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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기사 스크랩)

참여정부가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이라는 정책을 제시하며 드디어 총체적인 언론개혁의 카드를 빼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기간 내내 종종 언론의 과도하고 주관적인 정책해석에 많은 아쉬움을 표시하곤 했었다.

이번에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은 서구의 여러국가의 제도를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시스템 개혁을 이뤄내려고 하는데, 벌써부터 언론과 학계 그리고 정치권까지 이 문제를 두고 노무현 대통령과 대척점을 형성하고 있다.

분명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이라고 정책명을 밝혔음에도 '기자실 통폐합' 이라는 지극히 언론 중심의 헤드라인이 신문과 인터넷 기사의 대문을 큼지막하게 장식하고 있다. 작금의 언론이 어떠한 시각을 갖고 있는지는 이 부분만 봐도 대충 짐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시스템을 수행하는데 있어 충분한 여론 수렴과 토론 등의 논의과정이 생략된 채 진행되고 있다며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독재정권이 붕괴한 이후 현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군사독재 시기와는 또 다른 정언유착등을 통해 과도하게 비대해져 공정한 보도와는 거리가 멀어진 채 팩트를 왜곡, 과대포장과 축소, 은폐 따위의 수작을 부려 사주나 개인의 성향에 따라 소설을 쓰는가 하면 기사로 대서특필하겠다는 것을 무기로 하여 취재 대상에 대해 언론권력을 휘두르는 행태는 무엇이라고 국민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는 분명
언론이 저지르는 크게 잘못된 부분이며 대다수의 구독자들인 국민에게 잘못된 정보 제공은 물론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나아가 희롱하는 작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물론 참여정부의 슬로건이자 민주주의의 원칙답게 국가의 정책에 다양한 계층의 심도깊은 논의는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그러한 과정은 필요하되 필수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개혁의 대상이 된 언론이 제도시행의 논의 과정에 참여시켜 달라는 이야기는 어딘가 맞아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들이 현재 성토하는대로 이번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시켰다면, 절차상의 명분은 분명 얻게 되었겠지만 임기 말의 시점에서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이루어졌을지 매우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대통령은 다양한 계층의 요구를 최대한 수렴하되, 모두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는 현실 상황을 감안하여 최대 다수에게 최대한의 행복을 줄 수 있는 공리주의적이자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하기에, 늘 시행 정책의 반대편에 서서 공정하지 못한 보도와 함께 불만을 표시하는 언론들과 대치하곤 했었다.

이번 정책의 시행에 있어서는 언론 전반에 걸쳐 널리 만연되어 있는 기자들의 특권의식과 공정성을 잃은 주관적 보도 행태 등으로 비롯된 문제점들이 개혁의 대상이자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기에, 진보언론 수구언론 등의 언론사 성향과 상관없이 언론인이라는 큰 틀에 묶여 기존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번 정책에 한목소리를 높여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는 듯 하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맞는 말이다.

펜으로 대변되는 지식, 지혜 그리고 공권력과도 대비되는 지식층, 언론기관 등은 지식정보화 시대인 21세기는 국가와 사회는 물론 나아가 세계의 여론을 형성하고 움직일 수 있는 제3의 권력이라고 불리울만큼 파워가 부여되어 있다.

이는 올바로 사용되면 그만큼 언론의 사명이라 할 수 있는 국민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공정한 사실을 보도하며 정치를 냉정히 판단하고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는, 국가권력의 견제에 있어 최우선적인 대안으로 국민의 무한한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여론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이 형성될 수 있으며 이러한 언론권력이 특정세력과 유착한다거나 또는 그러한 성격을 바탕으로 통제되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변질되어갈 때 그 피해는 사회 전 영역에 걸쳐 광범위한 범위로 퍼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터넷 시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중.소 언론사들의 팩트에 대한 정확한 사실 여부의 확인 없이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같은 기사들을 중복적으로 취재하여 기본적인 맞춤법도 맞추지 못한 채 무성의하게 작성하여 뚜렷한 소신도 없이 과도한 주관적 해석을 덧붙이고 지극히 선정적인 제목을 달아 그저 조회수 올리기에 급급한 하루가 멀다하고 홍수처럼 쏟아지는 질낮은 인터넷 기사들을 써갈겨대는 그들은 진정 기자이며 언론인인가?

참으로 한심스런 작태가 아니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연유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보.혁 신문간의 불공정 경쟁을 타파하기 위한 '신문고시법'과 더불어 이번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 제도'를 저극 지지하는 바이다.

분명 언론은 통제되어서는 안되는 자유를 부여받아야 하지만 과연 그에 따르는 책임을 다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다지 할 말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사실을 왜곡하여 국민을 호도하며 잘못된 길로 이끄는 언론의 횡포는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기도 한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기자를 비롯한 언론인들은 진실로 한번쯤 깊게 고민해야할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다수의 언론인들은 이번 정책을 독선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책이라며 물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 왜 그러한 정책이 입안되어 추진되는지 그 배경을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한국 언론의 현 실태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과연 어디로 가야하는지 한번 정도는 객관적으로 자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또한 정부의 정책 시행 과정에서 들어날 미진하거나 수정해야할 부분들은 이후 적절한 논의와 여론수렴과정을 통해 올바른 방향으로 시정해나가는데 있어 당사자이자 주체자인 언론인들의 의견을 반영해도 늦진 않을 것이다.

이번 정책에 대한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간 당신들의 언론 보도 작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도 적잖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양심과 진실의 최선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언론. 그들에게 진정으로 올바른 길은 어디일까...

........

27개 OECD 국가 중 기자실 운영 국가 단 3개국.

조사결과에 따르면 행정부 건물 내에 기자실을 운영하는 나라는
국과 일본, 이탈리아 3개국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국가는 정부 내에 기자실을 두고 있지 않으며 대통령비서실이나 총리실 등 정부 내 핵심부서를 중심으로 브리핑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나머지 국가는 의회브리핑실(영국, 호주, 캐나다, 헝가리 등 내각제국가)이나 언론단체건물(독일)을 이용하고 있다.

또한 기자실이 있는 3개국도 우리나라와는 상황이 달랐다.
미국의 경우 국무부, 국방부, 법무부 3개 기관에만 기자실이 설치돼 있을 뿐이고 이들 부서와 농무부, 교통부에만 브리핑실이 설치돼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도 총리실에 통신사 기자들을 중심으로 6명만 상주하고 있을 뿐이다.

취재시스템이 우리와 비슷한 일본은 거의 전 부처에서
우리의 기자실과 비슷한 기자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폐쇄성 등 기자실이 가진 문제점은 2001년 나가노현의 기자클럽 폐쇄와 2004년 국경없는 기자회의 연례보고서, 같은해 기자실 개방 법정소송 등에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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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게 된 영화.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미리 접하고 보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 서핑 중에 하나의 문구를 발견하고
출처가 '허니와 클로버'라고 되어 있길래 찾아봤더니 일본 영화.

원작 만화도 있고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으며
주인공도 꽤나 인기있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듯 싶지만
일단 이런 배경은 접어두고.

그래서 즉흥적으로 보게 되었다.

......

미대생들의 이야기.

말 그대로 청춘예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다루지만 지루하지는 않고
딱히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은
서투르고 어설픈 행동들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운 풋풋함.

그 자체가 청춘이기에.

중간중간 재미있는 장면들도 있었고
중반이 넘어가면서 뻔한 결말을 향해 가는 것도 보였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들리던
두 곡의 밝은 음악에 여운이 짙게 남아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었지.

그래도 메말라가던 감정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가시게 한 시원한 아이스티와도 같았던.

잊혀져가는 시간들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으로 반짝이던 영화.

......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가장 좋아해준다.

고작 그 정도의 조건인데도
왠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느낌이 들어...

- 허니와 클로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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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 진보주의 법학자 한상범 교수의 저서인
박정희와 친일파의 유령들.

이 책은 시종일관 한국 내에 전방위적으로 퍼져 있는 수구세력과 친일파들의 행태를 일반적인 지식인의 서적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강한 어조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이 분 정말 원로학자 맞아?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네들의 저질렀던 짓거리들에 비추어 보면 그 정도의 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여하튼 논리도 논리지만 읽는 사람의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책 전반에 걸쳐 시종일관 맹렬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의 지식인들의 모습이 모두 이분만큼만 지행일치를 보여준다면 무슨 근심걱정이 있을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지만 대한민국사는 온통 우로 점철되어 있는 기형적인 역사이다. 옳고 그름도 분간 못했던 광풍과도 같았던 현대사는 미래를 위해 분명 언젠가 한번은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대의 요청이자 역사적 소명일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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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중동포 학자이자 작가인
리동혁씨가 쓴 本삼국지 시리즈를 다시 읽고 있다.

이 분 '삼국지가 울고 있네'라는 책의 내용에서부터 뭔가 조짐이 보였는데,
결국은 직접 삼국지를 완역하면서 기존의 번역, 평역서들에서 벌어진 오류들을 비판하며 거의 완벽에 가깝게 수정을 하신듯 하다. 삼국지연의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에게도 좋고, 이미 기존의 삼국지연의 시리즈를 섭렵하신 분들도 기억을 더듬어 혹은 직접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도 의외로 쏠쏠할 듯 싶다.

삼국지에 대해서 나름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이러한 책들을 보고 있으면 한없이 부족한 지식 앞에 부끄러울 뿐이지. 무릇 지식을 쌓는다하면 자신의 영역에서만큼은 압도적인 힘을 보여줄 정도가 되어야 소기의 목적 중에 한 부분을 달성했다 할 것이다.

그래도 수많은 삼국지연의 시리즈 중에 역시 내게 가장 큰 전율을 안겨준 삼국지는 일본 작가인 기타가타 겐조가 쓴 '영웅 삼국지'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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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정부 비밀해제 문건으로 본 미국의 실체'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상당히 끌리던 책이라서 성큼 집어 들어 빌렸는데 생각보다 방대한 내용을 자랑했다. 하지만 주된 요지는 대강 파악할 수 있는데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상적인 국가인양 대부분이 인식하는데 실상 '美'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국가라는 것. 그리고 자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서는 타국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입한다는 것.

또한 미국의 태생부터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독립혁명이 일어나고 인권과 노예제 폐지를 위해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1차, 2차 대전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

물론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역사에 있어서, 미국을 한국 해방의 주체이고 한국전쟁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정의의 사도로 인식하고 있는 보수우익집단의 장기간 집권도 미국의 실체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

대략 이런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근거로써 90년대에서 2000년대 들어 상당수 해제된 비밀문서들에서 다뤄진 내용들을 제시하고 있다.그 문서들은 세계 각 지역별로, 그리고 지역 국가별로 자세히 정리해서 미국이 저지른 행태들을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이라는 국가는 양의 탈을 뒤집어쓴 흉악한 늑대와도 같다는 것이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아마 해방 이후부터 불어닥쳐 60~80년대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자리잡은 반공주의 시대를 떠올려보면, 아마 금서 제1호로 지정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히 과격한 표현들을 서슴치 않고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현재 툭하면 서울시청앞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보수우익단체들이 이 책을 보면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국의 실체. 즉 온갖 미사여구로 덧씌워진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국 이후부터 현재까지 힘없는 약소 국가를 상대로 얼마나 조폭과도 같은 더러운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 진실을 입증하는 바로 그네들의 비밀해제문건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Fox Americana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미국은 2001. 9.11사태, 그리고 아프간 침공과 2003년 이라크 침공과 같은 대규모 군사 작전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더불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무장한 WTO, FTA등의 기구와 조약들을 앞세워 각국의 경제 예속화를 강화하고 양극화를 가속화하는 등의 부작용을 일으켜 사회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한-미 FTA 협상을 하는 우리나라에서도자주 거론되기도 했고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상을 직시하면 현재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미국에 대한 이미지는 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본모습을 인식함으로써 친미, 나아가 숭미를 일삼는 행태를 버리고 그들의 '약육강식'적인 정책에 적절한 대처를 해야만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그리고 상당부분 격한 표현들이 들어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기존에 대한 인식의 틀을 깨부수고 또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모습에 대한 실상을 비춰줌으로써, 우리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함에 있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양면성에 공평하게 접근할 기회와 기초 지식을 제공해 주는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도 그렇지만 더없이 거대해진 현대 사회 그리고 국가 집단에서 언제나 정치라는 것은, 철학 또는 이론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이상향적인 모습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자연상태와 같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고금을 불문하고 우리가 역사서와 TV를 통해 마주하는 진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여전히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방국이고 혈맹이라며 환상을 갖는 우리나라네의 자칭 원조보수우익이라는 분들. 성조기에 어떤 진실이 담겨져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한국의 국가 기념일에 막연히 흔드시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철딱서니 없는 분들.

타국의 사례는 고사하고라도 해방 이후 한국에 들어와 자유민주주의 이식이라는 미명하에 한반도 분단에서 시작하여 얼마나 많은 만행들을 저질렀는지 조금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

덧-

근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전형적인 미국사를 외교 부분 중심으로 다룬 '카우보이들의 외교사'를 보려니 도통 적응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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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연개소문傳'
 

말 그대로 고구려 말기에 독재와 핏빛으로 물든 절대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을 재조명한 책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고증할 사료들이 부족하지만 전적으로 당시 중국측 사료들(주로 구,신당서)을 맹신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며 (이 당시 중국측 사료는 당 태종 이세민의 주도 아래 관찬사서 편찬이 시작되던 시기였으며 화이사관, 중화주의 인식으로 주변국-四夷-을 바라보았던만큼 사료라고 하더라도 객관성이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신라, 고려측의 사료와 일본의 사료들과 그간의 연구논문들을 비교 분석하여 상당수 누락되거나 생략된 역사적 사건과 정황들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복원해내고 있다. (그 참고자료 중에는 다니던 학과에서 -국내에서 12명에 불과한- 고구려사를 전공하신 여호규 교수님의 논문도 자주 보였다.)

