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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전략가.


별칭  자 공명, 시호 충무, 와룡선생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한

활동분야  정치·군사

출생지  중국 산둥성


본문

자 공명(孔明). 시호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山東省 沂水縣) 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 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 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陝西省 톱縣)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에서 인용...


시작을 촉의 관우로 하니, 계속 촉의 인물들 위주로 다루게 되는데, 이렇게 이어지는 것. 촉이라는 나라의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리고 삼국지의 진정한 삼국을 구축하는데 큰 공헌을 한, 촉의 명참모이자, 삼국지 상에서도 최고의 참모라고 일컬어지는 제갈량 공명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1. 삼고초려와 천하삼분지계.



최근에 조조를 중심으로 한 삼국지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촉의 인물들은 기존의 호의적인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우, 그리고 제갈량도 그런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아 보인다.


최근에는 삼고초려의 진위 여부 역시 의심받고 있는 처지인데, 당시 유비군의 규모나 행색을 고려했을 때, 스스로 자신을 관중, 악의에 비교하며 속으로 큰 뜻을 품은 제갈량이 유비에게 먼저 찾아가 합류하였다는 것은 필자의 소견으로는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유비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종의 탐색을 했을 수는 있다고 본다.


그리고 후세의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후출사표와는 달리 제갈량의 글로 인정받고 있는 전출사표를 보면 ‘유비의 삼고초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유비가 인재를 얻는 스타일과 당시 조조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황에서 유비군의 앞날을 고려했을 때, 유비는 걸출한 참모를 얻기 위해 충분히 삼고초려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비는 신야에 머무르면서 일찍이 서서라는 뛰어난 참모를 얻었지만, 적벽전 전초전 당시 서서의 어머니를 인질로 한 조조군의 계략에 넘어가 유비를 떠나가 되면서 ‘제갈량 공명’을 추천하게 된다. 줄곧 형주지방에 거주하면서 사마휘 등, 형주 명사들을 통해 풍문으로 '와룡'이라 불리우던 제갈량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을 유비는 곧바로 제갈량이 거주하던 융중으로 찾아가 그 유명한 ‘삼고초려’를 하게 된다.


삼고초려는 제갈량과 유비간의 서로에 대한 탐색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스로 큰 뜻을 품고 있던 제갈량이 당시 소수군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명성이 있던 유비가 직접 찾아왔다고 해서 한번에 합류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으며, 또한 유비라는 사람이 주군으로 모실만한 기량 등이 있는지 가늠했을 것이고, 유비 역시 서서를 통해 참모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제갈량을 영입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우리가 알게 되는 ‘삼고초려’로 그려지게 된 것은 아닐까.


제갈량은 이렇게 자신을 영입하려고 3번이나 자택을 방문하는 유비의 모습에서 아마도 일종의 신뢰감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삼고초려 당시 제갈량이 형주지방에서 제법 명성을 얻고 있었다지만, 조조와 대립하며 난세를 헤집고 형주까지 내려온 유비의 전국적인 명성에 비하면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유비가 제갈량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 보여줬던 모습에 제갈량은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지 않았을까. 삼국지 전편에 걸쳐 유비의 인재를 얻는 모습은 이 ‘삼고초려’에서 극대화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한왕실의 부흥이라는 대의명제에 의기투합하게 되면서 제갈량은 유비에게 ‘융중대, 또는 융중계책’이라고도 알려진 ‘천하삼분지계’를 유비에게 설명하게 된다.


그런데 이 천하삼분지계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당시 조조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태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약간은 억지스러운 것이 아닐까.


적벽 대전 이후 유비군의 행적을 상기해 보면, 관우의 사망 전까지 유비군은 융중 계책의 100%에 가까운 모습과 전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는 과연 우연이었을까. 제갈량이 유비군에 합류하지 않았어도 그려질 수 있는 모습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적벽대전 발발 직후부터 관우의 사망 전까지 완벽하게 융중계책의 구상대로 그려진 유비군의 모습만으로도 융중계책에 대한 비판은 논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즉 제갈량은 당시 유비에게는 큰 전략의 얼개만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었다는 것이다. 조조군의 남하에 대한 전술은 직접 상황에 직면해야 보여줄 수 있는 것이지, 말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다루게 되겠지만, 제갈량의 전략, 전술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하지만 불과 신야의 일군에 불과하던 유비군을 삼국지 3대 대전 중의 하나인 적벽대전을 거치면서 형주와 익주를 병합하며 일약 삼국에서 오를 누르고 위 다음가는 촉을 건국하게 되는 그 중심에는 바로 제갈량이 있었다. 이 점만 봐도 제갈량의 군사적인 면모는 저평가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난세가 훨씬 유동적이었던 유비군이 제갈량이 합류하기 전에는 방랑군으로 떠돌다가, 난세가 오히려 고착될 분위기가 높아지던 때에 제갈량이 합류하고, 적벽대전을 거치면서 유비군의 세력이 급격히 비약하여 삼국 중 일약 2위로 도약하는 촉을 건국하게 된 역사적 사실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제갈량이라는 참모의 존재가 유비군에 있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사마휘의 '와룡과 봉추 둘 중 한 명만 얻어도 왕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라는 평은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2.적벽대전. 제갈량은 한 것이 없었다?



연의를 보면 이러한 질문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갈량은 사실 연의에서처럼 화살을 10만개를 얻었다거나 동남풍을 불어일으키는 등의 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유와 오의 수군이 이뤄낸 승리다.’ 라고 단언하는 것도 지나친 일일 것이다.


물론 연의처럼 제갈량은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지만, 개전을 망설이던 손권을 설득시켜 조조와의 결전을 이끌어 냈다. 당시 손권의 곁에는 장소를 필두로 주화파들의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노숙과 주유와 같은 주전론자가 있었으나, 손권이 확실히 개전을 할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제갈량이 세객으로 오의 진영으로 가 주화파를 물리치고 손권을 설득시켜 조조와의 결전을 이끌어 낸 것은 분명 제갈량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유비와 손권은 동맹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전력차이가 심했지만, 제갈량은 유비를 손권의 부장급 정도가 아닌 손권과 동급 위치에서의 동맹을 성사시켰다. 이 또한 평가받을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제갈량의 활약으로 손권은 개전을 결심하게 되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후로는 유비군과 제갈량은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군의 통수권은 총사령관이었던 주유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적벽전의 과정에서 제갈량은 주유와 황개가 쓰려던 화공 전술을 간파하고 있었던 듯 보이며, 유비군은 적벽에서 화공으로 패퇴한 조조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제갈량은 연의에서처럼 화려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시 오군 위주의 편제를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유비가 형주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적벽전을 손권에게서 이끌어 낸 점은, 범상치 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3.형주 상실과 관우와의 2인자 다툼설.



이것은 이전에 관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도 다루었던 내용이다.


분명 제갈량에게 있어서, 유비의 의제이자, 연령차이도 많이 나고 자부심이 매우 높았던 관우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연의에서는 적벽전에서 군령장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하지만 주유 사후 순조롭게 형주를 점령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인재와 병력으로 익주까지 병합하려 하였던 유비군이, 방통의 죽음과 함께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하자 형주를 진수하고 있던 제갈량은 일군을 이끌고 유비를 도와 익주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제갈량이 장비, 조운이 아닌 관우를 남긴 이유는 유비군의 서열 체계를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비의 첫째 의제인 관우를 형주 수비장으로 임명한 것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의 형주 진수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갈량은 관우의 성격을 감안하여 ‘북거 조조, 동화 손권’ 이라는 큰 지침을 관우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오의 손권은 형주를 바탕으로 익주까지 병합하여 순식간에 오를 제치고 위 다음가는 전력을 유비가 형성하게 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유비군을 견제하려 들었고, 이는 난세를 평정하고, 한왕실을 복구하려는 유비의 뜻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은 새롭게 편입한 익주 재편을 거쳐,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또다시 불거진 형주 문제를 형주 동부 3군을 손권에게 내주는 것으로 절충지어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된다. 그리고 형주의 관우가 북진하여 번성을 포위하게 된다.


여기까지의 모습은 지난날 제갈량이 융중에서 유비에게 이야기하던 ‘융중계책’과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데 제갈량이 여기서 일부러 관우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출사한 이유는, 유비의 극진한 간청도 이유가 되겠지만, 유비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한왕실 복귀라는 대의를 알고 있는 제갈량이 관우가 껄끄럽다고 해서 뛰어난 야전사령관인 관우와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형주를 포기하는 자승자박을 두는 것이 과연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마도 제갈량은 손권이 조조와 연합하여 동맹을 깰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손권도 촉과 연합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에, 형주에 대한 미련은 3군의 반환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와 별개로 손권과 잦은 마찰을 겪었던 관우는, 북진 당시 손권의 급습에 대비해 상당한 군사를 후방에 배치하는 등의 노련함을 보여주었으나, 도중에 여몽이 육손으로 교체되었다는 정보를 얻자, 수비병까지 번성 공략에 동원하게 되고, 이는 후방이 허술함을 초래하여, 위. 오 연합군의 공격을 자초하게 되고,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제갈량의 고의성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보다, 관우의 곁에 정황 판단을 해줄 군략을 지닌 참모가 없었던 점이 더욱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방통의 유시에 의한 죽음이 촉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의 죽음과 형주의 피탈에 대해 정리하자면, 제갈량은 유비에게 출사하여 당시 ‘융중계책’에 가장 근접한 판도를 꾸며놓고도, 설령 관우와의 사이가 불편하다고 하더라도, 관우와 형주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동맹이었던 오의 손권이 형주 문제로 배신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관우 곁에 군략을 지닌 참모의 부재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 있지 않고 익주에 있던 제갈량이 연의에서처럼 신기묘산 하였더라도, 시시각각변하는 수백리 떨어진 형주의 전장의 상황 변동까지 대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제갈량이 관우를 제어하지 못해서 방치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마초와 경쟁의식을 갖던 관우를 제갈량이 편지 한통으로 잠재웠던 것을 본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제갈량은 관우를 능히 제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필자의 지나친 해석일까.



4. 읍참마속.



왜 마속이 선봉이 되어야 했는가? 마속이 가정 전투의 선봉이 된 이유는 제갈량의 1차 북벌의 목적을 일단 파악해야 한다. 1차 북벌때 제갈량의 목적은 기산의 확보에 있었다. 이 기산을 확보하게 되면, 위수를 따라 동진하여 장안의 배후를 습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량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위연이 자오곡을 통한 장안을 탈취하자는 이른바 '자오곡(子午谷)의 계책'이 있었지만, 촉의 전력을 가지고, 위와 전쟁을 수행하는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무리수가 많다고 판단, 좀 더 안정적인 전술을 통해 장안과 옹,양주를 탈취하려 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든, 제갈량은 양동작전을 구사해 조운과 등지의 별동대를 기곡도를 통해 미성을 공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 조진의 대군을 기곡도로 유도함과 동시에 제갈량의 본대는 기산을 점령하려 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자 남안, 천수, 안정 3군은 촉군에 호응하게 되어 양,옹주를 진동시키자, 위의 명제(조예)는 장합(연의에서는 사마의)을 구원군으로 보내게 된다.


그러자 제갈량은, 기산으로 진군하는 장합의 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전략적 요지인 가정의 수비장을 선정하게 되는데, 바로 마속을 기용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왜 마속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게 되는 것이다.


제갈량이 위연이 아닌 마속을 가정의 수비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가정에서 장합의 군을 격파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군사적 요충지에서 수비위주로 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장합이 위의 명장이긴 하지만, 계곡과도 같은 좁은 길에서는, 대군의 잇점을 살릴 수 없게 된다. 군과 군이 맞부딪치는 면이, 한정되어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위연이 나아가지 않아도, 그간의 마속의 기량을 감안할 때 제갈량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본다.


