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문'

한때. 10여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분명 한때나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에 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 알고 있던 팩트와 그 이후에 알게 된 팩트 사이의 간극은 내게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원 사이드만이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극단적인 진실은 그 당시의 현실이기도 했으니까.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문이 그의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에 올라왔다고 한다. 지난 여름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 집회를 듣고 보고 몇 차례 참여하면서 너무나도 답답한 나머지 그의 홈페이지를 들러 이런 저런 글들을 보며 이 땅의 민주주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위안을 삼았던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저 한 사람의 정치인이기도 하면서 그 자체로 변화된 한 갈래 진보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론 진보 학자와 진보 칼럼니스트와 진보 언론과도 날카로운 대립도 했으며 모든 사안에 대해 일반적으로 진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기준에 맞춰 정책을 집행하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끈 참여정부의 최대 화두는 '도덕적 청렴'과 그에 의한 '개혁'이었다. 사회 전방위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등 각계 각층의 기득권력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경제 부문은 수치상으로는 더디지만 여전히 성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양극화 해소'라는 경제에 있어 신자유주의 하의 최대 부작용을 효율적으로 치유해내지 못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국민들의 체감 경제 불만족도를 유발하였으며 그로 인해 결국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1년 후.

참여정부의 주된 모토로 내세웠던 '도덕적 청렴'은 박연차 리스트에 의해 측근으로 시작해 결국 권양숙 여사까지 연루되면서 사과문을 올리며 사실상 무너져내리기에 이르렀다. 재임시절 그렇게도 강조했던 부정부패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무색해질 정도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배신감을 느낀다면 충분히 이해한다. 또 평범한 국민들이 실망하거나 허탈하다고 해도 백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들이대고 있는 그 같은 잣대를 들이댈 경우 입이 100개라고 해도 할말이 없는 작자들이 모인 정당들이 꺼리낌없이 내뱉는 후안무치한 논평으로 듣자니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을 듯 하다.

한국에서 정치는 대체 얼마나 돈이 필요하고 돈을 요구하고 돈을 받아야 행할 수 있는 것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도 천상 정치인이다. 그라고 해서 정부 수립 이후 기형적인 한국 정치의 구조 속에서 돈 한푼 쓰지 않고 국회의원을 하고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미 재임 초기에 대선자금 수수설로 인해 한차례 곤혹을 치뤘던 그였다. 자금의 총 액수와 무관하게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실망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털고감으로써 앞으로 그러한 구태의연한 정치행태를 근절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이 뇌물과 관련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급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것도 그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수치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퇴임 후 친형의 뇌물 수수와 관련된 구속. 그리고 측근과 권양숙 여사까지 돈과 관련된 추문에 휩싸이면서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그렇게 척결하려고 했던 친인척과 측근에 의헤 권력형 부정부패로 비춰지는 사건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한때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구시대 정치인은 자신으로 끝나기를 바란다.'는 언급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발언은 새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는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번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사람이 대통령이든 그 친인척과 최측근이든 그에 합당한 법적 처벌을 받는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 다시한번 확인함과 더불어, 이번 사건들에 들이댔던 엄중한 법적 기준은 현 대통령의 퇴임 후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국민 사이에 널리 형성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이번 사건 역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보복' 수준으로 훗날 평가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정치판은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대통령은 수백억원, 국회의원은 수십억원을 써야 한다. 수백억원대의 자산가였던 문국현 창조한국당 의원도 지난 대선 후 비용 문제로 그렇잖아도 조그마한 당이 쪼개지다시피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선거와 관련된 비용의 투명성을 미국과 같은 해외 수준으로 높일 필요성이 있다. 엄청난 비용을 소진하고 정치 권력을 잡게 된다면 당연히 그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다. 그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빚을 지면 빚을 갚고 싶어하고, 재산이 줄었다면 그 재산을 채우는 정도가 아니라 최대한 수십배로 늘리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적 욕망에 자신에게 다수의 국민이 부여한 정치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게 된다. 부정 부패는 그 정치권력으로 돈을 요구하는 자와 돈으로 그 정치권력을 사려는 자의 암묵적 합의 하에 그 싹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온갖 후안무치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국민들에게 일반적으로 각인된 진보와 보수에 대한 도덕성의 이중 잣대도 이참에 폐기해야 한다. 한때 부패한 보수에 대해 도덕성으로 무장한 진보가 정치권력을 획득한 적이 있었다. 지난 10년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간의 역사는 정치권력이 지닌 본원적 속성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진보와 보수는 사회 변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인식과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에 결합되어 있는 한 진보든 보수든 어느쪽이든 정치권력을 획득한 세력에게는 끊임없이 돈과 결탁하는 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인간의 본능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법과 제도로 그것을 최소화 할 수는 있다. 자신들이 저지른 위법 행위는 훗날 언제든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그 분명한 전제가 확립되게 된다면, 완벽하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의 미래와 현실을 바꾸는 어리석은 욕망을 어느 정도는 자제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안은 그저 과거의 추문을 들춰내고 덮어버리는 1회용 수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노 전 대통령이 내세웠던 도덕적 기치가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정치적 상황과 구조와 배경에 대한 국민들의 냉정한 현실인식과 판단이 요구된다. 단지 한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제 하에서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던 이같은 전철이 왜 반복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국민들에게 있어 정치가 혐오스러워질수록 역설적이게도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09년의 대한민국의 모습에서도 일면 엿보이기도 한, 다수의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게 되면 정치인인척 하는 자와 그에 결탁한 소수의 작자들이 국가를 통제하고 쥐락펴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판은 경제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압축되어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기에 그 과정에 온갖 폐단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도는 민주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정치인과 국민 다수의 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한때 국가를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했던 독재자를 무너뜨렸고 독재를 하는 동안 천문학적 액수의 뇌물을 챙긴 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보내기도 했으며 그 사이에 부정부패의 액수는 역시 대폭 줄어들었다. 이제는 그 줄어든 액수마저 제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게 된 시점이다. 지난 대선에서 보여준 국민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그 통치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인식은 통치자와 관련된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소액이라고 하더라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정도로 높아진 듯 하다. 이는 또다시 정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실로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처벌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인 제도들이 마련되어 있고 그렇게 참여하는 자들의 의사로 만들어지는 공화국가임을 헌법 1조 1항에서 보장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의 국민들은 끊임없이 정치에 참여하고 선거를 통해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정치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권리도 행사하지 않으면서 비난만 일삼는 무책임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 여전히 기형적인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 정치판이지만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 다수의 사람에 의한 참여가 모인다면 그 참여만큼의 발전을 이뤄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일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나 한때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번 사안으로 국민들이 지난 대선 투표 당시와 다른 생각들을 갖게 될 수만 있다면, 차후 비슷한 처지에 놓이는 제 2 제 3의 노무현의 출현을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