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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을 몰고올 미친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장관고시' 강행으로 대한민국 전역이 들끓고 있던 2008년 5월 29일. 국민과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그동안 '괴담' 취급을 하던 '수돗물 민영화'를 슬그머니 '수돗물 사유화'라는 같잖은 말장난을 쳐가며, 기어이 공공재의 하나인 '물'에 대한 '민영화'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간 내세운 공약 중의 하나인 '닥치고 민영화'의 컨셉은 비단 물 뿐만이 아니라 공기업부터 인터넷과 건강보험까지 국민의 삶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공공재들을 비효율과 적자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죄다 '이윤 추구'를 가장 우선시 하는 민간 기업에게 모두 팔아넘기겠다는 발상이다. 문제는 행정부의 수반으로 이득을 내야할 대상과 손해를 보더라도 보호해야 할 대상을 가리지 못한다는 것에서 더욱 심각하다.

아니나다를까. 정부는 이번 발표 역시 '민영화가 아닌 전문화'라고 강조하며 조삼모사식의 본질을 호도하는 단어로 국민을 무시하고 여론을 무마하려는 되먹지 않은 수를 쓰고 있다.

사실 참여정부에서도 이미 한번 추진하려다가 공공재의 성격이 매우 강한 '물'을 '아웃소싱'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관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유보된 정책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역시나 물에 대한 공공성보다는 효율성을 택했으며, 이는 결국 정부가 효율성을 핑계로 적자를 면피해보고자 하는 치졸한 방법일 뿐이다. 생활과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물의 민영화에 대한 경제적 부담은 결국 고스란히 '물'을 사용하는 소비자. 즉 국민에게 모두 되돌아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뿐이다.

미국 의료보험의 민영화를 다룬 'SICKO'에서도 수도 없이 나오지만 '민간 기업'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이윤의 극대화'이다. 그들이 적자를 보면서까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단연컨데 절대 없다. '물' 역시 '민영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이를 주관하는 기업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획득하려 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서비스 대상자인 국민에 대한 배려 따위 역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제시한 '물산업지원법'은 현행 '정부공기업법'과도 대치될 뿐더러 외국기업을 포함한 민간 기업들의 지분이 51%가 넘어가면 대주주가 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선택이나 대안이 없는 '물'에 대한 독점화는 얼마든지 진행될 수 있다. 또한 '민영화'로 인한 중앙정부의 재정지원 없이 '지자체'의 요금 결정권만으로 '독점화 된 민간 기업'이 관할하는 '물'에 대한 요금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네들의 발상 자체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이는 그네들이 그렇게 우선적으로 따지고 드는 '경제학적 논리'로 얼마나 당치도 않은 헛소리인지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들며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일일 평균 사용량인 285L를 1L에 500원이라는 생수 가격으로 환산하면 하루에만 170원에서 14만원으로 폭증하는 말도 안되는 가격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한달이 아니라 하루의 가격이란 말이다. 이는 결코 괴담이 아닌데도 정부는 그저 무조건적으로 부인하며 '민영화'의 전단계인 '사유화'를 버젓이 추진하면서도 대놓고 '하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이 얼마나 국민들을 우습게 보고 기만하는 가증스러운 행태인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4,800만명의 생명과 생활에 직결되는 '물'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복지 증진을 우선시해야 할 정부가 이딴식의 저급한 경제논리의 잣대를 들이대며, 일말의 사회적 논의도 없이 일방적이고도 대책없는 '민영화'로 도리어 국민의 목을 조르는 행태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책이며 어느 나라 국민을 위한 정부냔 말이다.

이명박 정부에게 무엇을 더 기대할 것인가. 소통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국민의 반발이 빗발치는데도 정작 그네들의 정책집행에 있어서는 안중에도 없다. 뭐라고 떠들든 결국은 지네들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있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무식한 일방통행이다. 애초에 CEO를 자처한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정부와 기업의 위상과 역할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보여준 이력이나 행보에서도 어느정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작금의 현실은 그에게 국가 운영의 철학과 비전 따위는 더더욱 결여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질도 갖추지 못한 자에 대하여 소수 언론은 대선 기간 내내 다양한 경로로 경고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항들를 끝끝내 외면하면서까지 가장 막대한 권력을 덜컥 쥐어준 대한민국의 지난 대선 결과는 그저 비극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에게 있어 더 큰 비극은 그러한 그가 5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취임한지 채 100일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각성하라”=밤 9시40분께 행진이 을지로2가를 지날 즈음, 인도에는 양복 차림의 천정배 민주당 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은 천 의원과의 일문일답.

-고시가 강행됐는데. 

=여야 문제가 있지만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분노를 해결했어야 했는데 이들을 거리로 나오게 하다니, 야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참담한 생각이 든다.

-민주당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은데.

=민주당이 성난 민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국민으로서는 당연한 질책이라고 생각한다.

천 의원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 옆을 지나는 시민들은 “민주당은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천 의원은 얼굴이 굳어진 채, 수행원들과 함께 인도로 사라졌다. 이를 본 정상x(30·대학원생)씨는 “천 의원의 행동이 좀 늦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의도로 나왔다고 해도 기회적인 처사라는 의심을 받을만 하다”고 꼬집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03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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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동기들과 함께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참가하다. 자유발언대 시간을 마치고 가두 행진을 하였는데 도중에 인도에서 천정배 의원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시민들과 함께 '민주당은 각성하라.'는 구호가 잇달아 터져나왔다. 그 근처를 지나던 나에게 한겨레 기자분이 다가와 그 인터뷰에 대한 소감을 묻기에 위와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즉 쇠고기 수입에 대한 정부 협상 내용에 대해 줄곧 이의를 제기하며 '재협상'을 요구했건만 17대 국회가 마감되는 그 순간까지 정부 제 1여당이었던 '통합 민주당'은 무엇을 했는가? 10대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부모가 자녀의 손을 잡고 촛불을 들며 거리로 그렇게 수 만명이 모여들 때까지 장관 해임안 건의를 한 것 이외의 대체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하였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마저 가결시키지도 못했다.)

공직에 있는 모두가 다 그렇겠지만 그 중 무엇보다도 국민의 민의를 제대로 헤아려 그를 정책 집행에 반영하는 것이 바로 입법부의 국회의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가 아니던가?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료는 물론이요. 현 정부의 여당인 한나라당 역시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제 1여당인 민주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벙어리마냥 청문회를 비롯하여 이번 사안에 대해 거의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천정배 의원의 인터뷰를 보고 시민들이 '민주당은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친 사실은, 단지 이명박 정부만이 답답한 것 뿐만 아니라, 국민과의 호흡을 함께하며 정부와 여당을 견제해야 할 야당 역시 국민과의 '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 벌어진 장관 고시도 막지 못했고, 뒤늦게 촛불 문화제의 가두 행진에서 언론과의 인터뷰를 하는 모습은, 설령 그가 단지 정치적 의도만이 아닌 어떤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분노한 국민들의 눈에는 그렇게 곧이 곧대로 비춰질 수만은 없는 시기라는 것이다.

오늘의 국민들의 반응이 서운하고 또 이번 촛불 문화제를 통해 전달하려는 국민들의 민의를 정말 헤아렸다면, 천정배 의원을 비롯한 통합 민주당은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진행하려 하는 다양한 사안들을 협조할 것은 협조하되, 그렇지 않은 사안 -지금의 쇠고기 협정과 같은 사안- 들에 대해서는 건전한 비판으로 확실하게 견제를 해야 할 것이다.

정치인의 정치활동에 있어서 국민들의 지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소통'이 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으로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상실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愚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억장이 무너진다. 대한민국이 뒤로 20년 이상 후퇴하고 있다. 씨바.

출처 : http://www.radio2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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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부터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촛불문화제와 경찰로 대변되는 공권력과의 충돌 내용을 시시각각 전해들으면서 울분이 터져나온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군부독재 시대나 금권 만능주의 시대나 한결같이 변함없는 언론은 커녕 쓰레기 같은 찌라시만도 못한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 언론들의 작태는 아니나다를까. 탁상에서 정권의 뒷구멍이나 빨아주면서 무책임하게 써갈겨대는 것을 버젓이 사설이랍시고 올려놨다.

이명박이 당선된 이후로 고소영라인을 제대로 타고 있는 조선과 중앙도 따라가지 못하는 정권 찬양일색의 나팔수인 동아일보의 사설을 보고 있자니 열통이 터져서 단락마다 조목조목 반박을 하려한다. 그들이 길지도 않는 이 사설란을 활용하여 얼마나 오만한 사고방식으로 국민들을 기만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사설]누구를 위해 “청와대로 쳐들어가자”고 하는가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8.05.25 22:58 | 최종수정 2008.05.26 01:26

[동아일보]
그제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는 광화문 일대 차로와 인도를 점거한 시위로 변질돼 새벽까지 계속됐다. 집회에 반정부 좌파세력이 본격 가담하고 수백 명이 청와대로 쳐들어가겠다며 경찰에 맞서 새벽까지 수도 한복판에서 불법 시위를 벌인 것은 '표현의 자유' 범위를 넘어서는 일탈이다. 과연 이들이 국민 건강을 염려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려고 거리에 나선 순수한 시민뿐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첫문단의 팩트를 언급하며 시작된 첫 줄의 마침표를 찍자마자 곧바로 냉전 반공 시절의 이데올로기적 수식어를 내뱉고 있다. 반정부? 좌파세력의 가담? 니가 직접 확인했어? 정부에서 또는 검.경에서 발표했어? 그들이 반정부 세력이고 좌파세력인지가 팩트냐고. 책임질 수 있느냔 말야. 확인되지도 않은 사안을 마치 사실인냥 단정지으며 곧바로 왜곡하고 호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부분에 대해 '당연하지. 뻔한거 아닌가'라고 조건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다면...당신은 그냥... 그래. 그렇게 살아라.

불법시위라고 규정하는데 현행 집시법상으로는 야간 집회는 불법이란다. 그러나 불법을 운운하기 전에 대체 왜 그들이 불법으로 규정된 사안을 어겨가면서까지 분노를 표출하는지 그 원인을 찾는게 선행되야 하는 것이 지극히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 아닌가? 대체 왜 그들이 그 시간까지 경찰과 대치하며 공권력과 마주하고서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알고 있느냔 말이다.

표현의 자유을 넘어선 일탈? 너는 이것이 단지 삶이 따분해서 그냥 즐기려고 하는 일탈같아 보이냐? 그들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나아가 이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이 어처구니없는 협상 아래 생명을 담보하지 못하는 쓰레기같은 음식 재료를 먹어야 하는 비극적인 미래를 막아보고자 나온 것을 모르겠니? 니가 이 땅에서 살아간다면 버러지만도 못한 니 목숨도 거기에 해당되고 있다는거 몰라?

공권력과의 충돌을 감수하고서도 기본권을 그리고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지켜줘야 할 정부가 도리어 그것을 스스로 내다버렸기에 그것을 바꿔보고자 그 자리를 지킨 그들을 '불순하다'고 생각하면 너 따위는 이딴 사설을 쓸 자격도 없어.



2일부터 시작해 서울에서 17번째로 열린 그제 저녁 촛불문화제는 그동안의 집회와는 양상이 판이했다.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조합원과 중등교육 자율화에 반대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교사, 대운하 반대단체 회원들이 가세했다. 집회가 진행되던 오후 9시경 일부 참가자가 "청와대로 쳐들어가자"고 외쳤고, 광우병국민대책회의 관계자가 이를 받아 "드디어 오늘 저희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청와대로 갑니다"라며 선동한 것이 집회의 성격을 바꾸었다. 특정 세력이 계획적으로 그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새벽까지 남아 있던 시위대는 경찰의 수십 차례에 걸친 해산 설득과 경고방송을 무시하고 불법 시위를 계속하다 경찰과 몸싸움 끝에 37명이 연행됐다.

그래. 이제 슬슬 니네들이 싫어하는 집단과 단체 이름을 대는구나. 그렇게 해서 이 집회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싶었겠지. 니가 언급하는 이 단체들의 이름만 봐도 반감을 갖는 애들이 아직도 이 대한민국에는 수없이 많으니까. 그리고 이들이 청와대로 이동한 것이 집회 자체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냐? 그렇게 집회를 개최하며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해도 국민들의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들은척만척 얼토당토 않은 '담화'를 발표하여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어디에 있냐?

그리고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혀놓은 주체가 누구냐구. 그게 바로 국민이야. 대한민국 헌법 1조에도 나와 있거든? 니네들은 촛불집회 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그래도 그들은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이고 헌법으로 보장된 집회 결사의 자유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 의사도 전달할 수 있고. 알아? 너같은 놈이 사설쓰는 쓰레기같은 언론이 언론 노릇을 못하니까 직접 나가서 스스로 뽑은 대통령에게 그 목소리를 전달하는 거야. 당신이 하고 있는 정책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바꾸라고.

그런데 그 청와대라는 깊은 곳에 앉아있는 그 사람이 말야. 들은 척도 안한단 말야. 아무리 목놓아 외쳐도 전혀 듣질 않는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어? 그 사람의 정책대로 가면 내 목숨이 위험한데. 너같으면 가만히 앉아서 시키는대로 하다가 죽겠냐? 다 아는 사실을 자꾸 기만하기만 하니. 직접 가서 전달할 수 밖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렇게 거리로 나와 움직일 때면 항상 역사의 물줄기는 바뀌었어. 청와대라고 절대적인 성역이 아니란 말야. 그 자리의 권력은 우리들이 위임한 것이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권력 행사를 과도하게 하거나 똑바로 사용하지 못하면 그것을 다시 회수할 권리 역시 국민들에게 있는거야.
4.19, 5.18, 6.29 다 그렇게 이뤄낸 것이거든. 몰라? 그렇다면 넌 좀 역사 공부 좀 해야겠다.

어제는 48개 대학 학생회로 구성된 '광우병대학생대책위원회'가 대학 식당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겠다며 나섰다. 일부 의사와 수의사들은 청와대 근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했다. 중고교생들도 참석한 어제 오후 청계광장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북한이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사용한 '역적'이란 용어까지 써가며 '이명박 타도'를 외쳤다.

그래. 이제야 팩트를 이야기 하네. 이것을 알면서도 넌 이 글을 쓰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상황 파악을 정확하게 하고 있으면서 넌 왜 글을 이 모양으로 쓰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넌 이 사실을 전혀 다른 아전인수격 결론을 내기 위해 쓴 것이겠지. 얼마나 슬픈 일이냐. 너도 꼴에는 대한민국 지식인 또는 언론인이랍시고 행세하겠지. 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도 없냐? 거울 보면서 반성 좀 해라.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크다 해도 취임 3개월밖에 안 됐고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닌 대통령에 대해 탄핵과 하야를 외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들의 행동은 이 정부를 흔드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다수 국민이 바라는 경제 살리기, 그리고 국정 및 민생 안정에는 도움이 될 리 없다.

미치겠네. 넌 위에서 팩트를 이야기 한 것을 단지 불안으로 판단하는거니? 그 미친 쇠고기를 내다파는 그 위대한 나라 미국의 FDA에서 직접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린거야. 니네가 그렇게 강조하는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불안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그리고 불법 행위가 아니다? 뭐 청와대 주인의 불법 행위는 이미 후보 시절에도 수도 없이 나왔고 실제로도 수 차례의 불법 행위가 폭로되었지만 대선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것을 무시했지. 자신의 호주머니를 조금이나마 더 채워줄 것으로 믿고 말이야. 그래. 결국 그 천박한 인식의 결과가 채 3개월도 안가서 모두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나타나고 있건만. (다 좋은데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건만 이런 부분을 애써 무시한 국민들도 조금은 다시한번 반성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명백히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사인을 하여 무엇보다도 국민의 생명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정부의 역할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명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협상을 주도한 죄. 이건 간접 살인 행위야. 아니 쇠고기를 빌미로 한 대국민 살인 교사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은 5년 뒤에 퇴임하면 그만이지만 그 사람이 수입한 고기를 먹은 국민들은 십수년에서 수십년 뒤에는 광우병에 걸려 죽게 되거든.


대한민국 CEO의 실체가 이렇다면 더 기대할 것이 뭐가 있니? 가장 합리적이고 이득이 될 결정을 내려야 할 CEO가 이토록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가져와서 대단한 공을 이룬 것처럼 국민. 즉 소비자를 기만하였다면 그 바보같은 CEO에게 뭘 더 기대하겠냐구.

다수 국민이 바라는 경제 살리기? 현 정부 들어선 뒤 경제 지표 좀 봐라.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그리고 너 말을 좀 이상하게 한다. 미친 쇠고기의 무대책 수입으로 국민에게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니가 말하는 민생을 흔든 장본인이 누구냐? 대체 그 일을 획책한 주체들이 누구냐고.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 몰래 그 쇠고기를 수입해 왔냐? 넌 이 글 쓰는 내내 선후관계와 인과관계는 전혀 무시한채 니가 내키는 대로 쓰는구나? 읽는 내내 느끼는 것이지만 참 이상한 애다. 넌.


하나부터 열까지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권력을 견제해야 할 언론이 국민들을 기만하고 오히려 권력 옹호에 눈이 빨개져 있으니까 국민들이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는거야. 알아? 너네들도 직무유기는 물론이고 현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범죄의 공범이야. 너네들도 이 정권과 함께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뤄야 할거야.

니네들이 이딴 글을 사설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는 행동만으로도 이미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거야. 그렇게 바보같이 여기며 기만하고 있는 국민들. 그들이 분노하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라구.
정치에는 여러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한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시키는 작용으로 전제하였을 때, 특히 사회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대립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주장을 최대한 반영하려는 활동을 정치의 본질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문국현의 정치 이념은 무엇인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적 신념은 대체 무엇인가?

지난 대선 그는 충분히 보수적 성향을 지녀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유한킴벌리의 사장이자 킴벌리 클라크의 동아시아 총괄사장이라는 능력있는 CEO임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운영하면서 보여줬던 일화들과 그리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사람 중심 진짜 경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등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진보 및 개혁적 성향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기존의 정치인들을 거리낌없이 비판하고 그들과의 차별성을 강하게 부각시키기에 이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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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같은 기치를 내세우며 진보 및 개혁 진형의 대안인물로 급부상했다.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한 당시 정동영 후보와 통합신당의 후보단일화를 거부한 채 끝까지 대선 레이스를 완주하여 그가 제시한 비전에 공감하는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의 지지를 받아 5.8%에 이르는 득표율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대선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18대 총선에서도 버겁다고 평가받던 은평구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재오를 무너뜨리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 나서의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창당했던 '창조한국당'의 지도부는 '대선비용'을 둘러싸고 문국현과의 갈등을 빚어내며 상당수의 인물들이 이탈해 나갔다. 대선을 위한 이합집산의 '정당'으로 비춰질 수 있는 일이었고 문국현 대표의 리더쉽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지만 그래도 일단 그의 지지자들은 '문국현을 믿어보자'는 약간은 무대책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다.

이후 곧바로 이어 치뤄진 18대 총선 결과 '창조한국당'은 고작 3석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비례대표의 '비리 공천'이라는 추문에 문국현 자신까지 휩싸이며 그가 기존에 내걸었던 정당 및 정치인과의 차별성은 거의 희석되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정당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인 2석을 간신히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내우외환의 결과 때문이었을까. 총선 결과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던 이회창 총재의 자유선진당과 덜컥 손을 잡아버렸다. 대선 때 그렇게 후보 통합을 하자던 통합신당과는 기존 정치 결과에 대한 '석고대죄'없이는 '단일화'는 절대 있을 수 없다고 강변하던 그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책연대를 통한 원내 교섭단체 구성이라는 제 딴에는 그럴싸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이유를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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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씨와 그가 이끄는 '자유선진당'은 예전의 '대선후보 정동영'과 '통합신당'보다 어떤 요구 조건 없이도 훨씬 더 자신의 파트너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게 그는 그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던 '진보'라는 이미지를 과감히 내던져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실체가 정치적 위기를 겪으면서 드러나게될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그를 지지했던 유권자들, 그리고 이번 18대 총선에서 다시 한번 그에게 표를 행사했던 지역 유권자들은 현재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과 취임 이후 두어달간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시멘트 지지율'을 바탕으로 150석 이상을 거머쥔 한나라당을 필두로, 대한민국의 지도부가 극도로 우측으로 경도되어가는 작금의 현실에서 그야말로 진보 및 개혁 진영의 새로운 기수로서 국민의 뜻과 열망과 목소리를 그대로 대변해 줄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 쉽게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들을 저버렸다. 이는 그의 진실된 모습이 드러난 것이거나 또는 그가 결국 정치를 모른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치를 위해 필요한 정치적 신념과 이념이 그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대선 기간 동안 비판했던 구태의연한 기존의 정치인들과 그 역시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그 스스로가 증명해버렸다.