책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과 성향, 연개소문 집권기에 벌어진 1차, 2차 그리고 사후의 3차 고-당 전쟁에 대해 사료들을 비교분석하며 사실과 가깝게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패망과정과 그 이유들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어,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이었던 고구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아쉬움만큼이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연개소문이 펼친 대당 강경책 중심의 독재 정치는 비록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연이은 고-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유지될 때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게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독재 체제는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사망하게 되자 급격히 붕괴되는 모습을 보이며 결국 이는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았을 때.

독재 정권이라는 것이
본래 독재자 개인의 능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체제이기에 살아 생전에는 겉으로 보기에 문제가 없어보여도, 당사자가 중심에서 사라지게 되면 연개소문 사후와 같이 급속히 붕괴되며 권력 투쟁등의 혼란을 야기하거나 박정희 정권과 같은 새로운 유사 독재자가 그 공백을 대신하는 경우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현재와는 다른 왕을 중심으로 한 전제 정치가 이루어지던 시기였지만, 오히려 그러했기에 고구려의 멸망은 독재 정권을 구축하고도 차마 왕위까지는 넘어서지 못한 연개소문의 정치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류왕도 죽여버린 그였기에 신하가 아닌 왕위를 차지하여 그 위치에서 승계를 하였다면, 아마 그의 사후에 벌어지는 남생-남건,남산의 권력 투쟁 가능성은 상당부분 줄어들며 안정적인 정권승계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본질적으로 권력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3형제간의 분란은 왕위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을 듯도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개소문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왕위 찬탈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 보다는,
어쩌면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주관할 수 있는 대막리지라는 위치에서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 나라의 흥망을 한 개인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을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지극히 편의주의적이고 위험한 생각인 것임은 알지만 이왕 그렇게 반대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것인만큼 조금 더 독하게 굴어 왕위를 차지하였으면 어땠을까? 라는 어리석은 가정을 하는 것은 현재 어지럽게 벌어지는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현상에 배타적 민족주의가 나에게도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가.

당시에 살아가는 인물들은 나름대로의 주관들을 갖고 민족이라는 개념에 앞서 국가라는 틀에서 치열하게 살아갔다.

사이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가진 당 태종 이세민, 그러한 팽창주의에 맞서 고구려를 진두지휘한 대막리지 연개소문.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그저 신라를 지키려던 김춘추, 김유신. 나당 연합군에 무너져가는 백제를 구하려했던 흥수, 성충, 계백.

다들 정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간 것이다.

그래도 책을 덮는 순간 어쩔 수 없는 아쉬움과 무리라는 것을 알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살았던 한반도에서 한참이 지난 지금 이 곳에서 당시에 그러한 선택을 했던 그들의 후예로 살아가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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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여야가 대치하며
국회가 헛돌고 있었던 원인의 중심에는 바로 이 사학법 개정 법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은 전혀 다른 사안인 주택법과 같이 처리하자면서 열린 우리당이 한발 물러서서 한나라당의 재개정 요구를 수용하면서 누더기 법안이라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데.

사학법 개정에서 가장 큰 골자를 살펴보면 바로 사학의 건전한 운영과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한 "개방형 이사제 도입"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방형 이사제는 7명의 이사진 중 1/4을 개방형 이사로 구성하는 것)

열린 우리당은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함으로써 사학의 운영에 있어서 '투명성'을 담보하자는 논리인 반면에, 한나라당은 "개방형 이사제"는 학교 운영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안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종전까지의 사학에서 가장 큰 힘을 갖는 이는 재단을 설립한 이사장을 중심으로 한 그 일가가 학교 운영에 대해 거의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인데, 특히 한국에서는 근대화 시기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비롯한 다수의 종교 집단에 의해 세워진 사학들이 상당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학교들의 이사진은 대부분 종교인이다. 때문에 이번 사학법 개정을 사악법이라고 규탄하며 머리까지 깎으며 투쟁하는 등의 난리법석(?)을 피우기도 했다.

그들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학이란 무엇인가. 목적상으로는 설립자가 자신이 지닌 이상 또는 이념을 추구하며 사회에 공헌을 할 수 있는 교육을 펼치기 위해 설립자가 사재를 출현하여 사학을 세우게 된다. 이미 그렇게 하는 순간 사학재단이라는 것은 설립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사회에서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교육의 장이 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학 재단이 개인의 소유물인양 국가가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한다면서 절대 개정 반대를 외치고 있다.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해 사학을 설립한 것은 분명 존경받을만한 부분이지만, 문제는 그들이 그 이후에 건학 이념을 망각하고 학교를 하나의 개인 소유물쯤으로 생각하고 온갖 비리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또한 사재를 출현하였기에 이사장의 권리도 일정부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대다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국민의 세금으로 인한 국가의 지원금을 70% 이상 받는 사학들임을 감안했을때, 왜 국가는 그들만의 사학 그리고 그들의 재단의 투명성에 개입할 수 없다는 말인가.

제작년 통계에는 200여개가 넘는 학교중에 20여개의 학교 재단 운영 실태를 표본 감사한 결과 2000여억원이 넘는 액수를 비리를 저지른 것을 적발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 다른 영역에서의 비리에 비교해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란 말인가? 그렇기에 사학법 개정과 개방형 이사제는 절대 반대란 말인가?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종교인이기에 더욱 기가 막힐 뿐이다.

교육은 예부터 백년지대계라고 했다. 사회가 급변하는 현대에도 교육은 여전히 국가적 사회적으로 그 비중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획일화된 교육방법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며 버티던 시대는 지났다.

쉽지않겠지만 점진적으로나마 사고의 창의력을 키우고 사물을 다원화된 관점으로 바라보며 하나의 정답이 아닌 다방면에서의 해결책을 구할 수 있게끔 하는, 21세기에 걸맞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국가의 노력만큼이나 사학의 역할이 분명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학이 그들이 외치는 진정한 자율성을 지니고 건학 이념을 실현하여 인재 양성이라는 공익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재단의 투명성이 우선시 되어 사학의 학풍이 깨끗하게 진작되어야 할 것이다.

사학재단 이사장이 전권을 쥐고 이익의 창출에만 집착하며 (급식 업체나 교복 또는 교과서 선정 등등)공금을 횡령하고 선생을 실력과는 무관하게 뒷돈으로 채용하는 고질적인 병폐와 그로 인해 이사장이 왕처럼 군림하는 그러한 학교가 과연 21세기에 어울리는 교육기관인가?

자율적으로 정화를 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이 부분은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제 구시대적 사학 재단의 전횡은 척결할 때가 분명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척결의 시발점은 '사학법 개정'이 될 것이다.

사학법 개정을 삭발까지 하면서 죽을 힘을 다해 반대하는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과 이해 집단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결국 그러한 압력에 못이겨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정략적 합의를 거치며 누더기 법안이 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면 참 한국의 사회에는 무엇이 원칙이며 정의인지 알기 힘들다.

사학법 개정이 비록 한국 사회 전체 모습에서 일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참 우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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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뭐야?
얘네들 웃기는 녀석들일세. 명확한 근거와 이유 설명도 없이 단지 신입생들이기 때문에 등록금 차등 인상을 적용하는 건 또 뭐냐 말이지.

해마다 재단에는 수천억이 넘는 적립금이 쌓여있는 상황인데도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이대 5천억, 홍대 3천억, 연대 2천억 등등) 모든 필요자금은 학생들의 등록금 인상분으로 메우려는 그런 몰상식하고도 비윤리적이며 싸가지 없는 짓거리는 언제까지 계속 되풀이 될 것인가?

적립금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과 재단 전입금과 기금 조성과 같은 다양한 예산 운용 방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국내 주요 대학 수익률 3~4%, 반면 외국은 10% 이상), 오로지 등록금과 국고지원금만을 바라보는 오늘날 주요 대학의 단순무식한 재정 체계와 더불어 일방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막가파식의 운용 방식으로 인한 부족분과 부담을, 어찌하여 오로지 학생들(더 정확히는 우리 부모님들)이 해년마다 일방적으로 모두 져야만하는 것인가?

더군다나 혜택이라는 이름으로 그나마 소수의 제한된 학생에게 되돌아오는 장학금과 같은 혜택의 비율은 역으로 줄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작태는 또 뭔가?

이러한 모순된 대학의 재정 구조는 더이상 대학과 학생 및 자치 기구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는 조절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정부기관 또는 국회의 감사를 통한 재정 투명화와 관련 법규를 수정해서라도 강제적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명색이 더욱 수준 높은 학업의 성취를 위해 존재하는 상아탑에서 (하긴 지금은 거의 취업을 위해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지만) 오히려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모르는 불문명한 학교측의 재정운용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 진학과 더불어 정부 보증 대출을 받아 학생들을 사회에 빚을 지게 하거나 (분명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닌 제도이지만 빚을 지고 시작한다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학기 중의 아르바이트는 물론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본말이 전도된 모습은, 바로 잡을 필요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하지만 과연 언제?

등록금 천만원이라는 미쳐돌아가는 시대. 이젠 사회적 공론화를 통한 해결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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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집에서 슈퍼맨 리턴즈 감상.

사실 슈퍼맨 시리즈는 어렸을 적 토요일 밤늦게
비몽사몽간에 보았던 것이 전부였다.

기억 나는 건
스타워즈 시리즈처럼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익숙한 메인테마 음악 뿐.

그래서 슈퍼맨 1과 4도 구해서 보았는데. -_-;

다시 리턴즈를 돌려보니  
C.G를 난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옛 버전의 색채를 가급적 그대로 유지하려했던 점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상당한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이질감 없는 옛 기억 속의 슈퍼맨을
온전히 되살리려한 흔적이 엿보였다고 할 수 있을까.

미리 옛 버전을 먼저 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주인공 브랜든 라우스도 멋졌고
미국의 영웅물 치고는 너무 시끌벅적하지 않아서
괜찮았던 것 같다.

왠지 배트맨 시리즈의 배트맨 비긴즈틱했던.

..........



넌 너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보고
난 나의 눈으로 너의 세상을 볼지니
아들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아들이 된다. 

......

Even if you are the last, you are not alone.

...... 

I'm always around

By Superm Returns.(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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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Hedge OST : Still - Ben Folds 


(김용현이 강추해서 보게된) Over the Hedge.

간만에 키득거리면서 본 영화.


주인공 너구리 알제이를 비롯해 다양한 동물 캐릭터들의 특성이 잘 살려진듯 했다. 그리고 그들이 먹거리를 구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당연한 것이겠지만) 친구들간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용서, 나아가 가족이라는 개념과 중요성까지 여러가지 요소들을 상당히 잘 담아낸 것 같았다. 더불어 환경파괴를 일삼는 인간의 삶에 대한 풍자까지.

여튼 한번쯤은 볼만한 영화로 추천!

ps: 너구리 알제이와 다람쥐 헤미는 참 귀엽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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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Sunset.

여름의 그 폭우가 쏟아지던 밤에 보았던  
Before Sunrise의 후속편이었는데.

나에게 현실은 대략 6개월 정도 지났건만
영화 속의 현실은 거의 9년이 지나버렸지.

우연한 만남과 사랑.
만남과 이별. 재회. 그리고 현실...

이 모든 것들이 담겨진듯한 영화.

80분 가량의 영화의 러닝 타임은
실제 80분과 거의 같게 흘러갔다.

단 한번의 짧은 만남.

그 후 9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들의 대화는 현재진행중이었지.

그 사이에 잃어버린 시간들과
다른 삶 속 사이에서
서로에 대해 여전히 유효한 감정들에 대해.

그리고 예상 외의 결말같지 않던  
영화의 결말 부분을 접하고서야
오프닝에서 에딘 호크가 말했던 것이
결국 이 영화의 결말과 같은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궁금증과 아쉬움을 남겨 놓은 채.

과연... 어찌 되었을까...

그들은...


A Waltz For a Night - Julie Delpy

......

난 이런 생각을 했었어.
나에게 더 이상 로맨틱한건 필요 없다고
결국에는 괴로움만 남거든.

아직 꿈들은 많이 있지만
그게 사랑이라는 관계는 아닌 것 같아.
그렇다고 슬프거나 하진 않아.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뿐이니까.

.......

난 솔직히 기분이 묘해.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절대로 생각해보지 않았거든.

사람들은 사랑을 나누거나 심지어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헤어지고 나면 바로 잊게 되잖아.
그들이 먹는 시리얼 브랜드를 바꿔 버리듯이 말야.

난 내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잊지 못할 것 같아.
왜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특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니까.

너 역시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는 없어,

끝난 건 끝난 거라고 하더라도.
관계가 끝날 때마다 그건 상처가 되더라.
그것도 완치될 수 없는...

그게 내가 몰두하는데 신중한 이유야,
그 상처는 아주 아프니까.

- Before Sunset(2004년 작)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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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그것은 패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역사에 승자로 기록된 이들에 못지않은 패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물론 그들과 승자의 사이에는 백지 한 장의 미세한 차이만이 존재했으며,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처지였을지라도 결국 패자라는 사실은 바뀔 수 없는 것이며 승자를 위한 조연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격렬한 삶을 살아가며 한때나마 모두들 승자였을 법도 한 위대한 패배자들.

그들의 기록에서 개인의 의지를 뛰어넘는 삶의 불안정성과 예측할 수 없는 인생에 전화위복이 반복됨을,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엿볼 수 있었다.

훗날
나는 내 자신에 비추어 삶을 반추하게 되었을 때... 어디에 가깝게 서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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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 살해사건 1,2.