제갈량은 유비 사후, 촉의 건국 공신이라 할 수 있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등 일당백 장군들의 사후 촉을 이끌어갈 만한 신진 인재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는 마속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릉전에서 마량 사후 제갈량은 이 재기 넘치는 준재인 마속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특히 남정 전 마속이 진언했던 "힘으로 꺾기보다는 마음으로 깨우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 후 제갈량은 마속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을 것이다. 당시 촉의 입장에서는 마속 정도의 준재는 드물었고, 실전 경험을 쌓게 해 촉의 기둥으로 키우려는 제갈량의 의도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가정의 수비가 비중이 큰 만큼 마속이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앞으로도 중임을 맡기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고, 장차 자신의 유지까지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마속의 첫 실전인 가정 전투는 무리해서 적과 맞서는 것도 아니었고, 군사적 요충지인 가정을 제갈량이 기산을 점령하는 동안 사수하는 역할이었다.


이처럼, 기량에 비해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마속에게 1차 북벌의 키라고 할 수 있는 가정 수비를 맡기면서, 일종의 실전 경험과 함께 공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려는 제갈량의 의도도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우직하게 수비에만 임하라."고 세부적인 지시까지 해주게 된다. 더불어 부장을 우직한 무장인 '왕평'을 붙여준다. 제갈량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왕평이라면, 경험 부족의 마속을 도와 적절한 상황 판단을 해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마속이 왕평의 조언을 무시함으로써 양 장수간의 직위나 위치가 부적절했지만, 제갈량은 수비만 확고히 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였고, 마속과 왕평이라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수행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형까지 촉군에 수비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마속이 지시를 어겨가면서까지 장합을 이기려 들려고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속이 패배한 이유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군사력과 지형에서, 마속이 공명심이 앞서 장합을 이기려들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나 싶다. 만약 마속이 제갈량의 당부대로 수비에만 치중했다면 결과는 180도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러한 마속의 결과론적 실패로 인해 제갈량의 용병술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기엔 다소간의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마속이 실전경험이 없었던 점이 역시 뼈아픈 패배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고, 이는 결국 제갈량의 전략 전체에 차질을 불러, 1차 북벌을 중단하고 사곡의 조운군과 기산을 공략하던 촉군 본대의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 패인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연의처럼 제갈량이 직접 마속에게 수비를 지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속을 가정에서 장합군을 저지하는 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분명 제갈량이고,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하더라도, 군사력이나 지형을 고려했을 때, 싸워 이기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1차 북벌의 총사령관은 제갈량이지만, 퇴각의 빌미를 제공한 직접적인 원인은 마속이었고, 제갈량의 군령(장합군의 저지)을 위반한 마속은, 일벌백계를 위해서라도 처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사의 상랑전에 마속이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시기가 나오지 않아, 가정에서 패퇴하고 도망쳐오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인지, 아니면 투옥된 다음에 다시 탈주를 감행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인지 그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가정에서 패퇴하고 한중으로 도주해 온 것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속이 전자에 해당해, 가정에서 패퇴하고 도주해 온 것이라면, 당연히 1차 북벌 전체 전세에 영향을 주는 가정의 수비라는 군령을 위반하였으므로, 그에 따른 처벌을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고, 만약 투옥된 뒤 도주하려 한 것이었다면, 더욱 더 용서 받기 어려운 행동이었을 것이고, 역시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총사령관의 군령을 따르지 않은 한명의 장수로 인한 패배때문에, 총사령관 자신도 중형에 처해져야 한다면, 관도대전 대패 후 원소나, 장수와의 전투에서 아들과 조카까지 잃은 조조 역시 그 직후 처단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제갈량은 마속과는 달리 촉의 승상이었고, 선주인 유비의 유지를 이어 후주 유선을 보좌하고, 이릉전 이후 급격히 기운 촉의 내정과 군사력을 일으켜 세우고, 남만 정벌까지 이루어 북벌에 도전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한 제갈량이 1차 북벌 패퇴의 책임을 지고 죽는다면, 그러한 행동은 일개 필부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제갈량의 어깨에는 마속의 죽음까지 짊어지게 되고, 그만큼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내심 자신의 후계자로까지 염두해 뒀을 법한 마속을 좀 더 가르치지 못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후회와, 선주의 유언까지(마속의 중용에 관한 이야기) 더해 대의를 그르쳤다는 자책감에 충분히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육출 기산과 오장원에서의 마지막.



제갈량은 유비의 유지를 이어 6차 북벌을 하는 등의 한실 부흥에 전력을 다 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234년 한여름, 오장원에서 54세의 일기로 눈을 감게 된다.


이 6차례 북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란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채택하지 않은 점과 6차례에 걸친 북벌을 하였음에도 뚜렷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결과에서 제갈량의 군략에 대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고 비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군략을 논하기 전에 위와 촉의 국력을 먼저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위와 촉의 영토는 5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더욱이 당시 중국의 경제적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하북 지역이었지, 외딴 산골의 익주는 아니었다. 이는 당시 중국이라고 논할 수 있던 지역은 대부분이 위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흔히 위,오,촉의 국력을 6:3:1의 비율로 비교하곤 한다. 물론 수치상의 비율이 전부라고 할 수 는 없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은 시작부터가 군사, 경제적으로 위에게 대적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안고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벌은 성패 여부를 떠나 촉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연의 자오곡 계책은 그 전략의 성사 여부를 떠나 안정적인 성향을 가진 제갈량의 눈에는 도박과도 같이 비춰졌을 것이다. 위연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총사령관의 위치에 있는 제갈량은 빠듯한 군사력으로 성패 확률이 반반인 기책에 모험을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에, 여러사람들은 '소수군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면 일거에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기책을 활용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제갈량의 군략을 비판하지만, 촉군을 통괄하고 있는 제갈량은 실패에 대해서도 충분히 계산을 하고 있어야 하는 위치였다. 무턱대고 가능성이라는 측면만을 가지고 공격해 들어갈 수 있는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현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6차례 북벌 모두 실패라는 최종 결과를 얻게 되지만, 가능성 측면에서 본다면 1차 북벌을 비롯하여, 옹주 양주는 물론 장안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적이 있었다. 비록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것은 촉의 군사들에게 사기 재고라는 측면과, 차후 북벌 진행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매번 제갈량의 북벌을 가로막았던 사마의가 수비 위주의 전술이 아닌 제갈량과 정식으로 공격전술로서 맞대결을 하였다면 과연 그 때에도 제갈량에게 승리 할 수 있었을까. 사마의는 언제나 촉군보다 대군을 이끌고 와서도 매번 수비적인 전술로 임했다. 일단 군략이라는 것을 쓰려면 상대가 맞받아치고 나와야 가능한데, 도무지 상대를 하려고 하지 않으니 제갈량이 아니라 조조가 오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사마의나 위의 장수들이 제갈량과 정면으로 맞부딪친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그들은 항상 패배했다. 즉 국지전에서의 대결은 제갈량은 승리로 이끌었지만,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대규모 전쟁은 하지를 못했다.


6배 가까이 차이나는 국력. 1.5배 이상 차이가 나는 병력. 그리고 초지일관 수비적으로 나오는 적을 상대로 결과적인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해서 제갈량의 전략과 전술을 폄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제갈량의 북벌이 촉의 경제력을 피폐시켜 멸망을 앞당기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본래 무리한 정벌은 국력을 소모시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최고의 길이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도, 2대에 걸친 고구려 원정 때문에 힘없이 멸망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촉은 수치상으로도 위의 1/6, 그것도 지형 등의 요소를 고려했을 때, 국력에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을 감안하고도, 6차례나 북벌을 먼저 감행했다는 것을 볼 때, 제갈량을 위시한 촉의 집권층의 내정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갈량은 언제나 여력을 남겨두었다. 즉 국력 피폐로 이어지지 않을 한계선의 병력으로 북벌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의 그러한 면 때문에, 제갈량을 최근에는 "최고의 행정가" 또는 "평화시 최고의 재상감"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런 수치상으로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매번 공세적인 북벌을 이끌었던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촉이 익주의 험준한 지세에 의지했으면 더욱 오랬동안 버텼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촉이라는 국가가 왜 건국되었는가? 유비는 유언처럼 익주에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려고 촉을 건국한 것이 아니었다. 촉을 개국한 유비와 제갈량을 비롯한 개국 공신들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촉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의 부흥. 그것이 바로 삼국 당시 촉의 정체성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헌제를 폐위하고 한을 멸한 조위는 양립할 수 없는 국가였다. 오나라처럼 양주와 형주에 안주하고 지낼 생각이 촉과 제갈량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제갈량 정도 되는 인물이 위와 촉의 격차를 몰랐을 리 없다. 오히려 북벌의 현실적인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라고 진작에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북벌을 감행했다. 유선을 보좌해 촉을 다스리며, 출사표를 올리고, 촉군을 이끌고 언제나 위를 향해 창끝을 들이댔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승리를 쟁취할 뻔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단지 제갈량에게 부족했던 것은 천운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결코 실패를 미리 염두해 두거나, 성공을 기대하지 않고 북벌을 진행했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6차례의 북벌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지만, 건강을 해칠 정도의 격무에 시달리면서까지 뜻을 이루려 했던 그의 모습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서 누누이 이야기 했던 위의 1/6의 국력의 격차등의 객관적인 조건의 압도적 불리에도 불구하고 ‘선공을 했는데도 승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갈량의 군략은 별 것 아니었다.’라는 단정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6.마무리를 지으며..



쓰다보니 글이 이전 글들보다 두서없이 꽤나 길어졌는데...


제갈량이 1800여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보여준 태도에 있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가 일국을 이끌 정도의 능력을 지녔음에도 후주 유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청렴하며, 공과 사를 구별하고, 상벌을 분명하게 해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며, 선제의 유지를 잇기 위해 위를 향해 지속적인 북벌을 시도하였던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 촉의 정사에서 어떠한 잡음도 없었다는 것도 조예  사후의 위나라나, 손권 말년의 오나라와 비교해 눈여겨 볼만하다.


그의 북벌이 승리를 쟁취하지도 못했고, 촉의 국력만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의 사후에 강유의 더한 북벌에도 불구하고 30여년이나 지탱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제갈량은 조조나 손권의 참모들과는 확실히 다른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유비라는 군주의 스타일과, 촉이라는 나라의 조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겠지만, 제갈량이 걸어온 행보는 일개 참모의 수준이 아닌 거의 군주와도 같은 모습이다.


일개 방랑군이었던 유비의 참모로 영입되어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는 촉을 건국하고, 비록 형주를 빼앗겨, 익주 1개주로 제한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의 건국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6차례나 북벌을 일으켰던 제갈량을, 결과적 성패를 떠나 필자는 삼국지 상의 최고의 참모라고 감히 말하면서...


부족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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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별칭  자 익덕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탁군


자 익덕(益德:翼德). 탁군(褶郡:河北) 출생. 유비(劉備)·관우(關羽)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평생 그 의(義)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후한(後漢) 말 동란기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益州)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巴西太守)가 되었다. 위(魏)나라의 명장 장합(張姸)이 장로(張魯)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車騎將軍)·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었다. 그후 유비가 패사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吳)나라를 치려는 동정(東征)에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荊州)에 있던 유비가 조조(曹操)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급박해졌을 때, 장판교(長坂橋) 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 하고 일갈하여 위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삼국지의 전편에 걸쳐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유,관,장 3형제 중 유비와 관우를 다루고 다른 이로 넘어가면, 이 막내가 되는 장비가 서운해 할 것 같아서... 는 아니고, 당연히 순서상 다루고 넘어가야 맞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연인 장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1. '나는 연인 장비이다.'




삼국지 본문에서는 물론, Koei의 유명한 역사시뮬레이션 게임인 '삼국지' 시리즈를 보면 이 '장비'가 일기토를 할 때 나오는 말이다. 사실 장비는 실제로도 결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연인 장비'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왜 연인일까? 연애나, 다정한(?) 연인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인데, 왜 연인이라고 할까?.. 어렸을 적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인하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애인 관계의 남녀만이 떠올랐으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장비의 조상이 옛 연나라의 황족 내지는 귀족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장비의 출신지인 탁군이 옛 연나라의 땅이었기 때문에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래도 유독 "연인"을 강조하는 것 보면, 후자라고 보기엔 뭔가 부족하고, 아무래도 혈통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사의 평을 보면 작은형 관우는 윗사람에게는 맞먹고, 아랫사람에게는 다정하였다.라는 평과는 반대로, 장비는 윗사람에게는 공손하였으나, 아랫사람에게는 거칠었다.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이러한 성향에는 장비의 옛 '혈통'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때문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러한 개인적인 성향과 지나친 주사로 말년에 수하에게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전편에 걸쳐 호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장비의 일대기에 옥의 티로 남는 것으로,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장비는 힘만 쎈 단순무식?