이번 양당간의 합의를 통해 그가 이끄는 '창조한국당'의 이념적 정체성은 사실상 모호해져버렸으며, 이제 당이라고 부르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와 그의 정당이 내세운 이념과 정책을 보고 지지했던 지지자들 역시 자신들의 뜻과 전혀 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문국현의 모습을 보며 급속도로 이탈해갈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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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탄핵을 빌미로 과반의석을 확보하며 여당 프리미엄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기반 정당의 타파라는 한국 정치사상 유래가 없던 초당파적인 '대연정'을 제의했음에도 기존 지지자들의 무수한 이탈을 초래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다소 성급했던 '정치적 결단'에 비하면 이번 문국현의 '결단'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할 뿐이다.

무릇 자신이 정치인이라면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어떠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이 정치라는 과정을 통해 이상향을 창조해낼 것인지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한 비전에 동의하는 지지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여러 다른 생각들을 지닌 또 다른 정치인들과 때로는 대결구도를 형성하며 때로는 설득하고 합류시켜 정당한 철차를 통해 다수의 국민들의 지지와 동의를 받아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국현의 이번 행보는 자신이 내세웠던 정치적 신념을 저버렸고 대선때 그를 지지했던 130만여명의 유권자와 이번에 '여당 프리미엄'을 포기하면서까지 이재오 대신 그를 국회에 보내준 지역구민과 지지자들을 모두 기만한 꼴이 되었다.

정치적 기반이 없는 문국현에게 있어 가장 큰 자산은 그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그를 지지하는 지지층인데, 이번 결정으로 가장 중요한 그 두가지 모두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그 역시 사실상 '진보적' 정치인으로서의 미래를 스스로 걷어찬 셈이 됐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보수 정치계에서 정치 생명을 계속 연장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앞으로 어떠한 정치적 결과가 있을 지라도 그것은 결국 문국현 스스로의 '자업자득'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신념과 신뢰를 저버린치 이미 실패한 정치인이 되어가고 있는 그를 지난 대선과 이번 총선에서 지지했던 한 사람의 지지자로서 '그의 변절'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더 늦기 전에 그의 실체를 알게 되어 후련한 점도 있다.

이러한 일견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와 정치에 분포된 '진보 개혁적 정치 세력'은 근본적인 고민을 안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단지 인물에만 기대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추진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제는 '한 두 명의 진보적 성향의 인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진보와 개혁을 위한 사회 및 정치 발전'의 기치 아래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그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적 구조의 형성에 착수해야 할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길 희망한다.

여담이지만 그가 자신의 당선에 대한 당위성으로 내세웠던 홍보 문구였던 아일랜드의 메리 메컬리스 대통령의 성공담 중에서 이런 문구가 있었다. "그녀는 기존의 부패한 정치세력과 완전 단절하고 아일랜드 경제성장을 위해 박차를 가합니다. 저는 바로 문국현이 한국의 매컬리스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부패한 정치권과 아무런 연결점도 없기에 오히려 부패를 청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회창과 손잡은 이번 선택으로 한국의 매컬리스가 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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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911로 9.11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에 음모론을 제기했던 마이클 무어 감독이 다룬 의료보험 민영화.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시간이 되시면 SICKO를 한번 보시길 추천한다. ^^)

고수익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는 민간 기업이 과연 그들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고객들의 생명을 책임져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얼마나 순진한 생각일까. 보험 회사 역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하나의 기업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생명의 안전 보장을 목적으로 보험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지만 그들에겐 그저 한 명의 수입원일 따름이다. 고객이라고 하더라도 막상 회사의 이익에 손해를 입히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내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이처럼 막상 생명의 위급을 다툴 때 외면하는 보험이 과연 보험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버젓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나라가 바로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의료보험 민영화를 도입한 미국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SICKO에서는 그러한 자본주의 시장 논리로 점철된 미국의 의료보험 민영화가 얼마나 잘못된 정책인지를 캐나다와 유럽의 영국 및 프랑스의 사례와 비교하며 역설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제도의 도입과정과 왜 그것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가에 대한 미 정부와 정치권의 현실도 적나라하게 들춰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건강보험제도 역시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처럼 민영화로 전환된다면 대강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게 될 지는 SICKO에 소개되는 여러 사례들로도 충분히 경악스러울 정도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상황을 커버할 수 있는 극소수의 졸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이 그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생명까지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보장되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일반인들의 생명으로 일부 민영 보험회사와 그와 결탁한 전문의 및 정치세력이 기름진 배를 불리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민영화를 추진하겠다? 그것을 그저 용인하고 바라볼 것인가?

도대체 이명박씨가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지난 두어달 동안 끊임없이 터저나오는 온갖 추문들을 보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지지한 천만,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막지못하거나 방조한 남은 대한민국 국민들 역시 혹독하게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직접 체험을 해야 그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전에 깨달아 막을 수 있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면서도 그저 손놓고 바라만 본다면 이미 일이 터진 뒤에 후회해도 늦을 뿐이다. 정말이지 답이 안나오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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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협상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한 조건을 기반으로 최소한의 조건으로 가급적이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어내기 위해 최대한 마찰을 피하면서 논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한민국 정부는 이번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 연일 새롭게 터져나오는 의혹과 진실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 대한민국의 쇠고기 협상단은 과연 '협상'이라는 용어에 걸맞는 행동을 했는지조차 의심을 받는 상황이다.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아예 하지 않았다고 자인하는 셈이 되는 영문 오역은 물론이고, 믿도 끝도 없이 '미국이니 믿었다'라는 따위의 시시각각 변하는 변명을 듣고 있자면 대체 어느 나라에서 이 따위로 무능하게 협상을 한단 말인가. 마치 19세기 말 서세동점 시기에 망해가는 조선의 관료들이 서구 열강과 얼토당토 않은 조약들을 맺으며 내뱉던 말과도 같아 등골이 오싹할 뿐이다. 협상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발언들 뿐이다.

게다가 협상의 결과랍시고 하여 우리나라가 얻어낸 것이라고는, 정작 미국 내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신임 대한민국 대통령이 겨우 임기가 1년도 남지 않는 부시 미대통령의 카트를 몰아주며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 하나 뿐이니 말이다. 오죽하면 켐프 데이비드의 숙박료니 또는 굴욕외교의 조공이니라는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그는 과연 그 내용과 그 댓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그 협상의 타결을 주도했던 것일까.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수입하려는 미국산 쇠고기는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이래 먹어서는 안되는 부위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광우병 위험 물질(SRM)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30개월 이상 소의 뇌, 척수, 눈 부위 등 가축의 사료로도 사용을 금지하는 부위까지도 고스란히 제 돈을 주고 수입하겠다는 것은, 아무리 이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어린아이라고 할 지라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미친 짓이 아니고서야 무엇인가.

미국의 로이터 통신의 '미식품의약국, 모든 동물사료에 특정 쇠고기 부위 사용금지'(FDA bans certain cattle parts from all animal feed)이라는 기사의 댓글에는 이러한 한미간의 쇠고기 협상 결과에 대해 Mad Cow, Mad ROK, Mad President, Mad People, Mad Society 등을 연발하며 강하게 비난하기도 하였다.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난에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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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하는 첫 일성이 '도시의 노동자들도 질 좋은 고기를 값싸게 먹게 되었다.'니... 우리가 언제 쇠고기 못먹는다고 불평했던가.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싶다고 탄원을 내었던가. 아니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취임 직후 이렇게 일사천리로 처리해야 할 공약이었던가. 이토록 중요한 사안에 대해 사전에 국가적 차원의 논의 한번 이뤄지지 않은 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몰랐던 졸속 협상이었다.  

그러나 일부 양심있는 언론의 보도와 정치인들의 문제제기를 통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번 협상에 대한 진실과 그 위험성에 대해 알게 되었음에도, 계속되는 변명과 말바꾸기 그리고 '안전하다'는 거짓말로 일관하는 이 무능한 정부에 대해 국민들은 절망하였고, 광우병 쇠고기가 수입될 시 군부대의 장병과 함께 가장 먼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이 분노한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코 그들은 괴담이나 선동따위가 아니라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협상같지도 않는 협상 타결을 주도한 바로 이명박 대통령을 위시한 현 정부 각료가 저지른 멍청한 짓으로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냔 말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한 국가의 자주적 검역권을 내주고 국민의 건강과 생명 그리고 불신을 담보로 대체 이명박 정부는 이 협상으로 먹기는 커녕 내다 버릴 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쇠고기 외에 무엇을 얻었는지 알 수 없으니 더욱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지금이라도 아주 늦지는 않았다. 현재 미국 육류업체와 국내 쇠고기 유통업체간의 갈비와 부산물(광우병 위험물질 포함된)을 7:3 비율로 수입계약이 속속들이 체결되고 있고, 현재 한국의 정서상 이 부산물들은 도매업을 거쳐 소규모 식당을 중심으로 판매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이번 협상을 주도한 책임자들은 모두 거짓과 기만으로 국민의 생명권 위협한 자들이니 마땅히 법에 따라 처벌하고, 정부는 신속하게 새로운 협상단을 구성하여 미국과 쇠고기 수입에 대해 전면 재협상을 벌여 광우병 위험 물질이 국내로 유입될 수 없도록 철저히 막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민이 정부에게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해결하길 원하는 부분이며,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이유이며, 이명박 대통령 당신을 탄핵하자고 하는 가장 큰 원인이란 말이다.

이미 엎지른 물이 되었고 사후약방문 형식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노무현 정부의 뒷처리를 한다느니 협상 불가라느니 대통령부터 장관 및 공무원이 직접 솔선수범하여 먹는 것으로 안심시키겠다느니 발병하면 그 때 수입을 금지하겠느니 따위의 씨알도 안먹히는 발뺌과 말장난은 그만 늘어놓고 하루 빨리 재협상을 하길 바라는 바이다.

너네들을 지지하며 광우병을 한낮 괴담 취급하고 장관을 비롯한 공무원들도 1년간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모범을 보여한다고 강조하는 글을 연일 필사적으로 써갈겨대는 그 조.중.동도 구내식당에 '호주산 쇠고기만'을 취급한다는 문구를 빨간 글씨로 큼지막하게 붙여놓았으며, 도가니탕을 메뉴로 내놓으면 누구도 먹지 않는단 말이다. 작금의 현실을 부정하며 무능하고 한심함을 한참 넘어선 개병신같은 작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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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의 대선 결과를 보고 이제 시사란에 글을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소재들이 조만간 쏟아져 나오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저 기우였으면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이후 인사 검증을 거치면서 지독하게도 쏟아져 나왔던 후보자들의 부정, 비리 연루 의혹과 일국을 이끌어가는 부처의 수장답지 않은 전문지식 수준의 미달에 부처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경력과 엉뚱한 소리들까지 하는 작자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답답함을 넘어서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어쩌랴. 1000만이 넘는 국민들이 그러한 그룹을 선택했으니.

그나마 지난 10년간 중도 진보 성향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내린 그 이전 시절의 구태의연함을 상당부분 개혁하는 성과도 있었으나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 노회하게 정국을 운영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달리 노무현 전 대통령은 좀 더 직설적이면서도 탄핵 역풍을 거치면서 높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 개혁 부분에 있어서도 과감하게 시도를 하였음에도 결국 보수 야당과 수구 언론 등을 상대함에 있어서 굳이 표현하자면 '정치력'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면서 결국은 국민적 지지를 얻어내는데 실패함과 동시에 정국을 주도하는데 추진력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력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당연시 되었었던 그릇된 인식과 잘못된 관행들을 타파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국가를 운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갖은 반대와 불만 불평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한 개혁 요소들이 그 성과를 나타내기도 전에 이제 그러한 것들마저 모두 다시 과거로 회귀하려고 하니 참으로 기가막힐 따름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치. 사회적인 이슈들은 참으로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시 개방한 숭례문의 전소부터 비롯하여 내각 구성에 있어서의 '강부자', '고소영' 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신조어를 만들었던 인사 파문을 거쳐  형님 공천으로 인한 여당 내부의 분열, 자신들이 내걸었던 대운하 정책을 이슈화시키는 것은 정략적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무슨 어불성설인가.

또한 지난 10년간 2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을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했던 대북 접근을 전면 부정하며 남북 관계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가 하면 최근의 미국 방문을 통해 노무현 정부에서 광우병 등 요인들을 감안하여 제한적 수입을 하기로 했던 미국산 소의 수입에 대해 그 타당성과 장단점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무조건적인 전면 개방을 하고 와서 '우리도 이제 싸게 먹어야 하지 않겠냐'는 무슨 일개 장사치같은 이야기를 지껄어지를 않나.

그렇게 굴욕적인 외교를 하고나서 미국에서 오다가 들린 일본에서는 제멋대로 일본을 용서하겠다느니 마치 일국의 국왕인양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 생각들을 쏟아내는 이명박 대통령의 천박하기만 한 외교적 저자세와 역사관 그리고 경박스럽기 짝이 없는 언사는 참으로 가관일 따름이다.

7.4.7이라는 공약으로 7%의 경제성장에 임기 내 4만달러 소득 달성을 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그 경제전문가께서는 지난달에 경기가 침체하고 추락하고 있다면서 국장급이 언급하는 정도가 관례인 환율문제를 대통령이 직접 언급하면서 세계 각국의 금융 전문가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고, 인위적인 부양책은 쓰지 않겠다면서도 벌써부터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 추진에 골몰하고 있으며, 공산국가도 아닌 시장경제를 채택한 나라에서 대통령이 직접 생필품 54가지의 가격을 지키겠다면서 이렇게 세세하게 챙겨야 국민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를 선택하게 한 단 하나의 '경제'라는 것도 이미 그에게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반증하고 있질 않는가.

진중권 교수의 비판처럼 이명박 대통령을 위시한 집권층 그들에게 앞이라는 없는 듯 싶다. 도무지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다보며 정책을 집행하는 모습이 보이지가 않는다. 허구헌날 쏟아져 나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주먹구구식 60년대 독재 정권 시절의 국가 전체의 모든 사안을 통제하려는 듯한 모습까지 보이기도 한다.

지난 정부에 인터넷 상에서 유행했던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든가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노무현은 뭘 했나'라는 유행어는 아무리 대통령제라지만 그게 어찌 모두 대통령만의 잘못이겠는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이명박 정부는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사회적 이슈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된다. 지난해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위 '까던'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졌을까...

서구 유럽에서도 사용량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대운하를 추진하게 되면 일부 땅부자들은 더욱 부를 불리우겠지만 그 댓가로 대한민국의 국토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흉터를 남긴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이며, 지방균형발전 추진을 중지하고 다시 수도권 중심 개발정책으로 역시 일부 땅부자들만 주머니를 채우며 뉴타운 추진 등을 통해 가난한 서민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영역을 잃어가게 되고, 지역의 불균형을 더욱 심해질 것이며, 교육정책의 자율화를 통해 가진 자는 그로 인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할 것이며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더욱 가진 것이 줄어드는 양극화 현상이 극대화 될 것이고, 교육환경이 우열이 뚜렷해지면서 자녀를 안심하고 학교를 보낼 수는 있을까. 의료보험 민영화로 역시 돈 없는 서민들은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한채 죽어가게 될 것이며, 검역이라고는 하나도 되지 않은 온통 광우병 인자인 프레온으로 범벅이 된 쇠고기 수입으로 온갖 물품들은 오염이 될 것이며, 값비싼 한우를 살 능력이 없는 가정의 저녁 식탁에까지 올라오는 값싼 쇠고기는 결국 언젠가 뇌에 구멍을 내버리겠지.

대체 거진 한달 반만에 완성된 이러한 결과들을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바로 이들을 청와대와 내각으로 보내고 한나라당을 거대 여당으로 만들어준 그 국민들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의 뜻은 아닐지언정 헌법과 법률로 정한 규정에 의해 그들은 대한민국을 향후 5년 가까이 좌지우지 할 것이다. 대선과 총선이 모두 엇그제 끝나버린 마당에 그들을 정당한 절차로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5년간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작 한달하고도 절반 남짓 지났을 뿐이다.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도가 최고조로 높아야 할 정부 출범 100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인터넷에서는 국민의 직접 탄핵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가. 경제 하나만 살리면 그 나머지는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그 천박했던 의지의 결과가 이렇게 사회 곳곳의 도덕과 정의. 그리고 윤리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의 모습이?

당신은 지금의 대한민국에 만족하십니까?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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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2008년 The Mist와 함께 기대했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 Cloverfield는 공포물이라고 하기에는 괴수 영화에 가깝고 단지 그래픽에 기댄 괴수 출연물이라고 하기에는 그 촬영기법이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그 덕분인지 시종일관 스릴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영화에서 줄곧 사용되고 있는 촬영기법은 이미 10여년 전 저예산으로 제작하여 제작비 대비 초대박 흥행에 성공해서 'Micro Budjet(초저예산 영화)'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 공포 영화 'The Blair Witch Project'에서 처음 등장했던 'Hand Held' 기법인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영화에서 보듯 일반 영화의 촬영과는 달리 주인공이나 그 그룹의 인물 한명이 직접 캠코더와 같은 촬영장비로 아마추어적인 촬영을 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영상기록과도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블레어 위치의 긴장감과 공포 분위기도 정말 대단했다! 실제 있었다는 일이라는 소문이 워낙 난무해서..)

여하튼 이 촬영방식을 통해 영화가 의도적으로 제작된 것(인적인 촬영과 편집 과정을 거쳐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닌)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상황을 직접 관객에게 전달하게 되는 효과를 통해 극도의 현실성과 스토리 전개에 대한 일체감을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블레어 위치 같은 경우도 주인공들이 느끼는 공포심이 여과없이 스크린을 통해 직접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됨으로써 개봉 당시 매우 큰 파급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 클로버필드의 감독인 매튜 리브스 역시 영화 입문 계기가 그렇게 캠코더 촬영을 접하면서 시작하게 되었고 이 방식을 통해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하나의 희망사항 이었다고 하였다는데 결국 블레어 위치 못지 않은 긴박감과 현실감. 그리고 몰입성을 갖는 SF 스릴러물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영화는 맨하튼에서 해외로 떠나는 주인공의 송별 파티를 기념하기 위한 촬영에서 시작되어 또 다른 주인공인 거대 괴수가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진행과정이 담긴 필름을 공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촬영기법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핸드헬드인만큼 영화는 시종일관 포인트가 흔들리고 360도 540도를 넘나드는 종횡무진하는 1인칭 켐코더 시점은 현란한 어지러움을 자아내는데 그 아마추어적 촬영 사이사이로 배어드는 실루엣만 보이는 괴수의 출몰과 더불어 현실감과 긴장도는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 역시 도입부에서 어느정도 예견할 수 있지만 스토리의 개연성부터 시작하여 촬영기법까지 왜 그렇게 물고 늘어지며 형편없는 영화로 혹평을 하는지 그다지 쉽게 납득되지는 않지만, 이 영화가 의도하는 목적과 구성 요소 그리고 진행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한 편의 사실감 넘치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글쎄... 사람들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은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 자신도 그 현장 한복판에 내던져져 주인공 그룹 옆에서 함께 움직이고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영화 플레잉 타임 내내 정말 온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인데 그냥 어지럽다는둥 말도 안된다는 둥 결말이 어떻게 그렇게 나올 수 있냐는 둥의 불평은 내겐 그저 그들이 어떻게 영화를 봤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긴장감과 몰입도 그리고 현실성은 정말 어느 영화와도 쉽게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야말로 이 부분들에 있어서는 최고!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남자 주인공의 행적과 심정은 정말 절절할 정도로 공감이 갔다. 나 역시 그 상황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말은 안타깝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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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시려거든 일단 예고편을 한번 봐보시고 그러한 촬영기법에도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고 주인공 일행의 행동 궤적과 함께 1시간 이상을 몰입하실 수 있다고 생각되시면 플레이 버튼을 누르시길.
절대 관객을 실망시키진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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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사람이라는 인격체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미국식 슬래쉬 무비 스타일의 공포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공포라는 장르도 썩 달가워하진 않는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반으로 하는 오컬트 무비류라면 다소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어린시절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공포물이었던 '오멘' (이건 참 궁금해하면서도 무섭게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이나 '데스티네이션'이라던가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개연성이 떨어지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아졌다고 생각하지만) 하는 영화들은 그래도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난다.