간만에 서점에 들러 한시간 가량 책 뒤적거렸던가. '누가 왕을 죽였는가'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사인이 불분명하거나 국왕의 임종을 흥미롭게 분석해 유명해진 이덕일 교수의 후속작(?)인 조선 선비 살해사건이라는 책이 새로 나와서 즉흥적으로 구입하였다.

이 책 역시 제목에서 흥미를 자극하는 상술적인 면이 엿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까지 그렇지는 않다.

고려말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림이 단독으로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의 전개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선비들이 대거 목숨을 잃었던 사화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책이지만, 참 어렵지 않고 쉽게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설명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면 장점? 중간 중간의 인물과 상황에 대해 저자 나름대로의 역사적 비평도 있어서 단조롭지 않고 맛깔이 난다.

기나긴 추석 연휴의 밤을
이틀에 걸쳐 나름대로 의미있게 보내게 해주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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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음 (문학으로 읽는 조선왕조사).

문학으로 읽는 조선왕조사라고 해서 조선시대 문학작품 위주로 접근하는 책인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조선 건국부터 대한제국의 멸망까지 시대순 그리고 인물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다른 부분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과 주로 일본과 관련된 사건, 인물들에 대해 일본의 기록까지 끌어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독특했다.

책 말미에는 날이 갈수록 역사라는 학문을 경시하는 풍조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는데, 최근의 동아시아 역사 논쟁이라든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임기응변식의 비전없는 정치권을 보면, 사회 전방위적인 부분에서 역사적 안목과 소양을 필요로 함을 보았을 때

중고등 교육에서 국사가 선택 또는 제외되는 현실. 국가에서 중대사를 담당할 인재를 선발하는 고시에서조차 역사 과목이 제외되는 현상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암기식 주입식의 역사 교육 방법도 사실은 틀렸다. 역사는 현재와의 대화이며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하는데, 현실은 이에 역행하고 있으니 저자의 한탄에 안타깝게 공감이 갔다.

다만 저자가 사학 전공이 아닌 문학자여서인지 다소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점에서 역사학자들의 객관적이고 분석적이며 논문식으로 풀어가는 글과는 또 다른 그 나름대로의 색깔이 있었다고 할까. 그래서였는지 상대적으로 부담없이 주욱 읽어내려가기에는 꽤 괜찮은 교양서적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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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

1996년 종군 위안부 문제가 일본 역사 교과서에 공식적으로 기술되면서부터 동시에 이에 대해 자학 사관이라고 반발하며 일본 자유주의(수정주의) 역사관이 전면에 대두되면서 이른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을 일으키는 '새 역사교과서를 쓰는 모임'이 출범하게 되는데 (이 분들 논리. 참으로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다.)

90년대 후반에 들어 눈에 띄게 늘어난 일본의 급진적인 우향우 경향에 대해, 18인의 일본 진보 학자와 재일동포 지식인들이 각 분야별로 학술적 및 논리적으로 비판한 글들을 다루고 있다.

하나같이 이성적으로 공감가는 주장들이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이들의 생각이 현실 정치와 맞물리는 부분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취약하다는 점이다. 즉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일본 뿐만이 아니라 현재 한국, 미국 등 어느 나라나 비슷한 상황이기는 하다.

엇그제 신임총리로 지목된 아베 역시 극우 보수파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강한 일본'이라는 주장 아래 민족적 동질성과 자존심을 강조하며,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고 교훈을 망각하는 이들에 의해 여전히 역사 부정과 왜곡은 현재진행형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이렇듯 우울한 현실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이렇게 부정하고 싶을 법한 그네들의 역사의 진실에 용기있게 마주볼 수 있는 지성인들 역시 일본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지만 소중한 변화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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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전쟁 (현대 일본의 역사 인식과 한일관계).

서문부터 끝까지 5시간 걸렸던가.

전후 일본에서 지속되던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서 냉전 체제의 해체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일컬어지는 버블 경제의 붕괴 이후, 찬란했다고 믿는 메이지 이후의 근대 일본을 그리워하며 다시금 내셔널리즘으로 회귀하려는 일본의 우익 세력들.

그리고 이제는 고질병이 되어버린
정치인들의 역사 관련 망언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을 비롯한 그네들의 과거에 대해 가해자의 모습은 간곳없고 오직 미국등에 의한 피해자의 모습만 남아 자신들의 과오를 청산하지 못한채 빛나는 부분만을 끄집어 내어 어떻게든 이끌고 가려는 모습에서

어이없으면서도 그러한 일본의 역사 인식이 동아시아에서 각국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적대적 공범관계'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네들의 주장처럼 과거의 역사는 언제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면 우리는 왜 역사라는 것을 배워야 하는가? 빛이 있으면 언제나 어둠도 존재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그네들은 왜 인식하지 못하며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독일과 같이 깔끔하게 정리하면 될 문제를 말이다.
그 옛날 탈아입구를 주장하던 그 알량한 자존심이 여지껏 남아서인가?

일본 정부는 책의 본문에도 나오는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된다”는 독일 수상 바이제커의 연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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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엔진 : 전쟁과 시장
 

사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스스로 떠벌리듯 그렇게 썩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책. 9.11 테러 이후 미국에 만연한 일방주의 및 패권주의적 모습의 대두를 이라크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여러 분야에서 다각도로 적나라하게 분석하고 있는 책.

미국이 언제나 그네들의 행동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독재 및 테러리즘 타도와 더불어 자유 민주주주의 체제의 전파라는 이제는 질릴법도 한 그 위장된 구호의 뒷면을 한꺼풀 들쳐보면, 온갖 악취가 나는 모순 투성이들. 겉으로 내세운 구호가 그럴듯 하기에 더욱 심하게 느껴진다.

미국을 움직인다고 생각되는 미행정부의 뒤에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보수 기독교주의자, 유대인들네오콘이라 불리우는 신보수주의 및 소수의 엘리트 지배체제를 꿈꾸는 스트라우시언 관료들. 그리고 아이젠하워 시절부터 그 모습이 실체화된 전쟁을 먹고 사는 군산복합체까지.

이들의 다양한 기득권이 결집된 미 행정부가 세계경찰이라며 정의와 평화를 유지시켜준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역사상 유래없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모든 정보가 공유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 시점에서도 그것을 비웃듯 그들은 의도는 은폐되고 통제하지. 그래서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 존재할 뿐.

.......

사실 우리나라의 현재 국제적 위상과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싫든 좋든 미국과 여전히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은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인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확한 실체파악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

특히 친미 사대주의자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무조건적으로 미국을 찬양할 것인가. 성조기를 흔들어 댈 것인가. 여전히 우리나라의 보수 우익층에 만연한 미국병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의 친미 사대주의적인 풍토에서 벗어나 좀 더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 가을. 정말 이 책을 똑바로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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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동아시아 삼국의 적대적 공범관계인 민족주의에서 한국부터 먼저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 국사는 물론 주류 사학을 지탱하는 이념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것이기에 분명 용기가 있는 일이고 필자들의 주장처럼 언젠가는 과감하게 버려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왜 그것이 가해자이자 '근대 민족주의' 개념을 잉태하게 만든 일본이나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가는 중국이 아닌 양국의 민족주의에 의해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받아 현실과 역사 모두 왜곡되어 있는 즉, 한국이 우선적으로 가장 먼저 해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탈피하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시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오로지 경제학적인 관점만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은근히 옹호하는 듯한 분의 글을 읽을 때는 학문의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방향은 제시하되 그 이후의 대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아쉬움이 남기도 하였고.

물론 장기적으로는 한,중,일 삼국 모두 각자의 입장을 극대화시키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현실을 재해석하는 것에서 탈피를 해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동아시아에서 평화적인 대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분명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것임은 틀림없고 그러한 부분에서 이들의 소신은 박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최근에 갈수록
삼국의 물고 물리는 역사적, 지리적 갈등이 증폭되어가는 상황에서, 과연 어느정도의 호응을 이끌어내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라고 생각된다.

학자로서 논문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현상을 파악하여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의의가 있지만, 국민국가를 바탕으로 한 각국 현실정치의 이해득실 속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만큼 통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지 않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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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권에 있어
한참 시끌벅적한 사안들이 한두개가 아니다. 그 중에 이 전시작전통제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의 환수문제 역시 이러한 사안에 해당하고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작통권 회수 방침에 대해 한나라당을 비롯한 평상시에는 어디에 있는지로 모를 법한 이 나라 보수에 우익이라고 자처하는 인사들은 모두 쏟아져 나와 한 목소리로 '절대불가'를 외치고 있다.

대체 그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인가? 그리고 어째서 절대불가하다는 이야기인가?

설마 아직도 현 시대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그들에게는 그리울법한 냉전시대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90년대에 구 소련이 무너지면서 체제 대립으로 인한 냉전 구도는 허물어지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의 지위를 획득한 지금은 테러리즘의 타도를 빌미로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주의 외교 노선이 횡행하고 있는 21세기의 2006년임을 모르고 있는 자들인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는 그 옛날 냉전이 최초로 열전으로 화했던 그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한달도 채 되지 못한 시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의해 당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겨준 것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의 협의를 거쳐 94년 김영삼 정부때 평시작전통제권을 회수하였다. (이 때 찬양일색이었던 조.중.동은 현재의 상황에는 절대 반대 논조의 사설과 칼럼을 연일 게제 중이다. 노태우, 김영삼이 하면 로맨스고 노무현이 하면 불륜이냐?)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전시작전통제권을 되돌려받으려고 한다. 당시 절박한 상황에 의해 넘겨준 작통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어째서 그리 잘못되었고 절대로 안된다는 것인가?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2001년 9.11 테러를 거치면서 세계의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북한은 현재 네오콘들이 대내외 정책을 쥐고 있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에 의해 악의 축의 한 국가로 지목당해 있는 상태이다.

네오콘은 소위 스트라우시언들로 대변되는 이들로 소련만큼은 아니지만 대외적인 적국을 설정하여 전쟁을 유발함으로써, 자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켜 단결력을 높히고 자유를 통제하며 국익을 추구하는그야말로 소수의 엘리트들이 통제하는 사회를 꿈꾸는 자들이다. 이미 그들은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하여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북한은 물론 이들 국가보다 다루기 쉽지않은 정치, 군사적 조건과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그들에게 지금의 상황이 해결되는 순간 눈을 돌릴 곳은 어디이겠는가? 지금이야 작계5027 등을 들며 작통권이 미국에게 있어도 전시의 모든 상황은 한국군과 협의하여 처리한다고 하지만 과연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것이 100% 준수될 것이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아마 너무 순진하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미국에게 북한은 물론 대한민국도 동아시아의 큰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다. 미국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한다면 그러한 규정쯤은 언제든지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 아니 그러한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어쩌면 대량 살상무기들은 이미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온건했다고 평가받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도 영변 폭격을 단독으로 계획하였다는 것은 알만한 사실이다.)

그들이 자국도 아닌 남의 영토에서 수행하는 전쟁에 도덕과 규범따위를 논하고 있겠는가? 세부 규정을 모두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작전통제권도 갖지 못한 한국군의 의도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설령 작통권을 회수한다고 해서 미국이 이대로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하고 손을 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도 역시 너무 순진하거나 바보같은 생각이다.

현재 그들의 가상의 최대 적은 중국이다. 그리고 네오콘들은 이 세계에 다시는 자신들과 동등한 파워를 지닌 구 소련과 같은 제국의 등장을 허용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이 한반도를 포기한다?

작통권을 회수하든 하지않든 그들은 유사시 한반도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개입하게 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주한미군등의 철수나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으로 작통권 회수를 반대하는 것은, 최근의 추세를 전혀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가 그저 부화뇌동으로 현 정권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로 나선 작자들일 것이다.

평시에는 체감할 수 없겠지만 전시가 될 경우 작통권이 미군에게 있는 것과 한국군이 갖고 있는 것은 전쟁의 양상이나 진행방향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될 것이다. 때문에 작통권 회수는 유사시에 최대한 대한민국의 의지대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의 다름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주권국가의 자주국방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만에 하나인 가정일 뿐이지만 북한이 아닌 만약 독도 등의 영토분쟁으로 한.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유감스럽지만 미국은 한.일 모두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 훨씬 가깝게 서 있다. 국지전에 이어 전면전이 발발했는데 전시작통권은 미국이 쥐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군은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 미군의 지시가 떨어지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의 적이 단지 북한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네들의 단세포적인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미국인이 아니다. 나와 여러분.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지켜줄수 있는 건 미군도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 국가와 군일 것이다.

응당 보수라면 일반적으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는 법인데, 우리나라의 자칭 '보수'들의 행태를 살펴보면 전혀 아닌 듯 하니 그들은 역시 보수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구 꼴통인가?

당연히 되찾아와야 할 것에 대해 저렇게도 절대불가하다며 어거지를 쓰는 작자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지, 과연 이해를 해줘야 할 필요가 있는지 나는 도통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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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h bloom - come here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던 밤에 홀로 본 영화.

특별한 줄거리도 없이
우연히 만난 남녀의 하룻밤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그 둘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몰입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

온통 낭만적인 대화 투성이.

그 짧은 시간에 둘이 느낀 감정은
하루만에 정리되지 않을 법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짧지만 진한 추억을 뒤로 하고
각자의 길로 향한다.

왜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여운을 진하게 남긴 영화.

하긴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더욱 공감이 가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

정신 나간 생각이지만
말 안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계속 얘기하고 싶어.

네 사정은 모르지만
우린 뭔가 통하는 것 같아.

........

너와 있어서 행복해.

넌 모를거야.
왜 지금이 내 인생에 그토록 중요한지.

.........

우리에게 남은 건 이별하는 것 뿐이야

.........