삼국지에서 장비.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황소만한 덩치에 산도적같이 거칠게 생긴 얼굴에, 호랑이 수염. 그리고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우렁찬 목소리....그리고 술 좋아하고, 주사 심하고, 단순하고, 미련하다...


아마 대부분은 이와 같거나, 비슷한 이미지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장비를 이러한 이미지로 고착시켜버린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나관중의 '연의'라고 할 수 있겠다. 연의는 유비의 독우 매질을 장비에게 슬쩍 넘겨버린 것으로 시작하여, 장비의 이미지를 단순하고 거친 무부로 그려버렸다. 장비를 이러한 케릭으로 만들어버린 나관중의 의도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연의'에서 일종의 '惡'의 개념으로 그려지는 조조에 대해, 촉한을 세우게 되는유비는 최대한 대립각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주인공(?) '유비'의 성격적 결함(?)까지도 막내인 '장비'가 모두 떠맡아 버린 것이다.


서주성을 빼앗기는 부분에서 바로 보편적인 '장비'의 모습이 가장 극대화되고 있다.


이렇듯 장비가 '단순, 무식, 과격, 주사'로 그려지면서, 연의에서는 유비의 과오를 은근슬쩍 덮어버리고, 스토리 진행을 원할하게 하며, 유비와 관우 사이를(관우가 유비보다 두어살 나이가 많다는 설도 있다.) 완만하게 해주는 철부지(?) 막내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러한 연의에서의 장비의 모습과는, 다른 시각에서의 장비를 해석하는 글들이 보인다.


주로 정사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실제로 장비는 시문에 능하고,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평이 보인다. 그리고 장비의 딸 2명 모두가, 유선에게 시집가는 것을 가지고, '장비가 추남이면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 장비의 모습은 상당히 멋지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또, 정군산으로 길을 잃고 헤메들어온 아리따운 처자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보니 하후연의 조카인 하후월희(?)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최근에 중국의 학자가 장비의 부인이 조조의 당질녀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조조,장비,유비는 모두 인척관계'라는 설을 주장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종의 장비와 관련된 야사(?)들을 종합해 보면, 장비의 인상과 성품이 연의에서 그려지는 마냥 '극단'적인 모습은 아니었던듯 싶다.


연의 상에서도 적벽전을 기점으로, 장비의 모습은 전반부와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서주성을 빼앗기는 장면을 비롯하여 망탕산에서 머물면서 관우에게 다짜고짜 달려드는 모습 등 전반부에서 나타난 장비는 '거칠고 성급하며 경솔한' 무장이지만, 중반부 이후에서는 지략적인 면모도 많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엄안을 생포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과, 위의 명장으로 불리우는 장합을 지모로 격파하는 등의 모습 등에서, 우리는 최근의 재해석을 통한 새로운 장비의 이미지와 비슷한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장비가 기존의 이미지와 다르게  멋진 모습을 하고, 시와 문예를 즐기며 마루에서 서화를 치면서 '껄껄껄' 웃는 모습을 생각하니.. 실로 그러하였다면 장비는 '미주랑 주유'의 멋을 뛰어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나관중에 의해 그려지는 '연의'에서의 장비가 아닌, 실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모습을 가진 장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만부부당의 호걸. 연인 장비.




잠시 기존의 장비의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장비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실로 장비를 논한다면, 외모가 아닌 그의 무용(武勇)을 반드시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삼국지 전편을 걸쳐 수많은 일기토와 영웅 호걸들의 멋진 모습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적벽전의 전초전인 조조의 유비 추격전에서 손꼽을만한 멋진 모습들이 두 장면이나 나온다.


첫번째가 바로 '호통소리' 하나로 고작 20여기를 데리고 있는 장비가 장판파에서 조조의 추격병을 막아세우고, 오히려 후퇴하게끔 만든 것이고,  '온 몸이 담덩어리로다'라는 평을 받은 조운의 '아두 구출작전'이 바로 두번째다.


조조군이 장판파에서 장비의 모습을 보고 진격을 멈춘 것은, 장비의 용맹이 조조군의 장수들에게 각인된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삼국지 초장에 보여준 '인걸중의 인걸'이라는 '여포'와의 호로관에서의 일전.

나름대로 내노라하는 제후들의 휘하 용장들이 여포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자, 장비가 "연인 장비의 칼을 받으라"라고 포효하며 그 당대 제일의 무장으로 손꼽히던 여포와 무려 50여합을 겨루고도 승부를 내지 못했던 적이 있었으며, 또한 조조군의 수하 장수들이 고전했던 그 안량의 수급을 쉽게 베어버렸던 관우가 되돌아와서 "저의 의제인 '장비'는 천만대군에서 머리 따내기를 이보다 쉽게 한다."며 나름대로 공손해한다며 했던 말이 당시 조조군의 장수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숫적인 우위는 물론 조조군의 수하에도 맹장, 용장이 꽤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장비 홀로 막고 서 있는 장판파를 돌파하지 못하고 역습까지 우려해 퇴각했다는 것은 당시 장비의 무용이 얼마나 위명이 높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또 여기서 장비는 수십기의 기마로 흙먼지를 내어, 뒤를 받쳐주는 군사가 있는 듯한 위장술을 펼치는 임기응변까지 보여주니 역시 장비는 '단순무식'한 장수는 아니었나 보다.


또한 이후 서량의 '신위 대장군'이자 '금마초'라는 애칭을 지닌 젊은 혈기의 마초와 100여합을 겨루어 비록 승부를 내지 못하였으나, 마초 또한 무용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맹장이었고, 장비 역시 "여포 이래 이러한 무장은 처음이다."라고 평했다는 풍문도 들리니, 장비의 무용을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당시 장비는 50줄이었고, 마초는 한창때였으니, 더더욱 장비의 실력은 허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가 있으니, 익주에서 고립된 주군이자 큰형님인 유비를 구하기 위해 형주에서 출발한 장비는 익주의 수비군을 연전연파하고, 가장 완강히 저항하던 노장 엄안을 지혜로써 생포하고, 호걸답게 엄안의 일갈에 매료되어 그를 풀어주고 빈객의 예우를 하자 역시 이러한 모습에 감동한 엄안도 장비의 군에 합류해 익주를 평정하게 되니, 여기서도 장비의 '쾌남아'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한중전 당시 위의 명장이라고 불리던 '장합'을 상대로 50여일의 교전끝에 장합을 패퇴시켜 다시한번 그 위명을 위나라에 진동시키게 된다.


장비는 일군을 이끌고 전투에 패한적은 있을지언정(삼국지 초반부), 장수간의 맞대결에서 패하거나 등을 돌린 적은 없었으며, 위의 모사 정욱도 '관우와 장비는 만부부당의 호걸들'이라고 평했고, 장판파에서 단기로 조조군의 추격을 막아내고, 자부심의 왕 관우마저도 '의제인 장비의 무예는 나보다 낫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의 무용은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는 삼국지 상의 '武로는 으뜸'이라는 여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초고수였음은 분명하다.




4.자초한.. 그러나 아쉬운 장비의 죽음.




장비는 삼형제 중 가장 비극적으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큰형인 유비도 늘 경계하라고 충고했던 '만취'로 인한 '주사'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는데..


장비는 의형 관우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 했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면 큰형인 유비보다 훨씬 그 감정이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도원결의를 통한 삼형제의 만남에 대한 설은 판본마다 다르지만, 세명이 의용군을 모집할 때 만난 설도 있고, 관우와 장비가 먼저 알고, 유비가 말장사를 위해 이 둘을 고용했다는 설, 그리고 유비가 차를 사러가다가 장비를 만났다는 설..


하여튼 이들의 초반 만남에 대한 설은 여러가지지만, 아마도 두 번째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장비는 청소년기부터 자신을 이끌어준 그러면서 '충과 의'를 설명해줬을 '관우'라는 작은 형을, 형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유비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런만큼 관우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애통해 했을 것임이 틀림없으며, 그러한 심리적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장비의 성격은 평소보다도 상당히 거세졌을 것은 누구라도 어림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관우의 복수전'을 대비해 온통 백색으로 말과 장병들을 무장시키라는 장비의 억지스런 명은 관우의 죽음에 대한 그의 심리 상황을 대변해 줌과 동시에 그러한 그에게 현실적인 답변을 한 범강과 장달.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들에 대한 매질과 그로 인한 장비의 암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인과의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비는 그러한 의제 장비의 성격이 초래할 화를 이미 간파하고 주의를 당부했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하지만 장비가 그러한 분노를 조금만 안으로 갈무리 하여 전장에서 풀었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대목을 볼 때마다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리라.


이릉전 직전에 이렇게 어이없이 목숨을 잃어버려 관우의 복수는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고, 결국 홀로 남은 유비만이 두 아우를 위해 복수전을 강행하지만, 육손의 계략에 의해 대패하여 패퇴하고 만다.


하지만 이 이릉전에 신출내기인 '관흥과 장포'가 아닌 이제는 노회하여 산전수전다 겪은 노련미가 넘치는 맹장 '장비'가 선진을 이끌었다면 과연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하였을까. 물론 제갈량과 같은 뛰어난 군사가 참전한 것과는 그 전술적인 측면에서의 영향력은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역시 이릉전 이전까지 무명에 불과했던 육손의 계략정도는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차후에 이릉전에 대해 논할 때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이릉전 당시의 유비군에게 '장비'의 존재 여부의 차이는 개인적인 기량을 떠나 유비군 전체의 전력에 절반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장비의 존재와 그가 이끄는 일군 그 자체만으로 '오'군에게 엄청난 압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장비가 '기병'을 이끌고 형주 벌판으로 돌파해 나아갔더라면? 아마도 이릉전을 기점으로 사뭇 달라진 삼국지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장비의 암살에 대해 '오군의 사주'가 있지 않았으냐는 필자의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기도 하는데...


즉, 억지스런 명령과 '사형'에 처한다는 장비의 처사에, 불만을 가진 범강과 장달에게, 이미 '촉-오 전쟁'을 선포한 촉군의 선진이자, 주력군이자, 오의 최대의 걸림돌이 될 무장인 '장비'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는 오나라가 접근해 사주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둘이 장비의 목을 가지고 뒤도 안돌아보고 '위'가 아닌 '오'로 도주했다는 것은 이같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외에도 장비가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결말을 맞게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역시 '장비' 자신의 태도. 즉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묘하게도 관우와 장비는 위, 아랫 사람을 대하는 것이 반대였다. 이 둘이 서로의 성향을 서로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쳐 바뀌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5. 글을 마치며...




간만에 쓰는 글인데, 개인적인 일때문에 PC방에서 쓰느라 다소 두서없이.. 그리고 이 전의 글보다는 조금 산만하게 적은 것 같다.


여하튼..


장비 역시 유비, 관우라는 인물에 뒤지지 않는 만부부당의 맹장이자, 호탕한 성격을 지닌 쾌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연의 상의 무식한 장수'가 아닌 나름대로의 멋을 지닌 숨겨진 모습을 지닌 무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의협적인 모습은 도원결의를 하고 형주를 얻기 전까지 방랑군을 이끌던 당시의 유비, 관우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武'와 '의리'만으로 난세를 풍미한 영웅 호걸답지 않게, 관우와는 다른 그러한 선천적인 성격적인 결함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삼국지 상에서 보여지는 다혈질이면서도 호탕하고, 솔직한 장비의 모습은 어느덧 우리를 친근하게 매료시켜버리고 만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가장 친근하면서도 인기가 많은 캐릭이 바로 이 '장비'라고 한다.