헐리우드에서의 90년대말부터 유행적으로 번진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지구적 재난 영화의 장르가 상당히 유행하였는데 (아마겟돈이라던가 딥임팩트류 또는 코어나 더 데이 애프터 투머로우라든가)  최근에는 단순히 SF적 재난영화에서 벗어나 재난을 통한 인간 본연의 본성이나 트라우마적 공포를 조명하는 영화들이 잇달아 나와서 매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개인 여건상 영화관에서 볼 형편은 되지 못하는 바람에 개봉한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집에서 보게 되었다.

The Mist.

이 영화 역시 재난과 더불어 안개라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과 더불어 초자연적인 생명체의 등장이 유발하는 공포 앞에서 내면에 가려져 있던 인간들의 본성이 어떻게 발현이 되는가를 노골적으로 담아낸 한 편의 SF 공포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스토리는 유명한 소설 작가인 '스티븐 킹'의 동명 원작에 기반하였으나 원작에는 뚜렷한 결말이 없는 반면 영화의 결말은 감독의 의중이 반영된 그야말로 기막힌 반전으로 마무리되게 된다.

특히 인간 스스로가 유발한 초자연적인 재난 현상에 대해 밀폐된 공간에서의 오로지 살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욕망 앞에서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기심들이 표출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감독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다양한 배경을 중심으로 개성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무력함에서 비롯된 공포심의 해소를 위해 생겨난 '종교'가 그 본래의 종교적 가르침과는 달리, 막상 집단의 공포 앞에서 이기적인 욕망으로 일치된 군중심리를 바탕으로 '신의 뜻'이라는 명목 하에 얼마나 크게 왜곡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최고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신앙에 대한 믿음의 여부에 따라 이 부분의 평가는 상당히 다를 수 있겠지만 종교의 긍정적인 부분만큼이나 어두운 면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듯 싶다. 마치 중세 암흑기의 마녀사냥이 딱 그러했을법 하다.)

그리고 결말같지 않은 결말의 대반전을 통해 결국 감독은 시청자로 하여금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최선의 선택이 상황에 따라 최악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냉혹한 사실을 극명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이없다. 허탈하다는 평가도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러한 결말은 충격만큼이나 한번 더 생각을 해볼 여지를 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SF적 공포물이지만 다양한 시각효과만큼이나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한번 더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

PS : http://www.daisyent.co.kr/mist/sub01.html (더 궁금하신 분들은 이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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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3.assembly.go.kr/vod/jsp/common/mpView.do?cmd=mpView&mt=TWMA&osn=108&mc=10&ct1=13&ct2=142&ct3=19&no=8571&whole_view=0


날짜 : 1988-07-08 금요일
내용 :
사회,문화에관한질문 노무현의원


내용을 들어보면 사회 전방위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참으로 준열하게 국무위원들을 질타하고 있다.

무려 20여년 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으며 1987년 민주화 항쟁을 거쳐 직선제를 통과시키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큰 획을 그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12.12쿠데타의 주역이자 군사독재의 마지막 잔재였던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시점에서 여전히 사회의 곳곳에는 군사 독재의 흔적이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몰아붙이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뚝심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할 것이다.

또한 노무현 국회의원의 열변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노동자 층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가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었는가와 더불어 국가 권력의 횡포가 어느정도 수준이었는지에 대해 낱낱이 폭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선의원임에도 그가 어떠한 사상과 이념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음성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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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노무현 대통령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공공기관 기록관리의 혁신이 이뤄진 그 대표적인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e-知園 시스템이 어제 종료되었다.

e-知園 시스템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국정 수행 과정 중에 생산되는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관리하고 보존하려 했던 국정운영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행정의 투명성과 더불어 이렇게 관리한 기록을 국민들에게 중요도에 따라 순차적으로 적극 공개하여, 알 권리를 보장함은 물론이고 이렇게 생산된 기록을 청와대 기록관리시스템을 거쳐 대통령 기록관으로 이관 및 보존하여 후대에 역사적 가치를 지닌 지식의 전승을 이뤄내는 문화를 정착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만큼 노무현 대통령은 시스템 개발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며, 중간 점검도 수시로 보고받아 e-知園 시스템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도 대단하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상당히 복잡한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개발에 참여했던 어지간한 직원보다도 훨씬 잘 활용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이끌게 될 차기 정부에서는 이 시스템을 계속 이어받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언급함으로써, 이렇게 2002년 16대 인수위 시절부터 구상되어 2004년 ISP 사업 등을 통해 장기간의 개발 및 테스트 기간을 거쳐 비로소 자리를 잡았으며, 여러 공공기관에서의 업무 및 기록관리 시스템으로써의 모범을 보였던 e-知園 시스템은 우선 이렇게 일단락되게 되었다.

e-知園 과 같은 업무관리시스템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그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 성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정권의 성격이 바뀐다고 해서 사용 여부를 전면 재검토 한다는 것은 사실상 사용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는데, 이러한 행태는 시스템의 본질적 파악을 통한 대승적 차원에서의 결정이 아닌 왠지 여전히 근시안적이고 구태의연한 정략적 접근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일단 '사용하지 않지 않겠다.'는 식의 접근 방식은, 지난 정권의 공은 애써 무시하고 부정하면서도 과는 부각하여 대신 밑바닥부터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려 하는 역대 정권 교체과정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지나친 과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 17대 인수위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및 그 소속당에서도 역시 확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해방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연원에서 비롯된 소속된 집단의 헤게모니와 더불어 이데올로기적 이념과 지역당파를 중심으로 한 당리당략적이면서도, 지극히 좁은 자신만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재단하는 습성은 과감히 타파해야 한다. '정치'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국민의 신임을 받은 정치 집단이 모든 역량을 쏟아 국가의 부국을 이루고 강병을 유지하여 권력을 위임해준 국민들에게 물질과 정신적으로 행복감을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비록 추구하는 정치적 지향점과 방식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취해야 할 장점은 취하고 버려야 할 단점은 버리는 대승적이고도 열린 태도와 함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위한 거시적인 관점의 접근태도가 필요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필요 요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知園 시스템 사용여부에 대한 결정 과정을 바라보면, 난 여전히 답답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저 안타까울 따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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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智將' 강유.

연의 상에서의 강유의 등장은 자못 화려하다. 삼고초려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제갈공명은 적벽대전 이후로 줄곧 주유와 조조를 비롯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희대의 지략가로 그려지지만, 그러한 그를 1차 북벌에서 유일하게 군략으로 제동을 건 무장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훗날 제갈공명의 유지를 받들어 촉한의 북벌을 이끄는 강유이다. 정사에서는 그저 천수태수의 의심을 받아 기현으로 이동했다가 제갈량에게 갔다고만 서술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주랑' 주유도, '중원의 패자' 조조도, 그리고 '숙명의 라이벌'인 사마의도 공명을 상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물론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연의의 저자인 나관중의 특별한 배려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공명과도 결과적으로 패하긴 했지만 일시적이나마 막상막하로 멋들어진 지략대결을 보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훗날 공명의 유지를 이어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음은 물론 북벌을 이어 진행하는 주연으로 격상시켜 줄 수 있는 복선을 화려하게 깔아두었던 것이다. 과연 공명이 '천수의 기린아'라고 감탄할만 했다.

이러한 장면의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정사에서의 공명의 강유에 대한 평가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갈량이 유부장사(留府長史)장예 및 참군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강백약(姜伯約)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 및 계상 등의 사람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에서 최고의 인물입니다."

 또 말했다.
"반드시 먼저 중호보병(中虎步兵) 5,6천 명을 그에게 훈련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한왕실에 있으며, 재능은 일반 사람을 넘으므로 군사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 궁궐로 보내 군주를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촉서 강유전>

연의에서의 공명은 정말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간상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꼭 그러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인재를 가늠하는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약점들이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는데, 1차 북벌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인 가정 전투에서 지략은 갖추고 있었으나 실전경험이 전무한 마속을 기용한 점(공명의 입장에서 마속을 기용한 것은 타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인선으로 거론된다. 유비의 임종시 선견지명과 비교된 부분)이 가장 크게 작용했고, 그리고 촉한의 오호장 사후 촉군 최고의 맹장인 위연과의 내면적 갈등관계로 인한 공명 사후의 분열 과정도 공명의 약점으로 지적받았다. (물론 이 부분도 유비 사후를 전후한 촉한에서의 제갈량의 입지 변화와도 큰 연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 정사의 기록에서 보듯 적어도 '강유'에 대해서만큼은 공명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의 사후 유비-공명으로 이어지는 북벌을 통한 '한왕실 부흥'을 이어받아 죽는 그 순간까지 추구한 이가 바로 '강유'였기 때문이다.

2. 제갈공명과 강유. 그리고 북벌.

강유는 공명과의 지략대결을 통해 등장한 이래 그와의 인연은 필연적으로 길고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명 사후 그의 유지를 이어 북벌을 추진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유의 북벌이 마감됨과 거의 동시에 촉한이 무너졌다는 사실에서부터 논쟁은 촉발하게 된다. 공명의 북벌과는 달리 강유의 북벌에는 늘 '내정을 도외시했다.'는 꼬리표가 뒤따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는 촉한의 멸망의 원인과 강유의 북벌의 결과를 하나의 인과관계라는 동일선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 결과는 그를 등용한 주체이자 그에게 북벌의 유지를 심어준 공명의 북벌과도 비교될 여지도 제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왜 공명의 북벌은 비슷한 횟수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30여년을 더 지탱했지만, 강유의 북벌은 촉한의 멸망과 이어지게 되었을까. 이렇게 진행되었던 것은 단지 한 두가지의 원인이 아닌 당시 촉한 내외의 상황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강유의 북벌을 평함에 있어서 가장 큰 화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답을 구해보고자 한다.

* 제갈공명과 강유의 입지. 무엇이 달랐나.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두 사람이 진행한 북벌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변수라고 단언한다. 강유의 북벌에 있어서 촉한의 내부와 연결되는 모든 문제점들이 유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성에서 유비 사후 그의 탁고인 유선을 받들어 2대 황제로 모시고 승상으로서 촉의 국정과 군권을 총괄하며, 안으로는 내정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군을 이끌어 '한의 부흥'을 위한 북벌을 주도하는, 그야말로 촉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실질적인 리더가 바로 제갈공명이었다.

제갈공명은 무인이 아닌 문인이다. 촉한의 정치가이자 유비군의 군사적 참모이기도 하였다. 그는 유비의 신임을 바탕으로 스스로 관중, 악의에 비유하던 젊은 날 쌓아왔던 지식과 재능을 유비군에 합류한 후 마음껏 펼쳐 보여 융중대에서 유비와 논했다고 전해지는 천하삼분지계를 적벽대전을 거쳐 현실화시켰으며, 입촉 이후에는 익주의 내정을 총괄담당했고, 유비 사후를 전후하여 촉한의 오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걸출한 무장들 중 조운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이 사망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군권까지 확보하며,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인물이다.

유선이라는 황제가 있었지만 실상 그에게 있어 공명은 유비의 유언처럼 아버지와도 같은 어려우면서도 의지해야할 존재였으며, 촉한이라는 국가는 실상 유비의 입촉 이후부터 263년 멸망에 이르기까지 조조와의 한중공방전으로 시작하여 유비가 동정했던 이릉전을 비롯해 공명의 남만 정벌과 육출기산 그리고 강유의 7차례에 걸친 북벌 등 전쟁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늘 準전시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명은 국정운영과 군권을 동시에 쥔, 어찌보면 모든 전권을 극한까지 발휘할 수 있는 전시상황 하에서의 일인 독재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당시 왕조시대의 최고위인 '황제'를 꿈꾸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본래 정치란, 최고의 권력을 공인 -왕조시대라면 문무관료 및 지배계층의 지지, 민주주의 시대라면 국민의 지지- 을 통해 쥐려고 하는 활동이다. 정치기반이 약하거나 정치력이 부족한데도 힘과 야심이 있다면 쿠데타 등의 절차를 무시한 방법을 통해 권력을 탈취하기도 한다. 옆 국가였던 조위가 바로 그러했다. 왕조시대에서는 그렇게 권력을 독점한 인물에 의해 기존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적이 무수히 많았음에도, 그 두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공명은 단 한번도 그러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후세의 극찬을 받을만한 큰 그릇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유비 사후의 촉한에서 제갈공명의 위치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임종직전 유비가 평했던 것처럼 '조비의 10배'에 이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이릉대전 대패의 후유증을 수습해 손권의 동오와 다시금 동맹을 맺었으며, 형주 상실에서 비롯된 물자와 인구수 축소라는 국력 저하를 남정을 통해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굴복시켜 어느정도 후유증을 감쇄함으로써 비로소 다시금 북벌을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육출기산 전까지의 일련의 눈부신 재도약 준비 과정으로 말미암아 중국 사학계에서는 오늘날 촉한 정통론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공명의 병법에는 의문부호를 붙여도, 그의 정치력에 대해서만큼은 대다수가 '최고의 정치가 또는 재상'이라는 거의 일치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유는 이러한 제갈공명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비록 강유가 촉한에 귀순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공명의 측근으로,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유지를 이어받아 최전선에서 북벌을 이끌면서 훗날 대장군의 직위에까지 오르지만, 촉한에서의 공명의 입지와 강유의 입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일단 위에서 촉한으로 귀순한 장수였다. 정사를 보면 그 당시 강유가 위에서 어떤 입지를 확보한 인물도 아니었으며 그저 지방의 평범한 무장에 불과했다. 다만 인재가 부족한 촉한의 상황으로서는 공명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수하로 거두어 활용을 하였고, 강유는 마속과는 달리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을 하였던 것이다. 촉한 내부에서의 강유는 비록 공명의 신임을 얻었을지언정 유비가 공명을 얻던 상황과는 크게 다를 수 밖에 없었으며, 공명 자신도 군략은 전수해주었을지언정, 자신이 지녔던 권력 모두를 강유에게 온전히 인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설령 공명이 심정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이미 그럴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이미 국가체제가 확고해지는 시점에서 적국인 위나라의 출신이라는 점도, 그가 방랑군이었던 유비군에 합류한 공명과는 같은 출발선상에 있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강유는 기본적으로 무장이었다. 병법과 무예를 익히고 군을 통솔하는데는 뛰어난 기량을 지녔지만, 그는 공명처럼 국정 전반을 운영하는 능력까지는 지니지는 못했다. 그러한 점을 이미 간파한 공명은 자신이 임종할 즈음에 우선적으로 국정의 전반적인 총괄은 그 기량을 인정받은 장완과 비의 라인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자신의 군권의 후임으로는 위연 등이 아닌 강유를 내정하는 방식의 이원화를 택했던 것이다. 정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강유는 당시 오장원에 종군 중이던 여러 장수들 중에서 특히 양의, 비의와 함께 무장으로서는 독자적으로 공명의 유지를 받들게 됨으로써, 그에 대한 공명의 두터운 신임을 알 수 있다.

건흥12년 (234) 가을, 제갈량이 병이 심해지자, 은밀히 장사(長史) 양의(楊儀), 사마 비의(費褘) 호군 강유(羌維) 등과 자신이 죽은 후에 퇴군하는 방법을 만들어 주고, 위연에게 영을 내려 후방을 끊게 하고, 강유는 그 다음에 있게 하였다. 만약 위연이 혹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대가 바로 직접 출발토록 했다.
<정사 위연전>

건흥 12년(234)에 제갈량이 죽자, 강유는 성도로 돌아와 우감군 및 보한장군(輔漢將軍)이 되어 군사들을 통솔하고, 승진하여 평야후(平襄侯)로 봉해졌다.
연희 원년(238)에 대장군 장완을 따라 한중에 주둔했다. 장완이 대사마로 승진한 후, 강유는 사마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 한 군대를 인솔하여서쪽으로 침입했다.
(~중략~)

연희 19년(256) 봄에 강유는 원정에 앞서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하략~)
<정사 강유전>

강유는 성도로 되돌아가 우감군 및 보한장군의 직위에 올랐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사마로 임명되어 독자적으로 일군을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으며, 군무를 총괄하는 대장군의 직위에는 공명 사후 20년이 넘게 지난 후인 256년에 이르러서야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상당한 세월이 지나 군권의 총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강유가 촉한의 국정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관여한 흔적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공명처럼 국정을 총괄하면서 군권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외지에서 위군을 상대로 북벌을 진행하면서 군공을 세우는 방식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는 공명과는 달리 2대 황제인 유선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얻지 못한 것도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호 등의 발호를 제압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위나라 출신이라는 한계로 인한 촉한 조정 내부에서의 입지 확보의 어려움과 더불어 제갈공명의 유지를 이어받아 촉한 중기 및 말기의 국정을 책임진 장완, 비의, 동윤 등의 유능한 인물들이 조정에서 잇달아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촉한을 망국으로 이끄는 환관 황호 등으로 대변되는 간신배들의 발호와 현실에 안주하려는 관료 및 호족 집단의 의식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때가 공교롭게도 그가 군권의 총수인 대장군이 되었던 시기와 비슷하게 겹치게 되면서, 실질적인 힘을 지녔음에도 이러한 점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성도 밖으로 물러나버린 사실은 공명과는 여실히 다른 그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공명에서 강유로. 촉한 지배 패러다임의 변화

예전에 유비에 관한 인물론을 쓸 때도 그랬지만 필자는 유비 집단이 난세에서 스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 결국 촉한을 건국하게 된 것은,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바로 '한 왕실의 부흥'이라는 대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의지가 무척이나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형주지역의 신진 명사였던 제갈공명이 당시 고작 객장의 신분이었던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라는 대전략을 제시하며 합류했던 이유도, 바로 그 꿈을 함께 실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개인의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굳이 그렇게 험한 길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인재가 넘쳐난다지만 공명 정도의 능력과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지역 명성을 바탕으로 조조의 관심과 발탁을 받을 수도 있었으며, 형이 중신으로 있는 손권의 오도 출세 지향적이 조건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것을 마다하고 유비가 간절히 내미는 손을 잡고 결국은 '한 왕실 부흥'의 최종 목표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천하삼분지계'를 현실로 이뤄냈다.