사진찍는거야

널 영원히 기억하려고
이 모든 것도..

..........

Before Sunrise(1995년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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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1. 지방선거.

투표권 행사.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진보와 개혁의 지지로 탄생한 정권은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도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2년여 만에 보수세력에게 K.O 당했다.

지자체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할 정도로 '참여 정부'가 그들의 표현처럼 '무능'했던가. 국정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정부이지만 그렇다고 그에 야당은 진실로 참여한 적이 있었나.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던 것은 누구였던가.

현 상황의 결과에 대한 책임의 절반은 야당도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법인데 선거 결과는 결국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국민들은 차떼기에 공천비리에 성추행범들이 득실거리는, 양극화가 날로 가속되는 빈익빈부익부 사회에서 부를 대변하고, 사상에서는 여전히 친미, 반북 그리고 오른쪽에 가깝게 서있는 그네들이 적어도 현 정권보다는 잘 하고 있으며 더 낫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많다던 서민들의 표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서민들에게 있어서도 대안이란 것은 집권당도 민주 노동당도 아닌 대척점에 있는 정책과 마인드를 표방하는 결국 한나라당일수 밖에 없었다는 것인가.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 정치의 후진성에서 비롯된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국회의원이 아닌 지방 자치 단체의 구성원을 뽑는데 인물과 정책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중앙 정부의 실정과 정치적 상황을 연관지어 특정당 일색으로 뽑아준 대한민국 국민들의 여전히 구태의연한 판단과 몰표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으며, 이번 선거 결과를 보는 한나라당의 득의에 찬 웃음을 상상하면 정말로 지네들이 잘해서 뽑아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실 걱정스럽기도 하다.

오늘의 이러한 결과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을 비롯한 집권층은 자괴감과 억울함이 교차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어떠한 이유와 변명을 갖다대더라도 이번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선거 결과의 치명타는 진보와 개혁 세력이 무능하고 독선적인 아마추어들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광범위하게 심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보수 언론의 공이 지대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점에 있어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집권 여당은 진실로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남은 채 2년이 못되는 시간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시기이다. 이제 또다시 새로운 개혁과 정책을 도입하기 보다는, 그동안 벌였던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지지부진하기까지 했던 각종 정책들을 최대한 국민의 기대치에 가깝게나마 수렴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관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보수, 수구 성향의 언론이 여론의 60%를 장악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여론에 의해 움직이는 그들이 답답해 보이더라도 그들 역시 국민의 일부이다. 결국 그들까지도 안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우둔하든 현명하든 그와 무관하게 언제나 그리고 어느 시대든지, 집권층에 있어서 민심은 천심이기 마련이다. 이제라도 실속없이 말만 앞세우며 자화자찬으로 인한 교만에 빠지지 말고 묵묵히 현재의 어지러운 상황을 슬기롭게 해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훗날 전화위복이라고 회상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지 않고 남은 시간에 쫓겨 대선에만 신경쓰며 이전투구를 벌인다면 07년 대선에서도 역시 국민들에게 외면받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 결과는 분명 참담하다. 하지만 낙담하기엔 이르다.

제발 이제부터라도 아직까지 노무현 정부에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는 진보 및 개혁 세력을, 더 나아가 국민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과 집권당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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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02:14   -  am 04:11

사랑을 놓치다.

현재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닌
사랑을 느꼈던 사람을 위한 영화라고 한다면
이기적인 감상일까.

표현하지 못하고 홀로 간직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다고 할 순 없는 것이겠지.

물론 종국에는 가슴에 남아 추억이 되겠지만.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법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혼자 보기 딱 좋은 영화.

.........

'나도 그런거
 질리도록 해봤거든요.

 속으로만 계산하고..
좋아하고...

 그런거..'

............

어떻게 시작도 하기전에.... 끝이 나냐....


- 사랑을 놓치다.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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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는 명장인가.


사실 근래에 삼국지연의에 내용에 대한 재평가 작업, 즉 소설적인 장치를 제거해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여 인물 및 사건을 평가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일반화된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제공하고 있는 삼국지 상의 인물은 역시 중국에서 '군신'의 지위까지 오른 '관우'와, 삼국지 상의 최대의 악인으로 묘사되던 '조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Daum 삼국지 천하와 삼국지 카페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우는 명장인가?’에 대한 논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삼국지연의에서 모습만으로 관우를 완벽한 무장이라고 규정을 내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춘추라는 책을 읽고, 상대적으로 장비보다 침착하고 냉정하며, 유비가 제갈량이라는 참모를 얻기 전까지는 언제나 전장에서 조언을 구하는 믿음직한 의제로 그려지곤 했다.

 

1. 관우에 대한 자료


‘관우는 명장인가.’


이 질문에 대해 ‘예’ 혹은 ‘아니오’ 라고 단정을 짓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가 관우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소설적 요소가 가미된 ‘삼국지연의’라는 소설과, 관우 생애에서 상당부분 누락되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 관우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정사에서의 관우는 안량을 참살하고, 장판파에서 유비의 도주를 도우며, 213년 익주를 공략에 어려움을 겪던 유비를 돕기 위해 제갈량을 비롯한 장수들이 출전하자, 적벽전 이후 차지한 형주 남부를 진수하게 된다.


그리고 한중전이 촉의 승리로 끝난 219년. 관우가 북진을 시도하여, 우금을 격파하고 번성을 포위하여 조조가 천도까지 고려하였으나, 위의 책략에 의한 손오의 형주 기습으로 일거에 형주를 상실하고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다가 사로잡혀 사망하게 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일단 정사를 놓고 관우를 평가하기에는 그 근거자료들이 너무나 부족하다. 상황설명도 생략되어 있고, 대략적인 전개과정과 결과만 기술되어 있다. 때문에 이러한 사서에서의 공백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 역시 일정 부분 참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하 글은 정사와 연의의 혼합)


2. 명장의 자격 조건.


일반적으로 명장이란 말 그대로 이름난 장수, 또는 뛰어난 장수를 의미한다. 이 정도의 정의라고 한다면 관우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우를 논함에 있어서 ‘명장’이라는 정의에 대해 손자병법에서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며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다.


일찍이 손자병법의 손자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이것은 군사들이 따를 수 있는, 즉 절대 복종할 수 있는 자질과 마음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지도자는 반드시 ‘지(智)·인(仁)·용(勇)·신(信)·엄(嚴)’의 다섯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지도자와 부하들 사이는 마음으로 친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과연 관우는 이러한 명장의 구체적인 요건을 얼마나 구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관우의 용(勇)·신(信)·엄(嚴), 즉 관우의 무력과 신의 그리고 엄격함에는 명장의 요건에 근접한다고 판단하고, 특히 지(智)·인(仁)에 대해서 논하도록 하겠다.


3. 지(智)


예전에는 관우를 일컬어 흔히 ‘문무겸장(文武兼將)’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나 ‘명장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불어 관우를 명장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관우의 문무겸장 이미지는 아무래도 연의 상에서 춘추라는 역사서를 암송할 정도이고, 후에 제갈량을 영입하기 전까지, 언제나 전장에서의 맏형 유비의 참모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용력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초반부터 맹활약한 것에서 이러한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사실 정사에서는 물론 연의에서도 관우의 ‘지략’을 보여준 일화는, 219년 관우의 북진 시 조조가 보냈던 우금을 수공으로 대파한 것 이외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초반에 유비군에서의 참모를 맡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관우가 그의 전략을 단독으로 전개할 정도로, 유비군이 세를 얻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소수 정예군인데다가, 대부분의 전투가 관우와 장비의 걸출한 무용을 바탕으로 돌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관우가 진정한 전략을 구사할 정도의 위치에 오른 것은, 213년 익주로 출정한 제갈량에 이어 형주 진수를 담당하게 될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219년 형주군을 이끌고 북진을 시도하는 시기야말로, 관우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략 구사가 실행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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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 그리고 수공으로 우금 격퇴


초반에는 여러 번 논의되었던 것처럼, 형주 지역의 익숙한 지형과 기후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수공으로 우금을 격파하고, 양양을 점령하며, 번성을 포위하는 등의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그 위명을 삼군에 진동시켰다.


지(智)를 바탕으로 한 전략의 완성형은 적군의 패퇴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의 성공을 위한 작전, 즉 전술 구사에 있어서, 전장의 지형에 대한 사전 지식은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이 촉으로 들어간 이후 육출 기산을 통한 북벌이, 적벽전 등의 형주 지역에서 보여주었던 활약보다 못했던 것에 대한 이유의 하나가, 바로 촉의 지형과 기후를 제갈량이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그 당시에 전장의 특성에 대한 파악은 곧 성공적인 전략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적어도 관우는 적을 격퇴할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였으므로, 평범한 수준은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때문에 관우의 지형과 기후의 활용을 통한 성공적인 수공은 칭찬받을 수 있을지언정, 전략의 부재라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덕의 건의를 묵살하는 등 적장인 우금이 보여준 어리석은 행동은, 관우의 군공을 세울 수 있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만약 우금이 그렇게 불리한 포진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격퇴하였다거나 탈출에 성공하였다면, 그때야말로 관우의 전략에 대해 비판을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공은, 관우가 아닌 당시 형주에 장기간 머물렀던 조운이나 장비가, 관우의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신야에 기거한 이래 촉으로 진공하기 전까지, 관우와 마찬가지로 장기간 형주지역에서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들이 관우가 실행한 수공 방법에 대해, 전혀 모르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번성 공략과 형주 수비병력 차출


이렇게 우금을 지략으로 격파하고 사로잡은 관우는 이어 양양을 점령하고, 조인이 수비하는 번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바로 공성전이 시작되는 부분인데, 일반적으로 공성전에는 공격병력이 수비 병력의 3배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공격할 성 근처의 지역을 제압하고, 성 외부에서 오는 지원을 차단해야 했으며, 직접적으로 성을 공격하거나 혹은 탄탄한 포위공격을 펼쳐야만 했다.


여기에서 관우의 전략을 다시 한 번 논할 상황에 이르게 된다. 바로 공성을 위한 형주 수비 병력의 차출이 바로 그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다각적이 접근이 필요하다. 즉, ‘후방이 허술해지는 위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고, 결국 오의 기습으로 형주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에, 관우의 수비병력 차출은 어리석은 행동이었고, 그의 북진은 실패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명장이 될 전략을 갖추지 못했다.’ 고 결과론적으로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관우의 북진과 오의 급습


관우는 북진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형주 접경지역에서 오와의 잦은 국경 분쟁과, 외교를 통한 형주 동부 3군의 반환, 그리고 적벽전 등을 통해 익히 기량을 파악하고 있었을, 당시 오의 지휘관인 여몽을 위협적인 장수로 간주하고, 오와의 접경지역에 방비를 튼튼하게 한다.


즉, 그는 오를 결코 만만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우금을 격파하는 등 성공적으로 북진 중이던 관우군의 기세에, 조조는 허도에서 업으로의 천도까지도 고려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도 평가절하 하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지나친 것이다. 분명 조조는 천도를 고려한 것이 사실이었고, 당시의 조조가 천도를 하게 된다는 것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여 수도를 안전한 업으로 옮겨놓고, 북진하는 관우군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이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당시 관우군의 북진은 성공적이었으며, 천하를 진동시킬 정도로 군세가 드높았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사마의의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삼국지 전편에 보여줬던 조조의 스타일을 감안하였을 때,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위가 천도를 하고, 형주 북부를 내주고 관우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게 된다면, 낙양을 분기점으로 위는 양분되어, 옹주-양주, 그리고 장안을 비롯한 낙양 서북부는 고스란히 촉에게 내어줄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이루어지면, 분명 한중왕에 오른 성도의 유비가 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본대를 이끌고, 한중을 통해 장안과 옹-양주 방향으로 북진하였을 것이다.


