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재위 221∼223).


별칭 : 자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국적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

활동분야 : 정치


자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公孫瓚)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하지 않고 호협(豪俠)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결의형제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袁紹)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조조(曹操)와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196년 원술(袁術)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鎭東將軍宜城亭侯)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下??)로 탈주하였다. 원소 ·조조의 관도대전(官渡對戰)에서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객장(客將)이 되었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 양(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대파,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 침입을 기도하자,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촉(蜀)에 들어가 유장을 항복시키고 촉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패사하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曹丕)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讓位)를 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사를 제갈 양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유비..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대부분 인자한 덕장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연의상에서 나관중이 각색한 모습이다. 유비는 연의상에서처럼 마냥 후덕하며, 나아가 무능하기까지 한 모습만은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1.'인덕뿐이다?' 유비는 후한 말의 난세를 헤쳐, 3국의 하나인 '촉'을 건국한 인물.


유비는 흔히 관우와 장비의 의형이긴 하지만, 왠지 그 둘에 비해 패기가 떨어지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모습은 특히 고우영의 삼국지에서 매우 심하게 부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비는 탁현 지방에 머무를 때부터, 의협집단의 수장이었다. 단지 '仁'과 ‘德’만으로는 그런 집단의 수장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 상당히 거친 성정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감안해본다면, 그에게도 한 성질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의에서는 독우를 매질하는 자가 의제 장비로 그려지지만, 정사에서는 유비가 직접 매질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역시 유비의 성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러한 유비의 거친 이미지를 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유비를 냉혹한 조조와 대비시키기 위해,  상당 부분을 의제인 장비의 몫으로 떠넘겼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유비를 마냥 패잔병만 이끌고 다니는 무력한 장수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만큼 시류를 잘 보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비는 스스로 확실히 자립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전투는 물론, 한 주도 미련없이 포기할 줄 아는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서주목을 인수 받은 후에도 잘 엿볼 수 있는데, 북으로는 원소, 서로는 조조, 남으로는 원술, 그리고 방랑군인 여포군의 존재를 보았을 때, 서주를 천하 평정의 발판으로 볼 수 없었고, 유비는 과감히 여포에게 내주었다.


물론 장비가 취중에 빼앗기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더 신중한 관우를 남길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장비를 남긴 것은 '서주 포기'라는 삼형제간의 모종의 묵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비 대신 서주를 차지한 여포는 결국, 조조군에게 패망하고 만다. 이 후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의 유비의 행적은,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비상할 기회를 노린 흔적이 나타난다. 원소가 패망하기 전에 그를 떠나 유표에게 의탁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즉, 유비는 단순히 ‘仁과 德’만으로 인재를 모은 것이 아니고, 3국의 하나인 촉을 세우고, 한왕실 부흥을 외칠 정도로 큰 포부와, 조조가 지닌 전략, 전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일군을 이끄는 군주로서의 나름대로 임기응변의 대처방안은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유비를 따르는 인재들도 유비에게 '인덕'만이 아닌, 그의 그릇도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을 것이다.



2.유비의 칭제는 '개인적인 야심'때문이었다? 칭제의 이유에 대해..     

(이 부분은 예전에 토론란에 올라왔던 '유비의 칭제'에 관하여 '나그네'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한중전을 승리로 이끈 후, 위의 문제인 조비가 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게 황제위를 선위 받은 직후, 유비 역시 칭제를 한 점을 가지고, 유비의 칭제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시선도 적잖이 있다.


물론 이런 의혹에 대해 100%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비가 '개인적인 야심'때문에 굳이 칭제를 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혹자들은 "'헌제'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헌제의 장례식을 치루고, '칭제'를 한 것은 야심때문이다"라는 이야기도 하는데, 일단 유비가 '칭제'로 얻을 개인적인 이득은 없다는 것이다. 향후 장안과 낙양을 거쳐 중원을 수복한다는 가정을 한다면,  유비 혈통의 황가가 들어서는 것 정도..물론 그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했을 때 그런 것을 먼저 염두해두고 칭제를 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이외에는 당시 상황에서 '한중왕'으로 있으나, '촉의 황제'가 되는 것이나, 개인 신변상의 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에 헌제의 장례식을 치룬 것은, 정말 헌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치뤘다기 보다는 '조비에 의해 폐위된 헌제에 의해 한의 대통이 끊겼다'라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장례식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혹자의 이야기처럼, 살아있는 헌제를 모셔와 유비가 받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조위가 폐위된 헌제를 방치할리도 없고,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촉의 입장에서는 폐위된 헌제의 생사여부도 확실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자치통감과 같은 사료에는 234년에 운명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촉에 어쩌면 폐위된 뒤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을 가능성도 상정해 본다면, '헌제의 장례식'은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헌제'가 살아있기 때문에, 유비의 '칭제'는 매우 이르다.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설령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기다릴 수 없는게, 이유야 어찌됐든 위의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의 대통은 위가 잇는다는, 대외적인 선포나 다름없는 선양식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3번 거절하는 등의 정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되면, 한의 뒤를 잇는 위에게 대항하는 촉이나 오는 곧바로 역신, 즉 황제에게 거스르는 역적무리가 되버리는 논리가 나온다. 때문에, 촉으로서는 위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폐위되버린 헌제의 뒤를 이어 '유비의 촉'이 한의 뒤를 잇는다는 뜻을 지닌 '촉한'이라는 국호로 위와는 다른, 一國을 세울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산양공으로 강등된 유협이 단지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칭제를 하지 않기에는 정황상 유비에게 유리한 것은 없다. 오히려 명분면에서도 정식 선양을 받은 위에게 밀리게 되는 것이다. 존왕양이를 하기에는 정식 선양식을 통해 산양공으로 강등되어버린 유협의 신분과, 위의 정식 선양에 이은 조비의 황제 선포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분을 지니기 위해서 자연스러운 한 왕조의 복귀 분위기가 형성될 때까지 유비는 칭제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는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에 당시엔 그러한 자연스러운 명분을 얻어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헌제 선위 당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식자층이나 백성들의 분위기를 고려해 본다면, 몰락해버린 한 왕조가 다시 명분을 얻을 가능성 보다는, 그냥 황제위를 선위받은 조비의 위나라를 대세로 받아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한의 유지를 이으려는 촉에게는 위기이자,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버린다면, '조위에 대한 촉이 역적국가'라는 그런 소극적인 개념을 떠나, 유비가 평생의 지론으로 삼던 "한 왕조의 정상적인 복귀"는 무용지물이 되버릴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고, 그럼 기껏 험한 난세를 어렵게 헤쳐나와 형주와 익주를 발판으로 촉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도, 의미없는 일이 되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유비가 조비에 이어 곧바로 '칭제'하는 이유는..