이 '한 왕실 부흥'이라는 대의명제는 헌제의 선양을 거치면서 촉의 유비가 후한의 명맥을 잇기 위함이라는 목적으로 황제의 위에까지 오르게 되는 원동력이 되며, 또한 왕조를 찬탈한 위를 상대로 총체적 국력 결집을 필요로 하는 북벌의 정당성까지 부여하게 된다. 즉 촉이라는 국가는 유비를 중심으로 하는 어떤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위함이 아닌 '후한'의 명맥을 그대로 온전히 잇기 위함이라는 것에서 그 존재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후세의 사가들은 유비가 건국한 촉을 '전한','후한'과 구별하기 위해 '촉한'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갈공명의 북벌을, 단지 익주에 한정된 촉한이라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책으로 '이공위수'을 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통일을 이뤄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전쟁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제갈공명 시대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북벌을 통한 한 왕실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공명의 북벌이 진정으로 수비를 위한 '이공위수'였다면 그렇게 주기적으로 여러차례에 걸쳐 촉한의 국력을 한계점까지 잔뜩 끌어올려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또한 굳이 장안이나 옹.양주를 목표로 삼을 필요도 없었으며, 그저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에 의지하다가 먼저 공격해 들어오는 위군을 요격하거나, 아니면 군사적 거점을 신속하게 타격하는 소규모 국지전에서 그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육출기산을 통해 생전에 북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강유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유비 사후 제갈공명은 촉한에서 절대적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다. 더불어 유비의 유지를 이어받음과 동시에 스스로도 신중하였으며 '읍참마속'의 예와 군량 수송 실패로 이엄을 곧바로 내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엄격하면서도 공평무사한 통치를 구사하여, 그가 북벌 정책을 추진해도 불만이 적었을 뿐더러 설령 있다고 해도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또한 공명은 스스로 국정도 동시에 챙겼기 때문에, 북벌을 진행함에 있어서도 절대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즉 언제나 촉한의 국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진행했다는 것이다. 상당히 상세한 정황 분석을 바탕으로 가능성이 적지 않은 기습을 제안했던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물리친 이유도 이러한 공명의 성향과 판단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명의 육출기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인 성공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결국 여섯번째 오장원 출병에서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과 대치 중 질병(폐결핵으로 추측된다.)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실질적으로 유비가 이뤄내려 했던 '한왕조 부흥'이라는 대의에 공감하며, 그와 방랑군 시절부터 함께 행동해 촉한을 건국했던 1세대들은 대부분 퇴장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장으로서는 맹장 위연이 남아있었지만 그는 공명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공명을 비롯한 문신들과 갈등관계에 있었기에 후계자는 커녕 결국 반란자로 낙인찍혀 허무하게 사망하게 되었으며, 공명에게 자신처럼 문무를 지니고 군과 국정을 모두 총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심어주며 내심 후계자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던 마속은, 그에게 실전경험을 심어주려했던 가정 수비의 실패로 인해 오히려 1차 북벌 패퇴의 책임을 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장완은 과거 제갈양이 진천(秦川)을 자주 엿보았으므로, 길이 험난하고 운반하기 어려워 결국에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많은 배를 만들어 한수와 면수로부터 위흥(魏興)과 상용(上庸)을 습격하려고 했다. 마침 장완은 지병이 연속적으로 발작하여 제때에 행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승리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므로 훌륭한 계책이 못된다고 했다. 그래서 장완은 상서령 비의, 중감군 강유 등을 보내 유선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도록 했다.
<촉서 장완전>

그래도 공명 사후 후임으로 내정된 장완은 군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명의 유지를 이으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정사에서 보면 장완은 강유를 그대로 북진하게끔 하고, 스스로는 공명의 북벌의 한계점이 군량 수송에 있음에 착안하여, 물자 수송이 훨씬 수월한 물길을 타고 위흥과 상용 등 형주 서북부를 공략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찍 병사하게 됨으로써 실행조차 하지 못하고 백지화가 되어버렸다. 물론 당대를 비롯한 후대에서도 장완의 이러한 상용 급습책에 대해 군략 그 자체로는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았으나, 일단 공명과 같이 어떠한 형태로든 북벌을 이어가려했던 노력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완이 그렇게 부현에 입성한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고 비의가 그 뒤를 잇게 되면서부터 촉한에서는 점차 북벌에 대한 회의론적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공명 사후 나눠졌던 국정과 북벌에 대한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희 12년(249)에 강유에게 부절을 주어 또 서평(西平)으로 출정하도록 했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는 스스로 서쪽 지역의 풍속에 익숙하며, 겸하여 자기의 재능과 무력에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강족과 호족을 유인하여 자신의 오른쪽 날개로 삼으려고 하며, 농산 서쪽을 위나라에서 끊어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항상 대규모로 출병하려고 하여 비의는 늘 그것을 제지하며, 그에게 준 병력은 만 명에 불과했다.
<촉서 강유전>

장완은 공명과는 다른 북벌을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고 스스로 실현하려고 하였지만,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비의는 오히려 강유의 출병을 제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비의가 강유의 움직임을 원천봉쇄한 것은 아니다. 대규모 출병은 막고 단지 일만의 군사를 내주었을 뿐이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드디어 유비에서 공명으로 그리고 장완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던 북벌이라는 국가적 대사가 당시 대장군이자 녹상서사였던 비의, 즉 촉한 최고의 관료로부터 부정을 당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34년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병사한 이래 촉한에서는 238년 강유가 몇 차례 출병하여 공격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244년 위군의 침입을 격퇴한 것, 그리고 247년 강유가 곽회 및 하후패와 교전을 벌인 것 그리고 250년 강유가 서평으로 출격한 것 정도가 촉-위간에 발발했던 전투에 대한 전부이다. 장완이 새로운 계책을 내놓았다지만 공명 사후 무려 13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공명이 진행했던 북벌과 같은 전쟁은 진행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누적된 기간들은 공명의 북벌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무장 출신인 강유에게는 답답함과 조급증을 충분히 유발하고도 남을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유의 출병을 제지하던 비의가 253년 정월 자객에 의해 불시에 사망하게 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것들을 한 번에 풀어내려했는지 그해 4월부터 254년, 255년, 256년, 257년 이렇게 5년 연속으로 매년 출병을 감행하였는데, 사마의가 '천하의 기재'라고 평했던 공명도 이렇게 매년 북벌을 진행하진 않았다. 바로 이 시기가 강유의 무리한 중원 정벌로 촉한의 내정을 피폐하게 만들어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근거가 되는데, 확실히 강유가 지나친 출병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62년 한차례 더 북벌에 나섰으나 역시 등애에게 막혀 대패를 당하고 답중에 머무르고 있는데, 이듬해 등애, 종회 등을 앞세운 위나라의 대규모 촉정벌군이 남진하게 되고 강유가 이끄는 군을 비롯한 다수의 촉군이 검각 등 요충지에서 분전하고 있었으나, 초주 등 익주 토착 호족 세력이 주축이 된 항복론에 의해 유선이 항복을 결심하게 되면서 결국 촉한은 유비와 제갈량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들이 뿌린 피와 꿈을 뒤로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3. 촉한의 꿈을 품었던 강유.


강유가 비의가 사망한 이후부터 단기간에 지나치게 잦은 북벌을 진행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매번 출병 규모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잖은 군사를 동원했음은 비의가 제지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완에서 비의로 넘어가면서 북벌을 바라보는 촉한 지배층의 시각이 변하게 되는 과정도 추정할 수 있었으며, 유선을 항복으로 이끈 일등 공신인 초주의 '구국론'에서는 익주의 토착 인사들의 북벌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넘어선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또한 246년 동윤이 사망하고 나서부터는 촉한 체제의 정점인 황제 유선이 환관 황호의 농단과 이에 결탁한 진지 등의 발호 등을 방치함으로 인해,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촉한은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균열현상을 보이면서 결국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강유는 대장군으로써 촉한의 멸망에 대한 책임과, 그의 북벌이 5년 연속으로 대규모로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촉한의 내정이 피폐해졌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대규모 출병을 제지했던 비의가 사망한 시점에서 그는 북벌에 대해 촉한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도 의지대로 추진할 수가 있었기에, 그 동안의 기다림만큼이나 차분하고도 대국적인 관점에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전략과 전술로써 적절한 기간을 두고 국력을 탕진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북벌을 진행했어야 옳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따랐던 제갈공명이 추진한 북벌이 아니었던가.

본래 전쟁은 국가를 피폐하게 만드는 최고의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자병법의 도국편에서는 '한 번 전쟁해서 승리하면 황제가 되지만, 다섯 번 전쟁해서 승리하면 망한다.'라고 비유하질 않았겠는가.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고구려를 원정하다가 2대만에 망한 ‘수’를 봐도 그 진리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득실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선행되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강유는 너무 성급했다. 그는 병법과 무예를 갖추고 북벌을 통한 전쟁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지속적으로 주고 받았지만, 위와 촉한 사이의 기본적인 국력 수준에서 심한 격차가 있음을 감안하였다면, 그렇게 잦은 출병을 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리한 외정은 곧 내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공명과는 달리 강유가 무장 출신이라는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 험준한 지세에 의지해 버티기만 해도 수개월 내에 공략할 수 없을 나라로 평가받던 촉한이, 강유를 비롯한 각지에서 촉군이 항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군의 침공이 시작된지 초단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2개월 만에 성도가 함락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물론 위군의 전력이 강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이 시기 강유를 중심으로 하는 무장들과 촉한 조정의 관료와 호족들이 지향했던 방향에 대해 극명한 차이점이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종국에는 출신도 다르며 만나지도 않았던 유비로부터 비롯되어 자신이 곁에서 보좌했던 공명이 품고 이루려했던 대의를 이어가려던 강유, 바로 그 자신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던 것이다.


4. 글을 마치며


강유는 공명 사후의 촉한을 대표하는 무장이었다. 극정의 평가에서 보듯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강유는 훌륭했다. 마치 생활태도는 공명과도 큰 차이가 없었을 정도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의 중임을 맡아 신하들의 위에 있었지만, 초라한 집에 살았으며 여분의 재산이 없었고, 별당에 첩을 두어 불결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후당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오락이 없었고, 의복은 입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수레와 말을 준비하고, 음식은 절제했으며, 사치스럽지도 않고 빈곤하지도 않아 관에서 지급하는 비용은 손을 따라 모두 썼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한 까닭을 고찰하면, 탐욕스런 자나 불결한 자를 거세게 질책하고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의 애욕을 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하여 만족하면 많음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견해는 항상 성공을 칭찬하고 실패를 헐뜯으며, 지위의 높음을 기대고 낮음을 떨어뜨리며, 모두 강유가 잘못된 곳에 의지하여 자신을 죽게 하고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폄하하고 다시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춘추》에서 말하는 폄하의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강유처럼 학습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청렴하고 소박하며 절약하는 인물은 한 시대의 모범입니다.
<정사 강유전>

강유는 유비와 공명의 꿈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제갈공명과는 달리 촉한의 조정에 입지를 다지지 못함으로써, 간신배들의 발호를 막지 못하였으며 결국 스스로 무장 출신이라는 점을 끝내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공명과는 달리 단기간에 지나치게 과도한 출병을 행함으로써 내정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단지 물적 인적 손해만이 아닌 익주 토착 호족들을 중심으로 한 촉한 신료들의 북벌에 대한 지지까지 상실했다는 점에서 강유의 패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공명의 유지를 이어가려 했으며, 군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청렴한 생활태도와 함께 후주 유선이 투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촉한을 부흥시키려했던 그의 충정만큼은 촉한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강유는 공명 이후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줄곧 고독한 싸움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늘 인재가 부족한 촉이었다지만 제갈공명 시기보다도 강유 주변에 인재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래서일까. 문득 장완의 요청대로 마속이 죽지 않고 경험을 쌓고 살아남아 강유와 유비와 공명의 꿈을 이어가는 내.외정의 파트너를 이루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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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안부나 물어보려 친구녀석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 무려 4시간이나 논쟁으로 이어질 줄은 통화버튼을 누르던 그 시점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으리라.

역사. 즉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쓰여지는 책들은 일단 논문 형식이든 소설 등의 문학 형식이든 실제로 있었고 기록으로 남겨진 팩트 그 자체를 가지고 자신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 맞게 해석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실의 왜곡 여부이다.

논문 형식의 구조를 취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감성을 배제하고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인 논리 구조를 따라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기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도출해 내는 결론에 대해 동의를 하는가의 여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팩트와 팩트 사이를 논리적으로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향이 독자와 맞지 않는 방향이라면 공감을 하는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논문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이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을진대, 하물며 소설적 형식을 취하는 역사 문학은 더 말해 무엇하랴. 소설류는 논문보다도 일반적으로 개연성이라는 측면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접근하며, 기록에 남겨진 역사적 사실 이외에도 온갖 검증되지 않는 2차적 사료들, 즉 일반적 통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서, 그리고 전설이나 설화, 구전 또는 구술로 남겨진 것들도 작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다지 큰 거부감 없이 취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작품들은 작가가 갖고있는 주관적인 감성과 의도를 지닌 평가도 상당히 진하게 담겨진다.

하지만 문학이기 때문에 팩트와 팩트 사이의 허구적 스토리를 재구성하거나 다소간의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하나의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점에 대한 평가 역시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천차만별의 스펙트럼을 지닌 독자들은 그러한 팩트의 뼈대에 픽션의 살을 덧붙여 완성된 하나의 작품에 대해 사실성이나 논리적 개연성이 떨어지는 측면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도 있으며 팩트를 기반으로 전개한 작가의 문학적 구성에 대해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나름대로의 작가의 의도에 공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최인호의 유림에 있어서는 후자의 입장에 가깝다. 한때나마 역사를 전공했던 한 사람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떠한 사실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해석은 그저 독자로서 취사 선택을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모든 서적이 객관적일 수는 없다. 서적이 지닌 특성상 이미 그 작가 스스로가 자신만의 관점과 신념을 지닌 주관적인 한명의 개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가 그러한 제반 사실에 대해 사전에 인지할 필요는 있다. 작가의 표현이나 전개 방식도 마찬가지다. 개개인이 보기에 그럴듯 하다고 인식하면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러한 묘사를 통해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묘사를 하고 표현을 하며 해석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4시간의 논쟁을 벌였던 친구에게는 그것이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작가야 어떤 의도를 지니고 묘사를 하고 해석을 했든 그보다도 친구 자신이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논리적 개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게끔 충분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거나 차라리 그러지 못한다면 굳이 주관적인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 친구와 나는 4시간을 투자했음에도 그다지 접점은 찾지 못하고 결국 서로의 견해차를 확인하는 수준에서 대강 논쟁을 마무리지었다. 서로가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만의 논리와 판단을 바탕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중간지점을 허용하지는 않았던 듯 싶다. 다만 같은 표현과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차이는 이렇듯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 한번 더 선명하게 깨달았다고나 할까.

적잖은 시간 동안 의견을 주고받으며 친구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앞으로 책을 보게 되면 그가 강조하는 논리적 개연성을 좀 더 스스로 의식을 하게되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친구가 갖고 있는 견해의 옳고 그름과는 달리 그가 책을 보는 하나의 방법이며 친구의 강조처럼 그렇게 하면 분명 객관적이고도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될 가능성은 높아지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한권의 서적, 또는 여러권으로 구성된 시리즈가 총체적으로 작가만의 표현 방식과 전개 내용을 통해 (설령 국지적으로 오류나 헛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에게 어떠한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우선시하는 것은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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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통령 선거에
오후 늦게나마 투표.

정치에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는 방법이여러가지라고 하지만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 간접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의지를 표현하는 방법은 아마도 선거를 통한 투표권 행사이리라.

어느정도 예상이 된 결과였다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고 내용을 확인해보니 그저 씁쓸함만이 잔뜩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가졌던 탓이었을까.......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선거권을 행사한 대한민국의 국민의 과반수가 이명박 후보를 택한 것을. 그들과 그를 지지한 세력들이줄곧 내세웠던 '경제'라는 2000년대 최고의 화두에 대한 답을 과연 '서민'들의 손에 쥐어줄 수 있을지. 아니면 진보진영의 우려처럼 사회 전 영역의 도덕적 아노미 현상 끝에 대한민국은 다시금 퇴보의 길로 접어들게 될지는 이제는 시간만이 그에 대한 결과를 알려주게 되겠지.

물론 어찌됐든 향후 5년간의 대한민국의 미래를 연출할 총감독이기에 최소한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하는 '졸작'을 만들어내지는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심히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

과연 어디로 흘러가게 될 것인가.
훗날 역사는 오늘의 결과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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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작 후보들간의 정책과 공약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의 비전에 대한 진지한 토론보다는, 온갖 상대 후보간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졸렬한 네거티브 전략만이 판치고 있다. 정치라는 것이 본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공론의 장인만큼 절대적인 도덕과 원칙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정치 철학적인 논리를 어느정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본래의 목적과 거리가 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욕으로 점철된 진흙탕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역대 대선이라고 그 진행과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그러한 네거티브 정쟁의 결정판을 보는 듯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마냥 온갖 비리와 부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그야말로 법과 도덕 그리고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완전히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한 후보가 가장 높은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유력한 당선 후보라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현 참여정부의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지난 10년간의 진보 세력의 집권의 결과에 대한 부정이며, 그로 인한 논쟁에서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미 국민들에게서 외면을 받고 있는 하나의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옛부터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였고, 가장 민주주의적인 방법은 다수의 지지를 받은 결과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라는 가장 큰 사회적 집단의 수장의 자리를 단지 경제적 측면만에서 두각(그마저도 실질적 결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투성이이며, 경제 능력이라기 보다는 개인의 부 증식에 가까운)을 드러냈으며, 그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에 그로 인해 빚어진 다른 온갖 비리와 추문들을 덮어버려도 괜찮다는 그야말로 절반에 가까운 대한민국 다수 국민들의 총체적 도덕 불감증에 이르러서는 더 무어라 할 말도 없을 뿐이다.

그것은 그저 '나만 잘먹고 잘살면 되고, 그렇게 해줄 수 있는 대통령이면 그 역시 뭘 어떻게 하고 살아왔든 상관없다.'는 법과 윤리 그리고 도덕적 원칙은 도외시한 채 개인 이기주의적 생각의 극치가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며, 과연 그러한 사람이 한 국가의 수장이 되었을 때, 당신들의 바램처럼 그러한 떡고물이 듬뿍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사적 사례를 살펴봤을 때 그것은  지나친 환상이자 기대이며 바램이라는 충고를 해두고 싶다. 물론 당신네들의 기대가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그동안의 모든 법칙을 무너뜨리는 금권과 민주주의가 교묘하게 결합된 신질서의 출현이라고 해도 누구도 부정하진 못하게 되겠지만.

최근 IMF 이후 지난 10여년의 세월에 대해 한나라당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짓고 증거물로 대략 6가지를 제시했다고 한다. 경제, 집값, 실업, 교육, 헌법, 안보 분야에서 대란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큰 틀에서의 경제로 귀결되고 있으며, 사회적 분야, 그리고 보수적 이념 체계의 입장에서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집권기간을 비판하고 있다.

최근의 한국 경제는 1997년 말 IMF를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군사독재정권기부터 세계화 열풍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경제 과도적 발전 과정에서 야기되었던 구조적 모순이 일거에 터져나오면서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 시기를 거쳐 10여년 만에 다시금 국민소득 3만불을 바라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문제는 이러한 수치상의 회복과 발전이 아닌 중산층 이하의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지수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정부가 제시하는 통계 수치와 그렇게 차이가 날까.

그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잃어버린 파이를 그 이상으로 다시 되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배가 균형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즉 경제의 회복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미 IMF 그 자체만으로 수많은 중산층이 붕괴하다시피 했으며, 더우기 국민소득이나 경제 규모에 비해 사회안전망이 형편없는 한국의 복지정책 수준으로는 그 간극을 메우기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그 부작용은 결국 고스란이 그나마 남아있는 중산층은 물론 그 이하의 서민들이 떠안을 수 밖에 없는 몫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당선이 가장 유력한 후보를 비롯한 보수 성장 제일주의자들은 '파이'를 더욱 키우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현재보다 경제 수준이 더 올라간다고 해서 대다수의 중산층들이 회생할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만족하게 될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세계적 추세이기도 한 양극화 현상은 수치상으로 늘어난 경제 소득을 실질적으로 공평하게 재분배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복지 선진국 수준으로 마련되지 않는 한, 그러한 이야기는 소수의 재벌일가와 졸부들만을 배불리울 뿐이며, 수혜를 받아야 할 이들에게는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우리는 경제 규모와 국가 소득 수준에 맞는 복지 정책을 펼쳐야 할 필요가 있다.

여담이지만 현재 대한민국 1%가 전국 토지의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왕조 시대에서 1%가 70%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곧 망국으로 이르는 시기였다. 시대가 달라지고 경제구조가 달라졌을지언정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 교훈은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에는 단지 구조를 수정하는 선에서 그치는 혁신을 넘어선 전면적 제도 교체가 가능한 강력한 제도 개혁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교육도 결국은 경제에 종속되어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교육의 목적이 참된 인간을 만드는 인성교육이 아닌 그저 대한민국에서 남보다 잘살기 위한 출세의 수단임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며 이는 최근에 벌어진 '외고의 부정 입시'사건은 하나의 단적인 예지만, 교육에 대한 사회적 구성원들의 인식이 어떠한지를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사교육에 잔뜩 돈을 들여 특목고나 명문사립고에 입학해서 SKY 내지는 해외 유수의 대학으로 진출하여 결국은 사회 상류층으로 진입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보편화된 교육의 최대 목표이자 일반화된 도식처럼 되어있질 않은가.

