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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별칭  자 익덕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탁군


자 익덕(益德:翼德). 탁군(褶郡:河北) 출생. 유비(劉備)·관우(關羽)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평생 그 의(義)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후한(後漢) 말 동란기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益州)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巴西太守)가 되었다. 위(魏)나라의 명장 장합(張姸)이 장로(張魯)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車騎將軍)·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었다. 그후 유비가 패사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吳)나라를 치려는 동정(東征)에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荊州)에 있던 유비가 조조(曹操)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급박해졌을 때, 장판교(長坂橋) 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 하고 일갈하여 위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삼국지의 전편에 걸쳐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유,관,장 3형제 중 유비와 관우를 다루고 다른 이로 넘어가면, 이 막내가 되는 장비가 서운해 할 것 같아서... 는 아니고, 당연히 순서상 다루고 넘어가야 맞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연인 장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1. '나는 연인 장비이다.'




삼국지 본문에서는 물론, Koei의 유명한 역사시뮬레이션 게임인 '삼국지' 시리즈를 보면 이 '장비'가 일기토를 할 때 나오는 말이다. 사실 장비는 실제로도 결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연인 장비'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왜 연인일까? 연애나, 다정한(?) 연인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인데, 왜 연인이라고 할까?.. 어렸을 적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인하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애인 관계의 남녀만이 떠올랐으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장비의 조상이 옛 연나라의 황족 내지는 귀족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장비의 출신지인 탁군이 옛 연나라의 땅이었기 때문에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래도 유독 "연인"을 강조하는 것 보면, 후자라고 보기엔 뭔가 부족하고, 아무래도 혈통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사의 평을 보면 작은형 관우는 윗사람에게는 맞먹고, 아랫사람에게는 다정하였다.라는 평과는 반대로, 장비는 윗사람에게는 공손하였으나, 아랫사람에게는 거칠었다.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이러한 성향에는 장비의 옛 '혈통'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때문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러한 개인적인 성향과 지나친 주사로 말년에 수하에게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전편에 걸쳐 호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장비의 일대기에 옥의 티로 남는 것으로,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장비는 힘만 쎈 단순무식?




삼국지에서 장비.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황소만한 덩치에 산도적같이 거칠게 생긴 얼굴에, 호랑이 수염. 그리고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우렁찬 목소리....그리고 술 좋아하고, 주사 심하고, 단순하고, 미련하다...


아마 대부분은 이와 같거나, 비슷한 이미지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장비를 이러한 이미지로 고착시켜버린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나관중의 '연의'라고 할 수 있겠다. 연의는 유비의 독우 매질을 장비에게 슬쩍 넘겨버린 것으로 시작하여, 장비의 이미지를 단순하고 거친 무부로 그려버렸다. 장비를 이러한 케릭으로 만들어버린 나관중의 의도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연의'에서 일종의 '惡'의 개념으로 그려지는 조조에 대해, 촉한을 세우게 되는유비는 최대한 대립각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주인공(?) '유비'의 성격적 결함(?)까지도 막내인 '장비'가 모두 떠맡아 버린 것이다.


서주성을 빼앗기는 부분에서 바로 보편적인 '장비'의 모습이 가장 극대화되고 있다.


이렇듯 장비가 '단순, 무식, 과격, 주사'로 그려지면서, 연의에서는 유비의 과오를 은근슬쩍 덮어버리고, 스토리 진행을 원할하게 하며, 유비와 관우 사이를(관우가 유비보다 두어살 나이가 많다는 설도 있다.) 완만하게 해주는 철부지(?) 막내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러한 연의에서의 장비의 모습과는, 다른 시각에서의 장비를 해석하는 글들이 보인다.


주로 정사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실제로 장비는 시문에 능하고,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평이 보인다. 그리고 장비의 딸 2명 모두가, 유선에게 시집가는 것을 가지고, '장비가 추남이면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 장비의 모습은 상당히 멋지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또, 정군산으로 길을 잃고 헤메들어온 아리따운 처자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보니 하후연의 조카인 하후월희(?)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최근에 중국의 학자가 장비의 부인이 조조의 당질녀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조조,장비,유비는 모두 인척관계'라는 설을 주장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종의 장비와 관련된 야사(?)들을 종합해 보면, 장비의 인상과 성품이 연의에서 그려지는 마냥 '극단'적인 모습은 아니었던듯 싶다.