그 때문일까. 장비 역시 삼국지를 풍미한, 왠지 일반적이면서 주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타 무장들과는 달리, 틀을 상당히 벗어난 개성만점의 매력을 지닌 무장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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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 서민호 7월 4일 만평)

열우당.
아주 만신창이가 되는구만.

국민들 중 과반수가
당신들을 왜 지지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더라면..
정말로 했더라면..

지금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

권력.

당신들의 경력은 지금에 이르러..
이제는 단지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남은 절반.
적어도 지금보다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 같은건 없는지.
정신들 좀 차리시길.

국민들이 가장 어리석어 보여도
정치에 있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상대 역시..

결국 국민이라는 것을

그들은..
언제나 경험을 하면서도..

왜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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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생일대의 행운은
도박에서 이 배의 티켓을 따낸거야.

당신을 만났으니까.

-Titanic 中에서-





영화를 보고 난 직후
곧바로 o.s.t 를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보면서 '진짜 사랑이라는건 희생이구나.'라는
다소 감상적인 생각도 했었는데...

(어쩌면 그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을 동경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그 기억 사이로..
7년여의 세월이 지나가버렸다.

...........

지금도 가끔씩 다시 보면..
여전히 변하지 않은 여운을 간직하고 있는..

그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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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야 하니까 꼭 들어줘.

첫눈에 사랑하게 됐지만
이제야 내 감정에 솔직할 수 있게됐어.

늘 앞서 계산하며 몸을 사렸었지.


오늘 너에게서 배운 덕분에
내 선택과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

그렇다면 충만한 인생을 산거잖아.

5분을 더 살든 50년을 더 살든...
오늘 네가 아니었다면
난 영영 사랑을 몰랐을꺼야.

사랑하는 법을 알려줘서 고마워
또 사랑받는 법도...


- If Only 中에서 -


.........


순간은 언제나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기에
우리는 늘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겠지.

이 영화는 왠지 그 틀을 깨트리는 듯한...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느끼는 것.

그것이..
조금은 낯설게도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

"오늘 단 하루만 허락된다면 뭘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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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 Arther : Woad To Ruin(Play 버튼을 살짝 2번 눌러주시길. ^^)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

아침에 반사적으로 7시에 눈 떴다가 시간 확인하고 다시 잠들었다가 눈뜨니.. 12시. 쳇. 뭔 시간이 이리도 잘 가? 하는 생각만...

간만에 영화 한편.

어제 보려고 했던 '킹아더' 봤는데.. 이번 여름에 흥행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는데...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재미있게 봤다.

아더왕이야 어렸을 적에도 여러 만화영화(^^;)에서도 다뤄졌고, 여러 판타지 게임에서 최강의 검으로 상징되는 그의 성검인 '엑스칼리버'와 그의 책사이자 대마법사인 멀린 그리고 충성스럽고 용맹한 6인의 원탁의 용사들까지,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이미 그 명성만으로도 판타지 세계에서는 한 획을 긋는 분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한 판타지적인 요소는 상당히 배제를 하고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어 현실적인 아더왕의 재현에 좀 더 신경을 쓴 듯 하다. 로마제국 말기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당시의 시대적 혼란 속에서 아더왕이 잉글랜드에서 펼치는 활약상을 리얼리티하게 그려놓았다.

다만 '킹 아더'라는 매력적인 캐릭을 중심에 세워두고도 영화를 전개해나가는 스케일 등이 그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조금은 아쉬운 부분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는 일부에서 던지는 혹평만큼 집중 못하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영화 음악이라면 또 유명한 한스짐머의 웅장한 (세심한 음악팬들은 '킹 아더'의 OST에 조금은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었지만 개인적으로 그만큼 평가할 역량은 갖고 있질 않기에... ^^;) 음악도 시종일관 영화에 몰입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던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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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라 라이틀리.

러브 액추얼리에서도 이쁘게 나왔지만, 킹아더에서는 전혀 상반된 케릭으로 열연한 여전사의 모습도.. 괜찮았다. 주인공 아더왕과 랜슬롯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다른 원탁의 기사들도 다들 나름대로 멋졌다..

어쨌든 2시간 가량(119분)이 훌쩍 지나갈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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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재위 221∼223).


별칭 : 자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국적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

활동분야 : 정치


자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公孫瓚)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하지 않고 호협(豪俠)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결의형제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袁紹)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조조(曹操)와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196년 원술(袁術)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鎭東將軍宜城亭侯)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下??)로 탈주하였다. 원소 ·조조의 관도대전(官渡對戰)에서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객장(客將)이 되었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 양(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대파,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 침입을 기도하자,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촉(蜀)에 들어가 유장을 항복시키고 촉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패사하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曹丕)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讓位)를 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사를 제갈 양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유비..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대부분 인자한 덕장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연의상에서 나관중이 각색한 모습이다. 유비는 연의상에서처럼 마냥 후덕하며, 나아가 무능하기까지 한 모습만은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1.'인덕뿐이다?' 유비는 후한 말의 난세를 헤쳐, 3국의 하나인 '촉'을 건국한 인물.


유비는 흔히 관우와 장비의 의형이긴 하지만, 왠지 그 둘에 비해 패기가 떨어지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모습은 특히 고우영의 삼국지에서 매우 심하게 부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비는 탁현 지방에 머무를 때부터, 의협집단의 수장이었다. 단지 '仁'과 ‘德’만으로는 그런 집단의 수장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 상당히 거친 성정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감안해본다면, 그에게도 한 성질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의에서는 독우를 매질하는 자가 의제 장비로 그려지지만, 정사에서는 유비가 직접 매질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역시 유비의 성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러한 유비의 거친 이미지를 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유비를 냉혹한 조조와 대비시키기 위해,  상당 부분을 의제인 장비의 몫으로 떠넘겼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유비를 마냥 패잔병만 이끌고 다니는 무력한 장수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만큼 시류를 잘 보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비는 스스로 확실히 자립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전투는 물론, 한 주도 미련없이 포기할 줄 아는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서주목을 인수 받은 후에도 잘 엿볼 수 있는데, 북으로는 원소, 서로는 조조, 남으로는 원술, 그리고 방랑군인 여포군의 존재를 보았을 때, 서주를 천하 평정의 발판으로 볼 수 없었고, 유비는 과감히 여포에게 내주었다.


물론 장비가 취중에 빼앗기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더 신중한 관우를 남길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장비를 남긴 것은 '서주 포기'라는 삼형제간의 모종의 묵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비 대신 서주를 차지한 여포는 결국, 조조군에게 패망하고 만다. 이 후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의 유비의 행적은,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비상할 기회를 노린 흔적이 나타난다. 원소가 패망하기 전에 그를 떠나 유표에게 의탁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즉, 유비는 단순히 ‘仁과 德’만으로 인재를 모은 것이 아니고, 3국의 하나인 촉을 세우고, 한왕실 부흥을 외칠 정도로 큰 포부와, 조조가 지닌 전략, 전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일군을 이끄는 군주로서의 나름대로 임기응변의 대처방안은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유비를 따르는 인재들도 유비에게 '인덕'만이 아닌, 그의 그릇도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을 것이다.



2.유비의 칭제는 '개인적인 야심'때문이었다? 칭제의 이유에 대해..     

(이 부분은 예전에 토론란에 올라왔던 '유비의 칭제'에 관하여 '나그네'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한중전을 승리로 이끈 후, 위의 문제인 조비가 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게 황제위를 선위 받은 직후, 유비 역시 칭제를 한 점을 가지고, 유비의 칭제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시선도 적잖이 있다.


물론 이런 의혹에 대해 100%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비가 '개인적인 야심'때문에 굳이 칭제를 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혹자들은 "'헌제'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헌제의 장례식을 치루고, '칭제'를 한 것은 야심때문이다"라는 이야기도 하는데, 일단 유비가 '칭제'로 얻을 개인적인 이득은 없다는 것이다. 향후 장안과 낙양을 거쳐 중원을 수복한다는 가정을 한다면,  유비 혈통의 황가가 들어서는 것 정도..물론 그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했을 때 그런 것을 먼저 염두해두고 칭제를 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이외에는 당시 상황에서 '한중왕'으로 있으나, '촉의 황제'가 되는 것이나, 개인 신변상의 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에 헌제의 장례식을 치룬 것은, 정말 헌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치뤘다기 보다는 '조비에 의해 폐위된 헌제에 의해 한의 대통이 끊겼다'라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장례식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혹자의 이야기처럼, 살아있는 헌제를 모셔와 유비가 받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조위가 폐위된 헌제를 방치할리도 없고,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촉의 입장에서는 폐위된 헌제의 생사여부도 확실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자치통감과 같은 사료에는 234년에 운명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촉에 어쩌면 폐위된 뒤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을 가능성도 상정해 본다면, '헌제의 장례식'은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헌제'가 살아있기 때문에, 유비의 '칭제'는 매우 이르다.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설령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기다릴 수 없는게, 이유야 어찌됐든 위의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의 대통은 위가 잇는다는, 대외적인 선포나 다름없는 선양식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3번 거절하는 등의 정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되면, 한의 뒤를 잇는 위에게 대항하는 촉이나 오는 곧바로 역신, 즉 황제에게 거스르는 역적무리가 되버리는 논리가 나온다. 때문에, 촉으로서는 위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폐위되버린 헌제의 뒤를 이어 '유비의 촉'이 한의 뒤를 잇는다는 뜻을 지닌 '촉한'이라는 국호로 위와는 다른, 一國을 세울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산양공으로 강등된 유협이 단지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칭제를 하지 않기에는 정황상 유비에게 유리한 것은 없다. 오히려 명분면에서도 정식 선양을 받은 위에게 밀리게 되는 것이다. 존왕양이를 하기에는 정식 선양식을 통해 산양공으로 강등되어버린 유협의 신분과, 위의 정식 선양에 이은 조비의 황제 선포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분을 지니기 위해서 자연스러운 한 왕조의 복귀 분위기가 형성될 때까지 유비는 칭제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는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에 당시엔 그러한 자연스러운 명분을 얻어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헌제 선위 당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식자층이나 백성들의 분위기를 고려해 본다면, 몰락해버린 한 왕조가 다시 명분을 얻을 가능성 보다는, 그냥 황제위를 선위받은 조비의 위나라를 대세로 받아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한의 유지를 이으려는 촉에게는 위기이자,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버린다면, '조위에 대한 촉이 역적국가'라는 그런 소극적인 개념을 떠나, 유비가 평생의 지론으로 삼던 "한 왕조의 정상적인 복귀"는 무용지물이 되버릴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고, 그럼 기껏 험한 난세를 어렵게 헤쳐나와 형주와 익주를 발판으로 촉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도, 의미없는 일이 되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유비가 조비에 이어 곧바로 '칭제'하는 이유는..


1.조비의 부당한 선양에 의한 위나라 개국과, 한 헌제의 폐위로 인한 자연스러운 명분을 얻기에는 당시 시대 상황이 그렇게 한가하지 못했을 뿐더러 가능성 자체도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2.유비의 칭제 목적은 분명 "한 왕조의 적통은 나"라는 것과, "선양에 의한 조비의 칭제는 무효"라는 2가지의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 한 왕조를 잇는다는 점은 "촉한"이라는 국호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개인적인 야심이다', '당연한 수순이다.'라는 상반된 시선을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다만 필자는 유비의 '칭제'가  '야심'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차선책으로서의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3.관우의 복수. 이릉대전과 유비..



유비, 관우, 장비.. 이 3형제의 우의는 삼국지 첫 부분에서 '도원결의'를 통해, 삼국지 전편에 걸쳐 매우 진하게 그려진다. 바로 이릉대전의 비극은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비의 이릉전에 대한 결심은, 25년 전에 있었던 '5관6참장'을 거치며 우직하게 유비에게 돌아온 관우의 ‘의리’와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유명한 '도원결의'와 '5관6참장'. 2가지를 보면 유비가 이릉전을 한 이유, 아니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유비는 아마도 평생을 함께 해온 의제 관우와 장비의 죽음에, 이성적으로 접근하기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유비의 군주로서의 자질에 대한 비판이 거론되기도 한다.)