이러한 인식 속에서 전인 교육은 어디에 있으며, 꿈과 소질을 일치시켜줄 수 있는 인재의 형성은 그저 요원한 꿈 속에서나 읊을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했지만 사회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능력과 자본과 이기주의가 결탁한 사회를 확대 재생산 하는 역할이 그칠 뿐이다. 평균 교육 학력 수준이 세계에서 최고 수준에 손꼽히건만 그들의 다수가 유권자인 2007년 대한민국의 대선 판도는 그 교육의 높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수준을 다시한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헌법과 안보도 한나라당에서 언급했는데 이제 이 부분도 냉전 시기의 이데올로기적 관념에서 탈피해 동북아 및 세계의 진행 방향에 보폭을 함께 할 필요가 있다.

지독한 대한민국의 인구 및 지역 불균형을 해소해보겠다고 추진했던 '신행정수도 이전'을 얼토당토 않은 경국대전까지 끌어들인 '관습헌법'으로 막아버린 작태나, 현재 대선 후보의 온갖 범법 사실들로 나타난 준법정신의 부재, 그리고 전시작전권 회수를 거품물고 반대하고, 남북정상회담이 2차례나 열리며 보수들이 그렇게 추앙해마지않던 미국이 그렇게 적대시하던 북한과의 북.미 정식 수교를 눈앞에 둔 지금 여전히 주적타령을 하며 친북좌파니 빨갱이니 떠들어내는 보수를 넘어선 수구 꼴통같은 소리만을 반복하는 안보관은 이제 저 동해 바다에 처박아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눈을 들고 동북아 주변을 돌아보고 세계를 내다보면 아직도 그런 낡아빠진 관념에 기대고 있을 때는 더더욱 아닐터.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한나라당의 주장은 일고의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중도에 출마를 선언한 이회창 후보는 지난 10년을 친북좌파정권이라고 하는데, 사실 두 정부의 성향을 굳이 나누자면 중도진보에 보수적 개혁 정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건국 초기 남로당의 혁파 이후 진행과정을 보았을 때,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공산당이나 사회당은 존재할 수가 없었으며 설령 그렇게 연루되었던 이들이나 단체(진보당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 등)도 모두 정치공작임을 이회창씨는 모르나보다. 아니면 현대사 공부를 제대로 안했거나.

아마도 그들 정부가 진실로 그네들이 따지는  냉전 시기의 이데올로기적 친북좌파였으면 아마도 집권 즉시 북한 정권과 연계한 숙청과 혈풍이 불어닥치지 않았을까. 한미 FTA? 그런 것이 가능하기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런일 따윈 없었다. 그러니 '친북좌파, 친북좌파' 열변을 토하는 것은 그저 우스울 수 밖에. 굳이 이념 성향으로 따진다면 지난 10여년간의 두 정부 모두 진보적 성향을 가진 중도 보수 정부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국 이번 논쟁의 원점으로 돌아오면 김영삼 정부에서 곪아터진 경제파탄의 후유증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치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한 치유의 댓가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되돌아가지 않았는가. 왜 수치는 높아지는데, 체감 경기는 혹한과도 같나. 이것이 최대 핵심 쟁점 사항인데 이는 결국 경제의 문제이며, 공평한 재분배의 문제라는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정부는 80년대 이전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운동 세력이 주축이 되었었다. 그들은 개발 독재를 일궈온 역대 군사정부의 정통성과 체제를 부정하였으며, 그 대신 이 땅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정말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헌신을 다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떠들 수 있으며,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정책적 실정에도 대놓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현실 역시 그들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에 지나치게 자만은 하지 않았을까. 민주화의 진전이 그들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그들이 부정했던 군사독재정권이 일궈놓았던 텃밭이자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곤하는 경제적 발전이라는 측면도 고삐를 놓지 말았어야 했다. 즉 과거 군사독재정권이 이뤄놓은 결과물은 결과물대로 계속 수정 보완해서 이끌어가야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김영삼 정부는 그 부분에서 완전히 실패를 하였으며, 이후 집권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혹독한 IMF 시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해내며 역시 각종 수치 및 통계상으로는 이전보다 나은 경제를 구축했을지언정, 김대중 정부 말기의 카드 대란으로 인한 신용불량자 급등과 노무현 정부의 집값 안정화 실패 등 그 실질적인 혜택을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한번쯤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또한 민주화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들이 과거 정부와 차별화했던 도덕적 마인드도 끊어질 듯 이어진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의해 그 색이 바래버렸으며, 그러한 일련의 반복적인 현상은 지금에 이르러 대선후보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가장 기본적이자 중요한 자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도덕성에도 불감증을 가져오게 된 중요한 원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결과 국민들도 이제 정치인의 도덕성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게끔 만든 것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괴리감이 도덕성에서는 엉망이면서도 현실 경제를 가장 잘 안다고 주장하는 후보에게로의 높은 지지율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현상은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으며, 이명박을 노무현이 키웠다는 이야기도 그저 정치적 언사로만 치부해버릴 수도 없다는 것은, 지난 10년간 개혁을 주도하며 애써 되찾아온 파이를 이제 그나마 그 혼란을 자초한 것은 물론이고, 성향이 전혀 다른 정치 집단에게 내줄 위기에 처해있다는 역설적인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들도 변명을 내세우기 보다는 크게 반성을 해야한다는 이야기다.

잃어버린 10년과 되찾은 10년.

단순한 정치구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지난 10여년간 분명 우리는 되찾은 것이 있는가 하면 잃어버린 것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우리는 결국 각자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결정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지난 과거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며 중요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는 이제 지금까지 지적되었던 문제들을 해결하고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도약을 해야하는 백지와도 같은 미래가 놓여져 있다. 과연 그 부분에 있어서 최적임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판단과 소신 그리고 믿음을 반영하는 것도 분명히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투표를 통해 의지를 표현할 수 있으며, 그 역시 선거 결과를 통해 결정이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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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전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의 양심선언으로 촉발된 이번 삼성 비자금 사태는 현 대선정국과 맞물려 사회 정치 경제에 걸쳐 메가톤급 회오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른바 재벌기업이 고위 공직자는 물론 사정기관까지 포함하여 각계 각층의 고위인사들을 이른바 '떡값'이라고 일컬어지는 비자금으로 관리를 해왔다는 것인데, 사실 이러한 정경유착의 관행이야 대한민국사와 그 궤도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군부독재정권과는 달리 도덕적 가치를 우선시하며 개혁을 최우선시 정책 모토로 삼던 민주화 세력이 이끈 지난 10년간에도 (물론 예전보다는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행태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에는 상당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현직 검찰총수라는 사람이 '그렇게 따지면 학연, 지연등으로 연결이 안된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며 수사 요구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을 보면 갈데까지 갔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이러한 재계와 정계가 연결되는 비리 및 부패 문제는 집권 세력의 성향과는 큰 상관이 없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삼성 비자금 사태는 특검 발의로 진행되고 있는데, 이 와중에서도 일부 언론에서는 연일 청와대가 특검을 거부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를 하고 있다. (웃긴건 이러한 내용을 크게 다루는 언론들은 처음 김용철 전 법무팀장이 양심선언을 할 때는 나몰라라 하던 그 유명 언론들이었던 것이다. 신정아 사태나 취재지원선진화 방안에서 보듯 그렇게 투철한 저항정신을 가졌던 그들은 이렇게나 사안에 따라 일방적으로 주관을 표출하기도 하고 또 이렇게 침묵을 지키기도 하는, 명색이 한국의 소수의 진보 언론을 제외하면 주요 언론의 보도 행태는 그야말로 공정성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후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3당 특검안과 한나라당 특검안이 전혀 다르다는데 있는데, 한나라당은 이 문제를 2002년 대선자금과 어떻게 해서든 연결을 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당연히 청와대는 거부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 부분은 지금 폭로되고 있는 사안과 직접적인 연관도 없을 뿐더러, 설령 수용해서 관계없다는 결과를 받을지라도 이미 수용하는 시점에서 청와대도 비자금을 받았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특검보다는 예전에 한번 국회에 제출했던 청렴위 소속의 공직자부패수사처를 설치해 조사하자는 법안을 다시 내놓고 있다.

하지만 차기 검찰총수 후보는 물론이요, 청와대에서 내세우는 청렴위원장까지 떡값 수수 인물로 거론되는 작금의 삼성 비자금 사태를 확실하게 마무리 지으려면 결국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선자금에 대한 의혹을 확실하게 밝혀서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의 물타기를 사전에 제거하고, 특검을 수용하되 이는 청와대만이 아닌 검찰과 그 외 정부기관. 그리고 여당과 한나라당까지 모두 총망라해서 비자금과 연루된 모든 공직자 및 정치인들을 모두 일괄적으로 처벌해야함이 최선책일 것이다. 물론 삼성의 이건희 일가를 비롯한 이와 관련된 모든 삼성의 책임자들도 처벌해야 함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이는 범여권 단일화에서 나오는 '부패 VS 반부패' 구도에 정점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도마뱀꼬리 잘라내는냥 몇 명의 희생양만으로 유야무야 덮어버리고 현재 이번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사실상 그의 전력과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BBK 의혹, 그리고 한나라당의 그간의 행적과 성향을 봤을 때, 아마도 요즘 유행하는 정조의 사후와 매우 흡사한 대대적인 보수 반동 정치가 펼쳐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사 주간지에서 삼성 비자금 사태의 처리 방안에 대해 대선 후보들에게 물었을 때, 유일하게 답변을 거절한 후보가 바로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였다.)

예전과는 달리 유한할 수 밖에 없는 정치권력보다 훨씬 긴 영향력을 지닌 자본권력이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구조적인 측면에서의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될 수 있으며, 또 음성적으로 지속적으로 행해질 것이다.

호미로 막을 것으로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리고 팔 다리의 곪은 종기를 째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나중에는 잘라내야 하는 법이다.

이러한 정경유착의 커넥션으로 이뤄지는 불법 경영구조는 결국 미국 엔론 사태와 같은 글로벌 기업의 붕괴를 필연적으로 불러올 수 밖에 없으며, 그 피해는 삼성의 현 영향력을 보았을 때 해당 기업에 국한되지만은 않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삼성 비자금 사태의 명확하고도 깨끗한 해결은 보수가 그렇게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왜 틀렸는지, '되찾은 10년'은 그 이전과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 10년의 끄트머리에서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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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이상하게도 개인의 '능력'에 대한 척도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이번 대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여진다.

'그정도 능력있는 사람이 그정도 해먹는 것은 당연하지. '그렇게 못한 놈이 병신인거지.' '나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했겠다.' 라는 식의 희안한 옹호 논리가 나도는데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어떻게 능력이라는 말인가?

정당한 원칙과 법을 준수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한 결과와 갖은 부정과 비리와 거짓말. 그리고 법을 기만해 얻은 결과를 동일시하는 그런 후진적인 상황 판단 의식에 대해서는 한숨밖에 나오질 않는다. 결국 그저 모두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시키는데만 관심이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그로인해 남이야 피해를 입든 말든.

모두가 그런 식으로 경제적 부를 늘리려 한다면 그것은 잠시의 환상에 불과할 뿐더러 결국은 기반을 파괴해 모두가 자멸하게 됨을 왜 모를까. 개인의 뛰어난(?) 치부 능력을 국가 경제 운영 능력과 동일시하는 작금의 웃기지도 않는 분위기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 뿐이다.  

진실로 대한민국의 발전은 부정부패를 통한 기만과 거짓으로 얻은 허상이 아니라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허용된 범위 내에서의 능력으로 일궈내는 진실됨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

그저 이번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궁금할 따름이다.

덧-
재미있는 사실은 이번 대선 후보들 중에 이러한 양극단을 대표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이다. 물론 지지율 차이는 상당하지만. 17대 대선에서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가에 따라 현재 한국 국민의 수준과 인식을 극명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전히 정치는 민의를 반영할 수 밖에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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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사란에 글을 쓰네.

이전 글이 여름에 쓴건데 지금은 겨울. -_-
아. 그저 빠르게만 흘러가는 시간이여.

요즘  그렇잖아도 대선 정국이라
이런저런 시끌벅적하면서도 굵직한 이슈들이
마구 난무하고 있는데

뭔가 하나 잡아서 쓰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서(는 핑계다..;;)

여하튼...

한국에서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에
국내 3개 고시를 수석 내지는 차석 합격으로 패스하고


미국 4개주의 변호사 자격증을 지니고 있으며
펀드매니저까지 겸업을 하고 있는

능력만으로는 그야말로 어디에 내다놔도
모두가 수긍할 수 있으며
존경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대단한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왜!

부족할 것이 하나 없는 이 분은
대체 무슨 이유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회 전략기획팀장을 수락한 것일까.

온갖 비리의혹들 투성이며  
BBK가 사실로 드러나는 그 즉시

투기꾼 후보에서
레벨이 전혀 다른 사기꾼 후보로 전락하게 될

그에게서 무언가 구원해줄 가치를 발견했단 말인가.

경제. 사회적으로는 충분히 성공했으니
이제 정치 영역에서만 성공을 하면 된다는
그만의 승부수를 띄운 것일까.

하긴 대선레이스 중 가장 마지막에
가장 큰 뇌관이라 할 수 있는 BBK 의혹을
한달 정도 잘 막아내서 킹메이킹에 성공한다면

아마도 그의 정치적 승부수는
아래가 아닌 위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것이고
또 한번의 대단한 혜안(?)이자 탁월한 결정이라고
회자될 법도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실망은 거둬들여지지 않으리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정도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고 판단되기에
더욱 그렇다.  

그의 정치적 성공을 위한 욕망의 시발점이
결코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음을
대통령 선거 결과를 통해 그가 깨달았으면 한다.

물론 그 몫은
여러분 개개인들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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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It`s Too Late  -
The Goo Goo Dolls 



시간이 없다 없다 하면서도 보게 된 영화.
올 여름 최고의 화제작 중의 한편이었던 Transformer.

일단 재미있다.

난 이런 영화가 좋더라.
단순하면서도 그렇다고 억지스럽진 않고 화면을 꽉꽉 채우는 액션이 난무하는 영화.

더 록부터 아마겟돈, 진주만,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마이클 베이 감독의 작품은 지금도 한번씩 꺼내보면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옛 작품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시종일관 엄청난 CG 퀄리티를 자랑하는
트랜스포머도 그렇지 않을까.

흔히 로봇이라하면 인간이 조종하는
하나의 거대하고도 정밀한 기계로 규정지을 수 있는데
(물론 아톰이라든가 에반게리온 같은 예외도 있다.)

트렌스포머 역시 아마 흔하지 않는 범주에 속할 듯 싶다.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며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로봇이다.
(오토봇과 메가트론의 양 집단으로 나눠짐)

다른 로봇 성우들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었지만
특히 포스터에서도 나오듯 주인공격 오토봇인
옵티머스 프라임의 성우는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고.

스토리는 그렇듯 심플하다.

절대적 파워를 지닌 큐브를 찾아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닌 채 지구로 오게 된
적대하는 두 로봇 집단과

그 단서를 지닌 주인공과의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

영화는
초반부터 화끈한 전투신으로 시작하여
마이클 베이 감독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중반 추격신에서
후반부 시가전까지.

그리고 마치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듯한
로봇들의 표정 연기도.

보는 내내 경탄할 수 밖에 없는 시각적 효과는
중반 이후 다소 급격한 경사를 그리는 스로리 라인까지도 흡수하며
어느덧 엔딩 크레딧까지 이끌어버린다.

물론 중간중간 웃을 수 있는 장면들도 의외로 많다.

또한 초반에 범블비의 카라디오를 중심으로
흐르던 음악과 중간중간 삽입된 곡부터 엔딩곡까지
어느하나 빠지는 것 없이 다 좋았던 듯 싶다. ^^

보면서 어린 시절 보았던 전대물로 일컬어지는
로봇시리즈물(후뢰시맨 등)과 매 여름 방학이면 빠지지 않고 개봉하던 우뢰매도 생각났다.
(물론 그래픽은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참 뭐랄까.

80-90년대의 향수를 지닌 이들을 위한
매끈하고도 잘 빠진 현대적 감각의 로봇물이라고 하면
좀 과소평가한 것일까.
(물론 영화를 폄훼하는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다.)

여하튼 좋았다.

덧-
글을 쓰고 나니 스스로가 매우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걸? -_-


No sacrifice, No victory.

.........

.
They deserve to choose for themselves.

                                                                                                 TRANSFORMERS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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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집에도 안내려가고 (아니 못내려가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혼자서 불평하는
그 와중에서도

또 한 편의 영화를 시청했다. (자랑이다. -_- )

(아. 22인치 와이드 모니터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ㅜㅜ )

.......

영화의 카피에서 보듯

23년의 근무 기간 중 15년 동안
냉전시기 최대 적대국 러시아에게 기밀 자료를 넘겨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이중간첩 사건으로 기록된
2001년의 FBI 요원 로버트 핸슨(크리스 쿠퍼 역)의 체포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사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전개 과정은 부드럽게 진행되는 반면
때로는 소재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평이함으로
밸런스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이 영화는 현재 실존 인물들의 내면에 대한
주연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으로 상당한 흡입력을 발휘하며
1시간 50분. 거의 2시간 가까운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첩보물이긴 한데
딱히 화려한 액션이라던가 러브 스토리는 없는데도
사이사이에 비춰지는 부장과 신참 요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힘이었으리라.

신참 요원의 라이언 필립도 잘했지만
특히나 내부 변절자인 로버트 핸슨역을 맡은
크리스 쿠퍼의 나직하면서도 완벽한 심리 연기는
정말 대단하고밖에 할 수 없었다.

영화에서의 배역의 비중 차이이겠지만
본아이덴티티에서의 트레드스톤을 이끌던 CIA간부의 모습보다
월등한 임팩트를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마주치는
그 부분은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다.

.......

그 누구보다도
애국심에 고취될 수 있는 정보기관에서
자긍심을 갖고 조국을 위해 일할법했을

그가

조국과 자신이 일하는 기관과
자신을 믿었던 동료까지 배신하면서
무엇을 얻으려 하였던 것일까.

종교적 신념이 강하며
자애로운 한 가정의 가장이자
기관 내에서 경험에 걸맞는 직위와
동료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던 그였기에

영화 내내 그 부분에서
한 순간의 실수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던 그의 변절행위에 대해

난 쉽사리 공감을 하기가 힘들었다.

적국 내에서 활동하면서
가치관이 흔들리는 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었을까.

실제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낼 수 없었다고 하니
본인의 침묵하는 이상 역사 속에 묻혀버리겠지만...

.....

여하튼 여러가지 상념과 더불어
한번쯤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그야말로 잘 짜여진 차분한 스릴러였던 것 같다. ^^

......

I need to know if I can trust you!

.......

The end of the day..
So carp.

You are who you are!

.......

Pray for me...

-Breach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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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 주말에는
영화라인이었던가. 그저 집에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기에. 그동안 못보고 늘어만 갔던 영화들을 주욱 감상했다. 그 중에는 아주 오래된 영화도 있었고 그럭저럭 최근 영화들도 있었지만.

<탑건, 아파치, 단테스피크, 판타스틱4, 007카지노로얄, 300, 더블타겟, 본아이덴티티, 본슈프리머스, 브루스 올마이티 까지>

.......

본 아이덴티티

난 이 영화 제목을 상당히 오래전에 처음 들었을 때 곧바로 '뼈의 정체성?'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장르는 '공포 스릴러' 정도? -_- 그런데 상영된지 5년이 넘게 지난 최근에 들어서야 묵직하고도 사실적인 영상으로 빈틈없이 짜여진 신선한 첩보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방대한 스토리의 전개가 멋들어지게 이어진 원작이 있으며 이 작품 역시 원작 못지 않게 제작되어 현재 3편이라고 할 수 있는본 울티메이트가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다고 한다.

