화신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군주이자 큰형님인 '유비'에게 보여주고 있는 '절대적인 충성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비성에서 조조에게 항복한 뒤 조조의 온갖 환대에도 불구하고, 안량을 목을 벤 뒤, 미련스러울 정도로 우직한 모습으로 주군 유비를 향해 떠나는 그의 한결같은 모습에 우리들은 그에게서 깊은 신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관우가 유비에게 보여주는 '절대적인 충성심'은, 그 자체가 곧 '의'로 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3.제갈량과 관우와의 '불편한(?)' 관계. 2인자 타툼설..



유독 삼국지연의 상에서 신묘한 계략과 혜안을 보여주는 제갈량이 힘을 쓰지 못하는 곳이 바로 형주와 관우의 몰락에 대한 부분이다.

이때문에, 제갈량이 '일부러' 불편한 관우를 고립시킨뒤 위-오의 연합군에 의해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2인자 타툼설이 제기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라고 개인적으로는 보고 있다.

제갈량은 신이 아니라, 그 역시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주군을 구하고 익주를 평정하기 위해, 형주의 주력군을 이끌고 간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형주도 중요하지만, 주군인 유비의 목숨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장기간 동안 익주 공략에 실패한 유비군으로서는 단기간에 익주를 평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형주의 주력군을 데려간 것이고, 이때는 손오와 동맹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서 수많은 장수 중에서도 관우를 남긴 이유는, 관우는 장비, 조운과는 달리 군주 유비의 첫번째 의제이다. 역으로보면, 그만큼 형주 진수에 대한 유비군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유비군 체제를 볼 때도 이는 당연한 것이다. 관우보다 아래뻘인 장비나, 조운에게 형주 수비장을 맡기는 것은 서열체계로 봐도 어긋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제갈량의 고의적인 술책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갈량은 관우에게 형주 진수를 맡기면서 '북거조조, 동화손권'의 계책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동오는 유비군의 익주평정 뒤 자꾸 형주를 반환하라고 요청하여, 형주를 진수하는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관우의 형주와 손오는 표면적으로는 동맹상태였으나, 형주의 촉,오 접경지역에서 끊임없이 잦은 마찰을 일으키며, 사실상 준전시 상태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관우는 형주를 변변한 참모 한명 없이 홀로 진수한다. 익주 평정 후 내정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제갈량이 오의 동향을 파악하여 바로바로 대처하는 것은, 아무리 그 제갈량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나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제갈량은 분명 삼국지상의 최고의 명참모이지만, 그가 현장에 없었던 형주에서나, 이릉전투까지 승리를 이끌 정도의 신적인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오가 형주를 손에 넣기 위해, 위와 손을 잡기전까지 북진한 형주의 관우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때문에 관우의 곁에 정황 판단을 바로바로 해줄 수 있는 군사적인 참모(방통이나 서서)가 있었다면, 그리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주 관우군의 몰락은 제갈량이 어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의적이라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융중계책'을 말하던 제갈량의 천하 통일 계책에는 '익주와 형주'가 필수다. 설령 사이가 불편하였더라도 그러한 '대의'까지 포기하면서 걸출한 야전 사령관인 관우와 형주를 동시에 '팽'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배신한 동오에 의해 형주를 빼앗기고, 관우는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그것은 제갈량이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고, 관우가 북진을 너무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4.관우의 성격적인 결함. 끝모를 자부심..



높은 존경을 받으며 후에는 무신으로 추앙 받기까지 한 관우지만, 그 역시 인간적인 면모, 특히 인간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일종의 약점 같은 것도 있다.

정사에는 관우에 대한 이런 평가가 나온다. '관우는 성질이 너무 거세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 여겼다.' 즉,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였다는 것은 그가 남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군주인 유비가 장비, 조운, 마초, 황충 등과 함께 관우를 오호대장의 하나로 임명하자, 관우는 황충이 자신이 같은 반열에 오른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분이 나온다.

하지만, 관우가 황충과 겨뤘을 때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어떠한 것이 사실적인 모습인지는 다소 애매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2인자 설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공명을 처음 얻어 무척 총애하자 관우는 제갈공명을 시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형주에서의 북진 중 오나라의 육손이 자신을 추켜세우는 내용의 편지와 예물을 바치자 관우는 무척 흡족해하며 방심하고 말았고, 이것은 결국 관우가 패하여 죽음에 이르는 빌미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오에게 배신당해 강릉과 형주를 빼았겼음에도, 익주로 퇴각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강릉을 탈환하려 했던 그 한 장면만으로도, 관우는 이미 성격적 결함을 뛰어넘는 '비장미가 가득한 영웅'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연의상에서 보여지는 관우는, 일을 시작할때는 끝모를 자부심을 보여주며 시작하지만, 막상 일을 마무리지으면 한없이 겸손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 : 화웅, 안량의 목을 베었을 당시.. etc)

또한 이러한 자부심이 그의 잠재력을 100%이상 이끌어 내었다고 볼 수 있고, 부하들에게도 대체로 인정도 많았다.

관우 역시 인간인만큼 장,단점을 지녔음은 당연한 것인데, 최근에는 너무 약점만을 부각시키는 듯 해 아쉬움이 남는다.



4. 마무리를 지으며..



사실 온갖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삼국지 상에서도 관우의 한결같은 태도, 그리고 적을 향해 '쥐새끼같은 무리들'이라고 일갈하는 그의 모습은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리라.

그리고 끝까지 적에게 굴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까지, 관우는 처음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비장미 넘치는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 또한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온다.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다소간의 성격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18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무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관우 운장'이야말로 수많은 삼국지의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여전히 삼국지 최고의 '충과 의' 그리고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무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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