이는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를 이야기하던 융중대에서 "만일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고 험요한 곳을 지키며, 서쪽으로 여러 오랑캐들과 화해하고 남쪽으로 이월을 어루만지며, 밖으로 손권과 결련하고 안으로 내정을 정비하였다가, 천하가 일변하면 한 명의 상장에게 명하여 형주의 군을 인솔하고 완, 낙으로 향하게 하며, 장군(유비)께서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몸소 진천으로 나오시면 백성들이 어찌 감히 단사호장을 가지고 장군을 맞이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유비에게 말하던 그 구상도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조조가 그러한 사태를 좌시하고 있을 인물은 분명 아니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바로 손오의 형주 욕심을 파악했던, 사마의의 차도살인의 계책이 나오게 된다. 바로 형주를 놓고 흥정한 '위-오 비밀동맹'이 맺어지면서 일거에 전황은 역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관우군의 성공적인 북진을 막아야만 하는 위와, 그러한 성공적인 북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형주 탈환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던 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부터 오의 손권은 형주를 바탕으로 익주까지 병합하여 순식간에 오에 버금가는 전력을 유비가 형성하게 되자,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유비군을 견제하려 들었고, 이는 형주를 진수하는 입장에 있는 관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은 새롭게 편입한 익주 재편을 거쳐,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또다시 불거진 형주 문제를 형주 동부 3군을 손권에게 내주는 것으로 절충지어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된다. 아니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형주에 대한 오의 욕심은 촉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제갈량 역시 손권이 조조와 연합하여 동맹을 깰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손권도 촉과 연합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에, 형주에 대한 미련은 3군의 반환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번성을 공격하던 관우에게 결정적인 오판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오군의 지휘관이 여몽에서 육손으로 교체되는 것이었다. 후에 이릉대전 지휘관으로 육손을 추천할 때에도, 감택 외에는 모두 반대할 정도로 오 내부에서도 백면서생이었는데, 하물며 천하를 진동시키며 북진을 지휘하는 관우에게 있어서, 이름도 듣지 못한 육손은 애송이로 비춰졌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여몽이 육손을 후임으로 천거한 이유도 바로 관우의 심리를 간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갓 부임한 육손의 공손한 편지는 관우에게 있어서, 오군을 대비한 수비 병력을 북진군으로 차출하도록 결정하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결정 하나가 관우를 명장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에서 아니라는 방향으로 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사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의 관우의 판단에 대해 논하자면 형주 지역에 대한 소규모 분쟁과 외교적 논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적벽전 이래로 준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촉-오 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유의 후임이자 여몽의 선임이었던 노숙은, 이러한 삼국의 정립구도를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형주로 인한 촉-오의 갈등을 최대한 봉합하여 동맹국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적벽전 이래 촉이나 오 모두 단독으로는 위에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동맹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관우 역시 이렇게 판단하진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 오를 위와 같은 적국으로 간주하였다면, 측면의 충분한 견제 없이는 애초에 형주 관우군의 단독 북진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공성전을 할 여유까지는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공성전을 위해 형주의 수비 병력까지 차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오의 전면적인 형주 침공은, 아마도 촉으로 입성한 유비와 제갈량을 위시한 촉 내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았을 때, 관우의 ‘수비병력 차출’ 결정은, 결과적으로 그의 전략을 송두리째 망가트리는 결정적 오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관우가 아닌 촉의 어느 장군이든 관우의 입장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관우와 다른 결정을 내렸을까. 관우가 비록 말년에 자부심이 매우 높았지만, 삼국지 전편에 보이는 그의 모습을 고려할 때, 신중하고 사려 깊고 냉정한 모습이라고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또한 그는 신의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비에 대한 신의가 그랬고, 비록 오관육참장을 하며 조조의 곁을 떠났지만, 분명 공을 세우고 돌아가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아마 촉과 오의 동맹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낭만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비 병력을 차출할 때에도, 비록 형주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며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설마 위를 공격하는 촉의 뒤를 들이치는, 그야말로 ‘설마 대놓고 배신까지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동맹 역시 국가 대 국가의 신의로 간주했을 가능성 역시 농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는 형주을 차지하기 위해, 위를 공략 중이던 관우의 등 뒤에 칼을 꽂았다.


하지만 이런 어떠한 이유를 갖다 대더라도 결국 관우의 결정은, 형주 수비의 부실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고, 이는 오에게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목숨과 형주의 상실을 초래하게 된다.


분명 결과적으로 관우는 ‘명장’의 최고봉에 다다를 수 있는 갈림길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우를 단순히 용맹만 뽐내는 용장 혹은 맹장이라고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본래 213년 성도를 공략하던 유비와 방통이 촉을 성공적으로 점령해야 했으나 낙성에서 방통이 유시에 사망하고, 유비가 고립되자 형주의 주력군이 출병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먼저 출발한 황충, 위연 등은 물론 형주를 진수하던 제갈량을 위시하여, 장비, 조운 등 실질적으로 촉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의 대부분이 유비를 구원하고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촉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기서 참모의 부재를 우려한 제갈량이 '동화손권, 북거조조'라는 전략의 얼개를 관우에게 알려주고 떠난다.


위, 오와 모두 접경하고 있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에서, 촉의 주력군이 모두 성도로 향해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오의 급습 이전까지 형주 진수는 물론, 조조에게 천도를 고려하게 할 만큼 병력을 신장시켜, 북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던, 관우의 형주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그러한 관우가 치명적인 오판을 범해, 결과적으로 형주를 상실하는 것은 사실이고 인정한다. 하지만 당시 관우의 곁에는 흔히 말하는 참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촉의 주력 인물들은 모두 익주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다. 관우와 아이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우 혼자 형주에서 버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위의 조인, 서황 등을 비롯한 주력군과 사마의의 계책, 그리고 촉을 저버린 오에서는 여몽과 육손을 앞세운 전략과 전술이었다.


가정이지만 북진을 하던 과정에서 만약 관우 곁에 서서 또는 방통이나 제갈량과 같은, 전략적 판단을 해줄 수 있는 참모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형주를 내어주었을까? 아마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관우의 형주 상실은, 상대적으로 인재층이 엷던 촉의 내부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4. 인(仁)


또한 오의 형주 침공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던 부분에 대해서는, 강릉과 공안을 수비하던 미방과 부사인의 저항없는 무조건 항복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만약 강릉과 공안을 거점으로 이들이 농성을 벌였다면, 양양을 포위하던 관우군의 회귀와 더불어 백제성에 주둔하던 군대가 이동하고, 나아가 촉에서 장비 내지는 조운으로 하여금 구원군을 출병시켜, 충분히 오군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군도 더는 형주에서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위군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촉과 형주에서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면, 양쪽 모두 공멸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마도 잠재적 동맹을 깨고 침공한 오군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물러나 외교적으로 타결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관우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을 갖고 있던 미방과 부사인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고, 강릉과 공안을 비롯한 형주 남부 전역이 오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즉, 관우군이 회귀하고, 익주의 본대에서 구원군이 올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히 관우의 인덕 문제 혹은 휘하 장수 통솔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관우의 인덕과 통솔력을 논하기 이전에, 미방과 부사인의 신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미방은 유비를 초창기부터 수행했던 미축, 그리고 유비의 처인 미부인의 혈족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관우 역시 부사인은 차치하고서라도 미방의 항복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우는 오만하긴 하였지만 순수한 무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때문에 스스로의 기준에 맞춰 주변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고, 북진 전에 실수를 저지른 미방과 부사인에 대한 엄포도, 아마 다분히 경고성 멘트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리 절을 받은 관우라고 한들, 미축의 동생인 미방을 임의로 참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주의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오군에게 항복해버리고 마는, 미방과 부사인을 기용한 것이 관우의 실책이라면 실책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를 놓고, 관우의 리더쉽이나, 인을 논하는 것은 지나친 결과주의적 시각이라고 본다. 즉 선후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관우의 어조가 다소 강경하였다고 하더라도, 상명하복이 우선인 군 내부의 기강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공적인 꾸짖음을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우선 문제가 있는 것이다. 관우가 얼마나 그들을 경시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위에는 오만하여도 아랫사람은 아꼈다는 평가에 기준을 둔다면, 관우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분명 그들에게 우선적인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촉에 인재가 풍성하다면 아마도 관우의 기준에 맞는 인물로, 진작 보직 변경을 시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인해 초래한 결과를, 단지 지휘관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사적 원한으로 빚어진 감정적인 결과까지 더해서, 관우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 지나친 것이라고 본다. 


4. 관우는 명장인가?


세상에 완벽한 지휘관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관우 역시 완벽한 지휘관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북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오의 급습까지 막아냈다면 애초 이러한 논쟁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 관우의 상황에서는 한신의 배수진이나 한니발의 칸나이 전투와 같은 결과가 나오기 힘들었다. 오군의 급습으로 관우가 번성에서 군사를 되돌리는 순간, 조인과 서황이 추격하기 시작하고, 오는 이미 강릉과 공안을 손에 넣고, 관우의 형주군을 이탈시키며 관우의 도주로를 차단하였다.


관우가 설령 천하의 덕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병력이 대거 이탈해가는 상황에서 이 같은 위, 오의 협격을 막아내는 것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우 역시 곧바로 촉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대신, 상용의 유봉과 맹달에게 원군을 청하고 강릉 재탈환을 시도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형주 상실로 인해 관우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끝남과 동시에, 관우 자신의 한계로 작용하게 되는 요인이 되지만, 이는 관우가 북진을 너무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명장이란 나 홀로 명장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더욱이 대군을 이끄는 군의 최고 지휘자야 말로, 개인의 능력과 더불어 그를 받쳐주는 수하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더해질 때, 비로소 명장이 탄생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관우에게는 개인적 능력만으로 이끌던 군이 있을 뿐이었다.


관우는 결과적으로 북진도, 형주 진수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의 복잡한 전개 과정을 고려해보았을 때, 진행 과정 중에서도 눈에 띌만한 성공 요소 역시 모두 우연 혹은 평범함으로 치부하고, 실패한 결과로 인해 ‘명장의 지략’을 지니지 못한 맹장 혹은 용장으로 결론지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부족한 글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덧-

 

필자 역시 이 글을 마치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관우는 명장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예'라고 대답하고 싶어질만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형주에서 외로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결국 홀로 산화했다.

 

그가 명장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당시 상대했던 전략가인 사마의, 또는 여몽이나 육손과 같은 '전략'이었다면 당연히 그는 명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결과적으로 형주 진수에 실패하였더라도, 홀로 상대했던 양국가의 전략가들이 그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 논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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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좀 섬뜩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근에 여기 Daum 뉴스란을 비롯하여..툭하면 사회란에 나오는 이야기 또한 '自殺'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오늘 교양 수업이었던 '가치와 행위' 시간에 바로 이 '자살'에 대한 나름대로 진지한 토론이 오갔다.

대전제는 '자살은 惡인가?'

물론 나는 직접 그 토론에 참여하지는 않고, 일종의 방청객(?) 역할을 자임했을 뿐이지만..

자살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행위자 주체가 자신의 죽음을 초래할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라틴어의 sui(자기자신)과 Caedo(죽이다)의 합성어이며, 영어로는 suicide라고 한다. 위의 것은 단지 사전적 의미이다. 자살은 저렇게 3문장으로 끝내버릴 정도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최근 우리 나라의 통계를 살펴보면 2002년 기준, 13,055명(하루36명)으로 93년에 비해 2배나 증가한 수치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O.E.C.D 국가중에서는 자살률 4위를 랭크하고 있으며, 자살 증가율 역시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물론 자살의 이유는 매우 여러가지가 복합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이같은 수치는 최근 사회난을 반영한 결과로 I.M.F로 시작된 이태백, 사오정, 오륙도 등의 웃지못할 단어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이러한 것은 자살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타일 뿐이다. 자살은 단지 이러한 조건이 객관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환경, 개인적 성향, 심리적 상태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결과가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문제는, 이러한 '자살'을 한 이에게 무조건적인 비난을 가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살과 관련된 인터넷 뉴스의 댓글을 보면 명복을 비는 내용도 있지만, 막무가내로 비난하는 글을 올리는 이들도 상당수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누구도 그 당사자의 '자살'을 비난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가정 주부가 갓난 아이들까지 죽음으로 이끈 것은 도덕과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3자가 '무조건적'인 비난을 하는 것도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대부분 자살을 비난하는 자들의 주된 논리는 '생명의 가치의 경시' '이기적인 태도에 의한 결과'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선택' '종교적 관점에서의 惡'등의 논리를 들고 있는데, '자살'은 이런 논리적인 근거로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3자의 판단에 의한 비난이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

'자살'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스스로 거두는 것이다. 그럼 왜 그렇게 소중하다는 생명을 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멀쩡하게 살아있고 또 죽을 아무런 생각도 가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만 했던 그네들의 즉, 당사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수능 첫 교시를 보고 비관한 여고생이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 그럼 일반적인 우리의 반응은, '시험은 못볼 수도 있지.' '재수해도 되잖아' '공부가 전부인가?' '미련한 짓이다.' 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러한 일을 행한 당사자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목숨을 포기할만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다양성의 범주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시험을 못봐도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극소수이지만 목숨을 버리는 이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실직자가 삶을 비관해 지하철에 투신하는 것이나 애인과 헤어진 뒤의 자살, 생활고를 비관한 주부의 자살등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 아산 회장이었던 정몽헌 회장이나, 98년이던가 당시의 조선대 총장, 그리고 엇그제 한강에 투신한 남사장 등은 약간은 다른 유형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르지 않다. 일반인 관점에서는 그들이 자살을 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단지 왜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고 안타까워하거나, 미련하다고 조소하고 만다.

저 위 3사람 같은 경우는 명예라는 것을 더 소중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 더 이상의 삶에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위의 3사람의 공통점은 비리나 사건에 연루되어 검찰이나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러한 것들이, 그간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들의 자존심 또는 명예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남은 삶보다 더 큰 가치를 지녔던 것이었고, 그것이 무너진 상황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으며, 결국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사람들은 많고 다양하다. 당연하 삶의 가치가 각기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숨쉬고, 밥먹고 무언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는 자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무언가 이뤄야 할 목적이 있어서 살아가는 사람 등.. 다양하다.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그러한 육체적 삶 이상의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살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결정한 문제이다.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 3자가 끼어들어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지만 사회적 여건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게 된 사람들이라면, 그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여 그네들의 생각을 좀 더 긍정적으로 유도할 수는 있다고 본다. 수능이나 직장 또는 경제적 여건등의 사회적 환경 때문에 목숨을 포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일부분 그가 속한 사회와 국가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회적인 요소 이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나 일신상의 이유때문에, 자살을 택한 자는..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스스로가 자살 이외의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보면, 우리 사회에 사회적 여건 때문에, 극단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선택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 자살을 택하게끔 선택하는 판단에 있어 그 여건을 최소화 해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도리라고 본다.

또한, 이들의 선택은 비록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고 단지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다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안락사와 같은 경우도 해당한다) 우리는 자살한 이를 잘못됐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해야만 했는지 그 원인을 알고 최소화시킨다면, 비슷한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들은 상당수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방법도, 자살이라는 개인의 결심을 막을 수 있는 완전한 장치는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결론은..