가장 강한 무기는 고도의 기술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다져진 사람이라고 하던가. 기억을 잃은 특수요원(거의 킬러) 본과 를 훈련시킨 기관 CIA와의 치밀한 대결이 영화 전반에 걸쳐 상당히 차분하면서도 긴장감의 끈을 놓지 않고 후반부까지의 진행을 이끌어 간다.

1편은 주무대인 파리 특유의 화려한 모습은 특별한 이질감 없이 사건 현장으로 어느덧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고 있으며,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본과 요원 간의 격렬한 격투신은 투박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맷 데이먼이 가라데와 킥복싱을 조합한 '칼리'라는 무술을 상당한 수준까지 연마를 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수차례의 탈출신이나 요원간의 격투 또는 총격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분명 007류의 첩보물이나 '미션임파서블'시리즈와 같은 화려하고도 현란하거나 요란스러운 액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국가와 국가를 위해 그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서 끝없는 투쟁을 하고 있을 비밀 기관의 특수 요원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물론 그들 중에는 본과 같은 요원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You are the only person I know. 

The Bourne Identity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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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일 6년간의 제작기간 끝에 개봉된 심형래 감독의 D-War가 대한민국의 여름 극장가를 강타하며 9일 만에 400만 고지를 돌파하는 등 초고속 흥행을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여느 영화처럼 단지 D-War의 흥행이 극장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영화에서의 이무기처럼 현재 극장 밖으로 뛰쳐나와 한국 사회 전반을 휘어 감으며 어디를 가든 난상토론을 일으키는 핵심 주제가 되고 있으니 이정도 되면 가히 'D-War 신드롬'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난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영화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D-War를 둘러싼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의 과열된 현상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지금 어디든 D-War에 대한 감상평을 쓰게 되면 그것이 호평이든 혹평이든 (물론 혹평이 경우에는 압도적인 댓글들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이 현재 분위기이긴 하다.) 곧바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현재는 D-War를 중심으로 갑론을박의 수준을 넘어 이데올로기적 대립 현상까지도 빚어지고 있다. 그만큼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대체 왜 수많은 영화를 제쳐두고 D-War라는 이 영화 한편에 좋든 싫든 그렇게 많은 이들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먼저 촉발시킨 근본적인 원인에는 바로 충무로의 비평가들이 쏟아낸 일방적인 평가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쉽게 찾아낼 수 있고 또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만 소개를 하겠다.

......

민용준 기자

디워 : 이미 몇 걸음 앞선 할리우드의 그것과 비교하면 특별해보이지 않으며 자본의 열세도 극복하기 힘들다. 다만 <디 워>의 성과는 특수 효과를 필요로 한 특정 장르의 표본 사례로 활용될만하다. 하지만 현재 진행형의 영화적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는 건 다소 안타깝다. 개인적으론 침통한 심정이다

김도훈 씨네21 기자

디워 : 거드름떠는 영화기자의 입장이 아니라 싸구려 B급 영화의 엇나가는 재미에 호들갑을 떨 준비가 되어있는 장르팬의 입장으로 말하자면, 300억짜리 이무기 영화 한편이 아니라 30억짜리 장르영화 10편을 10년동안 꾸준히 보기를 원한다. 아니, 원했다.

이지선 (영화칼럼니스트)

디워 : 근래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이렇게 무거웠던 적은 없었던 듯 하다.


서진우 기자

디워 : 문제는 이 영화를 보고선 역시 심형래라는 탄성과 함께, 전형적인 심 감독 스타일 영화라서 아쉽다는 비판이 동시에 쏟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애국심 짙은 감정을 버리고 또다시 냉정한 평가를 내려줄지 관객들 입심에 `디워`의 진짜 운명이 갈리겠다


이후남 기자

디워 : 이런 긴 노력에 비해, 그간 충무로가 닦아 온 이야기 세공력과 부쩍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를 제대로 감안하지 않는 게 신기하다


그리고 하재봉 영화 평론가

심형래 감독의 [디 워]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용가리]의 판박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일거에 날려버리고, 예고편이 전부일거야라는 일부의 의심을 시원하게 해소하면서, 놀라운 컴퓨터 그래픽 픽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한국형 SF의 새로운 신화를 썼다.

불과 10여년 만에 우리는 [디 워]를 볼수 있게 되었다. 할리우드 기술진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한국 컴퓨터 그래픽 기술진들만으로 완성된 [디 워]의 컴퓨터 그래픽은 이제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거리가 지구에서 달보다 가까워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디 워] 이후 대중들은 더 이상 개그맨 심형래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를 보고 지나치게 호들갑을 떤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조금 흠이 있다고 해도, 호들갑을 떨어도 된다는 생각이 든다.


.........


어떤가?

아이러니하게도 꽤나 독설로 유명한 영화평론가 하재봉(그를 싫어하는 영화팬도 꽤 된다.)씨만 빼고는 모두들 비관적이거나 나아가 혹평일색이었다. 평론가들이란 말 그대로 자신들의 영역에 대해 평론을 하기 위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칭찬보다는 강한 톤으로 그리고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각으로 개성적으로 비평하는 것을 자신들의 역할로 알고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시각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들 바아냥거리거나 나아가 개봉을 앞둔 영화에 대해 거의 반쯤은 실패작으로 거침없이 단정 짓는 멘트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개봉하고 나니 D-War를 관람한 관객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혹평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과연 D-War가 평론가들 말마따나 그렇게 형편없는 영화인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관객들을 중심으로 문제제기가 시작되면서 D-War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의 불씨가 당겨진 것이다.

일단 평론가들이 가장 문제 삼은 스토리 부분은 심형래 감독 스스로가 12살 이상이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했으며, 괴수를 중심으로 하는 전형적인 여름 블록 버스터 장르이기에 아주 스토리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엉망이 아니라면 그렇게 크게 문제 삼을 부분이 못되며, 또 트집을 삼는 CG 또한 헐리우드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독자적 기술로 이만큼 수준을 끌어올린 공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인정을 해주자는 분위기로 흘러갔던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직접 D-War를 본 관객들은 평론가들의 혹평에 공감하는 이들보다, 그들의 혹평의 배경에 대한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 평론가들의 다른 한국 작품에 대한 평가와 D-War에 대한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린 비교글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D-War에 대한 호의적인 관객들을 중심으로 '이것은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인 코메디언 출신의 심형래 감독에 대한 충무로 주류세력의 죽이기'라는 식의 불만스러운 반응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대결구도는 "심형래 VS 충무로"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즉 관객들은 충무로 등에서 흘러나오는 말마따나 정식 감독 코스도 거치지 않는 코메디언 출신의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심형래 감독이 한국에서는 어린이들이나 보는 것으로 인식하던 '괴수영화'에 집착하는 모습에 대해, 충무로가 노골적으로 무시하거나 조롱섞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그것이 개봉 전에 평론가들의 의도적인 악평으로 표현이 된 것 아니냐고 의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논란이 가열되는 과정에서, 독립영화 감독인 이송희일 감독이 대단히 자극적인 표현들을 구사하며 충무로와 평론가를 비판하던 관객들을 싸잡아 비난에 가까운 글을 쓰면서, 상황은 이제 아예 까놓고 "D-War 지지 관객과 네티즌 VS D-War에 비판적인 충무로 집단" 구도로 형성이 되어버렸다.

평론가들의 원색적인 비난은 공정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충무로로 편향되었으며, 어쩌면 충무로의 주류와도 일정한 거리가 있을 이송희일 감독도 예술영화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에 비해 D-War가 수준이 한참은 낮아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그 점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본인이 그렇게 영화를 생각한다고 해서 남들도 그렇게 바라봐야 한다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영화 내적 요소를 벗어나 D-War 대해 호감을 표시한 관객들에 대해서까지 한심하다는 식의 조롱은 마땅히 지양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이송희일 감독은 유감스럽게도 D-War에 열광하는 관객들을 '악다구니를 쓰는 애국애족의 벌거숭이 꼬마' 로 싸잡아 비난한 것은, 본의가 어디에 있었든지 설령 그 역시 비주류의 예술영화 감독이라고 하더라도 D-War에 있어서는 그 스스로가 영화에 대한 엘리트주의 의식을 갖고 있음을, 그리고 영화에 관한한 관객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지적 우월주의 의식만을 잔뜩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D-War를 보는데 애국.애족심을 발휘하면 천둥벌거숭이 꼬마이고, 스크린 쿼터를 지지하면 성숙한 시민이란 말인가. 기준을 들이대려면 일관성있고 공평하게 해야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얼빠진 논리는 대체 뭐하러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2007년 이 시점에서의 관객들은 평론가나 영화 감독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철없고 무지하며 사회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그런 수준미달의 관객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War에 대한 개봉 전 평론이나 이송희일 감독, 김조광수 대표 등의 연이은 D-War 관객들에 대한 모욕에 가까운 언사는 마치 영화 한편 보기 힘들었던 전근대적 시기의 관객 수준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가르쳐드려는 식의 태도를 보여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니들이 영화에 대해 뭘 알아?'

즉, 자신들이 혹평하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고 하는 관객들을 싸잡아 '수준 낮은 관객'들로 몰고가는 분위기를 형성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를 물고 늘어지고 CG를 물고 늘어지며 '이렇게 형편없는 영화에 대해 니들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불만을 드러내놓고 표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 한다고 해서 그 권위에 굴복해 '아 정말 그런가보다.'하는 시대가 아니다. 당장 수많은 블로그 또는 홈페이지만 검색해 들어가도 전문평론가 못지않은 영화에 대한 리뷰를 써내는 매니아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도 분명히 심감독이 12세 이상을 겨냥한 여름 블록 버스터 괴수 영화라고 했음에도 자꾸 예술 영화를 상대하는 것 마냥 그놈의 스토리 스토리 스토리 라인을 지겹게 물고 늘어지는 것도, 단지 거대한 이무기의 난동(?)을 말 그대로 가볍게 즐기려는 그리고 알만큼 아는 관객들에게는 핀트가 맞지 않는 식상하고도 염증적인 멘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반감을 자극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D-War를 본 관객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그들은 평론가들이 보지 못한 D-War만의 장점. 그리고 그 안에서 CG를 비롯한 한국형 블록 버스터의 희망을 계속해서 찾아내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이러한 현상을 애써 외면한채 일방적으로 '내 말 들어. 이건 형편없는 영화라니까!'라고 주장하면 그것이 과연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관객들에게 먹히겠느냐는 말이다.

그네들의 무조건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거기에 맞춰 관객들을 일방적으로 싸잡아 매도하고 상황을 재단하고 훈계하려는 영화인들의 지적 우월주의 태도는, 딱히 D-War에 호의적인 관객이 아닌 3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필연적으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오만함일 뿐이다.

영화를 평가하는 것은 감독도 비평가도 아닌 관객이다. 그들이 그 어떠한 잣대를 가지고 영화를 재며 평가를 하더라도 결국 관객들이 직접 얼마만큼 가서 보느냐에 따라 흥행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분명 D-War는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혹평을 진작에 넘어서서 대박을 낼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D-War' 만약 2001년에 개봉했던 '용가리' 수준이었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자. 과연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논쟁이 벌어졌을까. 아니 그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설령 평론가들이 발벗고나서 '용가리'에 대해 극찬을 했다고 해도, 그리고 심형래 감독이 아무리 꿈을 향한 노력을 했으며 애국심에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에 대해 관객들은 냉정하게 평가하고 발을 돌렸을 것이다.

2007년의 관객이란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주위의 여론 형성 따위에 어줍게 휩쓸리는 이송희일 감독 말마따나 ‘악다구니를 쓰는 애국∙애족에 휩쓸린 꼬꼬마’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그들은 여전히 관객의 수준 향상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에 대해서 여전히 관객보다 우위에 서있다고 생각하며 '매스컬쳐'라고 규정짓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평론가도 있던데, 이는 흐름을 주도하는 대다수 관객들이나 네티즌들의 수준을, 우매한 군중이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문화 현상이라는 좋지 않은 의미를 지닌 하나의 단어와 동일시시킴으로써 지금의 이 현상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화 산업이라는 것의 가장 근본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관객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평론가들의 역할은 그러한 관객들의 올바른 영화 선택을 돕는 보조적 장치일 뿐인데도 그것을 망각하고 마치 "너네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우리들이 우매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는 식의 본분을 망각하고 주어진 역할을 넘어서 일방적으로 관객을 계몽시키겠다는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지적 유희를 즐기려고 하는 태도에 대한 관객들의 높은 반감이 바로 이러한 오늘날의 D-War 열풍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론가 집단의 지식권력이나 기존의 충무로 집단의 문화권력에 대한 관객과 네티즌 나아가 대중들의 그동안 누적된 염증과 반감이 D-War라는 매개체를 통해 분출되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도 영화 산업뿐만이 아닌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신문화를 형성한 주체세력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류가 형성된 것은 실시간으로 정보의 수평적 전달을 가능케 한 바로 인터넷의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 크기를 순식간에 확대시켜버린 것 역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토론의 장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최근 벌어진 대한민국 내의 학벌 위조 논란 등(심형래 감독도 D-War 개봉 전에 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을 통해 엿보인 대한민국의 보수적인 주류 집단이 갖춰야할 코드와는 전혀 맞지 않는 비주류 출신인 심형래 감독이 차별과 역경을 딛고 그가 줄기차게 부르짖던 '왜 한국은 안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명제를 '드래곤 투카' '용가리'를 거쳐 드디어 'D-War'의 꿈틀거리는 이무기를 통해 용이 되기 위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그의 열정과 노력에 대해, 관객들은 그에 대한 연민과 함께 뜨거운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전문평론가들과 충무로 집단은 스스로를 한번쯤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전문평론가들은 '과연 나는 D-War에 대해, 아니 그 전에도 평론했을 수많은 영화에 대해 인맥, 학연, 지연 등을 떠나 정말 공정하고 냉정하며 합리적인 평론을 했는가.' 특히  그들이 그렇게 혹평을 해도 왜 관객이 드는가라는 부분에 대한 포인트를 놓친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관객들과의 영화에 대한 의사소통 부분에 대해서 한번쯤은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충무로 역시 그렇게나 무시하고 외면했던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인 심형래 감독이 자신의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해 세계를 목표로 도전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일정 성과를 들고 되돌아온 이 순간까지 과연 우리는 뭘 하고 있었는가? 가장 흥행하기 쉬운 코드로 우려먹기는 하지 않았는가? 국민들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스크린쿼터라는 장막 안에서 안주하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논쟁을 통해 드러난 충무로 내부의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시스템의 개혁에 대해서는 스스로 한번쯤은 자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논쟁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지지하는 쪽이나 비판하는 쪽 모두 감정이 격앙되어 있는 측면이 있고 이로 인해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분명 이러한 논쟁은 필요하며 또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D-War를 둘러싼 논쟁과 담론이 가라앉을 때에는 이렇게 수면 위로 뜨거운 에너지를 갖고 부상했던 것만큼의 수확을 심형래 감독은 물론이고, 충무로 집단, 전문 비평가들 그리고 우리 관객들까지 모두에게 한 단계 더 나은 진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길 간곡히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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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희생자 지원법’ 노대통령, 거부권 행사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지난달 3일 국회를 통과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법’에 대해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준다는 등의 이유로 2일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따라 이 법안은 국회에서 재의(再議·다시 심의) 절차를 거치게 되며,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할 경우 거부권 행사와 관계없이 법률로 확정된다. 당초 정부와 국회 행정자치위가 합의한 원안은, 일제에 강제 동원된 희생자 유가족에게 2000만원의 위로금을 주고, 생존자에게는 매년 50만원의 의료지원금을 지급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가족회의 요청을 받은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이 생존자에게 의료지원금 외에 500만원의 위로금을 추가로 지급하라는 내용의 수정안을 본회의에 제출해 통과됐다.

정부 당국자는 “수정안대로 하면 2000억원의 추가 예산이 들어 국가 재정에 부담이 크고, 생환 후 사망한 분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며 거부권 행사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대해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 양순임(77) 회장은 “정부에 신고된 생존자 2만4000여명 중 절반 가량이 사망해서 (수정안대로) 1인당 500만원씩 지원해도 필요한 예산은 1000억원 미만”이라며 “노 대통령 퇴진 운동과 함께 국회의원 설득 작업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안용현 기자 justice@chosun.com]

...........

엇그제 미 하원 본회의에서 '위안부 결의안'의 만장일치 채택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는데, 오늘 이런저런 뉴스를 뒤적이다가 마침 조선일보에서 쓴 또 한건의 일제강점기 시대와 관련된 이 기사를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찾아봤더니 참 기사라는 것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헤드라인과 내용만 봤을 때는 나도 얼른 "상식적으로 저 정도 보상금은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라며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이번 법 개정안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니 실상은 저 위에 써갈긴 아주 단편적이고도 부분적인 사실만을 기사만으로는 이 문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게되었던거다. 저 위의 기사는 그저 사안의 선후관계에 대한 설명없이 그저 민족적 감정만을 자극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선택을 말 그대로 '까게 만드는' 기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원안은 1945년 이전 사망,행불,부상자에게만 일시금으로 200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하게 되어있는데 장복심 의원이 제시한 수정안은 1945년 이후에 돌아온 생존자들에게도 위로금 500만원을 추가 지급하자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그런데 일단 문제는 1945년 이후 돌아온 생존자에게만 지급하자는 기준에서 발생한다. 그 기준에 의하면 정부에 등록된 생존사 4만여명에게만 지급하는 액수는 최대 2000억원 내외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수정 법안에도 1945년 이후 돌아온 사망자에 대한 위로금은 어디에도 없다. 여기에서 바로 수정안에 대한 형평성 문제가 생환후 사망한 그 유가족들에게 제기될 것이 불보듯 뻔하며, 또한 정부가 현재까지 파악한 4만여명의 인원은 실제 계산된 총원103만명 중에서 지극히 일부에 불과한 인원이다.

이러한 보상금 지급이 실시되면 관련 기관 또는 위원회에 '나도 생환 후 아직까지 살아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부가 파악못한 남은 인원 42만명 중에 어느 정도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물론 고령화로 인한 사망자들도 적잖이 되겠지만 그 유가족들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신도 수혜자라고 주장하며 나서기 시작하면 비용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3조 1천억원 가량까지 증가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비용은 전부 어디에서 나가는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국민의 세금이라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그렇다면 일제 시기 강제연행 생환자만 보상금을 지급할 경우 이와 유사한 사례들의 피해자 협회들(6.25참전군인 또는 베트남전 등 국가를 위한, 또는 국가로 인한 유사 사례 피해자들)이 과연 이번 수정안에 대해 침묵만을 지키고 있겠는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수혜의 형평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며 뭔가 조치를 강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복심 의원의 '태평양 전쟁 희생자 지원법'에 대한 수정안 발의의 진의는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졸속으로 처리된 한.일 협정으로 인한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들이기에 그에 대한 재정적 보상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비틀린 보상에 대한 해결을 지금 노무현 정부가 이어받아 박정희 정권이 제시만 했던 안들과 당시 일본에게 받았던 보상금액 그리고 환율등을 적절히 감안하여 보상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 보상 규모가 부족하다며 과도한 보상 금액을 막상 그것에 대한 지급 예산을 집행하는 정부와 충분한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모습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정안을 발의한 장복심 의원은 그렇게 이 사안에 대해 발의하면 관련 단체의 고마움과 함께 자신의 역할을 다할지 모르겠지만 막상 그 수정안을 받아본 행정부와 대통령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수정안이 미칠 여러가지 파급효과를 최대 범위까지 계산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재정적 부담이 결국 국민들에게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수정안의 통과가 야기할 여러가지 재정적 문제 등을 고려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고, 이는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이 든다.

국가 재정이 부족하지 않다면야 왜 그렇게 해주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한정된 재원을 효율적으로 집행해야 하는 행정부 수반으로써의 대통령의 고뇌도 조금은 감안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

덧-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도 '친일적'이라며 '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를 고수하고 있는데 물론 강제징용과 관련된 단체이기 때문에 그네들 단체명은 그렇게 사용해도 되겠지만, 대한제국 이후의 1945년 광복까지의 시기를 칭하는 말로 '일제강점기'는 안된다는 주장은 그들에 대해 심정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조금은 억지스러운 것 같다.

또한 이 법안 명칭도 '일제강점하'를 '태평양전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대해서도 너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입장만을 강변하는게 아닌가 싶다.