 

40여년 가까이 자신을 따르며 천신만고 끝에  '촉'을 건국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실 까놓고 이야기해서 그 둘이 개국공신으로서 '부귀영화'라는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평생을 유비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 하다가 죽어간 '의제'들을 생각하면, 유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복수를 해주지 않고서는 편안히 나날을 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변변한 참모도 없이 홀로 형주에서 산화해버린 '관우', 그리고 그러한 작은 형의 복수를 함께 하자던 '장비'의 암살. 


'유비'의 입장에서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왕실 부흥'이라는 대의와, 평생의 적으로 상정한 '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4번째 형제와도 마찬가지인 '조운'과  후사를 부탁할 정도로 신임하던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릉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복수를 위해 건국한지 2년도 채 안되는 '촉'의 국정을 통괄하고 있는 '제갈량'까지 데려가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유비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죽어간, 관우와 장비를 위해 이릉전을 치루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전쟁에 '제갈량'과 '조운'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릉전에는  관우, 장비의 아들들인 관흥과 장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결국 유비도 참모의 부재 속에, 오의 걸출한 무장인 육손의 계략에 의해 대패하고 백제성으로 패주하고 말지만, 승패의 여부를 떠나 그 시점에서 유비의 속은 이전보다 후련하지 않았을까.


이들 3형제는 219년 10월 관우의 죽음을 기점으로, 1년 반 안팎의 시간을 간격으로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장비 221년 7월, 유비 223년 4월)


'忠義'란 아무 때나 버릴 수도 있는 난세에 40여 년간 걸쳐 이어져온 그들의 '義'는 결국 이렇게 이릉대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삶이 우리들에게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글을 마치며..



사실 유비가 만능형 군주인 조조나, 수성형 손권에 비해 부족한 군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조조는 3명의 군주 중 가장 걸출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비도 조조나 손권처럼 일찍 근거지를 확보했다는 가정을 해본다면, 그 둘에 비해 그다지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둘보다 부족해 보이는 것이겠지만, 초반에 등장한 수많은 영웅들, 그리고 난세를 평정할 수도 있었던 원소나 손견과 손책 부자, 그리고 지역 기반을 가지고 난세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원술, 유표, 공손찬 등이 패망하는 과정에서도, 자립 기반도 없었던 유비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한왕조 부흥'을 꿈꾸며, 동지들을 규합하고, 세를 이루어, 제갈량이라는 삼국지 상의 최고의 명참모를 영입하게 되면서, 결국 난세의 한 축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러한 면모를 보았을 때, 유비는 세간의 이미지처럼 결코 나약하고, 무능한 군주는 더더욱 아니며, 그 역시 비상할 때만을 기다리는, '잠룡'의 모습을 지닌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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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U.F.O 신드롬이라는 책을 소개할까 한다.

이 책은 U.F.O 관련 서적 출판사로 유명한 넥서스Books에서 발간한 책인데..이미 95년도에 한번 나온 책을 21세기 기준에서 대폭 수정,삭제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며 약 200페이지 정도 늘어난 분량으로.. (물론 가격은 95년도 버전보다 3배 가까이 뛰었다. ㅡㅡ;)

하여튼...

감수자의 말처럼, U.F.O에 대해 이만한 책은 없을 것이라는 것에는 동감이다. 청소년을 주요 상대로 하는 흥미 위주로 꾸며진 여느 U.F.O 관련 서적처럼...가볍게 읽으려 한다면.. 돈이 아까울 것이다. 'ㅡ';

아직까지도 그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U.F.O에 대해 다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U.F.O와 관련된 수많은 루머들, 그리고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의 분석.. 등등을 다루어 상당한 수준의 U.F.O 전문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U.F.O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출몰 역사에 대해.. 현 인류 문명 발생 이전부터 날아왔다는 가설을 보면..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만큼 그에 대한 의문부호도 많다.

U.F.O에 대한 접촉은 99% 이상이 개인적인 접촉이다. 월등한 과학기술을 지닌 그들이.. 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기지만...그렇다고 브이(얼굴 벗기면 파충류. 인기 TV 시리즈물)나..인디펜던스 데이(1997년작. SF물)처럼 나타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_-;

아무튼...

역시 이쪽(미스테리틱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읽어보길 권한다. 다만 약간의 진지함은 가져야 책값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독실한 종교인이거나, U.F.O는 조작이다. 가짜다. 그런게 어딨냐?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비추다.. 책값도 상당하니...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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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에 흥행했던 멜깁슨,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컨스피러시라는 영화를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컨스피러시는 긴박한 스릴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내용, 여기에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첨가한 상당히 재미있는 영화다. CIA의 비밀 프로젝트에 의해 암살범으로 변모했던 주인공이 사랑에 빠져 자신의 정체를 찾게 되고, 정부 조직의 음모를 파헤치는 내용인데...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Conspiracy다.

이런류의 내용이나..
또는.. 폭팔적인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멀더와 스컬리 주연의.. TV 시리즈인 <X - FILE>과 같은 드라마에 열광한다거나...아니면.. 20C 중반 이후부터 빠지지 않는 논쟁거리인 외계인과 UFO에 관한 것들이나.. 최근 부각되고 있는 달 착륙의 진실등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보는 것을 권하고...
그런 것에 하등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굳이 권하지는 않겠다.

하여튼 이 책은 그동안 세간을 나돌던 어지간히 굵직굵직하면서도 미심쩍은 사건들은 거의 다 다루고 있다. 근데 이 책의 서문에서도 나오듯이.. 저자는 이러한 음모론에 대해 각 주장과 근거에 대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리를 한 것이지, 자신의 의견을 개입시키지는 않았다..

즉, 음모론과 연결되는 특정한 사실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음모론이라는 것들 자체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니.. 답이 정확히 나오면 음모론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 하여튼.. 음모론의 진위를 떠나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관심이 없어도 한번쯤 읽어봐도 나쁘진 않을 듯..

책을 보면 이우혁의 '퇴마록'에서 보이던 그룹들의 이름도 꽤 보인다.. ^^;
밤에 읽고 있으면 괜히 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PS -
개인적으로는 이런 음모론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 정
말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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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after Tomorrow O.S.T 中 - Superfreeze



간만에..

이 영화는 '트로이'를 볼 때 예고편을 봤는데..그때부터, 꼭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다.

'Tomorrow'는 여름이면 거의 어김없이 찾아오는 재난 영화의 계보를 잇는 영화로 전 지구적 재난을 그린.. 딥임팩트,아마겟돈(운석) 그리고, 코어(지구의 핵)의 뒤를 잇는.. 이번엔 기후 변동으로 인해 벌어지는..초대형 재난 영화이다.

그리고 결국 오늘 짬을 내서 보게 되었는데.. 시흥에도 멀티 플렉스가 있더라. 지하철역 바로 앞에..
그다지 크지도 않은 건물에 8개 관이나 있던데.. 개봉한지 좀 되어서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어서 그건 괜찮았다.

각설하고..

영화는 남극의 엄청나게 거대한 빙하가 쪼개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초,중반에는 지구 온난화를 중심으로 기후 변동으로 인한 연이은 재난에 대해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중반까지는 스토리가 큰 무리없이 흘러가는데, 후반부에 진행되던 북반구 빙하기를 주도하던 눈폭풍이 뚜렷한 설명없이 멈춰버린 것이 약간 의아했지만.. 그 때문에 엔딩은 약간 허무할 수도 있다. 'ㅡ';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이 영화의 '백미'!!!!

부시를 닮은 대통령은 객기부리다가 미처 피난 못하고 얼어죽고, 딕체니 닮은 부통령은 반성하는.. 장면. 그야말로 미 행정부를 대놓고 꼬집는 장면이 아니겠는가.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국제협약인 '교토 의정서'를 맘대로 무시하는 '미국'은 이 영화를 보고 뭔가를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여튼.. 간만에.. 섬찟한 영화 한 편.. 잘 본것 같다. 역시 이런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한다는..특히 재난영화는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지금은 아니더라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충분히 일어날만한 소재들을 다루기 때문에 영화관을 나서면 금방 잊어버리는 여느 일반 공포물보다도 훨씬 더 그 임팩트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96년인가 97년인가.. 했던 '트위스터'이후로..보는 내내 냉기가 느껴지는.. (에어콘 탓도 있겠지만.. ;;) 그런 영화였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우리나라에는 지상에서 토네이도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를 했었는지..)

하긴 보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았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지만, 과학의 발전이 과학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는, 과학적 낙관주의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다. 몰입해서 보았지만, 약간의 암담함을 느끼게 해주는..그런 영화였다.

대신 전 세계의 관람객들에게 무언가 느끼는 점을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어쩌면 충분할지도 모르겠지만..

PS
표는 원래 한장씩 팔지 않나?
왜 매번 2장이냐고 물어보느냔 말이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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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선일씨의 조의를 표한다.

김선일씨 사망 전후로 연일 터져나오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뉴스거리들.. 대체 우리 나라는 왜 이정도 밖에 안될까.

정부는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정치는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우리는 언제까지나 미국의 품에서 안주하려 하는가. 대부분의 나라가 이라크 추가파병에 'NO'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어떤 광고마냥, 'YES'라고 하고 싶었던 것일까. 김선일씨가 나가라고 하는 동영상이 나왔을 때, 우리 정부가 한다는 소리는 겨우 '파병 철회 불가 재천명' 따위라니.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

철회 발표에 대해 미국의 눈치가 그리 보인다면, 막후 협상을 통해, 자국민을 구할때까지만 철회를 표명하겠다고 하던가, 파병한다면서 그 정도 말도 못한다면 '이라크를 위한 파병'이라는 말은 이라크인뿐이 아닌 전세계의 그 어떤 누가 믿어줄까.

우리는 19세기말부터 시작해 20세기 초중반까지 35년간 일제 치하에 놓여졌었다. 이라크도 마찬가지다. 일제가 어떤말을 하던 믿지 않았고, 일제를 향해 무장 투쟁을 하였으며, 일본 민간인들까지도 적으로 상정하는.. 그런 극단적인 투쟁도 했었다. 그리고 독립을 쟁취했다.

이라크가 이것과 뭐가 다른가. 단지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려 했던 일제 대신 석유와 중동 군사 거점을 위해 침략한 미국을 대입하면 된다. 그 미국에 의해, 미국의 요청으로 의무병이든, 전투병이든, 민간인이 아닌 군인을 파병하면서, 이라크를 위한다고 하면, 이라크의 그 어떤 녀석이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줄까?

일제의 요청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온 또다른 타국의 군인들이 '조선을 위해서 왔다'고 내세우면 우리 독립군이 그 말을 믿을까? 정말 그렇구나. 일제와는 다르구나.. 라고 생각할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전혀 아니올시다. 라는 것이다.

또.. 故 김선일씨의 죽음을 계기로, 일부 흥분한 사람들을 규합해, 전투병 위주로 파병해 복수해야 한다는 미친 보수 녀석들은 대체 그 대가리에 뭐가 들어있는 것인가? 그래서.. 그 전투를 수행하다가 수많은 젊은 장병이 피흘리며 계속 죽어가면, 그때는 이젠 휴전선의 60만 대군을 모두 파병해, 이라크를 세계지도에서 지워야 한다고 할 것인가?

우리가 하등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 어떤 명분도 성립할 수 없다. 분명 아무 상관없는 故 김선일씨를 살해한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는 마땅이 규탄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를 놓고 흥분할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문제의 본질을 냉정하게 직시하자.