자살은 보편적인 생명 윤리의 가치로 보면 분명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당사자의 판단 근거는, 아무리 가까운 혈연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상 100% 알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으며, 개인적인 편차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적인 惡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을 무시하는 일방적인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 사회에서 한 사람의 '생명'에 대해 보편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 윤리적인 기준에서는 영원히 惡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PS : 다만 청소년 자살 같은 경우는 정말 죽으려는 생각보다는 고통을 회피할 일시적인 결정인 경우가 높으며, 보통 자살을 시도하기전 주변에게 뭔가 신호를 보낸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자살과는 약간 다른 패턴을 보인다는 통계가 있다. 때문에, 주변의 애정이나 도움으로 피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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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에 여기자를 성추행한 이른바 '최연희 사태'가 의외로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연희 본인은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강원도 모처에서 칩거 중이란다.


한나라당의 지도부도 최연희의 건강이 좋지 않은 만큼 사퇴를 촉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3.1절에 부적절한 골프를 쳤던 이해찬 총리는 무조건 사퇴를 해야 한다며 총공세에 나서던 모습은 간곳없고, 한나라당은 팔이 안으로 굽듯이 자기 식구의 성추행이라는 도덕적 범죄 행위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란, 그저 두 손 놓고서 최연희의 입만 바라보며 신세 한탄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보다.


또한 최연희의 지역구인 동해, 삼척시의 일부(일부인지 다수인지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단체들은 최연희가 능력 있는 의원이라며 우발적인 실수 한번으로 사퇴하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라며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2006년의 현 정치권 모습이며, 지극히 일부라지만 국민들의 정치 인식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문득 이 사태의 추이 과정을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얼마 전 Holiday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던, 88년도의 탈주 사건 당시 탈주자들이 부르짖었던 그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언은, 그로부터 20여년 가까이 지난 현재의 대한민국의 사회에서도 변함없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최연희가 취중에 여기자에게 했던 성추행은 성폭력범죄 처벌법 위반 혐의로 10년 이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구속사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보여지는 작태는 어떠한가.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 위에 국회의원은 군림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정황이 밝혀지고 본인 스스로도 '음식점 주인인 줄 알았다'며 행위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일부 단체장들의 '취중에 있었던 일이고,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논리로 옹호하기까지 하는, 지금 현재 벌어지는 우습지도 않은 이 유치한 모습은 무엇인가. 더욱이 일부 지역구민 및 단체들의 상식 이하의 구명 운동으로 최연희는 국회의원직의 사퇴 요구를 거부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는데, 정말이지 대한민국이 보여주고 있는 현재 정치 수준은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최연희를 구명하자는 30여개 안팎의 동해시의 단체들은 이번 사건을 접근하는 그 자세부터가 상식선을 완전 벗어나 있다. 최연희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어떤 경력을 지니고, 그동안 국회의원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여 지역구민들에게 정치,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는지의 여부는 지금 이 시점에서 논하거나 고려할 사항이 전혀 아니다.


그는 분명 성추행범이고, 현행범으로 구속할 수 있는 사유를 지닌 사람이다. 더욱이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도 현행범이 아닐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지금의 그에게는 법적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가 과거에 삶을 어떻게 살아왔든 지금 그는 죄를 지었고, 그 행동에 대해 법으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국민들의 단죄가 법을 대신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또는 한 번의 실수로 사퇴시키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라며 그의 죄를 무마하고 살리려하는 이들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혹시 그 대가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 하는 것은 아닌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기만 하다.


아무리 유능한 인물이라도 특히 도덕성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보이면, 이미 사회적 지도자의 자격을 이미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최근에 성관련 범죄가 예전보다도 더 많은 횟수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만큼 사회적 기강이 전반적으로 해이해져 있는 상태에서, 국민의 대표로 모범을 보여야 할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그러한 범죄적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처벌을 요구하지는 못할망정, 일부 몰상식한 지역구민 스스로가 그의 행위에 대해 옹호를 한다면, 그로 인해 차후에 유사한 사태가 또 벌어진다면 그때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십팔사략에서 보면 이러한 말이 나온다. '위에 선 사람이 그 자리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 재앙은 백성에게 미치는 것이다.' 이는 먼 과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현재에도 그리고 정치가 있는 곳이라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대명제인 것이다.


작금에 흘러가는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만 지금이라도 동해, 삼척 지역의 일부 지역구민들과 단체들은 구명 운동을 즉각 철회하고, 국민의 대다수(약80%)가 사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최연희는 의원직을 스스로 내놓고 검찰로 찾아가 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결자해지의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손수 최연희를 선택했던 지역구민을 비롯한 국민의 뜻을 더럽히지 않는 행동이 될 것이며, 그 스스로의 실추된 명예도 더이상 추락시키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성추행이나 부정부패 등을 비롯한 온갖 정치적인 위법행위에 대해, 국민 스스로가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국민소환제도'가 이를 거울삼아 논의 및 장기적으로는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번 여야 일부 의원들이 '국민소환제'를 추진하는 것은 진심으로 환영할만 하다.


물론 이 제도가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이, 지금의 지역구도와 당리당략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정언유착과 언론에 의해 여론이 상당부분 좌지우지되는 경향. 즉, 언론 플레이에서 탈피하는 등의 정치에 대한 국민의 의식과 사고방식이 전반적으로 높아져야 그 본래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지금의 수준에서 머무를 수만은 없지 않나 싶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한 만큼 임기 동안에 대표로써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잘 수행하는지 지켜볼 권리 역시 국민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임기 동안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면 다음 선거 때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임기 중에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대한 실수나 범법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당연히 그 지위를 박탈하는 것 역시 선출했던 국민이 가져야 할 권리이자 의무가 아닐까.


이번 최연희 사태의 진행과정을 보면서 이르든 늦든 '국민소환제'는 필요한 제도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아직도 한국의 정치 수준과 (일부라지만) 국민의 정치의식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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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만평>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 치고
학력 수준이 낮은 사람은 정말 보기 힘든데
하는 짓들은 왜 초등교육도 받지 못한 것처럼 굴지?

최연희 사태는
의원 개개인의 자질의 수준 여부와 더불어
남성 우월주의 의식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아직도 정언유착이 여전히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대 정치의
치부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우울한 단면이 아니지 않을 수 없다.

시대는 21세기를 향해 치닫고 있는데
정치는 아직도 과거의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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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G 웰스의 1898년 작품인 '우주 전쟁'을 영화화한 작품.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인디펜던스 데이'정도의 액션을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감독은 스필버그였고, 배우는 톰 크루즈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초반에 뭔가를 보여줄 것처럼 시작했으나..액션은 더 나아가질 못했다.

인디펜던스 데이와 같은 미국 중심의 영웅주의는 이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외계인의 침공이라는 절박함 속에서 한 가정을 죽음으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한 평범한 가장의 死鬪가 영화 전편에 걸쳐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기대했던 것과 포인트는 달랐지만 색다른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대략 이 소설을 어렸을 때 여러차례 읽었던지라 그 줄거리를 기억해내며 비교하면서 보는 맛이 있었다. (대부분은 거의 흡사하게 진행된다.)

때문에 전투신에서는 다소 엉뚱한 '소설 속에서는 20세기 초반의 무기로 대항했지만 21세기 최첨단 무기라면 전투의 양상이 약간 달라지지 않을까?'든가 하는 생각.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아직은 역시 안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쳇 -_- )

물론 소설의 틀을 벗어날 수 없기에 결과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쉴드때문에. 혹시 프로토스?)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결말(네타?)까지도.

영화 전편의 전개 과정은 정통 S.F 액션이라기 보다는 스릴러 스타일에 가까웠다는 생각이다.

이 영화 보니까..어렸을 때 이불 뒤집어 쓰고 가슴 졸이며 보던 계몽사에서 출판했던 '우주 전쟁'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P (좀 으스스하게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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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스의 담요 - Walk



간만에 본 영화였던가. 시험이 아직도 2개나 남았건만..

여튼..

-연애의 목적-

뭐 연인이 보기에는 좀 과하다(?)는 정도는 대강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막상 보게되니까. 이건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시작하더니.. 영화 내내 생각했었던 것처럼 아주 가벼운 로맨틱 코메디는 아닌 것도 같았고.. 근데 보기에 따라서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을 소지는 있어보이는듯 싶긴 했다.

막판의 반전아닌 반전에는 조금 황당하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직설적인 표현들이 난무한건 맞는데 그렇다고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솔직담백했다랄까.

본래 영화라는게 현실인 것 같으면서도 현실과는 다소 다른듯한 전개로 관객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경향이 있는데..이건 연애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있으니..즉..사실 연애라고 하면 상당히 '긍정적인' 환상을 갖게 되는데..이 영화는 '그건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하긴 어차피 연애의 목적과 과정에 정답이 있을 수는 없겠지. (있나.)

당사자들에게 서로 가장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닌가. 라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결론을 나름대로 내려보면서..(근데 사실 결론부를 보면서 연애 잘못하면 패가망신한다. 는게 잠시나마 이 영화의 결론인 줄 알았다. -_-)

........

그나저나..둘 다 연기 능청스럽게 잘 한다.

박해일.
살인의 추억의 살기등등은 다 사라지고 능청스럽기 짝이없는 연기에 어딘가 최양락틱한.. 목소리까지..

강혜정.
보면 볼수록 뭔가 매력이 있는 것 같았다는. (물론 이쁘기도 하다.)
조승우와 참 잘 어울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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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後漢) 말의 무장(武將).

별칭  자 봉선(奉先)

국적  중국 후한(後漢)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주위안[九原]


자 봉선(奉先). 주위안[九原]현 출생.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병주자사(幷州刺使) 정원(丁原)을 따라 뤄양[洛陽]으로 가서 동탁(董卓)과 싸우다가 마침내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로 귀순, 그의 심복이 되어 장안(長安)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뒤 동탁이 그를 소외시키자, 192년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결탁하여 동탁을 살해하였다. 동탁의 부장 이각(李?)의 공격을 받아 장안을 빠져나와 난양[南陽]의 원술(袁術)에게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원소(袁紹)에게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원소가 죽이려 하자 이번에는 진류(陳留)의 장막(張邈)에게로 도피, 원주목(袁州牧)으로 임명되어 조조(曹操)와 싸웠지만 패하고 유비(劉備)에게로 도피하였다. 이어 원술을 공격하여 하비(下)를 점령, 스스로 쉬저우자사[徐州刺使]라 칭하였다. 곧이어 원술과 결탁하여 하비에서 유비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조조가 유비를 도와 그를 공격해와 조조에게 붙잡혀 죽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관우로 시작한 인물평이 조운까지 촉의 인물들 위주로 단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시대가 달라도, 여전히 단연 삼국지 최고의 무장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삼국지 초반부에 나름대로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1. 여포의 출신지?



최근에 삼국지연의에 관련된 책자들을 보면, 여포의 출신지를 가지고 갖가지 해석을 제기하고 있다.


여포의 출신지는 오원군 구원현으로 지금의 내몽고 지역의 바오터우(包豆)시 지역이다. 지도로 보면 장안 지역에서 정북 방향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지역으로, 당시에는 병주와 인접한 흉노족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지역 출신이 삼국지연의가 나관중에 의해 지어지는 시점인 원말기와 맞물리면서, 몽고지역 출신인 여포에 대한 혹평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삼국지 해제’와 김운회 교수의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여포에 대한 폄훼에 대한 이유로 상당히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 상에서 시랑(豺狼)과 같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여포가, 나관중의 중화주의 사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의는 삼국지연의 재해석이 붐을 이루고 있는 근래의 상황을 비추어봤을 때,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는 본다.


사실 여포는 연의 초반부에 동탁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악의 대명사로 그려지고 있다. 확실히 이러한 연의의 묘사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정사에서 보이는 여포에 대한 기록 역시 그다지 호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여포의 이런 묘사에 대한 모든 것이, 단지 나관중의 중화주의적인 성향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물론 여포의 출신이 한족과는 다르고, 사고방식 역시 한족과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가정해 본다면, 그의 행동 모두를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고는 하더라도, 상당부분 여포가 일반적인 상식 특히 유교적인 부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여포가 연의에서처럼 과장되게 악행만 저지는 무장은 아니었다고는 해도, 그의 당시 보여주고 있는 행적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그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볼 수 없는 여지를, 여포 그 자신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나관중은 여포의 그러한 행적을 바탕으로 좀 더 소설적인 덧칠을 그에게 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연의상의 反동탁 연합군 측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역사서는 패자에게는 상대적으로 가혹한 평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정사에서의 기록이 호의적이지 않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최근의 여포에 대한 나관중의 중화주의적인 폄훼설은, 연의에 대한 지나친 분석이 낳은 결과가 아닌가 싶다. 연의는 역사소설이지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 개인적인 견해로는 삼국지연의라는 역사소설을 역사적 사실에 맞춰 과도하게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물론 실제와 다른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어디까지나 역사서가 아닌 역사소설이다. 당연히 소설적 허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학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굳이 정사와 같은 사실과 비교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면, 삼국지연의라는 걸출한 작품이 빛이 바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것이 비록 연의에서 악평을 받는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2. 비장(飛將) 여포.



앞서 이야기 했듯이 여포의 출신지는 흉노족의 영역으로 병주 지역과 인접한 지역이었다. 또한 여포는 용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절륜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창술과 궁술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때문에 여포는 한무제 때의 명장 이광(李廣)에 대해 흉노족이 비장군(飛將軍)라고 부르던 것을 흉내 내어 스스로를 비장(飛將)이라고 칭했다.