역사 용어는 어느 한 단체에서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바라보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역사 용어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의식을 제약할 수 있는 구속력이 있기에 제대로 붙이는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흔히 민족주의 색채가 진하게 베인 '일제강점기'라는 말은 해방직후의 '왜정시대' 60~70년대의 '일제식민지시대'를 거쳐 지나온 것이라고 한다.(역사용어, 김정인)

그러나 현재에도 여전히 민족적 감정, 바라보는 주체와 분야 그리고 국제적 시각까지 확대할 때 여전히 공통된 용어로 통일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만큼 이 시기를 바라보는 주체가 여럿일 수 밖에 없고, 그 또한 하나로 일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성립기부터 해방 직후까지의 이 시기만큼 어떠한 용어 하나로 못을 박을 수 없는 시기가 또 없으며 그렇기에 이에 대한 역사 용어의 선택은 정말로 신중해야 한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시각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용어를 정해야 함이 당연한 것이며, 현재는 이 시기에 대한 용어로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를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법률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회, 역사적 합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를 일방적으로 '친일적 또는 친일파'라고 매도하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막무가내적으로 내세우는 태도는 설령 그네들의 진의가 옳다고 하더라도 주변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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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Expectations O.S.T 中 - kissing in the rain



이틀 연속 영화 감상.

이번엔 친구가 그렇게 추천하던
에딘 호크와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98년 작 '위대한 유산'

주인공이 같아서인가.

작년 딱 이맘때 즈음에
비가 쏟아지는 것까지 같았던 날에 접했던
왠지 Before Sunrise가 겹쳐보이기도 했지만.

.......

영화 자체는
꽤나 감각적이랄까.

아주 어린 시절의 사랑에 대한 감정의 형성을
주인공이 펜을 놀리듯
시종일관 페이스를 잃지 않고

두드러지는 녹색으로 때론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터치를 한 듯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즈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지만

산업혁명기의 배금주의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가득 담긴 원작과는 달리

여기에서는 탈옥수의 금전적 도움은
결국 그네들의 사랑의 완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정도로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영화라고 해야할까.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영화에 초반부에 나오는
낡은 대저택 분수대에서의
어린 시절의 핀과 에스텔라의 기습적인 키스신.

뭐랄까.

예상하지 못했던만큼
강렬하게 다가오며 문득 어느 날의 기억을 자극하는.

그렇게 박힌 영상의 파편은
하나의 동경과 열병을 창조해내고
그만큼 좌절하고 상처를 받아 잠시 포기도 하지만

결국은 현실의 벽을 넘어
해피엔딩의 결말로 향하는 과정은

가슴이 저리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쉽게 떨쳐낼 수 없는 매혹적인 것이 아니던가.

........

순수한 어린 시절의
마음에 담긴 첫사랑에 대한 열망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전혀 퇴색하지 않은 채
다시금 그녀에게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음은.

충분히 공감할만한 부분이었다는 걸.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위대한 유산'이었음을...

.......

이 영화 역시
아역 역할을 한 배우들의 성숙한 연기도
매우 좋았던 것 같다.

어린 판도 그리고 에스텔라도
극의 초반 분위기를 매우 잘 끌어올린
또 한쌍의 환상적인 커플이었달까.

........

넌 맘에 드나 보구나? 너만 상처받게 될 거야.
사랑에 빠지는 건 비극이야.
장담하건데 상처가 아무리 커도 넌 저 앨 포기 못해.
그래서 사랑이 멋진 거지.

.........
I did it! I did it!
I am a wild success!
I showed them all! All my paintings.
You don"t have to be embarrassed by me anymore.

I"m rich!
Isn"t that what you wanted? Isn"t it great?
Are we happy now?

Don"t you understand that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
Anything that might be special in me is you

........

"날 용서해 줄래?.."
"..아직도 날 몰라?"

그녀는 날 안다. 내가 그녀를 알듯이.
처음 본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그 나머진 중요하지 않다. 모두 지나간 과거인걸.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내 기억속에 남아 있을 뿐...

- 위대한 유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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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주룩주룩 ost : 夏川りみ(나츠카와 리미) - 淚そうそう


문득
밤늦게 일본 영화 한 편을 봤다.

제목부터 감수성이 물씬 풍기는 '눈물이 주룩주룩'

허니와 클로버 이래 또다시 영화감상에 있어서
두달이 넘게 침묵에 빠져들었던터라 이렇게 갑자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안보면
언제 다시 작심하게 될 지 몰라서.

여하튼.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한양대에 잠시 들렀을 때
걸려있던 포스터에서
눈길을 끌었던

'같이 살지만 연인이 될 수 없는 우리...'

왠지 아주 서글픈 내용을 담고 있을 듯한 문구 한 구절의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외로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이제 아래부터는 줄거리도 나온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이복남매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

성인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미묘한 긴장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 초반부에 어머니의 '여동생을 지켜줘라.'는
유언이 너무 큰 족쇄로 작용한 것일까.

영화 전반부에 걸쳐 여러번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오빠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눈물을 참는 방법처럼
그의 마음을 결국 억누르고 만다.

그렇게 이복남매가 서로의 감정을 시종일관 억누르며
아닌척 또는 모른척 하고 지내다가

결국 여동생이
오빠를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낸 후에야
더이상 감정을 참고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

급작스러운 주인공의 죽음은
나름대로의 해피앤딩(미묘한 부분이긴 하다..)을 기대하던 나에게
당황스러움으로 다가왔지만

감독은 감독대로 의도한 바가 있었기에
그렇게 꺽어버렸을테지.

마음에는 가득 차 있지만
결코 밖으로 내보일 수 없었던 감정에 대한
서글픔이랄까.

비애라고도 할 수 있을수도 있는.

사람들은
가끔 어쩐지 납득하기 어려운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가둬놓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는 듯 하다.

벗어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것이던가.

........

어떤 상황이든
다 그렇겠지만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더 그렇지 않을까.

노력하며 가능하다는 생각과 믿음이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것이 비록 어떤 결과든
후회가 남지 않도록...

........

영화는 정말 단순했지만
아역 배우들의 앙증맞아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어린애답지 않던 성숙한 연기 또한
참 귀엽다는 생각과 함께 감탄이 나왔다.

그리고
오빠역을 맡았던 츠마부키 사토시의
순수한 열정과 순진한 미소와

시종일관 발랄하지만
결국은 슬프게 니니(오빠)를 외쳤던
여동생역의 나가사와 마사미의 모습은

왠지 여운이 길게 남을 듯 하다.

........

카오루 울지마.

오빠가 눈물이 멎게 하는 마법 가르쳐줄게.

눈물이 날거 같으면 코를 살짝 쥐어봐. 신기하지? 

........

만나고 싶을 땐 언제든지 만날 수 있으니까.

- 눈물이 주룩주룩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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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중앙선관위는 청와대가 선관위에 보낸 질의서를 공개한 것이 선거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어제 밝혔다. 질의서 공개가 언론 취재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이뤄져, 적극적·계획적·능동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선관위의 이런 판단과 관계없이 질의서와 관련한 청와대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런저런 발언을 해도 되느냐고 질의서를 낸 것 자체가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몰라서 그런다기보다는 지난달 두 차례나 선거법 위반이라는 지적을 받은 데 대한 일종의 어깃장으로 보인다.

선거법 조항이 모호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선을 넘으면 안 되는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있었던 선관위의 유권해석과 결정문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묻지 않더라도 현행법과 상식을 바탕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다. 헌법기관을 존중한다면 이런 내용의 질의서를 선관위에 보내는 일은 그만 하는 게 바람직하다.

질의서 내용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청와대가 자기 할 말을 하는 것도 유치하다. 그러니 졸렬하다는 얘기까지 듣는 것 아닌가.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 쪽이 대운하 보고서 유출의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고 주장한 것 등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대통령이 됐건 참모가 됐건 그때그때 정면으로 해명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면 될 일이다. 선거법은 대통령이 “특정 정당 및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를 폄하하고,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선거 개입행위를 막는 것이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발언을 막는 게 아니다.

현행 선거법이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을 지나치게 막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필요하다면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할 수는 있겠으나 선거법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대통령은 현행 선거법 조항과 정신을 존중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계속 작동하도록 하는 중요한 기제인 선거를 공정하게 치르도록 하는 것은 대통령의 중요한 책무의 하나다.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는 자중하기 바란다.

각 정당이나 후보들 역시 대통령이나 정부를 근거 없이 공격해서는 안 된다. 일부 후보는 현직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것이 선거전략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집중 공세를 벌이는 듯하다. 착각이다. 선거판을 혼탁하게 만드는 정략적인 접근으로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

-_-

글만 봐서는 왠지 한겨레의 성향과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은 논설문으로 조중동에 갖다놔도 그럴싸한 글이라는 의구심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최근 청와대와 어느 한 곳 관계가 매끄러운 기관 또는 단체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 현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여 씁쓸하기도 하다.

오늘 선관위가 드러내놓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연인 신분으로서의 헌재 소송이 부당하다며 기각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헌재에 제출한 것으로 또다시 선관위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이것 참 보면 볼수록 선관위의 행태가 중립을 잃고 본연의 임무에서 상당히 벗어나 도가 지나치게 오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관위의 의견서는 먼저 헌법소원은 기본권을 구제받지 못하는 국민을 위한 최후의 수단일 뿐이며 최고의 권력기관에 있는 대통령은 헌법 소원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데 이는 정말 어이없는 논리다. 사실 법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찾아본 결과 헌법소원심판청구라는 것은 기본권을 침해당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도 대통령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인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기에 대통령 노무현이 아닌 자연인 노무현의 입장에서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전에 헌재에서 내린 판례가 있다고 한다. 지난 99년5월27일 헌재 전원재판부가 내린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제53조 제3항 등 위헌확인` 판례(98헌마214)다.

이 사건은 당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당선된 마포구청장 등 서울시 22개 구청장들이 임기 중 대통령 또는 국회의원선거 등에의 입후보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과 지방자치단체의 활동상황을 알리기 위한 홍보물의 발행·배부를 제한하고 있는 같은 법 제86조 제3항이 자신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헌재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사건이다.

여기서 헌재는 "청구인들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라고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나 선거운동의 자유 등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헌재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지방자치단체의 홍보물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견해 및 정책 등을 밝히는 표현의 자유 또는 정치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이 법률조항에 의해 청구인들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며 공직선거법 관련조항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었다.

이 결정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은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의 주체`라고 적시한 것이다. 당연히 지자체장은 헌법소원을 청구할 주체가 된다는 해석이다. 또한 `지자체 장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공직선거법)에 의해 기본권이 침해됐다`고 본 점이다.

지방자치단체장과 관련한 이 판례가 주목받는 점은 이 판례가 이번 헌법소원에 원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법률적으로 지방자치단체장이나 대통령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우선 둘 다 선거로 당선된 정무직 공무원이라는 점, 지방 기관의 장과 국가기관의 장이라는 점도 유사하다. 법률적 성격은 비슷하다는 것이 법조계 판단이다. 즉 헌재가 이 판례를 따른다면 노대통령에게 헌법소원을 청구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참여정부평가 포럼과 원광대 특강에서의 발언에 대한 문제인데 이는 대통령의 의견을 듣기 위한 자리였음으로 사적인 사안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억지 논리이다.

먼저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따져보면 대통령은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으로 포괄적인 정치적 행위를 위임받은 자리에 있는 오리지널 정치적 존재이다. 즉 투표를 통한 선거로 임명된 선출직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 공무원법이라는 것에서도 일반적인 정무직 공무원과 구별하여 대통령의 정치활동을 예외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관위가 우선적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선거법의 중립 의무(9조), 공무원으로서의 공무원 선거운동 금지(60조),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85조), 사전선거운동 금지(254조) 조항은 적어도 대통령에게는 우선적으로 해당 사항이 없는 법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무원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금지(86조) 이 조항은 선거관리자로서의 제한된 규정일 뿐이다. 대통령을 정무직 공무원의 개념으로 전제하고 중립적 관리의 의무규정으로 선거법 위반 여부를 가름 한다면 말 그대로 행정부 수반이라는 신분으로만 국한시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선관위는 물론 나아가 조중동,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중립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억지주장은 그네들의 말처럼 선거관리의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선거관리를 집행하는 위치에 있는 하위 정무직 공무원들을 상대로 한 선거 관련 구체적 지시나 그런 지시에 준하는 의사 표현을 했다고 명확히 판단될 때에만 그네들이 주장하는 선거법 위반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상이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의 지휘영향 하에 있지 않는 그야말로 전혀 행정부 수반으로써 선거관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무원 이외의 신분의 순수한 민간인 지지집단이나 일반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별도로 구별하지 않고 상호 대칭적인 법 중에서 하나만의 잣대를 들이대어 교묘하게 하나로 이어 붙여서 제한하려 든다면 민주주의 대원칙인 표현의 자유까지 박탈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미 국민들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행동을 지난달 21일 시작하였지만.)

혹여 이러한 대통령의 정치적 행위까지 고의적인 행동으로 확대해석 한다면 이미 선관위 자체가 중립을 잃고 정치적 이해와 판단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 될 것이며 그 대상과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리라.

또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대체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 대통령 또는 총리가 이정도 자신의 정치신념을 밝히는 발언에 대해 선거법 위반으로 다루는 사례가 있는가? 당장 미국이나 일본, 영국 등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대통령 또는 총리가 직접 선거운동을 하거나 또는 그 이외의 정치적 사항에 개입하곤 하는데 그네들이 보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노무현 대통령과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으로 인한 헌법소원논란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리라.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의 직위를 수행하고 또한 국민들에게 위임받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에 따른 행동에 대해 그것들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적 반대 세력들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단지 행정부 수반으로써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가?

분명 자신의 정책에 대한 정치적 책임과 의무를 져야하는 위치에 있는 입장에서 효과적인 정책 집행을 위해서도 또한 상대방의 정치적 공세에 대해서도 당연히 자신이 왜 그러한 정치적 소신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한 의사표명을 해야 하며 또한 그를 바탕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행정을 총괄하기에 국민들에게 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이며, 그러한 대통령과 야당 간의 정치적 논쟁 과정을 통해 국민의 이해나 동의 또는 지지를 구하는 것이다.

결국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이 자연인 신분으로 헌재 소원을 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공무원법에서는 선출직 공무원은 정치활동이 가능하다고 하며 대통령은 분명 선출직 공무원인데도 선관위는 공직선거법을 빌미로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이 위법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관위의 주장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헌재소원으로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하는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명색이 일국의 헌법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 조항이라는 것이 서로 모순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모호한 조항들을 내세워 내린 이번 결정은 후대를 위해서라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며 개정이 필요하다면 추후에라도 분명하게 개정을 해야 할 것이다.

같은 법인데 이렇게도 동일한 상황에 대해 상반된 결론이 나온다면 이 자체가 법의 모순인 것이며 잘못된 것이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헌재를 통해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여 바로잡자는 이야기인데 이런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 조중동 언론은 아예 빼놓고 보도를 하고 있으며 가장 진보적인 성향이라는 한겨레에서도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이런 그저 ‘선관위를 존중하고 법이나 준수하라.’는 얼빠진 사설이나 올리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할 따름이다.

여기서 문제를 조금 더 넓게 바라보면 현재 한국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에 대해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사고방식은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 언론들과 조갑제, 지만원 등의 극우파들에게 그대로 투영되고 있음을.

21세기의 한국에서도 변함없이 자신들의 그 수십 년의 기득권 질서에 바탕한 관행이란 이름으로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하며 후진적인 행태들을 부끄러움도 없이 저질렀으며 야당이 된 이후에도 그들이 모여 있는 당에서는 온갖 구태의연한 작태(차떼기, 성추행, 부정투기, 군면제 따위 등)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또한 권력과 떨어진 시간들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제멋대로 규정하며 다시금 되찾아오기 위해 이렇게나 애를 쓰고 있음을.

그리고 그 바탕에는 바로 학연, 지연, 혈연 등 온통 기득권 카르텔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런 문화 속에서 성장하여 온 자들이 현재 한국정치집단의 상층부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야말로 그러한 기득권 세력과는 전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온 정치인이고 그렇기에 5년 내내 그렇게 많은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조중동은 역시 5년 내내 때려대기에 바빴고.

몇 년 전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야심차게 추진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서도 야권의 경제적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한나라당 의원과 열우당 이외의 의원의 재산차이는 매우 크다) 처음의 합의를 휴지조각처럼 파기하며 헌재소원을 청구해서 결국 성문법에 기초한 우리의 법체계까지 무색하게 만들어 가면서까지 21세기 한국의 중대 사안에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으로 대표되는 관습헌법이라는 논리까지 끌어들이는 개그를 벌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참 사실 이번 헌재의 결정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비록 다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참여정부 역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처나, 사학법 재개정, 내신 논란, 한미 FTA 등에서 여전히 부족하고 미흡한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번 사안의 중요성 또한 부족한 것은 절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 말도 많고 권위도 없어 보이며 정국을 시끄럽게 하는 대통령이라는 것. 분명 인정한다.

하지만 과거의 군부 독재 시기는 물론 지난 김대중 정부 시절만 해도 선관위 정도의 기관에서 대통령과 이런 식의 논쟁을 벌일 역사는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분명 예전처럼 권력과 돈의 힘으로 약자를 억압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법과 원칙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과 논의를 통해 타협하며 결국 다양한 의견 속에 여론의 향배에 따라 거르거나 또는 나아갈 길을 찾는 선진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 대통령들이 레임덕으로 침묵을 지키는 대선 6개월 전에 말이다.

앞으로 한국의 정치 수준과 방향이 어디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시금석이 될 수 있으며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정치적 관심을 유발하며 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논의 또는 토론을 통해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분명히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떠들어대는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한층 더 성숙한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며 이는 분명 풀뿌리 민주주의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렇기에 누가 뭐하고 해도 현재의 대한민국이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해 나아가고 있으며 이 부분은 분명히 평가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청와대와 노무현 대통령은 유치하니까 그만 자중하고 정략적으로 굴지마라’는 식의 전형적인 기득권 세력의 훈계조와 흡사한 오늘 한겨레의 이 논설은 정말 실망스럽기 짝이 없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크게 반성해야 할 졸필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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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닷컴]

“스스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고 공돈으로 잘 먹고 잘 살아온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데 쓴 사람을 상대로 도덕성 검증이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도덕에 대한 모독이다.” 보수논객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재산 형성과 관련해 당내는 물론 범여권으로부터 파상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두둔하는 듯한 주장을 펴 눈길을 끈다.

조 전 대표는 1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대체로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라며 ‘청부(淸富)론’에 근거해 부자인 이 전 시장을 감싸고 나섰다. 그는 “부자는 우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신뢰성이 강하므로 부자가 됐다. 즉 도덕적이기 때문에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다”며 “가난한 사람은 신체부자유자나 특별한 가정 사정을 제외하면 대체로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신용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부자는 남을 돕는다. 기업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월급을 준다. 가난한 사람은 남을 도울 수가 없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 또한 부자가 더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도 했다. 그는 이어 “가난은 자랑이 아니다”고 못 박은 뒤 “좌파들은 가난이 자랑이고 가난이 도덕적이라고 속인다. 청빈(淸貧)이란 말을 악용한다. 청빈보다도 더 좋은 게 청부(淸富)다. 정상적으로 돈을 벌고 좋은 곳에 그 돈을 쓰는 것이 가장 큰 도덕”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조 전 대표는 나쁜 부자도 나름대로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고도 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일을 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비정상 사회에선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 경우에도 그들이 벌어놓은 돈 그 자체는 좋은 목적으로 쓰인다. 나쁜 부자가 벌어놓은 돈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돈의 생명력이다.”

그러면서 조 전 대표는 도덕성 검증으로 시끌벅적한 한나라당에 일침을 가했다. “요새 유행하는 도덕성 검증은 게으른 좌파들이 만든 것인데 무능한 자를 도덕군자, 유능하여 일을 많이 하다가 실수도 조금한 이를 부패분자로 몰려는 함정이다. 이 함정에 빠진 것이 한나라당이다.”
 

...........