우리는 당장 그 빌어먹을 미군이 주둔하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생물학적 논리가 적용되었던 사회진화론으로 국가간의 침탈을 거듭했던 정의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19세기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주도하고 있는 이라크에서 철군해야 한다. 추가 파병은 당연히 취소해야 한다. 눈치가 그리 보이거든, 보류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민의 頭당 300$가 걸린 이라크에서 전원 철수령이 내려진 마당에 파병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외치던 보수주의는 어디로 갔는가.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마저 폭락을 거듭하고 있고, 이라크의 무장 단체는 한국민에 대한 적개심을 공공연히 표출하고 있는 이라크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애써 쌓아왔던 것들마저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그것들을 전후 미국 주도의 경제 재건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말 그런 생각이 드는가? 과연 미국 주도로 이라크 경제 재건따위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멀지 않은 과거를 잊지 않고 있다면 이라크에 파병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때문이라면, 미국의 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내부 역량을 키우도록 노력하자. 이제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일본, 더 나아가서는 중국, 아니 이제 주적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무한 경쟁시대이니까. 아직도 빨갱이 어쩌고 하면서 냉전적인 사고 방식은 던져버리자. 냉전이 끝나고 막이 내린지가 언제인데.. 북한과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손을 잡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주고, 도움 받을 것이 있다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오히려 민족주의가 부활의 조짐을 보이는 이 때, 북한에 손가락 질만 하는 아둔한 짓은 하지 말자.

진정한 국익이 어떤 것이고, 어떠한 행동이 정의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지 잘 알고 있다. 추가 파병은 절대 해서는 안되며, 이미 파병해 있는 서희,제마 부대도 시기를 조율해 철군해야 한다.

다시한번.. 힘없고, 어리석은 대한민국의 정부에 의해, 그리고 그러한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일원으로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바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武將).

별칭 : 자 운장(雲長)
국적 : 중국 삼국시대 촉(蜀)
활동분야 : 군사
출생지 : 하동군 해현(河東郡解縣)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윈청현[運城縣]인 하동군 해현(河東郡解縣) 출생하였다. 자 운장(雲長). 후한말(後漢末)의 동란기에 탁현(褶縣:河北省 소재)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혀 조조의 귀순 종용과 함께 예우를 극진히 받았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양(顔良)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208년 적벽전(赤壁戰) 때에는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益州:四川省) 공략 때는 형주(荊州:湖北省)에 머물러, 촉나라의 동방방위를 맡는 등 그 무력과 위풍(威風)은 조조와 손권(孫權)마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격(挾擊)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나라 때 이후로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의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최근에 '관우'에 대한 일련의 재평가가 나오면서 '武와 義'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졌던 '관우'가 '편협하고 거만하며, 이기적인 자부심'을 가진 무장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런 평가는 좀 가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의견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점들로 관우를 매장(?)해버리기엔, 관우가 보여준, 그리고 관우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1.무신(武神)으로 추앙받게 된 관우.


사실 관우의 무력은 삼국지 상에서 최고(最高)는 아닐지언정 손꼽힐만한 무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물론 정사와는 다르지만, 여기서는 정사보다는 연의로 논한다.) 사수관에서 동탁의 장수 화웅의 목을차가 식기 전에 베어버렸다거나, 원소가 내세우는 양대 상장인 안량과 문추의 목을 날려버린 것, 그리고 유비에게 되돌아가면서 오관육참장을 해버린 것, 형주 남부에서 최고의 무력을 뽐내는 '노익장 황충'과의 일진일퇴의 멋진 공방, 그리고 환갑을 바라보는데도 패기로 덤벼드는 방덕과도 막상막하로 겨루는 그의 무력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실 관우의 활약은 정사에서는 그다지 많이 엿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교적인 색깔이 작가인 나관중에 의해 잔뜩 가미된 <三國志演義>를 거치면서 '忠義;의 화신이 되어갔고,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관우의 모습을 빌어 문무대신들의 본보기가 되길 바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대부터 관우에게 '왕'의 칭호를 내려주고 받들기 시작하였으며, 명의 영락제는 정변후 정통성을 갖기 위해 '제'라는 시호를 내려주었고, 청대의 황제들도 '관우'를 매우 숭배해 '관성대제'로 받들었다.

이렇게 관우가 사후 '왕'을 거쳐 '관제'가 되기까지, 정치적인 목적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관우가 생전 보여주었던 강렬한 모습에서 연유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忠'과 '義'를 빼고 관우를 논하지 말라.



항간에는 관우가 '좌씨춘추'를 암송할 정도로 '춘추'라는 책의 매니아였다는 것을 가지고, 문무겸장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그건 솔직히 지나친 비약이다. 춘추가 무슨 병법책도 아니거늘, 단지 그것을 평생 지니고, 암송하고 다녔다고 해서, 문무겸장이라고 지레 판단하고, '왜 그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느냐'고 비판하는데, 춘추는 '병법서'가 아닌 '공자가 집필한 권선징악의 역사서'이다.

어쨌든 이러한 춘추의 내용은 훗날 관우가 보여주게 되는, 관우만의 '忠'과 '義'에 대한 근간을 마련해주게 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관우가 충의의 화신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군주이자 큰형님인 '유비'에게 보여주고 있는 '절대적인 충성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비성에서 조조에게 항복한 뒤 조조의 온갖 환대에도 불구하고, 안량을 목을 벤 뒤, 미련스러울 정도로 우직한 모습으로 주군 유비를 향해 떠나는 그의 한결같은 모습에 우리들은 그에게서 깊은 신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관우가 유비에게 보여주는 '절대적인 충성심'은, 그 자체가 곧 '의'로 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3.제갈량과 관우와의 '불편한(?)' 관계. 2인자 타툼설..



유독 삼국지연의 상에서 신묘한 계략과 혜안을 보여주는 제갈량이 힘을 쓰지 못하는 곳이 바로 형주와 관우의 몰락에 대한 부분이다.

이때문에, 제갈량이 '일부러' 불편한 관우를 고립시킨뒤 위-오의 연합군에 의해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2인자 타툼설이 제기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라고 개인적으로는 보고 있다.

제갈량은 신이 아니라, 그 역시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주군을 구하고 익주를 평정하기 위해, 형주의 주력군을 이끌고 간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형주도 중요하지만, 주군인 유비의 목숨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장기간 동안 익주 공략에 실패한 유비군으로서는 단기간에 익주를 평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형주의 주력군을 데려간 것이고, 이때는 손오와 동맹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서 수많은 장수 중에서도 관우를 남긴 이유는, 관우는 장비, 조운과는 달리 군주 유비의 첫번째 의제이다. 역으로보면, 그만큼 형주 진수에 대한 유비군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유비군 체제를 볼 때도 이는 당연한 것이다. 관우보다 아래뻘인 장비나, 조운에게 형주 수비장을 맡기는 것은 서열체계로 봐도 어긋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제갈량의 고의적인 술책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갈량은 관우에게 형주 진수를 맡기면서 '북거조조, 동화손권'의 계책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동오는 유비군의 익주평정 뒤 자꾸 형주를 반환하라고 요청하여, 형주를 진수하는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관우의 형주와 손오는 표면적으로는 동맹상태였으나, 형주의 촉,오 접경지역에서 끊임없이 잦은 마찰을 일으키며, 사실상 준전시 상태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관우는 형주를 변변한 참모 한명 없이 홀로 진수한다. 익주 평정 후 내정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제갈량이 오의 동향을 파악하여 바로바로 대처하는 것은, 아무리 그 제갈량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나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제갈량은 분명 삼국지상의 최고의 명참모이지만, 그가 현장에 없었던 형주에서나, 이릉전투까지 승리를 이끌 정도의 신적인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오가 형주를 손에 넣기 위해, 위와 손을 잡기전까지 북진한 형주의 관우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때문에 관우의 곁에 정황 판단을 바로바로 해줄 수 있는 군사적인 참모(방통이나 서서)가 있었다면, 그리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주 관우군의 몰락은 제갈량이 어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의적이라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융중계책'을 말하던 제갈량의 천하 통일 계책에는 '익주와 형주'가 필수다. 설령 사이가 불편하였더라도 그러한 '대의'까지 포기하면서 걸출한 야전 사령관인 관우와 형주를 동시에 '팽'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배신한 동오에 의해 형주를 빼앗기고, 관우는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그것은 제갈량이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고, 관우가 북진을 너무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4.관우의 성격적인 결함. 끝모를 자부심..



높은 존경을 받으며 후에는 무신으로 추앙 받기까지 한 관우지만, 그 역시 인간적인 면모, 특히 인간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일종의 약점 같은 것도 있다.

정사에는 관우에 대한 이런 평가가 나온다. '관우는 성질이 너무 거세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 여겼다.' 즉,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였다는 것은 그가 남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군주인 유비가 장비, 조운, 마초, 황충 등과 함께 관우를 오호대장의 하나로 임명하자, 관우는 황충이 자신이 같은 반열에 오른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분이 나온다.

하지만, 관우가 황충과 겨뤘을 때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어떠한 것이 사실적인 모습인지는 다소 애매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2인자 설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공명을 처음 얻어 무척 총애하자 관우는 제갈공명을 시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형주에서의 북진 중 오나라의 육손이 자신을 추켜세우는 내용의 편지와 예물을 바치자 관우는 무척 흡족해하며 방심하고 말았고, 이것은 결국 관우가 패하여 죽음에 이르는 빌미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오에게 배신당해 강릉과 형주를 빼았겼음에도, 익주로 퇴각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강릉을 탈환하려 했던 그 한 장면만으로도, 관우는 이미 성격적 결함을 뛰어넘는 '비장미가 가득한 영웅'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연의상에서 보여지는 관우는, 일을 시작할때는 끝모를 자부심을 보여주며 시작하지만, 막상 일을 마무리지으면 한없이 겸손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 : 화웅, 안량의 목을 베었을 당시.. etc)

또한 이러한 자부심이 그의 잠재력을 100%이상 이끌어 내었다고 볼 수 있고, 부하들에게도 대체로 인정도 많았다.

관우 역시 인간인만큼 장,단점을 지녔음은 당연한 것인데, 최근에는 너무 약점만을 부각시키는 듯 해 아쉬움이 남는다.



4. 마무리를 지으며..



사실 온갖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삼국지 상에서도 관우의 한결같은 태도, 그리고 적을 향해 '쥐새끼같은 무리들'이라고 일갈하는 그의 모습은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리라.

그리고 끝까지 적에게 굴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까지, 관우는 처음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비장미 넘치는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 또한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온다.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다소간의 성격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18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무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관우 운장'이야말로 수많은 삼국지의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여전히 삼국지 최고의 '충과 의' 그리고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무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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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초유의 사건이었던 지난 3.12 대통령 탄핵안 가결. 그리고 거의 한달 가까이 지났다. 그들이 진정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그들이 내건 명분때문에, 대통령 노무현을 탄핵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부터 자칭 보수언론이라는 독립신문 사이트에 가입하시거나, 조갑제 할배의 월간조선을 정기 구독하시거나, 아니면 조,중,동 신문을 보시길 권해드린다.

이번 3.12 탄핵이 왜 옳지 못한가?

가장 큰 이유는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고 머릿수로 탄핵결의안을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지금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은 행정부의 수반인 '노무현 대통령'이 입법부인 국회에게  '탄핵'을 당할만한 법적인 사유가 있느냐? 의 부분인데..

탄핵안 가결 직후  "변협"에서 발표한 성명을 인용해 보면..

.......

변협은 "중앙선관위가 중립의무준수 요청을 한 계기가 된 발언은 그 경위가 기자 회견에서 질문에 답변한 것이며, 이는 법률상 처벌되지 않는 사항임을 고려할 때.대통령직에서 파면돼야 할 정도에 이르는, 중대한 헌법과 법률 위반에 해당한다고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변협의 김갑배 법제이사는 "클린턴 대통령의 위증은 법률에 처벌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탄핵 발의가 가능했던 것이나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는 처벌 조항 없는 추상적 선언에 불과해 이를 위반했다고 해서 탄핵 요건을 갖췄다고 볼 수 없다"며 "탄핵 요건이 명백히 결여돼 있다"고 밝혔다.


.......

라고 발표했다.