여포가 변경의 이민족 출신임에도 발탁된 것을 보면, 단순히 걸출한 무예 기량뿐만이 아닌, 어쩌면 한족과의 혼열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여포는 이러한 무용을 바탕으로 삼국지 전편은 물론 중국 역사상 ‘최강‘의 자리를 논할 정도의 무장으로 군림하게 된다. 흉노족은 본래 유목민족으로 기마술은 한족에 비해 기본적으로 월등하게 능통해 있는 민족이다. 거기에 타고난 용력에 창술과 궁술까지 일류급이면, 이미 무장으로써 갖출 수 있는 기술은 모두 최고조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포에게 말 중의 말이라는 적토마가 더해졌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가 달린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에 그는 특히 화극이라는 무기를 잘 다루었는데, 화극은 찌르고 베기가 모두 가능한 무기이다. 이 무기와 얽힌 일화가 있는데 조운의 경우처럼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여포는 어렸을 적부터 무예 익히기를 좋아했는데, 이를 본 아버지가 그가 15세 되던 해에 종산(鍾山)에 있는 세공도인이라는 고수에게 수업을 받게끔 주선했다. 세공도인은 특히 화극의 사용에 있어서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세공도인에게 화극 72식 중 36식을 전수받은 시점에서 여포는 인간성 시험을 받았으나, 결국 실패하고 36식만을 전수 받은 채 하산하였는데, 그 36식만으로도 삼국지 최강의 무장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피소드 역시 여포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생겨난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여포는 호로관 전투에서 유,관,장 3형제와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게 되는데, 물론 이는 정사에는 없는 연의에서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연의 상에서 관우와 장비의 무력의 수준이 최상급으로 묘사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관우, 장비에 유비까지 상대하면서도 30여 합을 겨룬 것으로 그려지는 호로관 전투의 여포는 그야말로 나관중도 인정한 최강의 무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후 삼국지 사상 관우, 장비를 동시에 상대하는 무장은 여포를 제외하면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는 점이, 여포가 별 무리 없이 최강의 무장 지위를 차지하는데 가장 큰 단초를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호로관 전투 이후에도 여포는 원소에게 잠시 의탁했다가 곧 유랑군이 된다. 여기에 진궁이 합류하면서 조조의 배후를 급습하고, 유비의 서주를 탈취하면서 기반을 잡는 과정에서 조조군과의 숱한 충돌을 겪게 되는데, 여기에서도 여포의 절륜한 무력은 조조군에서의 주축 무장들과 칼을 맞대면서 또 한 번 실력을 과시하게 된다. 조조군 내에서 맹장에 속하는 하후돈, 허저 등을 수십 합내에 제압하고, 나중에는 조조의 명으로 1:6이라는 매우 불공평한 대결에서도 물론 패퇴하기는 하지만, 그의 무력은 6명을 동시에 상대했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빛을 발한다.


삼국지연의 전편에 걸쳐 여포처럼 일 대 다수로 일기토를 하는 경우는, 삼국지 후반부에 등장하는 조운의 한덕 부자 토벌전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여포의 상대가 다들 한창 때의 쟁쟁한 장수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운 역시 당시에 노장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여포 쪽의 수준이 좀 더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포의 걸출한 궁술 역시 연의에서는 빠뜨리지 않고 묘사를 하고 있다. 서주에 머무르는 당시, 유비군과 원술의 상장 기령이 이끄는 일군과의 대치를 중재하기 위해 여포는 화극의 가지를 맞추는 조건으로 양측의 화해를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여포의 제안을 양측은 각각의 속셈에 따라 승낙하게 되고, 호기롭게 술 한잔 걸친 여포는 100보나 떨어진 지점에서 화극의 잔가지. 즉 화극이 보일듯 말듯한 거리에서 월아를 맞춰버리고 만다. 당시의 활의 정확도가 지금의 양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궁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관중에 의해 후에 무신으로 추앙받게 되는 관우와 장판교에서 조조군의 추격을 단기로 막았던 장비를 동시에, 그리고 조조군 휘하에서 손꼽히는 무장들을 6명이나 상대하면서도 수 십합을 겨뤘던 점을 상기해본다면, 삼국지 사상 武에 있어서 으뜸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飛將 ‘여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주군을 두 번이나 바꾸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여포는 뛰어난 무용을 바탕으로 그 당시 출신지와 인접해 있던 당시 병주자사 정원의 눈에 띄어 발탁된 후, 십상시의 난을 거치면서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낙양의 집금오로 부임한 정원을 따라 수도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여포는 동탁의 눈에 띄어 적토마로 유혹하자 이에 넘어가, 정원을 살해하고 동탁측에 합류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부터 여포의 악행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 연의에서는 정원과 여포의 사이를 ‘부자지간’으로 얽매고 있지만, 기록 어디를 뒤져봐도 정원과 여포가 ‘부자의 의’를 맺었다는 사실은 없다. 이 부분은 확실히 나관중의 소설적인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둘 사이를 부자지간으로 엮게 되면, 통상적인 군신관계일 때보다 훨씬 여포의 행위는 유교적인 관점에서 정말 용납받기 힘든 패륜적인 행동이 된다. 그리고 나관중은 바로 그러한 효과를 노렸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동탁과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사이는 부자지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는 동탁이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지어진 것으로서, 그들이 부자 관계라고 하여도 도의적인 중요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여포가 동탁 진영에 합류하는 장면도, 난세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타 군주의 유능한 부하를 영입하려는 모습의 하나로, 그다지 보기 어려운 장면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손책이 태사자를 영입하려 하는 것과 동탁이 여포를 영입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하지만 손책은 태사자를 결투를 통해 남자다운 방법으로 영입한 것이고, 동탁은 여포를 적토마 등을 이용한 뇌물로 회유한 것으로, 방법상의 차이만 있는 것이다. 여포가 동탁에게 합류하면서 정원의 수급을 취한 것은, 동탁과 정원 사이의 정치적인 이해 충돌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여포를 비난하는 단지 윤리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한다면, 삼국지연의 상에 벌어지는 온갖 정치적 암투는 모두 여포가 했던 행위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된다.


단지 나관중은 여포의 행위에서 패륜적인 측면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상당부분 소설적 기질을 발휘했던 것이다.


여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동탁측에 합류하게 되고, 왕윤에 의한 초선의 ‘연환계’가 실행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의 동탁의 신변보호를 담당하면서 군신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여기서 초선이 등장하게 되는 ‘연환계’ 역시 나관중의 소설적인 허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탁과 여포의 군신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에, 바로 여자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나관중은 여기서 초선이라는 상상적 인물을 등장시켜, 연환계를 통해 그의 필치를 또 한 번 유감없이 펼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환계와 왕윤의 화술에 넘어가 결국 여포는 동탁을 다시 배신하게 된다. 물론 한조부흥의 기치를 내세우고는 있지만, 여포의 이후 행적을 감안한다면, 진정으로 한조부흥을 위해 동탁을 주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다만 여포는 초선과의 애정 묘사 등 연의 전반적으로 보면, 이민족 출신 치고는 상당히 미남축에 속한 듯 싶다.  그래서 '인걸 중에는 여포가 있고, 말 중에는 적토가 있다.'는 말 역시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최근에는 여포가 조운, 허저, 관우, 장비 등을 제치고 중국인이 뽑은 호남(豪男) 1순위에 들었던 것도 이같은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여포가 연의에서 전체적으로 악인으로 묘사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바로 주군을 두 번이나 주살하는 경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포가 주군을 바꾸게 되는 계기도 이른바 대의명분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사소하거나 보잘것없는 이유가 우선적이기 때문인 것도 그의 악평에 일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뇌물이나 여자에게 약한 그의 행동에, 당시의 절대적인 사회 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란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당연히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 해제’나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제기되는 여포의 출신문제. 즉 그가 정통 한족이 아니기 때문이었던 점도 고려되었을 법 하다.


연의에서는 이들 동탁과 여포는 반동탁 연합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이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당들로 묘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포와 동탁이 있었기에, 조조의 주도로 일어나는 반동탁 연합군의 결성도 호기롭게 보였고, 그와 대적하는 유,관,장 3형제도 호로관 전투를 통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포에 대한 연의의 악인 묘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중국인의 중화주의 사상이니, 국수주의니 하며 너무 부정적으로 볼 필요만은 없을 듯하다. 물론 여포 본인은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4. 진궁과 함께 천하를 논하다?



여포는 여자문제로 갈등을 겪은 동탁을 암살한 뒤, 낙양을 벗어나 장연을 토벌하던 원소를 도왔으나, 오히려 자신을 암살하려던 속 좁은 원소에게서 벗어나 다시금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연주의 조조가 보수설한의 기치를 내세우며 서주 원정을 떠난 사이에, 진류태수를 맡고 있던 장막과 진궁이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추대하여 드디어 여포는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천하를 논하는 주군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과연 여포 자신이 천하를 논하려 했는가에 대해서는, 필자는 다소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진궁이 서주 대학살을 핑계 삼아 여포에게 추대한 이유는, 여포를 전면에 내세워 천하를 노려보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처음에는 조조의 의기를 높이 사 그에게 가담하였지만, 여백사 사건(물론 정사에는 없는 것으로 조조를 악인으로 만들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 보는 편이 옳다.)이나 서주 대학살 등을 겪으면서 조조에 대한 인간적인 비정함과 더불어, 조조의 능력을 고려해 봤을 때 진궁 자신이 조조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못됨을 알게 된 것도, 진궁이 여포를 추대한 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여포와 결탁 이후의 행보를 보았을 때도, 분명 천하의 싸움꾼 여포를 내세워 천하를 쥐어보려는 욕심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즉 황제는 여포가 되고, 자신은 여포 밑의 승상이 되어 천하의 정사를 좌우하는 그러한 구도를 그리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군사는 여포, 정사는 진궁. 이러한 구도.


여포도 자신의 처지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진궁의 추대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여포는 이러한 제안에 대해 분명 그 의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덥석 받아들였을 것임은, 그의 그간의 행적을 보았을 때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궁은 주군을 조조가 아닌 여포로 택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당시 주변 지역 정세를 보면, 북으로는 원소, 서로는 조조, 남으로는 원술과 손책 등의 세력이 할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서주를 기반으로 천하를 노리기에는 여포군의 세나 인재, 여러 면에서 아무래도 가장 뒤처지고 조건 또한 불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유비가 서주를 근거로 자립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고의적으로 여포에게 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궁이 여포를 추대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진궁은 결국 여포를 천하의 주인으로 만드는데 실패했고, 결국 조조에게 사로잡혀 천하를 꿈꾸던 야심가답게 최후에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죽게 된다.



5. 배신으로 생애를 마감하다.



앞서 이야기 했던, 진궁은 죽음 앞에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 진궁이 주군으로 추대했던 여포는 다르다. 여포는 이 와중에서도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와 버금가는 무용을 지니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여타 무장들의 마지막 ‘산화’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포는 하비성에서 조조에 의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모사인 진궁의 진언을 채택하기 보다는 부인의 말에 더 의지하는 등 군주로서의 모습으로는 매우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주령에 대해서도 그의 융통성 없는 판단으로 결국 수하 장수들의 배신을 초래하게 된다.


이렇게 말년의 모습을 비롯하여 삼국지연의에서 전반적으로 그려지는 모습들을 종합해 보면, 여포가 상당히 단순하고 귀가 엷은 인물임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즉 군주감으로서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반증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조조에게 사로잡힌 여포는 형장에서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여기에서 유비는 이상하리만큼 단호하게 여포의 구명요청을 묵살해버리고 만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이야기를 조조에게 한다.


이처럼 유비가 하비성에서 조조에게 잡힌 여포를 죽이라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조조가 여포를 제어하기에 충분한 그릇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유비가 서주에 머무는 동안 여러 번 여포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여포 또한 유비를 배신했지만 그의 가족을 손대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유비가 조조에게 여포의 목숨을 간청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결국 유비는 사사로운 정보다 유비 자신이 품고 있던 대의를 위해서 미리 걸림돌을 제거하려한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즉 여포라는 희대의 맹장이 조조군에 합류하는 사태만큼, 조조를 최대, 최후의 양립할 수 없는 적(한조 부흥의 최대 걸림돌)으로 생각하는 유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의 이야기를 논외로 하더라도, 조조 입장에서는 기마대를 이끌며 야전에서 최강의 모습을 보여준 여포였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매번 주군을 배신하던 그의 불안정한 모습과 여포 밑에 있던 장료라는 여포에 버금가는 장수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굳이 충성이라는 측면에서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여포를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조조와 유비의 복합적인 이해관계와, 장료라는 유능한 무장, 그리고 이전의 여포 자신의 행적 등으로 인해, 여포가 그렇게 인재를 탐하던 조조의 눈에는 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삼국지 내에서는 물론, 나아가서는 중국 역사상 ‘최강’의 칭호를 논하는 무용을 지니고도, 한창 나이에 허무하게 교수형으로 생애를 마감 짓고 만다.



6. 글을 마치며...



여포에게 있어서 자신의 뛰어난 무력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이건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어쩌면 여포라는 무장은 그냥 싸움터를 전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았던 이민족 출신의 순진한 무인은 아니었을까. 정치가 됐든, 한족의 대의명분이 어떠하던지 간에 그런 머리 아픈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전장에서만이 자신의 의미를 찾았던 맹장.


삼국지연의에서는 비열하고 욕심 많고 파렴치하고 눈치 없이 악행만을 행하는, 무력은 최고이되 어딘가 모자란 듯한 무장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어쩌면 실제로는 그는 단지 순진하고 단순하며, 그저 싸움을 즐기는 본능에 충실한 무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포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고지식한 정원이나, 폭군으로 알려진 동탁 말고 처음부터 조조와 같은 ‘여포의 스타일을 능히 살려줄 수 있는 군주를 먼저 만났더라면.’ 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언제나 먼저 들게 된다.