연의 상에서도 적벽전을 기점으로, 장비의 모습은 전반부와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서주성을 빼앗기는 장면을 비롯하여 망탕산에서 머물면서 관우에게 다짜고짜 달려드는 모습 등 전반부에서 나타난 장비는 '거칠고 성급하며 경솔한' 무장이지만, 중반부 이후에서는 지략적인 면모도 많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엄안을 생포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과, 위의 명장으로 불리우는 장합을 지모로 격파하는 등의 모습 등에서, 우리는 최근의 재해석을 통한 새로운 장비의 이미지와 비슷한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장비가 기존의 이미지와 다르게  멋진 모습을 하고, 시와 문예를 즐기며 마루에서 서화를 치면서 '껄껄껄' 웃는 모습을 생각하니.. 실로 그러하였다면 장비는 '미주랑 주유'의 멋을 뛰어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나관중에 의해 그려지는 '연의'에서의 장비가 아닌, 실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모습을 가진 장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만부부당의 호걸. 연인 장비.




잠시 기존의 장비의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장비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실로 장비를 논한다면, 외모가 아닌 그의 무용(武勇)을 반드시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삼국지 전편을 걸쳐 수많은 일기토와 영웅 호걸들의 멋진 모습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적벽전의 전초전인 조조의 유비 추격전에서 손꼽을만한 멋진 모습들이 두 장면이나 나온다.


첫번째가 바로 '호통소리' 하나로 고작 20여기를 데리고 있는 장비가 장판파에서 조조의 추격병을 막아세우고, 오히려 후퇴하게끔 만든 것이고,  '온 몸이 담덩어리로다'라는 평을 받은 조운의 '아두 구출작전'이 바로 두번째다.


조조군이 장판파에서 장비의 모습을 보고 진격을 멈춘 것은, 장비의 용맹이 조조군의 장수들에게 각인된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삼국지 초장에 보여준 '인걸중의 인걸'이라는 '여포'와의 호로관에서의 일전.

나름대로 내노라하는 제후들의 휘하 용장들이 여포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자, 장비가 "연인 장비의 칼을 받으라"라고 포효하며 그 당대 제일의 무장으로 손꼽히던 여포와 무려 50여합을 겨루고도 승부를 내지 못했던 적이 있었으며, 또한 조조군의 수하 장수들이 고전했던 그 안량의 수급을 쉽게 베어버렸던 관우가 되돌아와서 "저의 의제인 '장비'는 천만대군에서 머리 따내기를 이보다 쉽게 한다."며 나름대로 공손해한다며 했던 말이 당시 조조군의 장수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숫적인 우위는 물론 조조군의 수하에도 맹장, 용장이 꽤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장비 홀로 막고 서 있는 장판파를 돌파하지 못하고 역습까지 우려해 퇴각했다는 것은 당시 장비의 무용이 얼마나 위명이 높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또 여기서 장비는 수십기의 기마로 흙먼지를 내어, 뒤를 받쳐주는 군사가 있는 듯한 위장술을 펼치는 임기응변까지 보여주니 역시 장비는 '단순무식'한 장수는 아니었나 보다.


또한 이후 서량의 '신위 대장군'이자 '금마초'라는 애칭을 지닌 젊은 혈기의 마초와 100여합을 겨루어 비록 승부를 내지 못하였으나, 마초 또한 무용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맹장이었고, 장비 역시 "여포 이래 이러한 무장은 처음이다."라고 평했다는 풍문도 들리니, 장비의 무용을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당시 장비는 50줄이었고, 마초는 한창때였으니, 더더욱 장비의 실력은 허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가 있으니, 익주에서 고립된 주군이자 큰형님인 유비를 구하기 위해 형주에서 출발한 장비는 익주의 수비군을 연전연파하고, 가장 완강히 저항하던 노장 엄안을 지혜로써 생포하고, 호걸답게 엄안의 일갈에 매료되어 그를 풀어주고 빈객의 예우를 하자 역시 이러한 모습에 감동한 엄안도 장비의 군에 합류해 익주를 평정하게 되니, 여기서도 장비의 '쾌남아'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한중전 당시 위의 명장이라고 불리던 '장합'을 상대로 50여일의 교전끝에 장합을 패퇴시켜 다시한번 그 위명을 위나라에 진동시키게 된다.


장비는 일군을 이끌고 전투에 패한적은 있을지언정(삼국지 초반부), 장수간의 맞대결에서 패하거나 등을 돌린 적은 없었으며, 위의 모사 정욱도 '관우와 장비는 만부부당의 호걸들'이라고 평했고, 장판파에서 단기로 조조군의 추격을 막아내고, 자부심의 왕 관우마저도 '의제인 장비의 무예는 나보다 낫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의 무용은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는 삼국지 상의 '武로는 으뜸'이라는 여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초고수였음은 분명하다.




4.자초한.. 그러나 아쉬운 장비의 죽음.




장비는 삼형제 중 가장 비극적으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큰형인 유비도 늘 경계하라고 충고했던 '만취'로 인한 '주사'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는데..