그럼 왜 법률전 근거도 희박한 '탄핵 결의안'이라는 것이 국회에 상정되자마자 일사천리로, 그것도 99%에 육박하는 일방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는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법률적으로 근거도 되지 못하는 이런 선관위의 자제 요청을 자의적으로 유권해석하여, 탄핵 결의안을 어거지로 통과시킨데에 모순이 보인다. 즉, 진정으로 국가와,국민, 그리고 헌재 어려운 경제를 위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는 한,민,자의 주장은 한마디로 '개소리'라는 것이다.

'탄핵'은 행정부의 월권과 횡포에 대한 입법부의 최후의 견제 수단으로 마련된 일종의 대의 민주주의의 안정장치라고 할 수 있다. 탄핵안을 상정하여 통과시키려면, 탄핵안을 진행시킬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파괴할 만큼의 폭정을 하는가'에 대한 법률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며, 또한 국민의 지지 즉, 여론의 향방을 파악한 다음에 진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탄핵안은 그 모든 요소를 갖추지도 못한채, 단지 정략적인 의도만을 담은 쓰레기만큼의 가치도 없다.

변협의 성명을 한번 더 인용하도록 하겠다.

........

변협 박재승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야당이 `대통령이 사과하면 탄핵안을 철회하겠다' 고 말한 데서 그들이 주장하는 탄핵사유가 근거가 희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김갑배 법제이사는 "대통령은 재임기간중 내란.외환의 죄가 아니면,형사상 소추받지 않도록 한 헌법의 국정안정 취지에도 어긋나는 의결"이라고 말했다.

........

분명 이번 탄핵안은 볍률적인 근거를 전혀 지니지도 못한 채, 상정되어 일사천리 즉, 다수당의 머릿수로 일방적으로 통과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거야의 '사과해라 그럼 철회하겠다.'는 일종의 정략적 타협안을 대통령이 거절했다고 해서 탄핵안을 발동한 그들의 저의가 뻔히 보인다. 일종의 대통령 길들이기 차원에서 발동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의회 민주주의의 승리'를 외치는 그들의 웃음 속에서우리는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회의감만이 가득했던 것을 느꼈었다.  

지금 한.민.자의 뜻은 '대학도 못나오고 빽도 없는 녀석이 어쩌다 운 좋아서 대통령을 해먹는 주제에,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고.. 한마디로 맘에 안들어. 더군다나 말도 막하고.. 경제도 어렵고.. 국민도 싫증내는 기색을 보이는 듯 하니, 이 기회에 갈아치워버리는거야!' 라고 생각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탄핵'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것에 다름없다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단지 다수당의 뜻과 맞지 않다고 해서 '탄핵'을마구 휘두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일 뿐더러, 헌법의 정신과는 위배된 중차대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노무현을 싫어하거나 거슬린다고 해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매우 위험한 작태'를 '그래. 나도 노무현 싫어하는데 잘됐다. 속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의 생각은 매우 위험천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이라는 것은 그 존재 이유를 잃게 되고 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 12. 16, 16대 대선에서 48.9% 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대통령이다. 그런 대통령을 단지 '맘에 안든다. 경제도 개판이다. 그러니까 대통령직에서 쫓아버리자.'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과 생각으로 '탄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노대통령을 지지한48.9%의 국민의 뜻은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발칙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단지 경제가 불황이다. 국가 경제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책임. 분명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탄핵을 받을 이유는 되지못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제 5년의 임기 중에서 겨우 1년 남짓 지났을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절대 빠르게 효과를 불러오는 단기적인 부양책은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결국 20%정도의 과정을 지나온 시점에서 엄청난 경제적 상승효과를 요구하고 그 기대치에 못미친다고 해서 '탄핵'한다는 것은 비논리적인 발상일 따름이다. 더군다나 야대여소의 정국에서 끊임없는 야당의 견제속에서.

노무현 정부에게 사사건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대며 국가를 책임지고 운영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야당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탄핵을 운운한다는 것인가? 또한 그런 논리라면 경제적 파탄이라는 IMF를 초래한 김영삼 정부때는 왜 가만히 있었던 것인가?

말을 여과없이 발언하곤 한다. 힘들다. 못해먹겠다.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되는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왜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인가? 또 선거자금이나 총선에 관한 입장 표명도, 매우 솔직하게 말했다. 역대 어느 대통령중에 이만큼 국민앞에 진실되게 가식적인 모습없이 의사표시를 했던 사람이 있었는지? 분명 달라지고 있는 증거이다. 예전의 제왕이며 권위주의적인 모습에서 탈피하고 있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모습만큼 역으로 생각하면 대한민국 대통령부터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알게 모르게 익숙해지면 절대 이후 권위주의적이며 독재적인 대통령상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이유가 "'탄핵'의 법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탄핵 결의안 통과는 입법부가 헌법을 무시하는 개같은 작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결의안 통과 후 '잘못했다'은 의견은 전국에서 70% 안팎의 수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정략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의견은 60% 안팎이고 '야당의 책임이다' 역시 55~60%에 육박하고 있다.

이제 국민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처럼 우둔하지 않다. 사태를 직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탄핵 규탄 집회'가 일어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대도 한민당은 일부 수구 언론을 이용하여 '국민을 위한 위대한 결단이었다.' '경제를 위했다' '의회 민주주의의 승리다.'라는 망발을 일삼고 있으니.. 대체 그들의 머리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심히 궁금할 따름이다.

이렇게 권력욕에 관련된 일은 195명중에 193명이 찬성하는 경이적인 몰표로 반나절도 못걸려 통과시키는 반면 '친일 잔재 청산' 이나 '민생 현안을 위한 필요한 법률'제정에는 짧으면 몇달, 길면 몇년씩 뭉그적거리질 않나, 수정하고, 짜르고.. 결국은 취지와는 다른 병신 법안을 만들지를 않나..

도대체 이딴 의결 기관이 진정한 '의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인지,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이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뿐이다.

지금 또 어떤 말이 나오는가 하니.. '내각제 개헌' 이야기도 간간히 흘러나오던데,고건 총리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한,민,자 3당이 수렴청정을 하겠다는 것인지 뭔지..

만약 이렇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1800년 4월 수구반동세력에게 의문의 독살을 당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개혁군주였던 정조. 그리고 정조 사후 60여년의 세도 정치, 그리고 대책없는 개항, 어리버리한 국내외 문제 인식.. 일제 식민시대를 겪은 200년 전의 과오를 그대로 되풀이 하게 될 것이다.

작금의 사태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친노,반노의 문제를 뛰어넘어서 반민주적이고, 헌법을 우롱하는 저 쓰레기같은 한,민,자와 그 법안을 통과시킨 193명의 국회의원의 작태에 분노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정말이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후안무치한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때가 어느때인데, 지금도 올바른 민주주의가 틀을 잡지 못해, 세계화 시대에 각 분야별로 국민의 역량을 집결시켜도 부족할 마당에,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리 정치가 난장판에 개판이었다지만.. 이건 해도너무한 것 아닌가?

헌재에서는 조속히 이 법적 근거도 없는 쓰레기만도 못한 '탄핵 결의안'을 부정하고, 한시바삐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모든 정부 업무가 '정상'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더불어 한,민,자의 수구반동에 헌법과 국민을 우습게 알고, 민주주의의 민주도 뭔지 모르는 꼴통, 쓰레기 같은 국회의원놈들은 모두 4.15 총선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탄핵을 받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말이지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올바른 민주주의와, 정치 풍도가 자리잡고, 대한민국이 갈등과 반목에서 화합하고, 더욱 성숙하여 21C 동북아를 주도할 수 있는 국가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된다면, 그 또한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15 총선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시 한번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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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弔] 대한민국 민주주의..

12시쯤에 일어나 받은 친구녀석의  호들갑스러운 전화의 내용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결의안 통과.' 라는 내용이었다.

.....  

대략 어이가 없어서..  

정치판이 난장판인 것은 어제 오늘일은 아니지만.. 기득권에 연연해 하며, 국민의 뜻이라고  지껄여대는 쓰레기들을.. 이번 총선에서 보기 좋게.. 쓸어서 내버려야 하는데.. 흠..  

......

항간에는 탄핵사태를 인조반정에 비유하지만.. 그보다는 근대 개혁의 종언을 고했던.. 1800년 6월의 수구반동 세력에 의한.. 정조의 의문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세도 정치..  그 후의 혼란.. 일제 식민시대.. etc..  그리고 지금.. 한국의 현대사는 또한번 혼돈의 중심지에 와있다. 부디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  

정말 웃기는 세상이다.
이런 걸로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훗..  

이번 총선에서는..행동하는 지성으로.. 진정한 '국민'의 뜻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도록 하자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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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OST 中 - Epilogue


아마도 심야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나름대로 개인적인 영화 관람史에 기념비적인 날 이라고도 의미부여를 하려면 할 수도 있는 날이건만.. 여전히 파트너는 별로 이쁜 짓도 안하는 친구 녀석이니.. 어두컴컴한 인생에 언제나 볕이 들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던데... 푸하핫..

하여튼.. 각설하고..

예전에.. 그러니까 쉬리 이전이라고 해야하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류의 한국 영화는 비디오감이고.. 영화관은 헐리웃의 액션 대작을 실감나게 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 이 영화를 보고 더이상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전에도 좋은 영화들은 많았지만.. 이 영화는 일단 외형적인 면에서 우선 그런 생각이 더 들도록 만들었다.

영화 내적으로 보면.. 1950.6.25 하루 전날부터 시작하는데.. 두 형제가 동시에 징집당해 일련의 전투과정을 거치면서 애국 이념도 민주 사상도 없이 오직, 동생의 생존을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전쟁영웅이 되어가고 있는 형'진태'와 전쟁을 직접 경험하면서 스스로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진석'의 모습과 함께.. 평양까지 북진하지만 거기서 생각지도 못한 운명의 장난을 거치면서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는데.. 몰입감이 대단했다.

특히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 그리고 반전의 직접적인 동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형의 동생에 대한 사랑이 정말 멋졌다. 보면서 전방에 있는 동생 녀석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장면 전환의 편집이 좀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후반부에 비행기가 등장하는 라스트 전투신은 조금 과장하자면 진주만이 연상될 정도였다. 정말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이 영화는 두 형제 이야기 외에도.. 그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곳곳에서 보여준다..바로 50년 전의 한국 에 그런 동족 상잔의 비극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은 발전해 있지만..

강대국의 정책과 이념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것 때문에..(그것도 원인의 원인을 찾다보면 결국 그 도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제 나라를 제 민족의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지도부는 도망치는 마당에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든.. 이름모를 수많은 국군장병, 그리고 자의에 상관없이 침략의 총대를 맨 수많은 인민군들.. 그리고 그 전쟁에 희생된 수많은 남,북 민간인들(영화에서는 살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은주'의 캐릭으로 대표되는 듯한..)에게 애도를 표하며..

왠지 이 영화는 한번쯤은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

그나저나.. 파트너를 좀 갈아치워야 하는데.. 그것도 쉬운일은 아니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도
막막하고.. 그녀석과는 친구,러브 액추얼리,실미도,라스트 사무라이에 이어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벌써 5편이나 됐다. 더 늘어나기전에.. 무슨 수를 쓰자.. -_-

청승맞게 혼자 보는 것보다는 쫌.. 낫긴하지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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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유 삽입곡 中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


요즘 특별나게 하는 일이 없어서.. 예전에 미처 보지 못한 영화들.. 마구 보고 있는데..

이번엔 후아유를 봤다.

일단.. 좋다! 꽤 수작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의외로 흥행에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사이버 스페이스와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배경이 되지만, 그래서였을까. 난 보면서 주욱~ 예전에 잘나가던 때의 나우누리 생각이 났었다. -_-

확실히 통신상에서만 이야기를 하면 직접 만나는 것보다 부담이 적어서 그런지 훨씬 공감대 같은 것이 빨리 형성되는 경향이 있는 듯 싶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과 ID로 대변되는 익명성을 바탕으로, 누구나 이미 개설된 대화방에 불쑥 끼어들어 그 어떤 주제로도 그렇게 낯설어하지 않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 하던.. 뭐 그런 것..