그가 삼국지상에 수없이 등장하는 여느 평범한 무장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그의 놀라운 무용을 꿈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속절없이 스러져가버렸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여포가 군주를 잘 만났더라면, 난세에 그의 엄청난 무력을 마음껏 과시하며, 지금 우리가 보는 그러한 삶이 아닌 멋진 무장으로써 한평생 살았을 가능성도 농후하기에, 아까운 점도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포가 한족이 아니었기에, 여타 비슷한 무력을 지닌 한족 무장과는 판이한 삶을 살게 되었고, 여포의 생애는 이민족이었던 그가 한족 사회에 뛰어들어 만들어진 필연적인 궤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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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별칭  자 자룡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상산


삼국지 전편에 걸쳐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만능형 무장으로 활약하는 유비의 4번째 형제와도 다름없는 조운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1. 상산의 조자룡.



조운은 하북지역 상산(常山)의 진정(眞定) 출신이다. 조운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조자룡’에서는 조운이 젊었을 때 말을 팔러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실제로도 말을 사고 파는 말장수였다는 설도 있다. 조운의 출신 지역인 상산은 분명 북방 유목민과는 근접한 지역이었으니,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이러한 조운도 언제나 전장에서는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장비가 ‘연인’을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는 것과 유사한데, 속을 좀 더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장비와는 사뭇 다른 이유가 있다.


조운의 아버지도 무사였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조운이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조운의 무예 실력을 향상시켜 주기 위해 상산에 있는 무예에 능한 사부를 소개시켜 주었다고 한다. 조운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상산으로 가 운산도사라고 불리는 사부를 만나 십팔반무예를 섭렵하고 특히 장창 72식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사부를 능가할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조운에게 사부는 운(雲)이라는 이름과 자룡(子龍)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조운은 하산한 뒤에도 사부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언제나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후세에 엮어진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삼국지 전편에 그려지는 조운의 무용(武勇)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들을 보면 그는 분명 젊은 날 무예 실력을 상당한 경지까지 단련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유비 관우 장비 그리고 조운.



사실 조운이 유비군에 합류하게 되는 과정은 관우, 장비와는 달리 조금 복잡하다.


본래 조운은 하북 지방의 최대 세력을 지니고 있던 원소군에 합류하지만, 의외로 발탁이 되지 못한다. 이는 조운의 실력보다는 원소의 출신 배경과 인재 기용 스타일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소는 사세삼공을 지낸 후한의 명문 중의 명문 가문이었다. 그리고 조운이 합류할 시점에는 하북에서 최대 세력을 구가하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당연히 원소 진영에는 소위 상류층의 수많은 인사들이 끈을 대기 위해 북적대고 있었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여기에 젊었을 때 너무 빈곤해서 타고 다니던 말을 팔아야할 정도였던 조운임을 감안해본다면,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소의 진영에서 고위직으로 쉽게 발탁되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야 할 정도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한 참에 원소의 하북 점령 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원소를 떠나 그와 맞서던 공손찬에게 가던 중 문추에게 쫓기던 그의 목숨을 구해주게 된다. 이 장면에서 조운은 홍안의 소년 장수로 그려지는데, 사실 조운의 나이(158-229) 역시 촉의 장수인 요화만큼이나 가늠하기가 힘든 상태이다. 기록에 의거한 나이로 보면 조운은 유비는 물론 관우, 장비보다도 나이가 많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나관중의 고의적인 의도인지는 몰라도 3형제보다 훨씬 어린 소년 장수로 그려지게 된다. 이후 4번째 형제와 다름없는 활약을 펼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면 아무래도 3형제보다 나이가 어린 편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부분에서 유비와 조운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고, 이때의 만남은 후에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한 이후 유비를 찾아 나서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고 있다. 연의에서는 당시 조운은 유비와 만나보고 공손찬 대신 곧바로 유비에게 신종(臣從)하려고 하지만 유비는 이를 만류하고 일단은 공손찬에게 합류하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곧바로 유비에게 합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공손찬 패망 후 여남에서 재회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3형제와의 극적인 만남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후 조운은 유비 관우 장비에 이은 4번째 형제와 같은 모습으로 활약하게 된다.



3. 유비군에서의 경호실장 조운.



사실 유비와 한 침상을 사용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조운은 실제로 기록에서 보이는 직위를 보면 촉이 건국된 이후 관우, 장비는 물론 조운보다도 뒤늦게 합류하는, 소위 ‘오호 장군’에 속하는 황충, 마초, 심지어는 위연보다도 장군직이 낮다. 이러한 정사와 연의의 괴리는 물론 연의의 작가인 나관중의 ‘촉한 정통론’에 의해 힘입은 바가 크다.


인물평을 하다보면 한 인물에 대해 정사와 연의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상당부분 보인다. 정사는 말 그대로 정통 역사서인 반면, 연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니 작가의 집필 방향에 의해 어느 정도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유비와 제갈량을 중심으로 한 촉의 인물들에게는 대체적으로 후하게 묘사를 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어쨌든, 조운은 유비군에 합류한 직후부터 거의 유비의 경호 담당을 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군의 주축을 이루는 일군의 장을 담당하였지만, 조운은 관우, 장비와는 달리 방랑군 상태의 유비의 신변 보호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야에 정착한 이래 유비를 호시탐탐 노린 형주 채모와의 만남에 동행, 그리고 적벽전 당시 퇴각하는 유비 가족의 경호를 담당했던 것, 적벽전 이후 주유의 계략에 의해 손부인과의 결혼식 참가 등등을 보면 의제인 관우, 장비보다도 유비의 곁에 더욱 그림자처럼 호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중에서 적벽전 초반부 당시에는, 장비의 당양 장판파에서의 조조의 추격병을 막아세운 것 이상으로, 조운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도 바로 유비 가족의 경호를 담당하면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조운은 퇴각하다가 헤어진 미부인과 아두를 되찾기 위해 조조군을 돌파해 들어가 결국 우물가에서 미부인과 아두를 찾지만, 미부인이 자결하자 아두만을 데리고 유비군을 향해 이동하기까지의 과정을 연의의 작가는 호로관에서의 여포와 유비 삼형제의 1:3 일기토 이후 최고로 멋들어지는 묘사를 했다. 10만명의 조조군이 에워싼 가운데, 홀로 분투하는 장면을 목격한 조조가 생포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결국 조운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게 만드는 명령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실 당시 조조의 추격군은 연의의 묘사처럼 10만 대군이 아닌, 경기병을 위주로 한 5000여명 안팎의 군사들이었다. 1/20로 줄어들었다고는 하더라도 아두를 품에 안은 조운이 홀로 돌파하기엔 수천여명의 병사 역시 엄청난 병력이었음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아수라장을 무사히 돌파해 나온 조운의 무용은, 연의의 묘사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타 호걸들에 비해 뒤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또 눈여겨볼 장면은 어렵사리 구출한 아두를 유비가 내던지며 조운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 보이는데, 유비는 그만큼 조운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적벽전을 거치며 유비군의 세력이 확장되자 그제야 조운도 일군의 장수로써 계양을 점령하고, 익주 점령전에 병력을 이끌고 가서 유비를 돕는 등의 일군의 장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비록 정식적인 직급은 타 장군들에 비해 다소 뒤떨어졌을지 몰라도, 유비의 신임만큼은 그의 직위와는 상관없이 변함이 없었다. 후에 관우 복수를 내세운 이릉전을 일으킬 때에도 조운은 유비에게 물러섬 없이 간언을 하였던 것도 이러한 관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고, 이릉전에 대패하고 백제성으로 도주하는 유비를 가장 먼저 구출하였던 이도 바로 조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병사 직전 제갈량과 함께 유비에게 후사를 부탁받은 인물 역시 조운이었던 것을 보면 유비가 조운을 얻고 나서 한 침상을 사용할 만큼 신뢰하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4. 이릉대전. 조운은 왜 배제되었던 것인가?



앞서 조운이 얼마만큼이나 유비에게 신뢰를 받았는가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런데 정작 관우의 복수를 위한 삼국지 역사상 3번째 대전(관도대전, 적벽대전에 이은)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릉대전에 왜 조운은 선봉을 담당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과연 연의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단지 유비가 강행하였던 이릉전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배제되었던 것일까.


이 부분은 단순히 유비, 조운과의 인간관계 이외에도 이릉대전이 갖는 성격에 대해서도 고려를 해야 한다. 이릉대전은 전면에 내세웠던 관우의 복수(물론 이것이 가장 큰 이유임은 틀림없다고 본다.)외에도 형주 탈환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즉, 제갈량이 구상하던 천하삼분지계, 그리고 나아가서 촉이 내세운 대의명분. 즉 한 왕실의 복귀를 위해서는 형주는 유비와 촉에게 있어서 전략적으로도 필수불가결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주 탈환과 더불어 한중 이북 지역인 양주, 옹주 지역으로 출병하는 동시 병진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필자 개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물론 촉의 병력으로 위, 오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릉대전 발발 직전의 분위기는 촉의 서슬퍼런 기세에 오는 완전히 눌려있었으며, 위는 애매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필자는 아마도 이릉대전에 유비와 제갈량이 다양한 전략을 수립해 놓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릉대전을 일패지도의 기세로 승리로 이끌어 최단기간에 형주지역을 회복한 다음 오와 화친을 맺고, 동시에 후방에서 대기하던 조운과 형주 진격군을 재편해 형주 북부로 한중과 촉에 남아있던 위연, 마초, 마대와 군수물자를 관리하던 제갈량이 본대를 이끌고 북진을 시도해서 옹주 양주는 물론 장안 지역까지 점령을 시도하는 이른바 ‘동시병진’을 기획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생각에 상당부분 현실적인 무리수가 엿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촉이 이러한 전략을 계획하고 이릉대전을 시작했는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 촉은 형주를 오의 배신으로 빼앗긴 뒤 삼국 중 최약체로 전락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당시에 남은 여력으로 유비 생전에 한 왕조 복귀를 추구하였다면 이릉대전은 그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마지막 전쟁이었던 것이다.


즉 기습적인 공격으로 형주와 옹주, 양주를 탈취해서 위와 결판을 내려하는 전략을 세우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촉을 대표하는 맹장들은 모두 남겨두고 관흥, 장포 등의 신출내기 장수들을 데리고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킨 것은 그만큼 오를 상대하여 형주를 회복할 자신감이 있었다는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겨둔 또 다른 온전한 전력으로 북진을 시도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위는 ‘촉의 북진’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위의 오판 가능성이 높을수록 촉의 이릉대전의 종결과 동시에 북진을 하는 도박 역시 성공 가능성 역시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가능성을 가진 촉의 ‘동시병진’의 전략은 이릉대전이 촉의 참패로 끝나면서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설령 계획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릉대전의 패배와 동시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조운이 백제성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이러한 원대한 촉의 전략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히 유비의 이릉대전을 만류했다고 해서, 또는 위의 공격을 막아내려는 수비가 중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만한 장수를 촉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대전에 선봉은 고사하고 본진으로도 데려가지 않았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러한 요소를 감안해 ‘동시병진’을 계획하였던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해보는 것이다.



5. 만능형 장수의 대표적인 인물. 조운.

 


삼국지연의 전편에 걸쳐 조운과 같은 다방면에 만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꼽으라면 위의 장료 정도가 조운과 유사한 궤적을 갖고 있긴 하지만, 오를 원정하던 조비를 대신해 전장에서 얻은 상처로 허무하게 사망하게 되는 말년의 모습을 감안해본다면, 조운은 한평생의 마무리까지도 그야말로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조운은 삼국지 전편에 등장하는 수많은 호걸들과도 비교해 보아도 어디하나 부족한 점이 없다. 무용은 관우, 장비에 뒤지지 않고, 일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 패배한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조운의 판단력은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유비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 그리고 여타 무장과는 달리 이릉대전을 만류하는 직언도 행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겸양지덕을 갖추고 있었다.


즉 관우의 자부심이나, 장비의 경솔함 또는 위연의 대인관계 등에서 보여주는 성격적 결함이 그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조운은 관우, 장비와 거의 동급인 촉의 개국 공신이며, 후주인 유선의 목숨을 구해준 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러한 위치를 내세운 적이 없으며, 자신보다도 훨씬 늦게 합류한 제갈량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갈량 또한 1차 북벌 당시 퇴각한 조운이 책임을 지고 장군직을 강등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또한 군수물자를 포상으로 분배하려고 하자 이를 만류하는 모습을 보여 제갈량은 조운을 더욱 공경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2차 북벌 직전에 조운이 병사하자 제갈량은 슬픔을 금치 못했고, 어렸을 적 조운 때문에 목숨을 부지한 후주 유선도 그의 죽음에 통곡하였다.


이처럼 조운은 평생에 걸쳐 잡음 없이 말 그대로 무장이지만 선비적인 기질을 지닌, 순수한 무인으로 살다간 것이다.



6. 글을 마치며...



최근에 촉한 정통론이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나관중에 의해 충의의 화신으로 그려지던 관우가 성격적 결함에 의해 예전보다 상당부분 저평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방면에서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겸양지덕을 갖춘 조운은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욱 추앙받는다고 한다.


사실 난세에서 조운과 같이 초지일관의 자세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더욱이 자신의 실력과 비례하여 갖추고 있던 그의 겸양지덕은 평생을 잡음 없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비록 관우, 장비에 가려져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그들에 뒤지지 않는 충성심과 용맹을 갖추고 있는 무장이었다. 또한 그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분수를 잘 지켰고, 공평무사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은 최대한 발휘하여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는 그야말로 뛰어난 장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그의 모습 때문에 유비는 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후사까지도 부탁하는 중임을 조운에게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군주의 입장에서는 조운과 같은 무장이야 말로 덕장, 지장에 용장의 풍모까지 갖춘, 즉 한마디로 완벽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 장비와 같은 일기당천의 맹장에다가 조운과 같은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무장까지 지닌 유비를, 특히나 무장을 우대하였던 조조가 부러워했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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