-_-

극우주의 언론인(사실 극우주의라고 하기에는 수구 꼴통에 가깝고 언론인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하기 짝이 없지만 21세기 한국의 현실에서는 이러한 코메디가 버젓히 존재하기에)인 조갑제씨가 드디어 또다시 한편의 희극적인 이야기를 했다.

뭐 엇그제 선관위의 규정을 의식한 마냥 상당히 우회적으로 돌려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번 발언에 대한 그 주체가 누구인지는 첫줄만 읽어도 금방 알 수가 있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한 듯 싶다. 듣도보도 못한 해괴한 '청부론'을 들고 나와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과 기름과의 관계와도 같은 금권과 도덕을 억지로 결부시키려는 조갑제씨의 노력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부' 그 자체를 놓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를 많이 지닌 부자들도 무턱대고 비난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부를 어떻게 창출해냈는가의 방법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의 앞과 뒤,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놓고 궤변만을 일삼으며 부를 가진 자들이 성실하고 근면하며 도덕적이며 부를 갖지 못한 자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신용이 떨어진다는 일고의 고려할만한 가치도 없는 논리를 일반화시켜 허무맹랑한 주장을 어떻게 이리도 용기있게 뱉어낼 수 있는지 아주 놀라울 따름이다.

어느 시대에서든 그것을 초월하는 보편타당한 도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라는 것은 모든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도덕과는 어찌보면 상극인 양날의 칼이라는 것을 진정 모른단 이야기인가?

또한 옛 말에 '청빈'이라는 말은 있어도 '청부'라는 말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청렴결백한 태도로는 조갑제씨가 떠드는 수준의 부를 창출하기란 정말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시대가 바뀌어 현재에는 근면하고 성실하며 신뢰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습 또는 탈법 그리고 투기 따위로도 근면 성실보다 훨씬 쉽게 그리고 그 이상으로 얼마든지 그가 말하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 또한 지금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의 차이를 교묘히 생략하고 결과만으로 하나로 묶어 부자는 모두 '도덕적이며 근면 성실'이라고 망발을 일삼고 있으니 어찌 웃기지 않겠는가.

"부덕하게 부조리한 돈도 결국 좋은데 쓰게 되니 좋은것이다."는 또 어디에서 근거한 논리인지. 이런 무식한 소리를 내뱉는 사람의 소리가 왜 언론인이며 언론에서 다뤄져야 하는지 또한 지식인인양 정치에 끼어드는지 그것도 웃길 뿐이다. 또 "가난한 사람은 남을 도울 수가 없다?" 대체 당신이 말하는 가난의 기준이 어디까지인가? 누가 가난하며 누가 부자인가? 누구를 또는 무엇을 돕는 방법이 꼭 금전적인 방법밖에는 없다는 단순 논리는 무엇을 근거로 도출하고 있는가?

조갑제씨의 논리라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어서라도 부자가 되면 그것이야말로 옳은 것이 아닌가? 그 옛날 이완용도 나라에서 손꼽을 정도의 부자였으니 그야말로 참으로 모범적인 나쁜부자가 아닐 수 없겠다. 이런 양반이 자칭 보수라고 하니 그네들의 논리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수준일수 밖에.

부자가 근면 성실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획득해서 사용하고 또 사회에 환원한다면 그걸 보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건 충분히 도덕적인 일이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결탁하고 세금을 탈루하며 자식들의 병역기피를 주도하고 부동산 따위의 투기를 일삼는 것은 명백히 비도덕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선 후보에 대한 도덕적 검증은 미국에서도 필수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미국 언론에서도 대선 후보들의 도덕적 자질에 대해 혹독하게 검증하는데 이러한 것이 좌파의 농간이라고 단언하는 그의 60년대 이데올로기식 단세포적인 반응에는 뭐라 더 할 말이 없다.

더불어 조갑제씨가 이런 해괴한 논리로 지지하는 듯한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그 동안 충분한 부를 모은 자이기 때문에 그의 위장전입은 실수이며 명의신탁의혹은 별것 아닌 일인가? 그렇게 작은 일이라면 왜 정정당당하게 검찰수사에 협조하고 진실을 밝히지 않는가? 또 왜 한나라당이 나서서 고소를 취소하게 하여 진실을 은폐하려고 하는가?

국민들이 정말 알고 싶어하는 것은 그와 관련된 부동산 투기의혹과 명의신탁여부, 금융사기 연루여부에 대해 명확한 진실을 얻고자 한다. 그토록 검찰수사를 두려워 할 것이면서 대체 수사를 의뢰한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본인들이 직접 수사를 의뢰해 놓고 뒤늦게 청와대와 권력기관의 개입이라고 주장하는 한나라당 대표라는 분의 머릿 속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있는 것인지.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중임을 맡기 위해 나섰다면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이미 말 그대로 완벽한 자격미달이다.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말 할 자격조차 없다는 이야기다.

더 늦기 전에 모든 의혹사항에 대한 한점 거짓됨 없는 진실된 해명이 분명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그를 지켜보고 있는 유권자 나아가 또한 선거권을 가진 국민들(그들의 대다수는 조갑제씨가 이분법으로 나눈 부와 가난에서 비아냥거리는 가난에 훨씬 가까운 사람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무이다.

..........

덧-

이런 인간들이 왜 그렇게 거품을 물며 특정 정당과 특정인을 지지하는지 한국 현대사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어느정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이런 반박을 할 일고의 가치따위도 없는 글이지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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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회도서관에서 일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가판대에 놓여있던 무료신문 City를 집어들었는데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타이틀이 -KBS '미녀들의 수다' 출현 일본인 여대생 "한국교수가 동침 제안" 파문-

바로 이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미수다를 시청한 적도 없고 학교에서도 몇몇 애들에게 준코의 실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가쉽거리성 이야기를 한 것만 들었지만 보는 순간 참 어이없음과 함께 한심하고도 낯뜨겁다는 다양한 생각들이 기사를 읽는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게시판을 비롯하여 인터넷상에서도 이 사건으로 한참 시끌시끌한데 차분한 반응부터 감정섞인 대응까지 천태만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1.경위야 어찌되었든 준코의 발언은 비난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 준코의 발언에 대한 내용을 보았을 때 그것이 농담이었든 진담이었든 J모 강사는 백번 잘못한게 맞다. 그리고 당연히 그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회적, 윤리적, 법적 책임과 처벌까지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사 프로그램이 아니었고 온 국민이 즐겨보는 연예 프로그램이었기에 부적절했다 또는 잘못한 처사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던데 선후가 바뀌어도 아주 뒤바뀐 태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준코는 엄연한 성희롱 피해자다.

본인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일단 그러한 피해 사실을 밝히는 순간 그건 시사 프로든 연예 프로든 중요하지 않으며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또한 이것이 공중파를 탄 것에 대해 그리 못마땅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던데 준코는 사전에 PD와도 발언에 대한 조율을 거쳤다고 했다.

그렇다면 녹화방송임에도 이 발언이 방송에 나오게 된 것은 준코보다는 아마도 시청률을 의식한 PD의 의중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공중파 방송 책임에 있어 잘잘못을 굳이 따진다면과연 누가 잘못한 것인가?

그리고 프로의 성격에 상관없이 위 같은 사실이 밝혀진 이상 이런 부분으로 걸고 넘어지는 것은 제얼굴에 침뱉기와 다를바 없는 아주 유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2. J모 강사로 대변되는 지성의 전당에서 자행되는 性추태.

이번 사건은 단지 J모 강사의 개인적인 문제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즉 단순히 강사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나라 대학에서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는 교수 및 강사들의 도덕성 문제와도 끈이 닿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교수님들이나 또는 강사분들는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훌륭하신 분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분명 겉과 속이 다른 미꾸라지 같은 일부의 사람들이 있다.

교수라는 권위을 내세운 강압적인 태도. 폭언, 연구비 착취 나아가 성희롱이라는 추태까지. 아마도 대학을 다니신 분들은 아주 크게 이슈화가 되진 않더라도 선후배 또는 동기들을 통해 한두번 정도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공식 비공식적으로 들었던 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회로 진출하기 위해 몇년간 머물다 졸업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에 본인의 일이 아니면 제대로 신경을 쓸 겨를이 없고 또한 교수 혹은 강사가 '학점'등의 성적평가라는 대학 내의 최대의 칼자루를 쥐고 있기에 설령 어떤 일이 있었어도 그냥 서로 쉬쉬하거나 수군거리다가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현재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외대에서는 이와 유사한 작년 6월 노조 파업에 참가한 여직원에게 성희롱 발언을 가한 보직교수의 사건이 있었는데 학교는 국가인권위의 보직교수 징계 권고를 무시하고 이 사건을 제기했던 영어과 4학년 조명훈 학우에 대한 학교측의 무기한 정학 조치 철회라는 법원의 판결에도 불복하고 항소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생회측과 학교측의 대립의 아직까지도 결말이 도무지 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준코의 경우는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로 하루만에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열고 해당 J모 강사를 곧바로 해임한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중적인 태도이기에 참으로 가소롭다는 생각이 든다.

준코와 같은 경우는 국민의 관심사를 받은 지극히 특별한 경우이기에 학교측의 대응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보직교수와 조명훈 학우와 같이 겉으로 드러난 사건에 대한 처리가 이정도인데 하물며 학교 내부에 묻히는 일들은 오죽하겠는가.

대다수의 학교들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사건 규명과 피해자의 인권보호 보다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학교 명예의 실추가 되는 것에 대해 더욱 집착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은폐하기 일쑤다.

그렇기에 올 초에 있었던 경희대 명예교수의 성희롱 해프닝처럼 뚜렷한 증거도 없이 과도하게 밀어붙인 총여학생회에 의해 성추행범으로 몰렸다가 결국 무혐의 처리되는 이례적인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지만, 이는 아직까지는 극히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 상황이며 여전히 많은 여학생들은 교수와 학생이라는 학교내의 상하 수직적인 관계에서 성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성과 관련된 그릇된 행동들은 본래 타고난 근성이나 기질과도 연관이 되어 있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고 아무리 다양한 지식과 뛰어난 판단력을 지닌 이라 할지라도 특정 조건이 형성되면 돌이키고 나면 분명히 후회할 것을 인식하더라도 내면의 욕망과 결합하여 이성이 마비된 채 순간적으로 돌출이 되는 경우가 있기에 그들의 도덕성 재고를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사건들을 완벽하게 예방하기란 쉽지 않다.

아직까지는 학교 내의 소수 교수들의 그러한 비이성적 행동에 대한 뚜렷한 제제방안이 없다는 것도 분명 시정되어야 할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이러한 상황에서 아직까지는 성적 약자에 해당하는 여학생들이 사건 발생의 여지를 최대한 주지 않는 것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명한 대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3. 준코. 일본인이기에 그런 발언을 할 자격이 없다?  

이건 가장 많이 보이는 주장이자 가장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일본인 준코와 한국인 강사간의 사건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여성과 한 사람의 남성으로써의 문제이다.

대체 이 사건의 발언 일본인인 준코가 했든, 또는 중국, 베트남 여타 다른 나라의 여자분들이 했든 그건 이 사건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일본의 역사왜곡 나아가 현재 일본의 우익들이 부정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 등 분명히 일본의 국가적 차원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과 이 사건과는 국적 외에는 그 어떤 연관을 지을수 있는 부분이 없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세계 보편적인 도덕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지 그렇게 지극히 배타적인 민족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도리어 우리 국민의 수준만 스스로 낮추는 꼴이 될 것이다.

간단하게 이 문제를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한국 여성 유학생이 일본 또는 그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 교수가 '학점 줄테니까 동침하자.'라고 한 것을 밝혔는데 그 나라의 일부 네티즌이나 국민들이 한국인은 그런 발언을 할 자격이 없다. 또는 왜 그런 주장을 공공 프로그램에서 하느냐는 식의 현재 상당수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과 같은 주장을 펼치면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건 세살배기 어린아이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제발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자신이 모자란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건의 본질을 애써 무시하고 단지 준코가 일본인이고 강사가 한국인이기에 이 사건을 부정하려들고 강사에게 인생을 망쳤다며 연민을 보이는 추태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국적과는 아무 상관없는 남성과 여성의 근본적인 도덕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민족주의를 내세워 어설프게나마 희석시키려는 시도들을 보면 참으로 민망하고 안쓰럽기 짝이 없을 따름이다.


4.한국사회의 올바른 性문화의 정착은?

최근에 들어 우리 사회의 성추태는 날이 갈수록 그 강도가 더해지는 듯 하다.

작년 초에는 명색이 국민의 대표라는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최연희가 신문기자와 주점사장에게 성추문을 일으키며 시끌벅적하게 하더니, 어제 오늘은 교수나 의사 등 사회적으로 나름대로 존경받을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성추행 사례가 나란히 사회면을 장식하면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대체 얼마나 성매매 원정을 다녔길래 오죽하면 보름전에 미국의 국무부가 한국을 성매매 해외원정국으로 상정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일련의 성과 관련된 추문들은 대체 이해해줄 수 있다거나 실수라고 볼 수 있는사안은 분명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그렇게 매도하는 이웃나라 일본의 과도한 성문화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처지도 아니라고 본다.

국회의원 최연희의 성추문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렇게 온 나라가 한동안 시끌시끌했는데, 희안하게 그의 행위를 변호하는 단체들까지 떠들어대더니 결국 그는 의원직을 유지했다. 분명 엄연한 현행범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참 이상한 대한민국이다.

이미 이러한 부끄러운 결과만으로도 현재 우리나라의 성문화 수준과 일부라지만 성에 대한 국민의 의식 수준의 현주소가 어디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아닐까?

한편에서는 과거 일제시대에 자행되었던 위안부(일반적으로 언론에서는 위안부라고 칭하지만 학계에서는 '일본군 성노예'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도 한다.)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와 도덕적인 반성을 요구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내에서는 폐쇄적인 성문화가 만연하고 있으며 온갖 귄위 또는 지위를 이용하여 부당한 사례들이 빈발하고 동남아로 나아가 세계를 상대로 쾌락을 찾아 떠나는 전혀 개별사안이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이렇게 모순된 모습을 대체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말 그대로 연관지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그런 것일까.

.......

여담이지만 조선시대 전기 최고의 개혁파 유학자이자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추구한 선비로 손꼽을 수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일화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조광조가 한참 젊었을 때 그의 용모는 상당히 수려했다고 전해지는데, 어느날 외방에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의 젊은 여주인이 그를 보고 곧 사모하게 된 나머지 둘만 있는 그 틈을 타 자신의 비녀를 뽑아서 그에게 주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비녀를 뽑아서 주는 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일종의 징표였다.

하지만 조광조는 그것을 받자 곧 벽틈에 꽂아 놓고는 그 집을 곧바로 나와버렸다고 한다.

지금의 인물들 중에는 과연 얼마나 이런 절제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참 한때는 이 나라에도 이러한 인걸들이 비록 시대적 한계까지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가는 시대가 있었는데, 작금의 한국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도 그렇고 돌아가는 나라 모양새도 그렇고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듯 하다.

모두에게 정암 조광조 선생과 같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회의 지도자층 또는 식자층은 앞으로도 많은 자기수련을 해야 할 듯 싶다.

이번 준코의 사건과 그로 인한 일련의 전개과정들이, 그간의 감춰지고 은폐되었던 성문화를 깨트리고도리어 바람직한 성문화 정착에 조금이나마 일조를 하였으면 한다.

한국 사회는 분명 자기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덧-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그렇게 남들을 혹독하게 비판할 정도의 도덕적 절제력을 지니지는 못하였지만,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분명 스스로가 납득할만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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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대선을 180일 앞둔 지난 22일 ‘특정후보 지지·반대 금지 규정’을 공식 발표하고 위반 시 최고 400만원이하의 벌금과 2년 이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선관위의 발표 사실이 알려지자 대다수의 네티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선관위가 근거로 들고 있는 공직선거법은 선거180일 전인 22일부터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이 법은 아주 예전 정치, 행정, 또는 정치인이나 정부의 법을 비판하기만해도 잡아갔던 군부독재시대를 연상케한다.

선관위의 잣대가 되고 있는 공직선거법은
현시대의 정치.사회적인 발전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조잡한 규제일 뿐이다. 또한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조치이기도 하다.

네티즌들에게 가장 큰 십자포화를 맞았던 '사이버 공간에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추천 또는 반대'는 공직선거법의 58조 1항 1호에 있는 '선거에 관한 단순한 의견개진 및 의사표시는 선거운동으로 보지 아니한다.'는 문구와 구분을 할 수 있는 그 근거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판단을 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선관위에서는 '정치관계법 위반사례 예시집'을 배포하여 사례별로 판단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곧 개별 사안별로 선관위의 자체 기준에 따른 검열을 받으란 이야기와 다를게 무엇이 있겠는가.

또한 포스터에서 보다시피 330명의 사이버 감시대를 통해 인터넷상의 댓글까지 평가하겠다고 하였던데, 이미 TV와 신문을 넘어서는 이용도를 보이는 넷상의 통제는 네티즌을 넘어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말 그대로 재갈을 물리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선관위의 일부 신문에 의한 특정후보 및 특정정당 밀어주기 보도행태에 대하여 선거법위반 여부에 대한 질의에 선관위의 답변은 이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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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관이 선거와 관련된 국민적 관심사안에 대하여 취재·보도하는 것은, 그의 고유의 기능이며 누구를 대상으로 어떠한 형태로 하느냐는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당해 언론사의 자율에 속하는 사항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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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이야기 아닌가. 언론이 국민 위에 있는 것인가? 언론은 공정한 사실을 보도하고 그 사실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과 의견 개진은 국민의 몫 아닌가?

그런데도 주체가 되어야 할 국민들에게는 재갈을 물려 벙어리로 만들어 놓고 70%이상의 시장을 장악한 수구 언론사에서 써갈긴 특정 대선 주자 또는 정당에 대한 주관적이고 편파적이며 왜곡보도를 일삼는, 그네들의 아전인수격 볼썽사나운 곡필은 '국민의 알권리'라는 그럴싸한 명분과 '언론의 자율'이라는 가당찮은 이유로 눈감아 주겠다?

일개 개인의 댓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선은 물론 나아가 정치 전반에 영향력과 파급력을 지닌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언론 플레이는 그냥 놔두겠다니, 이 얼마나 우습지도 않은 시대착오적이면서도 그 주체가 되어야 할 국민들의 뜻은 깔아뭉개는 불공평하기 짝이없는 발상인가.

노무현 대통령까지 개인 자격으로 이러한 선관위의 작태에 대해 헌재에 헌법 소원을 하겠다고 하는 마당인데 하물며 한 명의 국민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엇그제 87년 민주화 운동의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던 지금은 2007년의 6월이다. 대체 현재 대한민국은 어디로 흘러가려 하는가.

물론 개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모든 정치.행정적 선택이 모두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미 FTA같은 경우는 분명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분명 대다수 행보는 시대적 정신을 담아 과거의 여러 구습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21세기에 어울린 대한민국의 틀을 주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차기 대권 주자들과도 그렇게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리라. 누가 어떠한 색깔을 가진 인물이 후임 대통령이 되더라도 구태의연한 그네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낡은 체제로 쉽사리 돌아가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

그러나 수많은 언론에서 다뤄지는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기사를 보면, 여전히 이러한 그의 의지와 진정성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되는 듯 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이 그렇게 애처롭게 국민을 향해 자신의 뜻을 이해시키려 하였던가. 말 한마디면 군.경.검찰.정보조직 등 공권력으로 언론이든 정치세력이든 국민이든 그 누구든 상관없이 얼마든지 반대세력들을 쉽게 탄압하고 억누를 수 있었던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그 시절에.

과연 그 어떤 대통령이 그러했던가.

그런데 현재 유력한 대선 주자들 중에는 분명 그 시절에 그러한 권력의 양지에 살던 인물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또 작금의 대한민국에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독한 시간들을 겪으며 경험했던 것들을 다시금 망각한다면 그 이상의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 것인가.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한번 넘어뛴 시대는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진리이며 곧 역사 그것일테니.

덧-

과연 이 글도 선관위의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는 것인지 심히 걱정이 될 뿐이다. 21세기가 시작된지 7년이 지났건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 자체가 왠지 한편의 비극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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