온라인 상에서 그렇게 친해지면, 확실히 뭔가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고 그렇고.. 상상의 현실화를 은근히 바라게 되는 것이랄까...

옛 추억에 잠깐 빠질만한 그런 내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밴드의 음악들. 크라잉넛의 밤이 깊었네라든가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 그리고 엔딩 크레딧을 장식했던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너의 목소리가 들려! 난 이 반복되는 리듬이 너무 좋다구.) ^^

영화 전반에 걸쳐 다사다난한 삶에 고단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음을 잃지 않고 사랑을 키워가는 이들의 모습은 나름대로 공감도 가는 듯 싶었던 것 같다.
 
조승우, 클래식에서도 괜찮은 연기를 보여주던데, 후아유에서도 꽤 능청스러운 연기를 잘해낸 듯 싶다. 그 즉석에서의 기타 연주와 생음악이란...같은 남자가 봐도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 ^^; 근데 클래식이 먼저야? 후아유가 먼저야? 그리고 이나영은 드라마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인지 '니 멋대로 해라'의 캐릭이 번뜩 떠올랐음. -_-

안보신 분들은 한 번 봐도 후회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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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매트릭스는 잊어라!' 였던가. -_- (우리나라 포스터는 멘트도 그렇고 유독 흥행에 민감하게 제작된다. 그래서 난 가급적이면 원 포스터를 걸어 놓는다.)

음, 뭐 소재와 연출은 꽤 괜찮았지만, 도시 배경이나 그런 곳에서 약간은 빈티가.. 주욱 보면서 오프닝과 엔딩 말고는 매트릭스를 잊어버릴만한 영상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 크리스챤 베일의 무감각 연기는 멋졌다.

영상도 그렇지만 특히 이퀄리브리엄에서 설정한 감정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이유로 통제하는 것. 과연 인간이 그렇게 감정을 억제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있는가.

아무리 국가적 차원에서 강압적으로 통제를 하더라도 결국 내재적 본성인 이상 '통제조치' 자체에 '불만'이라는 감정이 형성될 것이며, 그것이 곧 영화상에서의 반군 형태로 표출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번 정도 생각을 해볼 여지는 남겨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엔딩직전에 나오는 감정의 전적인 배제를 바탕으로 한 건카타 액션은 꽤 신선하다. 기발한 발상에 박수를!

매트릭스를 잊을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안보신 분들을 봐도 좋을 듯. 크리스찬 베일을 정점으로 케릭터들의 무감각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나름대로의 스타일리쉬한 측면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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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 and Commander O.S.T 中
Prelude (From the Unaccompanied Cello Suite No. 1 in G Major, BWV 1007)
Composed by Johann Sebastian Bach
 


부제에는 신경쓰지 마시길.. (우리나라의 영화 포스터는 원작의 내용과 상관없는 허위 과대 수식어가 붙어서 쓸데없이 기대감으로 인한 흥행만을 노린다는 것이 문제)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촬영했다던데 그쪽 정부에서 못찍게 한거 사정해서 찍었다더군요..

'컷스로트 아일랜드'나 '캐러비언 해적' 류의 해양 액션을 기대하면 좀 곤란합니다. 꽤나 차분한 분위기에서, 가끔 웃기는 장면도 나오고.. 폭풍우 몰아치는 것은 '퍼펙트 스톰'보다는 약하고, 몰입도는 '타이타닉'보다 좀 덜하고, 액션은 '글래디에이터'보다 약하고..(너무 기대를 했던 탓인지 조금 불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 )

감독이 의도한 바대로 (촬영기간 내내 액션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이라고 암시를 걸었다죠? -_-;) 철저한 고증에 바탕을 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과 프랑스의 패권 대결을 바다에서의 영국 해군을 중심의 에피소드로 그린 시대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기 때문에 내용은 다수 지루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러셀 크로는 멋집니다. :)

아무튼 직접 보고 판단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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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영화를 보러갔는데, 뭘 볼까? 하고 고민하다가 (요즘에 꽤 영화가 마니 개봉하고 있다.) 꽤 유명한 원화평씨가 무술감독을 맡아 사실적인 액션을 보여준다는 KILL BILL을 선택하게 되었다.

영화의 시작부터 사람을 깜딱~ 놀라게 하더니.. 영화 내내, 주인공의 복수극이 펼쳐지는데..타란티노 감독은 '보고 듣고 즐겨라!'고 즐거운 듯이 이야기했다지만, 으흠~ 막상 맘편히 즐길 정도는 아니었던 듯.. -_- (내가 좀 소심했나..)

영화 전편에 걸쳐, 그냥 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화면에 튄다! --; 그리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적들의 신체의 일부분들.. -_-;; 이건 완존히 갱스터 하드고어 슬래쉬 무비!였던 것이다. 켁~

그런데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영화관의 분위기.. 꽤나 비위가 강하지 않고서는 눈뜨고 보지 못할 장면들이 자주 나오자, 커플들끼리 살며시 다투는 것이었다.

주로 여자들이 보러 오자고 조른 남자들에게 핀잔을 주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뭔가 하고 들어보니..
(그냥 들린 거다. 의도적으로 들은 것은 절대 아님..-_-;;;)

"거 바~ 내가 딴 거 보자고 했자나~ 으이 씨~."
"어 미안해.. -_- 그럼 너 이런 거 보지마, 내가 가려줄께."
하고 살며시 손을 어깨에 올려 얼굴을 가려주고 있더란 것이었다.
-_-;;

으흠.. 커플 사이에서는 당연한 것인가? 얼마나 배가 아프던지.. -_-

영화는 혼자 보러 갈 것이 못된 듯 싶었다. 더우기 크리스마스 등의 연말연시가 이제 한달 앞으로 다가온 이 마당에, 혼자 영화를 보러 다닌다는 것은 스스로 염장을 지르는 것을 자초하는 일. 그래도 KILL BILL 끝까지 다 봤다...;;;

그런데 1편에서 복수를 다 끝내지 못한 '더 브라이드'는 2편을 기약해야 한다. --;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루시 리우가 맡은 야쿠자 두목 오렌 이시를 치러 갔을 때, 오웬 이시의 부하 중 이쁘장한 일본 여고생이 나온다. 근데 교복은 왜 있고 있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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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나오지만, 뭐 이쁜 건 이쁜거다..ㅋㅋ 얼른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니, Chiaki Kuriyama 라는 이름의 배우로 지금 19살이며, 배틀로얄(뜀박질 선수)에서도 나오고, 주온, 사국등의 공포 영화에도 나왔으며,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줄 기대되는 여배우라고 하더라.

교복입고 철퇴를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은 우습지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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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직접 보시길.!!

이 영화 Kill Bill을 감독 말마따나 '보고 듣고 즐기는'사람이 있으면 존경할랍니다. --; 여성분들이 애인에게 먼저 보자고 하면, 그 앤.. 생각이 바뀔수도 있어요. ㅎㅎ

그럼.. 궁금하면 직접 보세요. 돈은 책임 못지지만..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영화관은 둘 이상 가시길.. -_-;;

그럼. :)

덧-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지만 이 곡이 아마도 더 브라이드가 복수하러간 일식집(?)에서 오렌이시 일파가 복도롤 걸어오는 장면에 삽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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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일본의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Hotei Tomoyasu가 작곡한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가 4~5년이 지난 지금 공중파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그렇게 자주 쓰일지 누가 알았겠는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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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ummy Return OST 中
Forever May Not Be Long Enough


미이라2를 봤다.

1편을 워낙 잼있게 봤는지라, 1만한 2가 없다.라는속설에도 불구하고 매우 구미가 땡겨 결국은 봤다.
근데 역시 그 전지전능한 미이라도 속설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1에 비해 2에서의 그 무기력한 모습 이란.. (특히 갠적으로 이모텝과 스콜피온 킹과의 능력대결을 기대 했었는데, 그 무릎 꿇고 비는 건 좀.. 예상 밖의 일이었다.. -_-;)

플레잉 타임은 장장 2시간이나 되는데 몇 가지 특수효과 보고나니 시간 다 가더라.
1에서 가장 중효한 스토리 라인을 잇던 왕비와 이모텝과의 관계가 2에서는 완전히 뒤집혀, 더욱 스토리 전개를 부실하게 만들었지만..

뭐 어쨌든, 나름대로 볼만했다. (역시 1의 환상에 들떠서 봤더니..재미가 반감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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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X - Ain't No Sunshine


액션스타 스티븐 시걸과 들어보지(?) 못한 랩퍼 DMX가 손잡고 만든 Exit Wounds를 봤다.

스티븐 시걸이 주연인 영화는 이 전처럼 뻔한 권선징악과  주인공인 시걸은 한대도 안맞는 장면이 눈앞에 싹 스쳐 지나갔지만 (그야말로 Untouchable!!) 액션 영화를 극장에서 본지 꽤 된지라 그냥 즉흥적으로 표를 구입해서 보고 말았다. -_-;

상영극장은 광주 무등극장 5관.

근데 표를 구입할때 민망하게도 다들 친구만을 사려고 아우성을 치는데 난 그 바로 옆에서 달랑 혼자 표를 사고 있는 것이 좀 이상스러웠다. 마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3류  영화의 표를 구입하는 듯한 그 느낌이란~ -.-

어쨌든 그렇게 시간 맞춰 영화관에 들어갔는데 지정석 자리라 좌석이 가장 오른쪽 끝이었다. -_- 별로 맘에 안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 난 그냥 가운데 부분에 가서 아무데나 앉았다. 그러기를 한 10여분?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에 2명이 들어오더니 옆에 앉는 것이었다. 조마조마한 나는 "그만 들어와라~"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는데 급기야 옆에 앉은 사람이 "그  좌석이 확실한지?" 하고 묻는 거였다.  -_-;

쪽팔려서 우물쭈물 "아니요"하고 바로 옆으로 앉으려고 하자(옆자리 하나가 더 비어 있었다.) 그 사람이 말하길 " 거기도 자리가 있는데요."-_-;라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줄에서 쫓겨나 난 중앙 분리선 앞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다행이 중앙 분리선 앞의 좌석에는 나 혼자만이 가운데에 떠억 하니 앉아있게 되었던 거다. 으~ -_-;

어쨌든 사람은 별로 없는 상태에서 불은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었다. 역시 시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답게 초반에 그렇듯 화끈한 액션신으로 시작되었다..;;

그러기를 약 2시간(117분). 영화 평론가는 단지 별 하나만을주었지만 난 그렇게 짜게 주고 싶을 정도로 지루하게 보지는 않았다. ^^; 그런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 그것을 분석하면서 굳이 단점을 들춰내 비웃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평론가는 평론을 해야하는만큼 뭔가를 분석하긴 해야겠지..)

스티븐 시걸은 여전히 액션을 뽐내고 있었지만 예전작처럼 언터쳐블 하지는 않고 간혹 몇대씩 맞기도 했다. 역시 나이가들어서 그런것일까? :) (그것도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 정말 시걸을 꼭 닮으셨던 정치경제 과목의 선생님도 생각났다..-_-)

간만에 액션 영화를 혼자 봤더니 예전에 고 3 여름, 보충수업끝나고 페이스 오프를 봤던 기억이 났다. 친구놈들과 같이 보자고 권유를 했건만.. -_-; 그리고 군대 가기 직전의 친구와 같이 봤던 스타워즈  에피소드 원을 봤던 기억도 났다. 벌써 2년이 다되가는군. 그  때의 영화 장면은 선명한데, 그 기억사이로 2년이 지났다니. 훗.

암튼 좀 시시하다고 생각할만한 액션영화도 극장에서 보는 것은 확실히 비디오로 보는 것과는 그 느낌의 차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액션은 극장에서 봐야한다니깐~

간만에 본 액션 영화는 참 재미가 있었다. :)

덧-

아 참! 영화의 제목인 exit wounds는 관통상 중에서도 총알이 뚫고 나간 상처를 뜻하는 것이라고..
총알이 뚫고 들어온 상처는? enter wounds라고 하던뎁. ^^;
근데 이 제목이랑 이 영화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본인도 모르겠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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