장비는 의형 관우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 했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면 큰형인 유비보다 훨씬 그 감정이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도원결의를 통한 삼형제의 만남에 대한 설은 판본마다 다르지만, 세명이 의용군을 모집할 때 만난 설도 있고, 관우와 장비가 먼저 알고, 유비가 말장사를 위해 이 둘을 고용했다는 설, 그리고 유비가 차를 사러가다가 장비를 만났다는 설..


하여튼 이들의 초반 만남에 대한 설은 여러가지지만, 아마도 두 번째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장비는 청소년기부터 자신을 이끌어준 그러면서 '충과 의'를 설명해줬을 '관우'라는 작은 형을, 형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유비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런만큼 관우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애통해 했을 것임이 틀림없으며, 그러한 심리적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장비의 성격은 평소보다도 상당히 거세졌을 것은 누구라도 어림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관우의 복수전'을 대비해 온통 백색으로 말과 장병들을 무장시키라는 장비의 억지스런 명은 관우의 죽음에 대한 그의 심리 상황을 대변해 줌과 동시에 그러한 그에게 현실적인 답변을 한 범강과 장달.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들에 대한 매질과 그로 인한 장비의 암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인과의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비는 그러한 의제 장비의 성격이 초래할 화를 이미 간파하고 주의를 당부했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하지만 장비가 그러한 분노를 조금만 안으로 갈무리 하여 전장에서 풀었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대목을 볼 때마다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리라.


이릉전 직전에 이렇게 어이없이 목숨을 잃어버려 관우의 복수는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고, 결국 홀로 남은 유비만이 두 아우를 위해 복수전을 강행하지만, 육손의 계략에 의해 대패하여 패퇴하고 만다.


하지만 이 이릉전에 신출내기인 '관흥과 장포'가 아닌 이제는 노회하여 산전수전다 겪은 노련미가 넘치는 맹장 '장비'가 선진을 이끌었다면 과연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하였을까. 물론 제갈량과 같은 뛰어난 군사가 참전한 것과는 그 전술적인 측면에서의 영향력은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역시 이릉전 이전까지 무명에 불과했던 육손의 계략정도는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차후에 이릉전에 대해 논할 때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이릉전 당시의 유비군에게 '장비'의 존재 여부의 차이는 개인적인 기량을 떠나 유비군 전체의 전력에 절반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장비의 존재와 그가 이끄는 일군 그 자체만으로 '오'군에게 엄청난 압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장비가 '기병'을 이끌고 형주 벌판으로 돌파해 나아갔더라면? 아마도 이릉전을 기점으로 사뭇 달라진 삼국지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장비의 암살에 대해 '오군의 사주'가 있지 않았으냐는 필자의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기도 하는데...


즉, 억지스런 명령과 '사형'에 처한다는 장비의 처사에, 불만을 가진 범강과 장달에게, 이미 '촉-오 전쟁'을 선포한 촉군의 선진이자, 주력군이자, 오의 최대의 걸림돌이 될 무장인 '장비'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는 오나라가 접근해 사주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둘이 장비의 목을 가지고 뒤도 안돌아보고 '위'가 아닌 '오'로 도주했다는 것은 이같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외에도 장비가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결말을 맞게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역시 '장비' 자신의 태도. 즉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묘하게도 관우와 장비는 위, 아랫 사람을 대하는 것이 반대였다. 이 둘이 서로의 성향을 서로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쳐 바뀌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5. 글을 마치며...




간만에 쓰는 글인데, 개인적인 일때문에 PC방에서 쓰느라 다소 두서없이.. 그리고 이 전의 글보다는 조금 산만하게 적은 것 같다.


여하튼..


장비 역시 유비, 관우라는 인물에 뒤지지 않는 만부부당의 맹장이자, 호탕한 성격을 지닌 쾌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연의 상의 무식한 장수'가 아닌 나름대로의 멋을 지닌 숨겨진 모습을 지닌 무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의협적인 모습은 도원결의를 하고 형주를 얻기 전까지 방랑군을 이끌던 당시의 유비, 관우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武'와 '의리'만으로 난세를 풍미한 영웅 호걸답지 않게, 관우와는 다른 그러한 선천적인 성격적인 결함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삼국지 상에서 보여지는 다혈질이면서도 호탕하고, 솔직한 장비의 모습은 어느덧 우리를 친근하게 매료시켜버리고 만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가장 친근하면서도 인기가 많은 캐릭이 바로 이 '장비'라고 한다.


그 때문일까. 장비 역시 삼국지를 풍미한, 왠지 일반적이면서 주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타 무장들과는 달리, 틀을 상당히 벗어난 개성만점의 매력을 지닌 무장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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