1.조비의 부당한 선양에 의한 위나라 개국과, 한 헌제의 폐위로 인한 자연스러운 명분을 얻기에는 당시 시대 상황이 그렇게 한가하지 못했을 뿐더러 가능성 자체도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2.유비의 칭제 목적은 분명 "한 왕조의 적통은 나"라는 것과, "선양에 의한 조비의 칭제는 무효"라는 2가지의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 한 왕조를 잇는다는 점은 "촉한"이라는 국호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개인적인 야심이다', '당연한 수순이다.'라는 상반된 시선을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다만 필자는 유비의 '칭제'가  '야심'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차선책으로서의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3.관우의 복수. 이릉대전과 유비..



유비, 관우, 장비.. 이 3형제의 우의는 삼국지 첫 부분에서 '도원결의'를 통해, 삼국지 전편에 걸쳐 매우 진하게 그려진다. 바로 이릉대전의 비극은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비의 이릉전에 대한 결심은, 25년 전에 있었던 '5관6참장'을 거치며 우직하게 유비에게 돌아온 관우의 ‘의리’와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유명한 '도원결의'와 '5관6참장'. 2가지를 보면 유비가 이릉전을 한 이유, 아니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유비는 아마도 평생을 함께 해온 의제 관우와 장비의 죽음에, 이성적으로 접근하기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유비의 군주로서의 자질에 대한 비판이 거론되기도 한다.)

 

40여년 가까이 자신을 따르며 천신만고 끝에  '촉'을 건국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실 까놓고 이야기해서 그 둘이 개국공신으로서 '부귀영화'라는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평생을 유비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 하다가 죽어간 '의제'들을 생각하면, 유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복수를 해주지 않고서는 편안히 나날을 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변변한 참모도 없이 홀로 형주에서 산화해버린 '관우', 그리고 그러한 작은 형의 복수를 함께 하자던 '장비'의 암살. 


'유비'의 입장에서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왕실 부흥'이라는 대의와, 평생의 적으로 상정한 '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4번째 형제와도 마찬가지인 '조운'과  후사를 부탁할 정도로 신임하던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릉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복수를 위해 건국한지 2년도 채 안되는 '촉'의 국정을 통괄하고 있는 '제갈량'까지 데려가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유비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죽어간, 관우와 장비를 위해 이릉전을 치루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전쟁에 '제갈량'과 '조운'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릉전에는  관우, 장비의 아들들인 관흥과 장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결국 유비도 참모의 부재 속에, 오의 걸출한 무장인 육손의 계략에 의해 대패하고 백제성으로 패주하고 말지만, 승패의 여부를 떠나 그 시점에서 유비의 속은 이전보다 후련하지 않았을까.


이들 3형제는 219년 10월 관우의 죽음을 기점으로, 1년 반 안팎의 시간을 간격으로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장비 221년 7월, 유비 223년 4월)


'忠義'란 아무 때나 버릴 수도 있는 난세에 40여 년간 걸쳐 이어져온 그들의 '義'는 결국 이렇게 이릉대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삶이 우리들에게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글을 마치며..



사실 유비가 만능형 군주인 조조나, 수성형 손권에 비해 부족한 군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조조는 3명의 군주 중 가장 걸출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비도 조조나 손권처럼 일찍 근거지를 확보했다는 가정을 해본다면, 그 둘에 비해 그다지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둘보다 부족해 보이는 것이겠지만, 초반에 등장한 수많은 영웅들, 그리고 난세를 평정할 수도 있었던 원소나 손견과 손책 부자, 그리고 지역 기반을 가지고 난세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원술, 유표, 공손찬 등이 패망하는 과정에서도, 자립 기반도 없었던 유비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한왕조 부흥'을 꿈꾸며, 동지들을 규합하고, 세를 이루어, 제갈량이라는 삼국지 상의 최고의 명참모를 영입하게 되면서, 결국 난세의 한 축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러한 면모를 보았을 때, 유비는 세간의 이미지처럼 결코 나약하고, 무능한 군주는 더더욱 아니며, 그 역시 비상할 때만을 기다리는, '잠룡'의 모습을 지닌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연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장' -여포 봉선-  (2) 2005.07.28
'상산' -조운 자룡-  (0) 2005.07.20
'와룡' -제갈량 공명-  (1) 2005.07.14
'연인' -장비 익덕-  (0) 2005.07.12
'미염공' - 관우 운장 -  (2) 2004.05.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